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1년은 산 것 같지를 않고 잃어버린 것 같다. 실물(失物)을 한 허망함과 억울함. 그러나 신고할 곳은 없다. - P250
사는 것은 무엇일까? 내가 재치 박사라면 사는 것이란 싸움질이라고, 극히 재치 없는 살벌한 대답을 할 것이다. - P250
우선 일과의 싸움, 어제의 노고를 무(無)로 돌리고 밤사이에 정확하게 제자리로 돌아와 쌓여 있는 여자의 일, 일, 또 일. - P250
빨랫거리, 연탄불 갈기, 먹을 것 장만하기, 청소 등 어젯밤에 분명히 다 끝낸 줄 알고 자리에 들었건만 아침이면 정확히 어제 아침만 한 부피로 돌아와 쌓여 있는 일과의 영원한 일진일퇴(一進一退)의 싸움질, 시시포스의 신화는 바로 다름 아닌 여자의 이 허망한 노고를 이름이렷다. - P251
그러나 싸움을 걸어오는 것이 어찌 일뿐일까? 시장에 가면 장사꾼의 간교와의 싸움, 늘 이쪽이 비굴하고 저자세의 입장에 서야 하는 그래도 한 번도 이겨 본 일이라곤 없는 불리하고 불쾌한 싸움, 웃는 낯으로 아양을 떨며 달려드는 불량 (不良), 날림, 속임수, 허풍과의 싸움, 물가고와 주머니 사정과의 싸움, 수입에도 전해 오는 지출과의 싸움, 욕구와 현실과의 싸움, 툭하면 사회 풍조를 타고 허구위로 올라가지 못해 하는 생활을 땅으로 끌어내려야 하는 싸움, 마땅히 그래야 할 것과 절대로 그럴 수는 없는 것과의 싸움. - P251
어디 그뿐일까. 자라나는 아이들을 바르게 기르려는 것도 싸움질이다. 아이들이 바르게 자라는 것을 저해하고 조소하는 온갖 악덕………… 이루 열거할 수도 없는 숱한 악덕과의 싸움질이다. - P251
그럼 매일 이런 악전고투에 임해야 하는 나는 무엇일까? 신념과 투지에 넘치는 호전적인 용사라도 된단 말인가. 천만에, 영문도 모르게 소집되어 최전방에 세워진 일개 초라한 졸병이다. 졸병은 왜 싸우는 것일까? 싸울 수밖에 없으니까, 졸병이니까. 안 싸우면 자기가 죽으니까. 글쎄 어느 쪽일까. 아무튼 훈장을 위해 싸우지 않는 것만은 확실하달까. - P252
긴긴 겨울밤 올해도 얼마 안 남았구나 싶으니 이런 일 저런 일을 돌이켜 보게 되고 후회도 하게 된다. 이런저런 시시한 후회 끝에 마지막 남은 후회는 왜 이 어려운 세상에 아이들을 낳아 주었을까 하는 근원적인 후회가 된다. 그리고 황급히 내 마지막 후회를 뉘우친다. 후회를 후회한다고나 할까. - P252
아아, 어서 봄이나 왔으면. 채 겨울이 깊기도 전에 봄에의 열망으로 불안의 밤을 보낸다. - P252
딴 일도 아니고 자식 기르는 일에 대해서 감히 누가 입바른 소리를 할 자격이 있단 말인가. - P253
재벌의 자제가 곱지 않은 일을 저지르면 우리는 모두가 재벌이 아니라는 걸로 마음을 놓고, 너무 극빈(極貧)한 층에서 일어난 청소년 문제에 부딪히면, 내 자식은 그렇게까지 없게 기르진 않았으니까 하고 남의 일 보듯 하는 안일한 자세로 살아왔다. 그렇다고 보통으로 사는 데 대한 긍지나 보통으로 사는 데 가치를 부여할 만한 양심이 손톱만큼이라도 있어서도 아니다. 실은 부자가 되고 싶어 죽겠는데 그게 잘 안돼서 보통으로 살고 있을 뿐인 것이다. - P254
기계가 부드럽게 돌기 위해서 알맞은 양의 기름을 쳐야 하는 것처럼 한 가정이 가족끼리의 친애감을 유지하면서, 제각기의 삶도 즐겁게 영위하기에 알맞은 만큼만 돈이 있는 집을 보통 사는 집으로 치면, 기름이 너무 없어 부속품끼리 쇳가루를 떨구며 마멸해 가는 상태는 가난이겠고, 기름이 너무 많아 기계를 조이고 있던 나사까지 몽땅 물러나 기계의 부분품들이 따로따로 기름 속을 제멋대로 유영하는 상태가 아마 부자이겠다. - P258
보통으로 산다는 걸 장황하게 설명했지만 한마디로 말하면 시시하게 사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보통으로 살아 본 사람이면 다 알 수 있는 게 이 보통으로 산다는 게 여간만 어려운 게 아니다. 어려워서 그런지 보통으로 사는 사람이 아주 부자나 아주 가난한 사람보다 수적으로도 적은 것 같다. 정상적인 사회라면 마땅히 보통으로사는 사람이 제일 많아야 할 텐데 그렇지 못하다. - P259
외형적으로 보통 사는 것으로 보이되 의식은 부자지향적인 수가 많다. 그래서 뱁새가 황새 쫓는 식으로 끊임없이 부자의 상태를 흉내 냄으로써 자기 생활을 파탄과 불안으로 몰고 간다. 속으론 혹시 가난해지면 어쩌나 불안한 채 겉으로 호기 있게 부자의 흉내를 내면서 산다. 일종의 분열 상태다. - P259
보통 살면서도 보통 사는 데 대한 긍지나 줏대가 없다. 이건 진정한 의미로 보통 사는 게 아니다. 정말로 떳떳하게 보통 사는 사람은 드물고, 따라서 보통 살기가 외롭다. 보통 사는 사람이 많아야 의사소통이 잘되는 건강한 사횔 텐데 말이다. - P259
왜냐하면 사람이란 특별한 사람 아니면 대개 자기가 사는 위치에서 가까운 범위밖에 보지 못하고 타인을 이해하는 범위 역시 그렇다. - P259
그러니까 부자는 자기네 부자 사회와 보통 사는 사회까지는 이해할 수 있을지 몰라도 가난을 이해하긴 어렵다. 극빈자 역시 자기네의 가난과 더불어 보통 사는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재벌의 생활에 대해선 이질감 내지는 복수심밖에 동하는 게 없다. - P260
결국 아래위를 함께 이해할 수 있고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를 가장 폭넓게 바라볼 수 있는 시야를 가진 층이 바로 이 보통 사는 사람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 P260
또 돈이 귀하다는 것도 알 만큼은 알지만 세상에 사람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는 믿음과는 바꿀 수 없고, 돈을 자기를 위해서는 아낄 줄도, 남을 위해선 쓸 줄도 알고, 자기일, 자기 집안일과는 직접적으로 관계는 없더라도 크게는 관계되는 사람들과 사람들과의 관계, 세상 돌아가는 일과 사람들과의 관계의 그른 일, 꼬인 일, 돼먹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마음이 편할 수 없어, 그런 일로 잠 못 이루는 밤을 가져야 하는 양식의 소유자도 바로 이 보통 사는 사람들이 아닐까. - P260
과부의 설움은 과부밖에 모른다지 않는가. 딴 사람이 안다면 그건 짐작일 뿐 진실일 순 없다. - P279
마치 구두 위로 발등을 긁는 것만큼이나 답답하다. - P280
국민은 누구나 조국의 융성을 위해 많건 적건 기여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조국의 망국을 위해서도 많건 적건,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기여를 했을 것이다. 망국의 씨앗은 자기에게도 반드시 있었을 것이다. - P280
나라를 지키려면 죽기 아니면 살기로 지켜야지, 금괴로 상징되는 단 얼마간의 안일과 도피의 여지라도 마련돼 있어선 안 된다고 감히 단언한다면 가혹한 말이 될까. - P282
구구절절 망국의 한이 서린 월남인의 답사를 다 읽고나니 새삼 전쟁은 싫다 싶다. 그러나 일단 말려들면 어떡하든 이기고 볼 일이다 싶다. 진다는 건 너무 끔찍한 굴욕이다. - P282
정직과 근면은 사람을 웃길 따름인 것이다. 다만 돈이 제일인 것이다. 돈이면 다인 것이다. 법을 어기되 법에 걸리지 않고 어떻게 해서든 약게 돈만 벌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돈을 위해서 법을 어기는 일쯤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풍조는 이미 구석구석에 팽배해 있다. - P285
"내가 한마디로 표현할 수 있으면 소설을 결코 쓰지 않겠죠." - P294
뭐니 뭐니 해도 내 집, 내 방만큼 아늑한 곳도 이 도시엔 없을 것이다. - P308
우리의 실제 인생은 드라마나 코미디보다 훨씬 재미있다는 사실의 확인도 텔레비전을 보는 재미의 하나다. - P313
늘 그렇듯이 문제는 바로 나에게 있는 것이다. - P313
아이들이란 순진한 것 같으면서도 악마처럼 악랄하고 잔혹한 데가 있다.
무슨 재주로 사람이 집어먹은 세월을 다시 토해 낼 수 있단 말인가
나는 결코 세월을 토해 낼 수는 없으리란 걸, 다만 잊을 수 있을 뿐이란 걸 안다. 내 눈가에 나이테를 하나 남기고 올해는 갈 테고, 올해의 괴로움은 잊혀질 것이다. - P342
부자가 되는 공상은 아무리 해도 싫증이 안 나고 할수록 재미가 아기자기하다. - P343
앉은 자리와 둘레가 깨끗하다는 건 참 기분 좋은 일이지만 깨끗한 게 지나치면 오히려 불안하다. - P364
남이 불안할만큼 비와 걸레를 들고 다니며 앉은 자리에서 조금만 움직이면 그 자리를 훔치고 머리카락도 집어내고 하면 불안해서 그 집에서 쉴 마음이 안 난다. - P364
집에 들어가면 내 집이건 남의 집이건 우선 몸과 마음이 편하고 싶다. - P364
깨끗한 것도 좋지만 남이 불편하고 불안해할 만큼 깨끗한 것에만 상성인 여자는 딱 질색이다. 비질 · 걸레질 따위가 다 여자의 보람이 될 수 있는 건 비질 · 걸레질로 집 안이 깨끗해지면 가족이나 방문객이 기분이 좋아지고 편해지기 때문일 게다. 그러니까 비질 · 걸레질로도 남을 행복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일 게다. - P365
알뜰한 건 미덕이지만, 수단 방법 안 가리고 알뜰한 건 악덕에 속할 것 같다. - P366
사람은 늙으나 젊으나, 주위에 이성의 눈을 의식하는 게 사는 즐거움도 되지만, 이성의 눈이 견제의 역할까지 함으로써 인간이 지킬 최소한의 예절이랄까 절도랄까를 지키면서 살게 되는 게 아닐는지. - P370
얼굴이 각양각색인 것만큼 추는 모습도 각양각색이다. - P372
아이들의 책가방은 무겁다. 그러나 단순한 책가방의 무게만으로 한창 나이의 아이들의 어깨가 그렇게 축 처진 것일까? 부모들의 지나친 사랑, 지나친 극성이 책가방의 몇 배의 무게로 아이들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는 거나 아닐지. - P380
부모의 보살핌이나 사랑이 결코 무게로 그들에게 느껴지지 않기를, 집이, 부모의 슬하가 세상에서 가장 편하고 마음 놓이는 곳이기를 바랄 뿐이다. - P380
아이들은 예쁘다. 특히 내 애들은 아이들에게 과도한 욕심을 안 내고 바라볼수록 예쁘다. - P380
제일 예쁜 건 아이들다운 애다. 그다음은 공부 잘하는 애지만 약은 애는 싫다. 차라리 우직하길 바란다. - P380
활발한 건 좋지만 되바라진 애 또한 싫다. - P380
특히 교육은 따로 못 시켰지만 애들이 자라면서 자연히 음악·미술·문학 같은 걸 이해하고 거기 깊은 애정을 가져 주었으면 한다. - P381
커서 만일 부자가 되더라도 자기가 속한 사회의 일반적인 수준에 자기 생활을 조화시킬 양식을 가진 사람이 되기를. 부자가 못 되더라도 검소한 생활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되 인색하지는 않기를. 아는 것이 많되 아는 것이 코끝에 걸려 있지 않고 내부에 안정되어 있기를. 무던하기를. 멋쟁이이기를. - P381
대강 이런 것들이 내가 내 아이들에게 바라는 사람 됨됨이다. 그렇지만 이런 까다로운 주문을 아이들에게 말로 한 일은 전연 없고 앞으로도 할 것 같지 않다. - P381
다만 깊이 사랑하는 모자 모녀끼리의 눈치로, 어느 날 내가 문득 길에서 어느 여인이 안고 가는 들국화 비슷한 홑겹의 가련한 보랏빛 국화를 속으로 몹시 탐내다가 집으로 돌아와 본즉 바로 내 딸이 엄마를 드리고 샀다면서 똑같은 꽃을 내 방에 꽂아 놓고 나를 기다려 주었듯이 그런 신비한 소망의 닮음, 소망의 냄새 맡기로 내 애들이 그렇게 자라 주기를 바랄 뿐이다. - P381
나는 별로 낮에 글을 써 보지 못했다. - P3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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