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 포스팅에서 사회과학 분야 중 경제학에 대한 얘기를 많이 했었다. 저자가 사회과학분야에서 그나마 자연과학분야와의 접점을 찾았던 학문 분야가 바로 이 경제학인데, 오늘 시작하는 부분에서 저자는 경제학에 나오는 다양한 예측 모형들을 보다 더 정교하게 만들기 위해 자연과학에서 말하는 환원주의에 입각하여야 한다고 말한다.

환원주의라는 것은 간단히 말해 어떤 큰 것을 분석할 때 그것을 구성하는 성분으로 잘게 쪼개서 분석하는 것을 지칭하는 용어다. 저자는 자연과학적인 요소들을 배제한 채 단지 직관에만 의존하여 사회과학적인 방식으로만 경제현상들을 분석하는 것에는 일정부분 한계가 있음을 지적한다. 경제학에서 다루는 경제현상들에 대한 보다 더 높은 수준의 분석을 위해서는 자연과학적인 지식들이 밑바탕에 깔려있어야 한다는 게 저자의 생각인 듯 보인다.

개인적으로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이렇게 심오한 분석이 과연 가능할까라는 의구심도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최근 발달한 AI와 함께 한다면 마냥 불가능하지만은 않겠다는 생각도 해볼 수 있었다. 다만 이렇게 고려해야 할 요소가 많아진다면 과연 이런 정보들을 온전히 다룰 수 있을 정도의 지식을 갖춘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있을지에 대한 약간의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AI가 도와준다고 해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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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지는 글에서는 경제학에서 기본적으로 가정하는 합리적 선택 이론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 이것의 핵심은 인간이 의사결정을 할 때 모든 관련 요소들을 검토하고 최선의 선택을 한다는 것인데, 저자는 이렇게 세세한 고려가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저자는 현실에서 휴리스틱이라는 용어로 대변되는 어림법으로 의사결정을 하는 경우가 훨씬 많다는 점을 지적한다. 또한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로 인간이 진화해온 역사를 되돌아보는데, 최근 급부상한 기술의 발전은 인간 전체의 역사에 비하면 지극히 짧고 선사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본다면 인간이 어떤 것을 결정할 때 모든 것을 꼼꼼하게 고려하기보다는 그저 직관적으로 자신이 만족할 수 있는 수준에서 의사결정을 해왔다는 연구결과에 기반하여 뇌가 진화해온 방식도 그런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즉 인간의 뇌라는 게 무슨 컴퓨터처럼 모든 요소들을 고려할 정도로 섬세하게 진화해오지 않았다는 말이다.

개인적으로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인간이라는 존재가 절대자인 신(神)이 아니기에 결코 완전하거나 완벽하지 않음에도 그냥 나 혼자서 상대방을 마치 컴퓨터처럼 모든 것을 고려할 줄 아는 존재로 착각하고 내 마음을 몰라준다거나 내 상황을 이해해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서운해한다거나 미워하며 살지는 않았는지 잠시나마 돌아볼 수 있었다. 결국 인간이란 원래 불완전하고 부족한 존재라는 사실을 항상 염두에 두고 설령 내 기대나 내 생각과 다른 부분들이 있을지라도 그냥 상대방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게 맞지 않나 싶다. 물론 말처럼 쉽지 않을 때도 있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좀 더 발전적인 방향으로 나아가 관계를 형성하고자 한다면 언제나 상대방과 열린 마음으로 소통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바람직한 자세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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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이어지는 글에서는 철학자들이 과학의 한계를 지적하는 현실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독자인 나 역시도 어쩌면 본문에 나오는 철학자들과 비슷하게 현실을 뛰어넘어서 생각하고 꿈꾸려하기보다는 그저 지금 존재하는 현실에만 철저히 종속되어 거기에 기반한 생각만을 하며 살아오고 있지는 않았는지를 돌아볼 수 있었다. 저자의 말처럼 만약 오늘 본문에 나온 철학자들이나 나 같이 현실적인 생각에만 매몰되어 있는 사람들만 있었다면 지금 존재하고 있는 수준의 과학 발전은 결코 없었을 것이다. 미래를 꿈꾸고 불가능을 가능케 하고자 애썼던 탐구정신과 도전정신이 투철한 사람들이 있었기에 요즘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인공지능 기술 같은 것도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앞으로의 과학기술이 어디까지 발전할지 그 끝은 알 수 없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미래라는 건 꿈꾸는 자의 몫이라는 사실이다. 꿈꾸는 자만이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이고 비록 그것이 지금 당장은 현실성이 없어보일수는 있어도 그 꿈을 포기하지 않고 그것을 향해 달려간다면 그 꿈은 언젠가 반드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는 과거의 수많은 역사들을 통해 증명되어 왔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다. 저자도 9장 마지막 문장에서 이렇게 말한다.

작업을 못하게 막으면 막을수록 그 작업을 감행하는 사람들을 위한 상은 더 커지는 법이다.(p.3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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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장을 바꿔서 10장 예술과 그 해석 이라는 제목의 글이 나온다. 저자는 과학과 예술, 이 두 분야를 통섭하기 위해서는 예술에 대한 해석이 그 연결고리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해석이라는 것 자체가 비평 하는 사람의 개성과 미적 판단의 표현이라는 속성이 있기 때문에 해석 자체를 어떤 하나의 예술로 볼 수 있다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이런 생각을 보며 처음에는 저자가 통섭이라는 것을 하려고 너무 억지 주장을 펼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다른 각도로 본다면 연결짓는 것이 어려워 보였던 어떤 두 분야에서 공통되는 속성을 끄집어내어 그 둘을 연결하는 게 어쩌면 진정한 통섭을 위한 노력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이르자 뒤이어 나올 저자의 생각이 좀 더 궁금해졌다.


뒤이어서는 예술의 정의와 특징 그리고 이와 관련된 다양한 철학들이 소개되는데, 개인적으로는 잘 몰랐던 분야라 큰 흐름을 잡는데 애를 좀 먹긴 했지만 그래도 많은 공부가 되었다. 나의 좁았던 관심사를 보다 크고 넓은 영역으로 확장시킬 수 있는 값지고 보람된 시간이었다. 덕분에 많은 작가들을 알게 되었고 각 사조들의 굵직굵직한 특징들에 대해서도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다. 기회가 된다면 이 《통섭》책에서 접했던 작가들의 책들도 찾아서 읽어보면 굉장히 뿌듯할 것 같다.

경제학자와 사회과학자가 좀 더 예측적인 모형을 만들기 위한 전제를 발견해야 할 곳은 다름 아닌 생물학과 심리학이다. 이것은 생물학을 발전시킨 전제를 발견한 곳이 물리학과 화학이었던 것과 마찬가지이다. - P355

미래의 사회 이론 작업도 추론 과정 자체에 대한 심리생물학적 이해에 의존할 것이다. - P356

인간의 두뇌는 매우 빠르기만 한 계산기가 아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결정은 복잡한 환경과 불완전한 정보를 바탕으로 신속하게 이뤄져야 한다. - P356

합리적 선택 이론에서 중요한 문제는 정보가 얼마나 많아야 충분한가이다. 즉 사람들이 어떤 시점에서 숙고를 멈추고 결정을 내리는가? 한 가지 단순한 전략은 ‘만족화(satisficing)‘ 전략이다. 여기서 ‘만족화‘란 ‘납득이 되는(satisfying)‘과 ‘충분한 (sufficing)‘이라는 단어를 결합한 스코틀랜드 용어이다. - P356

사람이 미리 최적 선택을 예견하고 그것이 발견될 때까지 찾아다닌다는 의미가 아니다. 만족화는 단기간에 가용적이고 감지되는 것들로부터 첫 번째로 만족스러운 것을 고른다는 뜻이다. 예컨대 결혼할 준비가 되어 있는 젊은 남성은 자신의 이상형을 무작정 찾아다니기보다는 자기가 알고 있는 주위 여성들 중 가장 매력적인 여성에게 청혼할 것이다. 만족화란 바로 그런 것이다. - P356

합리적 선택 이론 ...(중략)... 그 중심 아이디어는 무엇보다도 인간이 합리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이었다. 인간들은 할 수 있는 한 모든 관련 요소들을 검토하고 특정 선택을 했을 때 어떤 결과가 나올지를 저울질한다. 그리고 결정하기 전에 이해득실(투자, 위험, 감정적, 물질적 보상 등)을 따져본다. 선호된 선택은 효용성이 극대화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람들이 실제로 어떻게 사고하는지에 대한 적합한 그림이 아니다. - P356

전통적인 합리적 선택 이론들에 대한 하나의 대안은 사람들이 어림법을 따른다는 사실이다. 어림법은 ‘발견 기법(heuristics)‘이라는 전문용어로 더 잘 알려져 있는데, ...(중략)... 이 연구에 따르면 사람들은 이해득실을 따지기보다는 대체로 단순한 신호와 발견 기법에 기반을 두고 행동한다. 이 때문에 복잡한 확률 계산과 결과 예측이 불과 몇 가지 판단 작업으로 환원된다. - P357

발견 기법은 대체로 잘 작동하여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절약할 수있게 해 주지만 여러 상황들에서 체계적인 실수를 낳기도 한다. 예를들어 빠른 셈 계산에 사용되는 발견 기법인 ‘정박(碇泊, anchoring)‘이 있다. - P357

계산과 통계를 이해하도록 훈련받을 수 있는 데도 왜 이런 일관적인 실수가 생기는 것일까? 이에 대한 정답은 유전적 진화 속에 있는지도 모른다. 수천 년 동안 인간의 두뇌는 간단한 수와 비율을 다루도록 진화했지 추상적이고 정량적 추론을 필요로 하는 복잡한 문제들을 처리하도록 진화하지 않았다. - P358

합리적 선택 이론은 정작 수십만 년 동안 진화해 온 석기 시대의 기관인 인간 두뇌의 속성들에 대해서는 주의를 거의 기울이지 않고 있다. 기간을 따져보면 인간의 두뇌가 산업 사회라는 아주 낯선 환경으로 떠밀려 온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이다. 따라서 합리적 선택 이론은 선사 시대의 사람들이 오랜 과거의 진화적 시간동안 어떻게 사고해 왔을 것인지에 대한 증거들에 잘 부합하지 않는다. - P359

크리스토퍼 홀파이크(Christopher R. Hallpike)는 『원시 사고의 토대(The Foundations of Primitive Thought)』에서 선사 시대 사람들의 추론 방식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직관적이고 독선적이며, 물리적 인과성보다는 특수한 감정적 관계에 매달려 있고 본질과 변형 (metamorphosis)에 집착하며, 논리적 추상화나 가설적으로 가능한 것들에 아둔하고 개념적 장치보다는 사회적 상호 작용을 위해 언어를 사용하며, 정량적인 측면에서 빈도와 희소성에 대략적으로 민감하고 부분적으로 환경에서 연유한 마음이 다시 환경으로 투사될 수 있다고 여겼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단어 자체가 힘을 가진 존재자가 되었다. - P359

선사 시대 사람의 특성들이 현대 산업 사회의 시민들에게도 나타난다는 점은 분명하다. 따라서 경제학자와 사회과학자는 이것을 자기 작업의 전제로 삼아야 한다. 그 특성들은 컬트 단원들, 광신도 그리고 교육 수준이 낮은 이들에게서 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리고 그것들은 예술의 은유에 깊숙이 침투해 있고 또한 그것을 풍요롭게 만든다. 좋건 싫건 간에 현대 문명의 일부이다. 체계적인 논리 연역 추론은 고도로 특수화된 서양 문화의 산물로서 발휘하기가 매우 힘들뿐만 아니라 실제로 여전히 드물게 나타난다. 이 추론 양식을 완벽하게 다듬으면서도 낡은 방식의 추론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훈련시키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또한 낡은 추론 방식이 우리를 현재까지 생존하게 만든 적응적인 인간 본성의 일부였다는 사실을 망각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 P360

사회 이론가들은 엄청난 양의 기술적인 문제들 앞에 기가 죽어 있다. 어떤 과학철학자들은 자연과학과 사회과학 간의 경계 지점들이 너무 복잡해서 현재의 상상력만으로는 도저히 정복될 수 없다고 포기한다. 그들은 그것이 어쩌면 오르지 못할 산인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그들은 생물학으로부터 문화로의 통섭이라는 아이디어를 의심하며 공식의 비선형성, 요인들의 2·3차 상호 작용, 우연성 (stochasticity) 그리고 큰 소용돌이 바다에 살고 있는 다른 모든 괴물들을 지적한다. 그리고 "희망이 없어, 절망이야." 라고 한숨을 쉰다. 원래 철학자들이란 대개 그런 법이다. 그들의 일이 더 큰 도식 내에서 과학의 한계를 정의하고 설명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 P360

다행스럽게도 과학자 자신은 그런 것에 구속되지 않는다. 만일 우리 학문의 선배들이 미지의 것에 대해 겸손하게만 생각했더라면 우주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16세기에 성장을 멈췄을 것이다. 철학자들의 독설을 막을 필요도 있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과학 기술이 그 독설과는 정반대의 믿음을 통해 오늘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스스로 확신하는 일이다. 계몽이 처음으로 사그라든 곳이 과학이 아니라 철학이었다는 점을 상기하라. - P361

물론 사회과학에 대한 비관적인 철학자들의 판단이 옳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을 그른 것으로 여기고 나아가는게 더 낫다. 갈 길은 하나뿐이다. 작업을 못하게 막으면 막을수록 그 작업을 감행하는 사람들을 위한 상은 더 커지는 법이다. - P361

통섭적 설명에 대한 가장 흥미로운 도전은 뭐니 뭐니 해도 과학에서 예술로의 이행을 설명해 보라는 요구일 것이다. 여기서 예술은 창조적 예술들, 즉 문학, 시각 예술, 드라마, 음악, 무용 등의 개인적 작품을 지칭한다. 이 예술은 ‘참됨‘과 ‘아름다움‘이라는 단어 외의 다른 표현을 찾기 힘든 그런 속성들을 지닌다. - P363

일차적이며 직관적으로 창조적인 의미에서의 예술, 즉 ars gratia artis는 가장 광범위하고 유용하게 사용되는 정의로 남아 있다. - P363

예술이 역사적·개인적 경험 어디에서 연원하는가 - P364

참됨과 아름다움이라는 그 본질적 속성이 일상 언어를 통하여 어떻게 기술될 수 있는가 - P364

해석은 그 자체가 부분적으로 하나의 예술이다. 왜냐하면 해석은 비평가의 사실적이고 전문가적 의견일뿐만 아니라 그의 개성과 미적 판단의 표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 P364

일급의 비평은 다루고 있는 작품만큼이나 영감에 따라 창조된 독특한 개성의 소산일 수 있다. 더 나아가 그것은 과학의 일부분일 수도 있으며 반대로 과학 또한 비평의 일부분일 수 있는데, 이것은 이제부터 내가 보여 주고자 하는 바이다. - P364

해석은 역사, 전기(傳記), 개인적 고백 그리고 과학이 하나로 엮어질 때 한층 더 강력해진다. - P364

불경스러운 단어가 성스러운 근거에서 언급되면 곧바로 거부 반응이 나온다. - P364

과학이 현상을 그 작용 요소들로 환원함ㅡ예를 들어 뇌를 뉴런으로, 뉴런을 분자로ㅡ으로써 진보를 성취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과학이 전체의 통합성(integrity)을 손상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와는 반대로 요소들을 그 본래의 집합으로 재창조하기 위한 종합 작업이 과학적 절차의 나머지 절반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이것이 과학의 궁극적 목표이다. - P364

나는 예술과 과학의 창조적 과정을 환원주의적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미래의 예술이 가질 창조성과 우수성에 관해 그 어떤 본원적 한계도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예술과 과학의 동맹 관계는 이미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었고 그것은 해석을 매개로 하여 성취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 P365

과학과 예술 모두 서로의 힘을 합치지 않고는 완성될 수가 없다. 과학은 예술의 직관과 은유의 힘을 필요로 하며 예술은 과학으로부터 신선한 수혈을 필요로 한다. - P365

인문학 쪽의 학자들은 환원주의에 드리워진 저주를 걷어 내야 한다. 과학자들은 잉카 제국의 황금을 약탈하러 온 신대륙 정복자들이 아니다. - P365

과학도 자유롭고 예술도 자유롭다. 하지만 내가 마음에 관해 앞서 주장했듯이 과학과 예술이라는 두 영역은 모두 창조적 정신을 요구한다는 면에서 유사하기는 하지만 그 목표와 방법에 있어서는 근원적으로 다르다. - P365

예술과 과학 간 상호 교류의 핵심은 혼성화(hybridization). 즉 ‘과학적 예술‘이나 ‘예술적 과학‘과 같은 떨떠름한 혼합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과학 지식과 미래에 대한 그 지식의 독점적 감각으로 예술에 대한 해석을 되살리는 데 있다. 해석은 과학과 예술 간의 통섭적 설명이 가질 수 있는 논리적 통로이다. - P365

디스(그리스 신화의 하데스)

페르세포네(그리스 신화의 제우스와 데메테르 사이에서 태어난 여신)

페르세포네의 어머니이자 경작의 여신인 케레스(그리스 신화의 데메테르) - P367

아름다운 다프네를 향한 아폴론의 열정은 결국 아무런 보답을 얻지 못했다. 다프네가 그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그녀 자신의 정원에 있는 한 그루의 월계수로 변해 버렸기 때문이다. - P367

그(밀턴)는 상이한 감정들을 대립시켜 그들의 힘을 증폭시켰다. 예를 들어 아름다움과 어두움이, 자유와 운명이, 열정과 절제가 서로 충돌한다. 밀턴은 그런 감정들 간의 긴장을 이끌어 냄으로써 보다 낮은 단계의 낙원들을 거쳐 한순간에 신비로운 에덴의 원형에 도달하게끔 우리를 인도한다. - P367

밀턴은 권위에 의지하는, 기초가 단단한 또 하나의 전략을 사용했다. 즉 그는 자신이 살던 시대, 예컨대 크롬웰이나 찰스 2세 그리고 혁명과 잉글랜드 공화국의 투사였던 그가 겨우 죽음을 모면한 바 있는 당시의 왕정 복고 시대를 직접 언급하지 않았다. 대신 수세기를 지나면서도 여전히 기억될 만큼 강렬한 고대 그리스·로마 문명의 문헌을 언급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우리가 직접 듣지 않았더라도 진실임을 알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 P368

예술은 인간의 조건을 감정과 느낌을 통해 표현하는 것이라고 정의된다. 즉 예술은 질서와 무질서 양자를 함께 환기시킴으로써 모든 감정들을 움직인다. - P368

예술을 창조하는 능력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사실에 기반한 차가운 논리인가, 아니면 밀턴의 믿음처럼 시인의 사색을 이끄는 신의 인도인가? 모두 아니다. 게다가 『실락원』의 저자에게서 발견되는 천재성을 점화시키는 그 어떤 독특한 섬광의 증거도 없다. 예를 들어 음악적 재능이 특출한 사람이 상상을 하고 있을 때 그들의 뇌를 관찰해 본들 그들에게서 어떤 특이한 신경생물학적 특징들을 발견할 수는 없었다. 그 대신 덜 재능 있는 보통사람들보다는 동일한 뇌 부위들이 보다 폭넓게 활용되고 있었다. 역사도 이러한 이른바 증대(incremental) 가설을 지지한다. 맨앞에는 셰익스피어, 레오나르도 다빈치, 모차르트 등과 같이 늘 맨 앞줄에 있는 천재들이 있고 실력 순서대로 수많은 유능한 사람들이 그 뒤를 잇고 있다. - P368

서구의 정전(正典)을 비롯한 고급문화에 통달한 사람들은 한결같이 독보적 지식, 뛰어난 솜씨, 독창성, 세밀한 감수성, 야심, 대담함, 충동 등을 소유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무언가에 강하게 사로잡혀 있었고 마음속에 불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선천적인 인간 본성을 직관적으로 파악해내는 능력도 지녔다. 그런데 그 능력은 우리 모두의 마음에 흐르고 있는 보잘것없는 생각들에서 뛰어난 이미지들을 선택하기에 충분할만큼 정확한 것이었다. 그들이 발휘했던 재능의 크기가 단지 정도에 있어서만 큰 것이었는지는 몰라도 그들의 창조물은 다른 이들의 것에 비해 질적으로 참신했다. 그들은 주술이나 신의 자비를 통해서가 아니라 다른 보통 사람들과 일정 부분 공유하고 있는 능력을 조금 더 발휘함으로써 이름을 남길 만한 영향력과 생명력을 얻은 것이다. 그들은 나머지 보통 사람들의 위로 높이 솟구칠 수 있는 능력을 가졌을뿐이었다. - P369

정도는 다를지라도 모든 사람은 공통적으로 예술적 영감을 가지고 있다. 이 예술적 영감은 인간 본성의 분수에서 솟구쳐 올라온다. - P369

예술적 영감에 따른 창조는 분석적 설명이 없다 해도 보는 사람의 감수성을 직접적으로 자극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창조성은 절대적으로 인본주의적 (humanistic)이다. 지속적인 가치를 지니는 작품들은 이와같은 인본주의적 근원을 가장 충실히 따르는 것들이다. 이런 의미에서 가장 위대한 예술 작품들은 그것들을 이끌어 낸 후성 규칙들을 탐구함으로써 근본적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후성 규칙들은 인류 진화의 역사 속에서 형성된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 P369

그들(예술에 대한 주류 관점)은 다양한 수준에서 보편적인 인간 본성의 존재를 부인하는 포스트모더니즘 가설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아왔다. 문학 비평에 적용된 포스트모더니즘의 극단적인 표명은 자크 데리다와 폴 드 만(Paul de Man) 이 가장 도발적으로 정식화했던 해체주의 철학이었다. - P369

이 관점(해체주의 철학)에 따르면 진리는 상대적이고 개인적이다. 개인은 언어 기호들의 끊임없는 변환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내적 세계를 창출한다. 여기에는 문학적 지성을 인도할 어떤 특권적 지점도 길잡이별도 없다. 그리고 과학 역시 세계를 바라보는 또 하나의 방식에 불과하기 때문에 텍스트의 깊은 의미를 끌어낼 수 있게 해 주는 인간 본성에 대한 과학적 지도 따위가 있을 수 없다. 있는 것이라고는 다만 독자 자신이 구축한 세계에서 여러 해석과 주석을 창안할 무제한의 기회뿐이다. "저자는 죽었다."라는 표현은 바로 해체주의의 상투 문구이다. - P370

해체주의를 주창하는 학자들은 오히려 자기모순과 모호함을 추구한다. 그들은 저자가 생략한 부분을 상정하고 분석한다. 바로 이와같은 보이지 않는 요소들 때문에 포스트모더니즘적 형식의 개인화된 주석이 허용된다. 이런 혼합물에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덧붙이는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전통적인 문학 규준들을 지배 계급, 그것도 특히 서구 백인 남성의 세계관을 확고히 하는 집합체. 그 이상으로는 생각하지 않는다. - P370

포스트모더니즘적 가설은 증거와 잘 부합하지 않는다. 그것은 어떻게 정신이 작동하는지에 대한 기존의 지식으로부터 자유를 만끽하고 있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이 그토록 인기를 끄는 데는 카오스에 대한 추구 이상의 어떤 이유들이 있는 것이 확실하다. 만일 포스트모더니즘의 생물학적 근거가 맞는다면 그것의 광범위한 호소력은 인간 본성에 뿌리를 둔 것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 P370

예술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은 해럴드 블룸(Harold Bloom)이 『서구의 정전들(The Western Canon)』에서 고발한 바 있는 "원한 학파(School of Resentment, 블룸은 이 책에서 "서구의 정전들이 사회·정치적 엘리트들에 의해 부과된 구조물들에 불과하며 이제는 부적절하다."라고 주장하는 일군의 학자들을 이른바 "원한 학파" (페미니즘, 마르크스주의, 해체주의 등)라고 부르고 그들을 노골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이상의 것이며, 알렉산더 포프의 시구에서 나온 "거세된 남자의 앙심" 이상의 것이다. - P370

이것(예술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은 미국 학계가 프랑스 몽매주의(Gollic obscurantism, 여기서 Gollic은 프랑스에 대해 약간 비아냥거리는 느껌으로 씌어진 형용사이며 obscurantism은 문학과 예술에서 고의로 의도를 애매하게 하는 표현주의적 사조 일반을 일컫는다. 몽매주의라고도 하며 여기서는 해체론 등 프랑스에서 기원한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사상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에 대해 통상 지니는 감상적인 경외심 이상의 것을 통해 지지되고 있다. - P371

또한 포스트모더니즘 속에는 어떤 혁명적인 정신이 요동치고있다. 예를 들어 이 소용돌이 속에서 많은 사람들, 특히 자신만의 독특한 재능과 정서적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 여성들이 지난 수세기 동안 상대적으로 부당하게 무시당해 오다가 이제야 주류 문화 속에서 자신을 충분히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 P371

나는 페미니즘ㅡ그것이 사회적이건 경제적이건 예술적 페미니즘이건 간에ㅡ을 환영한다는 것이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옹호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페미니즘은 새로운 표현의 창구를 열었고 억눌려 지냈던 인재 집단을 해방시키기는 했으나 인간 본성을 산산조각 내지는 못했다. 그와 같은 진전이 인간 본성을 폭파시켜 작은 조각들로 파편화시킨 것은 아니다. 오히려 페미니즘은 인류를 통합시키는 보편적 형질들을 충분히 탐색하게끔 새로운 무대를 마련해 주었다. - P371

또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면 포스트모더니즘은 문학적 세계관의 역사적 진동 중 하나의 극값이라고 볼 수 있다. 1926년에 위대한 미국인 비평가인 에드먼드 윌슨(Edmund Wilson)은 서구 문학이 그 강조점에 있어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라는 양극단 사이를 "흔들거리며 왔다 갔다 하지 않을 수 없는" 듯이 보인다고 했다. - P372

아주 폭넓게 생각해 보자. 이와 같은 진동 주기 중에는 우선 포프와 라신처럼 질서있는 세계를 지향하는 과학자의 시각에 의존했던 계몽주의 시인들이 19세기의 반항적 낭만주의 시인들에게 대중의 사랑을 빼앗기고 만 시기가 있었다. 그러나 이 낭만주의자들도 합리적 질서로 회귀했던 플로베르 같은 사람들에게 곧 길을 내주고 말았다. 그러다가 말라르메와 발레리 등 프랑스 상징주의자들과 예이츠, 조이스, 엘리엇 등의 영국 문인들이 주를 이루던 모더니즘적 글쓰기가 나타나 또 정반대의 흐름이 풍미했다. - P372

에드먼드 윌슨은 극단적인 것이 하나의 지배적 사조로서 영원히 지속될 수는 없기 때문에 주기적인 진동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 P372

"예술 작품은 한 줄 한 줄마다 자신의 정당성을 지녀야 한다." _조셉 콘래드(Joseph Conrad) - P3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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