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 포스팅의 마지막 부분에서 안도 다다오의 ‘바람의 교회‘ 라는 건축물을 살펴봤었는데 오늘은 저자가 그 건축물을 감상하며 생각했던 것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면서 시작한다. 이와 관련해 추가로 사견을 살짝 보태자면, 솔직히 글만 읽으면 좀 덜 느껴질수도 있지만 책에 나온 사진과 함께 비교해가면서 읽다보면 어떤 말인지 좀 더 실감나게 느껴질 것이다. 이미지와 글의 바람직한 조화가 있다면 바로 이 책에 나온 ‘바람의 교회‘ 에 관한 부분이 아닐까 조심스레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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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는 챕터를 바꿔서 ‘학문 간 이종 교배의 시대‘라는 제목의 글이 나온다. 앞선 챕터까지 지리적, 문화적 이종 교배가 쭉 이어져오다가 각종 교통수단의 발달과 지구촌 시대의 시작으로 인해 더 이상 이질적인 것들을 흡수하는 것이 어려워지자 이제는 다른 학문 분야로 눈을 돌리기 시작한 것이다. 맨 처음에는 철학부터 시작해서 이후에는 생물학, 컴퓨터공학, 재료공학, IT, 패션, 미술 등 다양한 분야와의 협업을 시도한다.

이러한 협업 중에서도 가장 최근에 활성화된 것이 바로 IT분야와의 협업인데, 저자는 이러한 협업으로 인해 작업의 효율성이 크게 개선된 것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반기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다양성이 소멸되어간다는 측면에서 우려하는 모습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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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이 책의 마지막 챕터인 9장까지 왔다. 9장의 제목은 ‘가상 신대륙의 시대‘ 인데 이것은 현실세계의 공간이 아닌 인터넷 상의 공간 같은 것을 지칭한다. 지구상에서 더 이상 새로운 물리적 공간을 찾는 것이 어려워지자 이제 사람들은 가상 공간을 탐험하기 시작한 것인데 이는 가장 최근에 유행하는 각종 SNS를 비롯한 사이트들을 통해 손쉽게 확인할 수 있다. 심지어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북플조차도 컴퓨터나 앱으로 접속해서 가상의 공간에 독서기록을 남기는 것이다. 어찌보면 현실에서 나타나는 물리적인 어떤 것은 없지만 분명히 우리들은 이것이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사용하며 살고 있다. 이외에도 증강현실같은 최신 기술들에 힘입어 어떤 전자장치를 착용하면 가상의 세계를 눈으로 체험해 볼 수 있는 등 과거에는 상상도 하기 힘들었던 일들이 지금 우리의 현실에 나와있다. 앞으로 또 어떤 기술들이 개발되어 우리의 현실세계를 또 얼마나 새로운 것들로 채워나갈지 감히 상상이 되지 않는다.

책을 읽다보면 본문에서도 비교적 최근에 사용되고 있는 각종 기술들에 대한 얘기들이 나온다. 보다보면 신기하다는 감탄과 함께 이런 것들을 잘 활용하면 우리들의 삶이 좀 더 윤택해질 수 있겠다는 기대감도 드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것들에 끊임없이 적응해나가지 못한다면 도태되기 쉽겠다는 생각도 들어서 약간의 두려움도 느껴진다. 적응하는 종만이 살아남는다는 진화론자 다윈의 말처럼 살아남기위해서 적응하는 수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어보인다.

이와 관련해서 본문에 저자가 언급한 내용 중에 ‘변하지 않는 것에 집중해야 살아남는다‘는 얘기가 있었는데, 저자의 전문분야인 건축에서는 그것이 바로 ‘재료‘였다. 이 재료의 속성을 잘 활용한 사례로 책에 소개된 건축물이 이토 도요도의 ‘윈드 타워‘ 다. 여기서 이 타워와 관련해 일일이 다 얘기하기는 힘들지만, 개인적으로 이 타워사례를 보면서 느꼈던 핵심 메시지는 변하지 않는 것의 근본 속성을 철저하게 분석하고 그 속성을 활용하고 응용한다면 얼마든지 멋진 결과물을 만들 수 있다는 점이었다.

분야를 막론하고 독자인 내가 느꼈던 이러한 핵심 메시지를 잘 생각해서 자신이 속한 분야에 적용한다면 최소한 그 분야에서 도태될 일은 없지 않을까 조심스레 예상해본다. 어쩌면 자신이 속한 분야의 대가로 인정받을지도 모를 일이다. 변치않는 근본에 집중하자는 이 메시지를 몸소 느끼게 된게 오늘 독서의 가장 큰 수확인 듯하다.

처음 진입로부터 마지막 예배당까지 자연과 건축물간의 관계는 계속해서 변화해 왔다. 처음에는 자연이 건축물을 감싸서 포함하는 관계, 두 번째인 복도 공간에서는 건축물이 자연을 포함하는 관계, 세 번째로 예배당 안에서 바라보는 장면에서는 예배당과 정원과 낮은 담장이 차례로 층을 두고서 서로 교합한 형태를 띠고 있다. 선형으로 된 동선을 따라 걸으면 그 안에서 건축물과 자연의 관계는 계속해서 변화한다. 건축물은 이렇듯 자연과 건축 간의 관계를 계속해서 전환시켜 주는 장치다. - P317

일본의 전통 정원 디자인에서 자연과 건축물 간의 관계성 변화는 주로 수평적인 이동에 의해서 창출된다. 진입로는 분절되어 있고, 비틀어져 있다. 반면 계단 같은 수직적인 이동은 변화하는 지형에 맞추기 위해서만 사용되어 왔다. 이런 전통 건축과 달리, 안도의 건축에서는 수직적인 이동을 더 적극적으로 도입했다. - P325

안도의 디자인은 일본 전통 건축의 2차원적인 ‘시간 죽이기‘ 기법에 3차원적인 수직적 변화를 첨가한 것이라 볼 수있다. ‘물의 교회‘에서 보면, 안도는 오르락내리락하는 계단을 단순히 지형에 순응하기 위해서가 아닌, 시간을 지연하고 파노라마 장면을 유도하기 위한 방편으로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다른 높이에서 다양한 장면을 연출할 수 있었다. - P325

토목기사들은 다양한 위치와 높이에서 측량하여 객관적 데이터를 수집하고, 이렇게 축적된 데이터들을 이용해서 좀 더 정확한 지형도를 그려 낸다. 안도는 방문객의 눈을 측량기로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그에게 있어서 방문객의 이동 경로는 측량 기사가 땅을 측량하기 위해 다니는 동선과 같다. - P325

안도 건축에서 계단은 단순한 수직 이동 기능 그 이상이다. 계단은 수직 이동 외에 수평 이동도 유도한다. 일반적으로 계단의 디디는 면 깊이는 28센티미터고 한 단의 높이는 17센티미터 정도이며, 이 모듈러는 반복된다. 따라서 계단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수평·수직적인 이동을 몸으로 감지하게 되고, 계단 진입 전과 후에 다르게 보이는 장면을 통해서 좀 더 객관적인 공간감을 구축할 수 있게 된다. 안도의 건축에서 계단의 개수는 토목 측량 기사가 사용하는 자의 눈금이라고 보면 된다. - P326

안도 다다오의 건축은 오브제를 만드는 데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그의 건축은 자연과 건축의 입체적 구성을 만드는데 초점을 둔다. 그러기 위해서 안도는 그의 건축물의 내외부에 복잡한 경로를 만들어 놓는다. 이 복잡한 경로를 따라 걸으면서 방문객들은 자연과 건축의 다양한 관계를 보여 주는 다양한 장면을 감상하게 된다. 본인들의 신체를 사용하여 이동하며 얻은 장면을 수집하면서 방문객들은 머릿속에 전체적 공간을 구축하게 된다. 안도의 건축에서 방문객의 신체는 측량 기구고, 건축물은 신체라는 측량 기구를 이동시키는 장치로서 역할을 하게 된다. - P326

픽처레스크 조경 디자인과 안도의 건축이 비슷한 것은 동일하게 ‘1인칭 시점의 다양한 관계 변화의 경험‘을 중요하게 여기는 동양의 문화 유전자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 P326

하지만 동양 전통 건축의 내외부를 흐르는 듯한 유동적 공간과 달리, 안도의 건축 공간은 벽에 의해서 명확히 구분된 성격을 가지고 있다. - P328

포스트모더니즘이란 ‘...후, 다음‘을 뜻하는 post와 모더니즘을 합성한 단어로, 직역하면 ‘모더니즘 이후‘라고 할 수 있는데, 흔히 ‘후기 모더니즘‘이라고 한다. 각 분야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은 각기 다르게 해석된다. 예를 들어서 영화나 소설에서는 기존의 이야기 틀을 깨는 것을 말한다. 전통적인 이야기는 항상 과거-현재-미래로 이어지는 시간의 흐름을 따라서 전개되는데, 포스트모더니즘 이야기는 그 순서를 깨뜨린다. - P334

또 다른 특징은 관객과 배우 간의 무언의 계약을 깨뜨리는 것이다. 영화나 연극은 허구임을 관객이 알면서도 속아 주는 계약이 성립되어 있다. 그래서 배우들은 카메라 앞에서 가짜지만 진짜인 것처럼 연기를 하고, 관객은 가짜 연기를 진짜인 것처럼 받아들이며 이야기에 몰입한다. 그런데 포스트모더니즘 영화에서는 갑작스럽게 카메라가 뒤로 빠지면서 배우와 촬영 스태프를 함께 보여 주며 ‘당신이 보는 것은 허구입니다‘라는 식으로 관객의 환상을 일부러 깨뜨리기도 한다. - P334

그런데 다른 장르와는 다르게 건축에서의 포스트모더니즘은 현대식 건축물을 만들 때 고전 건축물을 흉내 내서 디자인하는 현상을 말한다. 예를 들어서 뉴욕의 37층짜리 고층 건물을 디자인할 때 ‘파르테논 신전‘의 입면을 흉내 내서 디자인하는 것 같은 현상을 말한다. - P335

1970년대부터 건축은 다른 분야와 이종 교배를 시작하면서 혁신의 돌파구를 찾기 시작했다. ‘다른 학문 분야‘라는 새로운 개척지를 찾은것이다. 첫 번째 시도는 ‘해체주의‘다. 해체주의 건축가들은 철학이라는 장르를 건축 설계 프로세스에 적극 도입했다. - P338

이제 발견해야 할 신대륙은 대서양 건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대학 캠퍼스 내 다른 단과대학 건물이었다. 다른 학문 간의 소통을 가로막는 벽에 구멍을 뚫어서 문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가장 먼저 해낸 분야는 건축이었다. 전통적으로 새로움이 가장 늦게 적용되는 분야가 건축인데 타 분야와의 융합을 가장 먼저 시작하게 된 이유는 뭘까. 아마도 건축이 가장 많은 돈이 들어가는 일이고 너무 많은 사람이 연관된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재료에 관해서는 재료공학과와 연관되어 있고, 공사비는 금융업계와 연관되어 있고, 전자공학과에서 만든 스마트폰의 발달은 도시 공간 구조의 변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 P339

현대 사회에서 건축만큼 다양한 전공 분야에 걸쳐서 연관된 곳도 없는 듯하다. 과거의 약점이 오늘날에는 장점이 되었다. 현시대에 르네상스맨과 가장 비슷한 직업은 건축가일 것이다. 이렇게 건축가들은 철학을 건축 디자인에 적용하는 새로운 접목을 시도하여 새로운 형태를 만들었다. - P339

하지만 관념이 실재를 이끌면 산으로 가는 경우가 많다. 해체주의의 대표적인 건축가 피터 아이젠만 Peter Eisenman (1932~)의 경우 주택 설계를 했는데 안방 침실의 방 가운데가 갈라져서 침대가 둘로 나뉜 디자인을 하여 부부가 같은 침대에서 잘 수 없거나, 건물의 모양이 필요 이상으로 기괴하게 복잡해서 복잡한 모양 틈새로 방수가 제대로 안 돼서 시공 후 비가 새는 일이 많은 건물이 만들어졌다. 심지어 어떤 계단은 올라가도 막혀 있는 ‘철학적 개념이 있는‘ 계단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 P339

해체주의 디자인은 인간이 중심에 있는 인문학에 근거해서 디자인되었지만 정작 그렇게 디자인된 건물에서는 역설적이게도 인간이 소외되는 일이 생겨났다. 애당초 근본적으로 해체하려는 해체주의 철학과 무언가를 계속 구축해야 하는 건축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이렇듯 해체주의 건축이 기능적으로 말이 안 되는 경우가 많자, 해체주의는 기능과 실용이라는 시험을 견디지 못하고 한때의 유행으로 그치게 되었다. - P341

하지만 이미 시작된 타 장르와의 교류는 더 활발해져서 건축가들은 지난 십여 년간 생물학, 컴퓨터공학, 재료공학, IT, 패션, 미술 등 각종 분야와의 협업 혹은 도움을 주고 받으면서 새로운 건축을 만들어 내고 있다. 그중에서도 IT기술과의 접목을 통해서 새로운 형태의 건축을 만들 수 있게 된 것이 가장 큰 발전이다. - P341

IT와 건축의 접목을 성공시킨 건축가는 아이러니하게도 실패한 해체주의 건축의 상징 같은 건축가 피터 아이젠만이었다. 그는 건축과 철학을 결혼시키는 데는 실패했지만, 건축과 컴퓨터를 결혼시키는 데는 성공했다. - P342

아이젠만의 건축 디자인 스타일은 소프트웨어의 발전과 함께 진화했는데, ‘마야 Maya‘나 ‘라이노 Rhino‘같이 곡선을 자유롭게 모델링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개발된 후부터 그의 건축 디자인 형태도 자유 곡선형의 작품들이 대세를 이루게 되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의 파격적인 디자인은 시공 기술이 받쳐 주지 못했기 때문에 제대로 지어진 건축물이 거의 없다. - P344

컴퓨터 모델링상의 멋진 모습을 실제 현실로 재현하는 데 성공한 사람은 캐나다 건축가인 프랭크 게리 Frank Gehry (1929~)다. 그는 자동차나 비행기를 제작하는 기술을 도입해, 컴퓨터 안에서 그려진 형태를 그대로 재현하는 데 성공한다. - P345

게리는 항공, 조선, 자동차 산업에서 사용하던 기술을 건축에 처음으로 적용한 사람으로서 의미가 크다. - P345

20세기까지는 사람의 머릿속에 있는 상상력을 컴퓨터로 표현하는 시대였다면 21세기 들어서는 컴퓨터의 상상력을 빌리려는 노력이 진행중이다. 그런 시도를 파라메트릭 Parametric건축이라고 부른다. 파라메트릭이란 굳이 번역하자면 수학에서 ‘매개 방정식‘의 ‘매개‘에 해당하는 단어다. 매개라는 단어를 국어사전을 살펴보면, ‘둘 사이에서 양편의 관계를 맺어 줌‘이라고 나와 있다. 한마디로 파라메트릭 건축은 건축가가 종이에 스케치를 하듯이 최종 결과물을 직접 조절하는 것이 아니라, 디자이너와 최종 결과물 사이에 숫자 같은 매개 변수를 조정해서 예상하지 못한 최종 형태를 만들어 내는 디자인이라고 할 수 있다. - P348

복잡한 형태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규칙이 전혀 없는 불규칙의 복잡함이다. 프랭크 게리의 작품이 대표적인 예다. 게리는 디자인할 때 종이를 구겨서 던지고 맘에 드는 종이를 주워서 3D스캐너를 통해 형태를 컴퓨터 데이터화시킨다. 이런 형태는 완전 무작위한 복잡함이다. - P348

이와는 달리 복잡해 보이는데 수학적 규칙이 있는 경우가 있다. 과학에서 말하는 카오스 이론의 내용과 일맥상통한다. 날씨나 자연계 속의 디자인은 너무 복잡해서 불규칙해 보인다. 하지만 이런 자연계의 불규칙은 실은 아주 단순한 수학적 공식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거라는 생각이 카오스 이론이다. - P348

파라메트릭 건축 디자인은 후자에 속한다. 이들은 알고리즘을 통해서 복잡하면서도 아름다운 모양을 만들려고 한다. 컴퓨터와 프로그램을 이용하지만 엄밀하게 말해서는 수학적 규칙을 가진 형태를 추구하는 서양 전통 건축 디자인과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파라메트릭 디자인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숫자를 입력해서 만든 디자인이라고 할 수 있다. - P349

파라메트릭 디자인 프로세스 중에서 컴퓨터에 의해서 연산되는 과정에는 알고리즘이라고 하는 수학적인 개념이 접목되는데, 이 알고리즘을 기계공학자들이 만든 알고리즘을 사용하느냐, 유전공학자가 개발한 알고리즘을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다른 결과물이 나오게 된다. - P349

통상적으로 많은 경우에 건축에서는 유전공학자 또는 생물학자들이 만든 알고리즘을 사용한다고 한다. 그 이유는 건축을 디자인하는 프로세스가 생물학의 진화 과정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건축디자인의 프로세스를 살펴보면, 초기에 개념을 가지고 계획안을 만들고, 그중에서 몇 개 좋은 것을 선택하고 나머지는 버린 후 다음 단계로 넘어가서 몇 가지 계획안을 다시 만들고, 때로는 돌연변이가 나오기도하고, 그중에서 우성을 선택하여 다음 세대로 넘어가서 또 다시 발전시켜 나가게 되는데, 이렇게 여러 세대를 거치면서 우성 선택의 과정과 돌연변이가 발생하는 과정이 생물 진화의 패턴과 흡사하기 때문이다. - P349

문제는 건축 디자인이라는 것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인간이 행할 수 있는 가장 복잡한 이슈들을 다루고 반영해야 하는 것인데, 이러한 요소들은 컴퓨터가 수행할 수 있는 ‘숫자‘로 정량화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따라서 아직까지 파라메트릭 디자인은 건축의 입면 디자인 같은 표면적이고 장식적인 디자인을 만들 때 사용하고 있다. - P350

문화인류학적으로 한 언어를 사용하는 문화권은 서로 비슷한 생각과 공감대를 공유하게 되는데, 이와 유사하게 같은 컴퓨터 언어, 즉 같은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을 사용하는 디자이너들의 생각과 결과물들은 서로 비슷하게 나올 수밖에 없다. - P356

컴퓨터를 이용한 작업의 효율성이 높아진 점은 장점이다. 하지만 이로 인해서 ‘다양성의 소멸‘이라는 치명적인 결함을 갖게 된 것도 사실이다. - P356

기술에만 의존하는 창조는 시간이 지날수록 다양성이 사라진다. 우리는 그런 현상을 20세기 중반 국제주의 양식에서 경험했다. 기술이 이끄는 획일화를 어떠한 방식으로 피하느냐가 이 시대의 중요한 화두다. - P356

기술로 인한 획일화를 피하기 위해 일부 사람들은 사람의 신체에 집중하기도 하고 일부는 재료에 집중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몸과 재료는 현실 세계에서 없어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 P357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변화하지 않는 것을 찾는 것이다. 아무리 세상이 변해도 인간은 몸을 가지고 있을 것이고, 앞으로도 오랫동안 우리의 유전자에 각인된 짝짓기 본능이나 관음증 같은 가장 원초적인 본능은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한 본능은 수십만 년이라는 긴 시간에 걸쳐서 진화해 온 것들이기 때문에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 P357

건축에서 가장 변화하지 않는 것은 ‘중력‘이라는 법칙이다. 많은 건축이 다양한 디자인을 하지만 태초부터 바뀌지 않는 건축의 본질은 중력과 싸워야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현대 건축에서는 구조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형태의 건축물이 디자인되기도 한다. 구조적으로 파격적인 디자인은 본능적으로도 파격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에 항상 감동을 준다. 그래서 예나 지금이나 랜드마크 건물은 구조적으로 만들기 어려운 건축물들이었다. 이런 현상은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다. - P357

프랭크 게리 같은 자유로운 디자인을 하는 건축가나 파라메트릭 디자이너들은 공학자들이 만들어 놓은 컴퓨터를 단순 도구로 사용하여 디자인을 발전시키거나 제작하는 사람이라면, 좀 더 깊이 있게 디자이너의 머릿속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연구 분야를 ‘쉐입 그래머‘라고 한다. - P360

쉐입 그래머학자들은 한 발짝 나아가 우리의 머릿속을 파고들어 설명한다. 그들이 말하는 바로는 사람들이 디자인을 발전시킬때에는 ‘문법 Grammar‘이라는 것이 있다고 말하는데, 그것이 그 사람의 쉐입 그래머라는 것이다. - P360

한 사람이 어떤 건축물을 디자인할 때는 한 가지 형태에서 계속해서 변화되어 나가기 마련인데, 그 변화의 단계 단계가 그 사람 고유의 쉐입 그래머에 의해서 진행되어 나간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 형태 변환 문법인 그래머를 알아낸다면 디자인 프로세스를 인간 대신, 컴퓨터가 할 수 있다는 것이 쉐입 그래머 연구자들의 설명이다. - P361

한 명의 건축가가 몇 달 걸릴 수백 개의 계획안 작업을 컴퓨터가 대신 몇 분 만에 만들어 주고, 그중에 몇 개를 선택한 후 그것을 컴퓨터가 다시 수백 개의 계획안으로 만들어 주면서 일종의 디자인 파트너와 같은 방식으로 인간과 컴퓨터가 협업하는 날이 올 것이다. 이런 날은 아직 오지 않았지만, 그 전 단계로 지금의 설계 사무소에서는 젊은 직원들이 디자인할 때 핀터레스트Pinterest웹사이트를 이용해서 디자인한다. - P361

핀터레스트는 내가 좋아하는 사진을 선택하면 핀터레스트의 인공지능이 그와 비슷한 사진을 골라서 추천해 주는 웹사이트(앱)이다. 과거에는 계단을 설계할 때 콘셉트를 고민하고 난간을 어떻게 할지 며칠을 고민했다. 그런데 요즘 젊은이들은 계단을 설계할 때 핀터레스트에 ‘계단‘을 치고 사진을 고르면 컴퓨터가 그와 비슷한 스타일의 계단을 수십 수백 개 더 골라서 보여 준다. 디자이너는 그 안에서 마음에 드는 사진을 골라서 더 발전시킨다. 그렇게 함으로써 완전히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보다 훨씬 빨리,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다. 조금은 원시적인 방식이지만 이미 디자인 분야에서 인공지능과의 협업이 시작된 것이다. - P363

형태는 더 이상 차별이 되지 못한다. 마치 자동차가 나오기 직전에 마차 디자인에서 더 이상 새로운 디자인을 만들기 어려웠던 것과 마찬가지다. 지금은 건축을 뛰어넘어 새롭게 바뀐 세상에 적합한 도시의 모습은 무엇일까를 고민하는 시대가 되었다. - P363

콜럼버스의 업적은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보다는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을 두 달 만에 연결시켰다는 ‘공간의 압축‘에 있다. 이 사건은 식민지 시대를 열었고, 문화적 융합에 가속을 가져왔다. 그런데 19세기 말이 되자 문제가 생겼다. 인간은 계속 무언가를 탐험할 곳이 필요한데, 사실 당시의 교통수단으로 갈 만한 곳은 다 가 버려서 갈 곳이 없어졌다. - P367

탐험할 ‘공간‘이 필요했던 인간의 눈은 두 방향으로 향했다. 하나는 ‘안쪽‘으로 하나는 ‘바깥쪽‘으로. 안쪽으로 향한 것이 인간의 마음을 연구하는 심리학의 발전이다. 1856년 오스트리아 태생의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를 필두로 하여 인간의 내면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었고 ‘무의식의 세상‘이라는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20세기에 교통수단이 조금 더 발달하자 우리는 우주로 향했다. 그 정점은 케네디 대통령의 인간을 달에 보내는 꿈이 실현될 때였다. 그 이후 보이저도 띄웠지만 50년 동안 우리 인간은 달나라 밖으로는 전혀 나가지 못하고 있다. - P367

지리적인 발견이 더 이상 불가능한 시대가 되자 인간은 새로운 대륙을 만들었다. 새로운 대륙은 현실 속 공간이 아닌 컴퓨터 네트워크 속 ‘가상의 공간‘이다. - P367

모니터상에서 정보를 얻는다는 점에서는 컴퓨터와 TV가 같아 보인다. 하지만 인터넷 가상공간이 TV와 다른 점은 TV처럼 일방적으로 정보를 받아들이는 공간이 아니라,
마우스 클릭을 통해서 개인이 만들어 가는 시공간이라는 점이다. 이것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사는 공간이다. - P368

인터넷 공간은 지구의 영토에 근거하고 있지 않다. 인터넷 공간은 반도체와 케이블과 전기만 있으면 만들어지는 공간이다. 전통적인 국토와 선거법 등으로 만들어진 국가라는 기관이 인터넷 가상공간상의 다국적 기업을 제어하기는 힘들어 보인다. 이 시대의 다국적 기업은 국가의 권위를 뛰어넘었다. - P368

이제 문제는 누가 그 공간에 가서 새로운 창조적 생각을 만들어 낼 수 있느냐다. 과거 아메리카 신대륙에는 범선을 탄 사람들만 갈 수 있었다면 새롭게 만들어진 신대륙에는 디지털과 융합한 자들만이 갈 수가 있다. 그 융합의 기반이 되는 플랫폼은 디지털 세상인 가상공간이다. 융합의 플랫폼이 실제 공간이 아닌 가상공간이 주 무대가 되는 이유는 간단하다. 가상공간이 가격이 싸고 무한하기 때문이다. - P369

이제는 현대인의 일상이 되어 버린 ‘디지털 정보‘와 ‘현실‘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현상을 처음으로 보여 준 창작자는 백남준이다. TV 모니터로 사람 모양을 만든 백남준의 작품을 보면 형태적으로는 인간을 상상하지만, 모니터 안의 동영상에 집중하는 순간 사람의 모양은 사라지게 된다. - P371

고전의 조각품은 대리석 덩어리를 아름다운 모양과 황금비율로 잘라 내서 만들어진다.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이 대표적이다. 이와는 다르게 여러 대의 모니터로 만들어진 백남준의 조각상은 동영상이 돌아가는 순간 물성이 사라지고 모니터 안의 이미지 정보만 남게 된다. ‘물질의 비물질화de-materialization‘가 되는 것이다. - P371

이런 현상을 건축에 처음으로 적용한 작품은 1991년도에 만들어진 이토 도요오의 ‘윈드 타워 Tower of Winds‘다. - P371

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이라는 자연을 테크놀로지의 힘을 빌어서 형형색색 다른 시각적인 정보로 변환시켜서 보여 주는 장치를 만든 것이다. 이는 건축적으로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진다. 먼저 타공철판이라는 재료의 특성을 잘 이해하고 여기에 현대 조명 기술을 접목함으로써, 건축물 자체가 하나의 물질성으로 고정돼 있지 않고 빛의 연출에 의해서 존재 자체가 있었다가 없었다가 시시각각 바뀌는 ‘정보‘가 된 것이다. 한마디로 건축물의 존재를 전원으로 켜고 끌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로써 건축적으로는 현실과 비현실, 혹은 가상과 실제사이를 넘나드는 건축이 만들어졌다고 말할 수 있다. 이는 생활의 많은 부분을 인터넷과 TV에 의존해 살아가면서 삶의 절반은 실제 공간에서 나머지 절반은 인터넷 가상공간에서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의 문화적 패러다임을 잘 반영하는 건축 디자인이라 하겠다. - P3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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