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추억‘에 비해 감정이 덜 관여돼 있다.
추억은 틀릴 가능성이 없다. 이미 내가 어떻게 저장하기로 한, 나의 감정이 적극적으로 개입된 결과이기 때문이다.
뼈아픈 슬픔도 시간이 흘러 추억이 되기도 하는 것
추억이 인화되어 액자에 넣어진 사진이라면, 기억은 잘려져 나온 디지털 사진이다. 잘리기 전의 상태에 따라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되기도 하고, 확대해서 들여다보면 몰랐던 것들이 튀어나오기도 한다. 지나가긴 했지만 소멸되진 않았기에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바뀔지 아무도 모른다.
모든 기억이 익어 추억이 되진 못하지만, 모든 추억은 결국 기억의 흔적이다.
자존감은 근육 같은 거예요. 한 번 높아지면 계속 높아져 있는 게 아니죠. 그냥 높아질 때도 있고 낮아질 때도 있고 그런 것 같아요. 그래서 근육처럼 키워야 해요. 가끔 약해졌을 때는 또 쉬었다가, 다시 운동해서 키우고, 그렇게 반복하는 거죠.
말썽은 아이가 내 뜻대로 굴지 않는 상황을 두고 쓰는 어른 입장에서의 표현이지, 아이에게는 일종의 갈등이다. 나의 의지와 다르게 상황이 흘러감에 대한 저항, 그리고 혼돈의 표현인 것이다.
굳이 상징적인 거에 얽매일 필요는 없는 거 같긴 해요.
수많은 격언들은 때로 정확하게 서로를 대치한다. ‘모르는 게 약이다.‘ vs ‘아는 게 힘이다.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라.‘ vs ‘쇠뿔도 단김에 뽑아라‘
나이에 대한 말도 마찬가지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풍선과 나이에 맞게 행동하라는 말풍선은 뽀득뽀득소리를 내며 부대낀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파도를 타듯 자연스러울 때 근사하다
나이가 들어 육체가 약해지는 데에는 분명, 조금 더 신중해지고 조금 더 내려놓으라는 뜻이 있을지도 모른다
중력이 내게 해주고픈 말을 받아들이면서 다만 너무 아프지 않게 나이 드는 것, 그러나 숫자로 모든 걸 판단하는 우를 범하지 않는 것, 육체의 유한함 앞에 겸허해지는 것, 이것이 앞으로의 내 나이에 관한 바람이다.
거기에 있지만 거기 있지 않은 것, 당장 손에 닿지 않아도 존재만으로 아름다운 것. 꿈은, 어릴 때 상상했던 구름과 무지개를 닮았다.
꿈은 어딘가에서 날아온 꽃씨처럼 소리소문 없이 피어났을 때 비로소 꿈이다.
어쩌면 어릴 때 반복적으로 받은 질문 탓에 우리는, 꿈을 목표와 혼동하는지도 모른다.
목표가 지점으로써 존재한다면, 꿈은 장면으로 존재한다.
영화로 말하자면, 목표는 어느 만큼의 관객수를 동원할지, 얼마의 수익을 창출할지 등의 구체적인 ‘수치‘를 다루는 이야기다. 반면 꿈은 미술을 논한다. 어떤 분위기의 장소, 어떤 색깔과 질감의 의상, 또 어떤 종류의 소품에 둘러싸인 주인공.... 즉 나를 상상하는 것이 바로 꿈이다.
훌륭한 목표와 근사한 꿈, 어울리는 수식어도 각각 다르다.
아직 꿈이 없다면 차라리 그대로가 자연스럽다. 꿈은 ‘좋아하는 것들‘이 생겨나고 취향이 생겨나면서부터 자연스럽게 피어나는 것이다.
내 마음이 끌려 탄생한 꿈은 자연스럽게 나를 이끌어 작은 목표들을 만들어준다. 마음이 하는 모든 일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나를 이끌 듯 꿈도 그렇다.
꿈은 목표와 성질이 다르기에, 반드시 이루지 않아도 나를 행복하게 해주기도 한다.
작가가 꿈인 사람은 글을 쓸 때 행복할 수 있다. 행복하기 때문에 거듭 글을 쓴 사람은 자연스레 필력이 늘고, 그러다 본격적으로 목표를 세웠을 때 꿈이 현실이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내게는 음악이 그랬다. 좋아하는 음악을 들을 때 온몸에 퍼지는 엔도르핀의 기운, 사랑에 빠질 때나 느껴지는 뱃속의 간질거림은 여전히 신비롭다. 그러나 그저 너무 좋았을뿐 구체적으로 목표를 세운 적은 없었다. 직장인이 되고 나서 자연스럽게 음악 쪽 일을 하고 싶다는 목표가 생겨 아주먼 변두리에서 중심부로 조금씩 가까워지다 덜컥 지금의 내가 되었다.
작사가가 꿈인 누군가에겐 나의 직업이 구름이나 무지개처럼 닿을 수 없고 그저 근사한 무엇으로 보일 수 있지만, 그건 오래된 하루하루가 만들어낸 결과일 뿐이다. 나는 그저 그런 것들을 바라보며 기뻐하고 열광하다가 지금의 내가 되었을 뿐이니까. 언제 여기서 당신을 만나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구름과 무지개를 만져보고 맛보고 싶었던 어린이의 꿈은 깨어졌지만, 그것들은 여전히 날 기분 좋게 만든다. 떠올리면 행복해지는 꿈을 갖고 있다면, 주머니 속에 넣고 살아가다가 계속 꺼내보았으면 좋겠다. 당장 가서 만질 수 없으니별수 없다고 버리지 말고.
유난스럽다 : 주로 비난의 용도로 쓰이는 이 말은 국어사전에 실린 원뜻으로는 아주 근사한 말이다. ‘보통과 달리 특별한 데가 있다‘(엣센스 국어사전 기준). 이 얼마나 극찬인가!
생각건대, 유난스럽다고 지적받은 적이 있다면 그 부분이 바로 당신을 빛나게 해줄 무언가일 것이다. 그러니 유난스러운 자들이여, 온 힘을 다해 스스로의 특별함을 지키자.
천천히 들이마시고 내쉬는 호흡에 집중을 해보라
명상을 할 때 호흡에 집중하는 것을 초보에게 권하는 이유는, 지금 이 순간, 즉 완벽히 ‘현재‘에 일어나고 있는 일 중에 호흡이 대표적이기 때문이란다.
명상의 목적은 늘 부유하는 잡다한 생각들을 멈추는 데 있다. 이런 생각들 중 대부분은 미세하게라도 과거나 미래에 있다. 다가올 일들에 대한 걱정, 또는 지난 일들에 대한 후회.
참 아이러니하다. 오직 현재로서만 존재할 수 있는 우리인데 정작 생각은 주로 미래나 과거에 갇혀 있으니 말이다. 겪어온 것들(과거)로 인해 생긴 두려움으로 피어오르는 다가올 일(미래)에 대한 걱정.
티벳 승려들처럼 명상의 고수가 아닌 이상, 보통의 사람이라면 떠오르는 생각들을 막을 순 없다. 그럴 땐 가만히 숨을 쉬며 그 생각들을 바라보라고 한다. 신기한 것은 ‘걱정을 하고 있는 나‘를 인지하는 것만으로 실제로 스트레스가 반은 넘게 사라진다는 거였다.
현재의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시간을 갖는 것, 어쩌면 명상은 그걸 위해 하는 걸지도 모른다.
나의 인생을 극으로 본다면 작가는 나고 주인공도 나다. 작가가 위기에 빠진 주인공 곁에 같이 앉아 ‘어떡해, 어떡하면 좋아‘ 하고 발을 동동 굴러선 안 되는 법이다. 걱정에 빠진 내 인생의 주인공인 나를 위해 작가인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음 회차로 이야기를 진전시키는 것뿐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순리에 모든 걸 맡기는 것.
생각에 갇혀 잠 못 이루는 밤, 긴 숨을 쉬어보자. 숨이 나가고 들어오는 것에만 집중해보자. ‘나는 숨을 쉬고 있다. 이렇게 잘 살아 있다. 걱정에 빠진 나를 구원하기 위해, 가만히 숨을 쉬며 누워 있다.‘ 이렇게 생각이 정리된 다음, 주인공을 위한 최선의 다음 화를 써내려가보는 거다. 주인공이 방치될 순 없으니까.
너무 내 탓을 하든 남 탓을 하든, 둘 다 본인한테 정말 안 좋은 거예요. 이것 모두 양날의 검 같아요. 저는 그럴 때마다 자의식을 조절하려고 해요.
‘그래 맞아. 내가 하나 못했다고 큰일이 되고 말고 할 게 아니지‘
뭘 해도 내 탓을 심하게 하지 않고 잘됐을 때도 너무 오만해지지 않고 적절하게 파도 타듯이 살아가게 된 거 같아요.
의도적으로 신경 쓰고, 바로잡아주지 않으면 치우칠 수밖에 없는 자의식 과잉과 결핍의 간극. 세상만사가 그러하듯 완벽히 내 탓인 일도, 남 탓인 일도 없을 것이다.
나쁜 결과를 지울 때는 ‘탓‘이라는 말을 쓰고, 좋은 결과를 지울 때는 ‘덕‘이라는 말을 쓴다. 둘 모두 한쪽에만 치우쳐선 안된다.
매력 있다는 말은, 주관적으로 쓰이면서 다수를 공감하게 만들기도 하는 묘한 말이다. 또 다양한 취향들 사이에 있는 중립지역에 사는 말이다.
깊은 대화를 나누거나 오랫동안 서로를 지켜보지 않았을 때 우리는 서로를 평면적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면서 충분히 상대를 파악했다고 착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느 우연한 순간에 내가 알고 있던 누군가의 평면적인 모습이 갑자기 입체성을 띄게 될 때가 있다.
누군가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많은 표현들 중 ‘매력 있다‘는 말은, 한 사람이 가진 여러 면들의 다름이 기분 좋은 밸런스를 이루고 있다는 걸 느낄 때 나오는 말이다.
누군가를 ‘매력 있다‘라고 표현하는 나의 기분조차 좋아지는 건, 한 사람의 다양한 면을 보게 될 때 느끼는 일종의 해소감 때문이다.
나를 규정짓고 있는 프레임을 벗고 객관적으로 자신을 바라볼 수 있을 때, 스스로의 매력을 파악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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