우연한 기회가 되어 읽어볼 수 있게 되었다. 시에 나온 표현 또는 문장들을 하나하나 곱씹어보며 그 의미를 생각해보면 좋을 듯하다.

처음 밑줄친 문장은 무언가 소중한 것이 계속해서 끊임없이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표현한 것 같은데, 예를 들어 우리가 크게 의식하지 않고 지나치기 쉬운 시간의 중요성 같은 게 떠올랐다. 이러한 생각은 지극히 독자인 나의 주관적인 해석이기에 읽는 사람이 처한 상황이나 배경 등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뒤이어서 밑줄친 부분에서는 무언가를 잊지 않으려는 듯한 저자의 마음이 느껴졌다. 그 무언가가 무엇인지는 내가 저자의 머릿속에 들어가보지 않았기에 정확히 무엇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무언가를 절대로 잊지 않겠다는 그 의지‘만큼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이어서 ‘마크 로스코‘라는 인물이 갑자기 등장하는데, 개인적으로는 이 시집을 통해 처음 듣게 된 이름이라 생소하게 느껴졌다. 알라딘 검색창에 검색해보니 관련된 책이 몇 권 나왔고 예술가로 나름대로 이름을 남겼던 사람으로 보였다. 한강 작가님의 책을 통해 생각지도 못했던 한 예술가에 대한 호기심이 모락모락 피어나기 시작했다. 추후에 한 번 관련 책을 찾아서 읽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시집에 나온 말처럼 ‘마크 로스코‘와 한강 작가님은 아무 관계가 없다. 한강 작가님이 태어나기 전에 이미 마크 로스코는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다만 여기 별도로 밑줄치진 않았지만,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처럼 보일지라도 관계를 이어만들면 또 없던 관계가 생겨나기도 하는 것 같다. 마크 로스코가 사망한 날은 한강 작가님의 생일과 약 9달 정도가 차이난다. 이미 눈치 채신 분들도 있겠지만, 이 정도의 기간은 아이를 임신하기 시작해서 출산하는 데 걸리는 기간과 거의 비슷하다. 작가님은 이 점에 착안하여 시를 한 편 남겼는데, 이 시를 통해 전혀 연결점이 없을 것만 같던 관계라도 그럴싸한 스토리를 잘 만든다면 없던 관계도 있는 관계로 만들어낼 수 있겠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해보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최근 이정모 저자의《찬란한 멸종》이라는 책을 함께 읽고 있는데, 그 책에서 생명이라는 것은 죽음과 탄생을 반복한다는 얘기를 읽은 기억이 났다. 갑자기 생뚱맞아 보일수도 있지만 이 얘기를 하는 이유는 마크 로스코가 사망한 뒤 지구 반대편에서 한강 작가님이 새롭게 이 세상에 태어나는 스토리와 유사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이 세상의 모든 삶과 죽음을 다 알 수야 없지만 지금도 이 세상 어딘가에선 어떤 생명이 죽기도 할 것이고 또 다른 곳에선 새 생명이 태어나기도 할 것이다. 이처럼 이 세상에서 생명이라는 건 끊임없이 죽음과 탄생을 반복한다는 속성이 있는데, 오늘 읽은 시를 통해 이 속성을 좀 더 깊이있게 이해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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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는 어떤 고난과 역경도 나를 파괴시키지 못한다는 화자의 굳은 의지가 느껴지는 표현이 나온다. 그냥 단순히 내가 적은 것 같은 딱딱한 문장보다는 시의 화자가 표현한 문장이 뭔가 의지의 강도가 굳세다는 것을 훨씬 더 잘 느끼게 해준다. 어쩌면 이런 게 시의 매력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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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에 밑줄친 문구들도 독자인 내가 한 줄 한 줄 곱씹어보며 읽어내려간 것들인데, 의미심장한 문구들을 보면서 시의 묘미가 무엇인지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무엇인가 영원히 지나가버렸다고
지금도 영원히
지나가버리고 있다고 - P11

다시는
이제 다시는 - P13

희미해지려는 마음은
그러나 무엇도 희미하게 만들지 않고 - P14

마크 로스코와 나는 아무 관계가 없다 - P16

신기한 일이 아니라
쓸쓸한 일 - P17

죽음과 생명 사이,
벌어진 틈 같은 2월 - P17

이렇게 멎는다
기억이
예감이
나침반이
내가
나라는 것도 - P19

어둠과 빛
사이 - P20

어떤 소리도
광선도 닿지 않는
심해의 밤
천년 전에 폭발한
성운 곁의
오랜 저녁 - P20

어떤 마술도
비법도 없어요

단지 어떤 것도 날
다 파괴하지 못한 것뿐 - P23

어떤 지옥도
욕설과
무덤
저 더럽게 차가운
진눈깨비도, 칼날 같은
우박 조각들도
최후의 나를 짓부수지 못한 것뿐 - P23

언제나 나무는 내 곁에

하늘과

나를 이어주며 - P24

내가 바라보기 전에

나를 바라보고 - P25

나는 지금
피지 않아도 좋은 꽃봉오리거나
이미 꽃잎 진
꽃대궁
이렇게 한 계절 흘러가도 좋다 - P26

이렇게 한 계절
더 피 흘려도 좋다 - P27

아니,
나는 삼켜지지 않아. - P28

이 운명의 체스판을
오래 끌 거야,
해가 지고 밤이 검고
검어져 다시
푸르러질 때까지 - P28

믿을 수 없었어. 아직 눈물이 남아 있었다니
알 수 없었어, 더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니 - P37

거리 한가운데에서 혼자 걷고 있을 때였지
그렇게 다시 깨어났어. 내 가슴에서 생명은 - P37

이제부터 네 삶은 덤이라고 - P38

나는 손을 뻗지 않았다
무엇에게도 - P42

어두워지기 전에
그 말을 들었다.

어두워질 거라고.
더 어두워질 거라고. - P43

(두려웠다.)
두렵지 않았다. - P43

(괜찮아, 이렇게 좀더 있자.) - P44

해부극장 : 16세기 이탈리아에서 활동한 해부학자 안드레아 베살리우스의 책. 수년간의 급진적 해부 연구 끝에 인간의 뼈와 장기, 근육 등 정교한 세부를 목판에 새겨 제작했다. 독특한 구도의 해골 그림들이 실려 있다. - P45

그걸 견디기 어려울 때가 있다.

견딜 수 없다, 내가 - P46

진심이야.

후회하고 있어.

이제는 아무것도 믿고 있지 않아. - P47

검푸른 뢴트겐 사진에 담긴 나는
그리 키가 크지 않은 해골 - P49

무심코 잊었어, 어쩌다 - P52

그 영혼의 주파수에 맞출
내 영혼이 부서졌다는 걸 깨달았던 순간 - P56

그렇게 부서지고도
나는 살아 있고 - P56

(하지만 상관없어. 네가 찌르든 부숴뜨리든) - P63

유리창,
얼음의 종이를 통과해
조용한 저녁이 흘러든다 - P65

유리창,
침묵하는 얼음의 백지 - P65

입술을 열었다가 나는
단단한 밀봉을
배운다 - P66

나무들은 내가 지나간 것을 모를 것이다 지금 내가 그중 단 한 그루의 생김새도 떠올릴 수 없는 것처럼 그 잎사귀 한 장 몸 뒤집는 것 보지 못한 것처럼 - P69

푸르스름한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었다
밤을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찾아온 것은 아침이었다 - P70

하지만 곧
너도 알게 되겠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기억하는 일뿐이란 걸 - P73

저 번쩍이는 거대한 흐름과
시간과
成長,
집요하게 사라지고
새로 태어나는 것들 앞에
우리가 함께 있었다는 걸 - P73

괜찮아
아직 바다는 오지 않으니까
우리를 쓸어 가기 전까지
우린 이렇게 나란히 서 있을 테니까 - P74

괜찮아.
괜찮아.
이제 괜찮아. - P76

서른 넘어야 그렇게 알았다
내 안의 당신이 흐느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울부짖는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듯
짜디짠 거품 같은 눈물을 향해
괜찮아 - P76

왜 그래,가 아니라
괜찮아.
이제 괜찮아. - P77

집념도 오기도 투지도
어떤 치열함과 처연한
인내도
사나이를 서안으로 데려다주지 못한다 - P79

내가 가장 처절하게 인생과 육박전을 벌이고 있다고 생각했을 때, 내가 헐떡이며 클린치한 것은 허깨비였다 허깨비도 구슬땀을 흘렸다 내 눈두덩에, 뱃가죽에 푸른 멍을 들였다 - P81

그러나 이제 처음 인생의 한 소맷자락과 잠시 악수했을 때, 그 악력만으로 내 손뼈는 바스러졌다 - P81

오늘은

목소리를 열지 않았습니다.

벽에 비친 희미한 빛

또는 그림자

그런 무엇이 되었다고 믿어져서요. - P84

죽는다는 건

마침내 사물이 되는 기막힌 일

그게 왜 고통인 것인지

궁금했습니다. - P84

잊지 않았다

내가 가진 모든 생생한 건
부스러질 것들 - P85

알고 있니. 모든 가혹함은 오래 지속되기 때문에 가혹해. - P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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