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리모어는 맵토를 굴복시키기 위해 강한 표현을 썼다. 어차피 케렌시아의 펫들은 다른 펫들을 데려오는 역할인지라 이런 말을 하면 쩔쩔매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이는 드리모어의 착각이었다.
[드리모어는 나한테 미안하다는 말을 듣고 싶은 거징? 하지만 나는 그런 말을 하지 않을 거야.] 맵토는 드리모어의 예상과 달리 똘망똘망했다.
‘인간도 그렇고, 몬스펫도 그렇고 왜 나를 소중히 대해주지 않는 것이냐!‘
[내가 터지면 나는 이제 없다. 너도 여기서 죽는다고 봐야 한다.]
[이런 제기랄! 무능하게 계속 질 때부터 알아봐야 했어!]
‘어쩌면 드리모어는 터지고 싶지 않은 걸지도 몰라!‘
"배가 그곳을 지나가려면... 비가 많이 오면 되지 않을까?" 앞이 바위로 막혀 있다면, 그곳을 건너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바위를 부순다거나. 배에서 내린다거나 아예 포기하거나 등등. 하지만 그중에서도 제일 이상한 방식은, 역시 비가 와서 수심이 높아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기다리면 되는 거였어... 비가 올 때까지. 수심이 높아질 때까지... 그거면 되는 거였다고...‘
자신은 틀리지 않았다. 부족했기 때문에 등록하지 않은 게 아니다. 미래 예지. 이 기나긴 싸움 속에서. 하늘과 연결되지 않아야 승리할 수 있기에. ‘이기는 경우의 수‘ 라는 배에 올라타야 하기 때문에. 그녀는 유형화되지 않은 모든 과정을 단지 본능으로 이행했다. ‘나는 사실상 그때부터 지금 순간을 위해 대비하고 있던 거였어.‘
잠을 자다가 스산한 기운이 느껴지면 문을 걸어 잠그는 것처럼. 이서하 역시 본능적으로 미래의 어떠한 위험을 느끼고 스킬 등록을 하지 않은 것이었다. ‘설마 이 감각이 십이월검법의 최종형인 걸까?‘ 물론 시간 차가 너무 길어서 우연일지도 모르겠지만. 지금 이 순간. 이서하는 자신이 방황하던 모든 과정이 의미 있다고 느꼈다.
드리모어의 몸 정중앙에 검이 박혔다. 약점을 옮겼지만, 마치 미리 위치를 알았다는 듯이 칼이 정통으로 박혔다. 드리모어의 몸에 있던 핵이 깨지고, 불이 뿜어져 나온다.
"아빠 말대로 검은 잘못되지 않았고, 이미 충분하네요. 이걸 너무 늦게 깨달았어요."
‘검 끝이 올바르니 조용히 기다려보세요. 검은 잘못되지 않았으니까요. 굳이 따지자면, 항상 호들갑 떠는 당신이 문제죠.‘
검성은 충격을 받았다. ‘서하는 잘못되지 않았다. 단지 내가....‘ 그는 충분히 강했음에도 불구하고 깨달음을 얻기 위해 방황했다.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서. 실수를 바로 잡기 위해서. 하지만. 완성된 검은 멀리 있는 게 아니었다. ‘서하가 내 검이었어.‘
권민수가 말했던 용사와 활. 깨달음과 검. 그 둘은 이렇게나 가까이에 있는 것이었다. "아빠." "응..." "나한테 검을 알려줘서 고마워." 이서하의 팔이 떨린다. 검성의 눈에서 눈물이 주륵주륵 흘러내렸다.
멀리서 지켜본 드리모어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단지 이겨서 좋아 하는 건 아닌 것 같구나.]
이서하의 검술은 드리모어에게 대항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이를 통해 검성조차도 완성하지 못했던 그들의 가문 검법이, 완벽하게 완성된 것이었다.
드리모어는 고개를 돌려 파괴된 세상을 바라봤다. 그리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내가 필요악이라는 궤변은 하지 않겠다. 하지만, 나는 적어도 저들에게는 기쁨이었던 것 같구나.]
드리모어가 가루로 변해서 차츰 사라지기 시작한다. 확률에 기생하여 명을 유지하던 드리모어는, 이서하의 검술 때문에 존재할 수 있는 확률 자체가 이 세상에서 없어진 상태였다.
[바보야. 나는 사라지는 게 아니야.] ...(중략)... [나는 앞으로 저들 사이에서 ‘기쁨‘으로써 존재하게 될 테니까.]
‘내가 저런 나쁜 펫의 말에 속았구나. 나는 대체 뭐란 말이양!‘ 자기 뜻대로 펫을 모으고, 쓸모 있으면 쓰고 아니면 버린다. 록은 드리모어의 행동에 분노했다. 차라리 드리모어의 계획이 실패하기를 바랐다. 그리고, 마침내 드리모어가 이서하에 의해 꿰뚫렸을 때 속으로 좋아했다.
‘100%라고 사기를 치더니! 결국 실패했구나!‘ 뭐든 성공할 것처럼 굴더니!
똑똑한 록의 생각이 맞는다면. 드리모어는 사실 실패한 게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서하는 검술을 완성하고, 드리모어는 인간에게 도움을 줬으니까. 사실상 두 존재의 첫 소원이 모두 이뤄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서하의 실패가, 사실 오늘의 성공이었던 것처럼. 드리모어의 실패 또한 성공이었다는 걸까낭. ..?‘
자신이 밖으로 나와서 인간의 도시를 흉내 내고 여러 가지 계책을 짠 것은, 어쩌면 인간을 능가해서 그들에게 인정받으려는 애증에 가까운 감정일지도 모른다.
케렌시아가 아닌 곳에서는 싸움이 넘쳐나는 데 비해 케렌시아는 너무나도 평온했다.
록은 도서관에서 읽었던 책을 떠올렸다. 그곳에서도 내용은 비슷하지만 표지만 다른 게 꽤 많았다. 록의 생각 역시 그런 식으로 형태만 탈바꿈하여 누군가가 사용하고 있는 것이었다.
[어차피 세상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나도 결국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지.]
결국 다 없어진다는 걸 상기하니 마음이 편안했다.
록이 언젠가 읽었던 책에 의하면 지구는 둥근 공의 모양이라 했다. 그 내용을 떠올린 록은. 다시 사과 위에서 싸우는 개미를 관찰했다. 계속해서 피하다가 결국 마주치고 싸우고야 마는 저 개미는... 마치 글라이더 록과 같았다. [저게 나구나... 저게 나였어...] 둥근 지구에서 케렌시아와 돌렌시아를 만나며 계속 싸우는 존재.
록은 사과 위의 개미를 보며 바닥에 주저앉아 울었다. [아이고... 구체 위에 있어서, 나는 여기서 벗어날 수 없다.]
록은 세상에서 거대한 꿈을 일구는 게 우선이었다. 그래서 2번이나 거절하며 케렌시아로 가지 않았다.
록은 드디어 이블린의 심정을 이해했다. 돌렌시아 펫들에게 거절 당하고 나서야 자기 행동을 마주하게 된 것이었다. 그제야 록의 귀가 선명하게 뚫렸다.
부르는 소리에는, 적의가 아닌 선의가 가득했다. 결코 록을 생포하거나 죽이려고 오는 게 아니었다.
록의 눈꺼풀이 떨린다. 예나 지금이나... 그들은 록이 케렌시아로 돌아오길 바라고 있던 것이었다. 왜 그들의 말을 제대로 듣지 않았던 걸까. 항상 원망받는다고 생각했던 록은 심리적인 자유를 느꼈다. 주르륵. 이윽고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온다.
‘나는 많은 걸 잃었지만, 모든 걸 잃지는 않았구나.‘
지구는 둥글다. 그러니 계속 가도 큰 문제는 없다. 앞으로 가면 결국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오니까.
록은 웃고 있었다. 이미 받을 걸 다 받았기에.
[나는 자유야!! 너희도, 자유라고!! 우리는 모두 자유를 얻었어!!] 메아리조차 울리지 않는 작은 소리. 그러나 록은 계속해서 외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이렇게 안정적으로 흘러간 건 처음이야. 노력한 건 거의 없는데... 오히려 가만히 있던 게 더 잘 되다니...‘
이번에는 되도록 조용히 가면서 상황을 지켜보자.
앞선 회차의 지식은 발생 시기가 엇나가면서 무가치해졌다.
‘케렌시아를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 반대였던 건가...?‘
직선의 시작과 끝이 만나며 ‘원형‘이 되는 형상이 나타났다.
모든 사건은 과거에서 미래로, 직선적으로 이동한다. 하지만 원형의 형태로 끝이 서로 맞닿아 있다면...
‘지구를 둥글게 일주해서... 다시 돌아오고 있다.‘ 케렌시아를 떠난 글라이더 록이, 다시 케렌시아로 돌아와서 끝을 맺고. 이서하의 집을 떠났던 기쁨이 다시 그들에게 돌아와 끝을 맺으며. 가족을 떠났던 권민수가 다시 가족에게 돌아와 끝을 맺는다. 그밖에도 케렌시아를 떠난 많은 펫들이 다시 케렌시아로 돌아오고 있었다.
‘뭐, 인간 말종이긴 하다만...‘ 혹시 모른다. 지구를 한 바퀴 돌면 또 달라질지도.
"나도 이제 케렌시아로 돌아가야겠어." 길었던 시간이 끝맺음 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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