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 포스팅에서 에어로빅의 양면성에 대한 저자의 생각을 잠깐 언급했었는데 오늘은 이에 관한 추가적인 얘기들로 시작한다.

p.231에 두번째 밑줄친 문장에서 저자는 에어로빅이 체력증진에는 도움이 될 지 몰라도 비디오를 보고 강사의 동작을 따라해야 하는 행위로 인해 은연중에 수동성과 복종이라는 부정적인 느낌이라고 인식되는 것들을 사람들의 의식속에 심어넣고 있다는 뼈있는 말을 한다.

일반적인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별다른 자각없이 수용하게 되는 지점에서 저자는 마치 예리한 검처럼 그 사이를 파고든다. 저자의 날카로운 시각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이었다. 어떤 속박이나 굴레, 책임감으로부터 자유롭고 싶다는 동기에서 비롯된 이러한 생각들이 뭔가 진보적이고 현대적이고 세련되게 보인다.

다만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들었다. 과연 이 세상에 속박이나 굴레같은 게 정말 하나도 없는 곳이 있기는 한 걸까? 학생때는 학교라는 곳에 자신이 원하든 원치않든 속박되어 있고, 성인이 되고 사회에 나와서는 돈을 벌어야 하기에 취업을 하든 아니면 자기 사업을 하든 일에 속박되어 있고, 또한 그 속박된 집단이나 조직 안에 있는 사람들간의 관계 속에 이리저리 얼키고 설켜있는 것이 모두 다 속박이고 굴레가 아닌가 싶다. 심지어 이러한 속박에서 벗어나고자 무슨 경제적 자유니 뭐니하는 것들을 추구하기 위해서도 그 과정 속에서 끊임없이 공부하고 생각하는 시간들을 가져야하는 등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우리가 이 사회를 살아가기 위해서 어떤 속박과 굴레가 과연 하나도 없는 곳이 있냐는 말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그런 곳이 과연 있는지 잘 모르겠다.

그리고 꼭 눈에 보이는 외적인 것들만이 아니라 눈에 보이진 않지만 분명히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수많은 편견들과 고정관념 같은 것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누구나 어느정도씩은 다들 겪고 있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다만 나이나 성별에 따라 겪게되는 어떤 부당하다고 생각되는 것들의 종류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혹자는 내가 너무 이 문제에 대해 가볍게 생각하는 게 아니냐고 비판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느정도의 부당함은 늘 사회에 존재해왔고 지금도 있으며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다만 그러한 부당함을 조금씩 개선시켜 나가고자 하는 분들의 노력은 그 자체로 존중한다. 사회가 전쟁터라는 말이 있듯이 전쟁터에서는 언제나 부당한 일들이 발생한다. 이것을 막기 위해선 힘이 있어야 한다. 그 힘은 단순하게 물리적인 힘인 무력일 수도 있고 때론 경제력일 수도 있으며 혹은 어떤 정치권력일 수도 있고 어떤 분야의 지식이 될 수도 있다고 본다.

속박이나 굴레의 종류를 불문하고 자신이 기를 수 있는 힘을 기르는게 그나마 어떤 속박이나 굴레로부터 진정으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라면 방법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근데 이 힘을 기르는 과정마저도 속박이나 굴레라고 느낀다면 뭐 딱히 할 말은 없다. 글을 쓰다보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타인을 설득하는 것도 내 자신의 머리를 스스로 속박하고 쥐어 짜내서 해야되는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귀에 걸면 귀걸이고 코에 걸면 코걸이라는 말처럼 그냥 자신이 속박이나 굴레라고 생각하면 그것이 속박이나 굴레가 되는 것이고, 다른 사람들이 속박이나 굴레라고 생각하든 말든 나 자신이 그렇게 느끼지 않는다면 그것은 속박이나 굴레가 아니게 되는 건 아닐까? 결국 인생이든 뭐든 다 자기가 생각하기 나름이라는 결론에 이른 것 같다. 앞서 무슨 주저리주저리 말들이 많았지만 결론은 언제나 단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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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본문으로 돌아와서 이어지는 글은 ‘뚱뚱해도 즐겁게‘ 라는 제목의 글이다. 여기에는 버가드와 캔티-레트섬 이라는 두 명의 핵심 인물이 등장한다. 이들은 기존에 날씬하고 맵시있는 몸매를 추구하는 움직임에 반해 상대적으로 몸집이 크고 뚱뚱하다고 여겨지는 여성들이 살을 반드시 빼야한다는 속박과 굴레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존중하면서 즐겁게 운동하는 것을 추구하는 에어로빅 프로그램을 별도로 만들었다. 이를 틍해 몸집이 좀 크고 뚱뚱한 사람들이 사회에서 이상적이라고 규정해놓은 몸매를 보면서 운동에 대한 좌절감을 느끼기보다는 오히려 자신들의 있는 모습 그대로 운동 자체를 즐기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이 부분에서 저자도 특별히 진한 글씨로 써놓은 문장이 있었는데 다시 한 번 적어보겠다.

몸은 규격화될 수 없다. 살은 언제나 저항한다. (p.244)

본문에 여러가지 도전적이고 혁신적인 메시지들이 등장하지만, 바로 위에 적은 문장이 가장 임팩트있는 핵심을 담고 있는 문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회에서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몸과 나의 몸이 가급적 비슷할수록 좋을 수 있겠지만, 설사 그렇지 못하더라도 자신의 있는 모습을 그대로 인정하고 그 자체를 즐길줄 아는 사람이 진정 멋진 사람이 아닐까?

이는 앞서 언급한 사회적 속박이나 굴레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세상이 나를 어떻게 보든 관계없이 내가 내 삶에, 내 몸에 당당하면 그만인 것이다. 괜히 사회가 규정한 특정한 기준에 나 자신을 억지로 맞추려 하다보면 행복함을 느끼기는 다소 힘들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라도 나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어딜 가든 당당하게 말하고 행동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남을 의식하고 눈치보는 삶이 무조건 나쁘다고는 할 순 없지만 적어도 나의 행복을 온전히 추구하는데는 방해물로 작용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든다. 무엇을 하든 당당하고 자신있게 살아가자! 그게 우리의 행복을 증진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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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이어 챕터를 바꿔서 6장에서는 ‘아이콘‘ 이라는 제목이 붙었다. 이는 엉덩이와 관련된 유명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다뤘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한다.

이 6장에서 가장 먼저 소개되는 인물은 바로 ‘케이트 모스‘라는 사람이다. 90년대에 다양한 브랜드의 모델로 왕성하게 활동했다고 하는데 개인적으로는 이 쪽 분야에 둔감한 편이라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책을 읽으면서 인터넷에 케이트 모스와 관련된 내용들을 검색해봤는데 꽤나 유명한 인물인듯 보였다.

케이트 모스는 비교적 마른 체형의 모델이었고 엉덩이도 작은 편이었다고 한다. 90년대 당시 최고의 인기 브랜드 중 하나였던 켈빈 클라인은 케이트 모스가 자신들이 추구하는 이미지에 부합한다는 판단하에 그를 전격 캐스팅하여 대중들에게 선망받는 브랜드로 독보적인 지위를 유지했다고 한다. 모델인 케이트 모스가 표출해내는 이미지는 책의 앞선 내용에서 언급하기도 했었던 저항과 반항의 색깔을 가지고 있다고 많은 대중들에게 느껴졌는데, 이로 인해 일부 보수적인 단체들에서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기성세대의 우려 따위는 과감하게 거부해버리는 자녀 세대들로 인해 케이트 모스에 대한 선호도는 쭉 이어졌다고 한다.

하지만 이 파트의 끝부분에서 저자는 케이트 모스 같은 체형에 대한 선호가 조금씩 변하고 있다는 뉘앙스로 말을 하는데, 뒤이어 나오는 인물은 ‘서 믹스어랏‘이다.

서 믹스어랏도 개인적으로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는데 본문에 나오는 내용을 읽다보니 이 사람의 대표곡인 ‘베이비 갓 백‘ 이라는 노래가 약 20년 전에 우리나라 코미디 프로그램이었던 ‘웃찾사‘ 속에 있는 나몰라 패밀리 라는 팀에서 등장곡으로 사용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 내용은 책에 직접적으로 나온 건 아니고,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정말 우연히 알게 된 사실이었다. 당시 그 코미디 프로그램도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굉장히 인기를 끌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는데, 책을 읽다가 그 코미디 프로그램의 코너와 연계해서 생각해보니 본문의 내용이 좀 더 와닿게 느껴졌다.

서 믹스어랏은 랩을 하는 가수인데 그의 말에 따르면 당시 자신의 여자친구가 엉덩이가 크다는 이유로 사람들로부터 온갖 차별과 멸시 비슷한 것들을 당했었다고 한다. 위에서 케이트 모스에 대한 얘기를 잠깐 했었지만 90년대 당시에는 작은 엉덩이가 선호되던 시절이라 큰 엉덩이를 가진 여성들은 상대적으로 열등하고 좋지 않게 여겨졌다고 한다. 이러한 시대 속에서 차별받던 자신의 여자친구를 위해 서 믹스어랏은 ‘베이비 갓 백‘ 이라는 노래를 만들었다고 한다. 자신은 작은 엉덩이보다 큰 엉덩이를 가진 여성이 더 섹시하다고 느낀다는 내용의 가사들이 나오는 노래였다.

이 노래와 관련하여 많은 에피소드들이 본문에 나오는데, 바로 위에서 언급했던 어떤 순수한 의도와는 달리 일반 사람들은 이 노래의 뮤직비디오에 여성의 특정 신체부위(엉덩이)만 부각되어 나온다는 이유로 방송부적격 판정을 받기도 하고, 이외에도 수많은 오해들을 받았던 얘기들이 나온다.

독자인 나는 이러한 다양한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다른 사람들의 시선과는 관계없이 나 스스로에게 당당하고 떳떳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다시금 느낄 수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유행이라는 게 일정한 순환주기가 있다는 생각도 해보게 되었다.

서 믹스어랏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수많은 오해를 받았음에도 자신이 처음에 가졌던 어떤 순수한 동기에 대한 초심을 잃지 않고 꿋꿋하게 자신의 뜻을 관철시켜나갔다는 점이 참 멋있게 느껴졌다. 어떤 성별을 떠나서 이러한 모습은 누구든지 배울만한 태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이 책의 처음에는 엉덩이가 큰 여성들이 선호되는 흐름을 보이다가 이후 코코 샤넬의 등장과 함께 일명 ‘플래퍼‘라고 지칭하는 마른 여성들의 스타일이 선호되는 시대로 변화한다. 그리고 케이트 모스라는 인물이 그 시대의 절정을 찍은 뒤 다시 서 믹스어랏이라는 사람에 의해 마른 체형보다 엉덩이가 큰 체형이 선호되는 식의 유행을 선도하는 일련의 순환과정을 바라보며 사람들의 선호가 시대에 따라 주기적으로 바뀌는 것을 몸소 느낄 수 있었다.

우리가 종종 하는 말 중에 ‘유행이라는 건 결국 돌고 돈다‘는 말이 있는데 그 말이 어떤 느낌인지 오늘 독서를 통해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일단 오늘 밑줄친 내용과 관련된 얘기는 이 정도로 하고 다음 포스팅에서 관련 내용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이어가보도록 하겠다.

<제인 폰다의 워크아웃>과 <번즈 오브 스틸>은 무용 비디오가 아니다. 예술적 해석이나 자기표현의 기술을 가르치지 않는다. 비디오를 보고 운동하는 사람은 다른 누군가를 닮기 위해 그 누군가를 한 박자씩 성실하게 따라 한다. 에어로빅은 대체로 고분고분한 운동이다. - P231

에어로빅을 하는 사람은 작은 직사각형을 그리는 매트에 머물면서 강사가 시키는 동작을 그대로 따라한다. 이런 식으로 에어로빅은 결국 순종과 획일성에 보상을 주고 힘을 실어준다. 체력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될지는 몰라도 수동성과 복종을, 여성에 관한 가장 오래되고 해로운 수사를 덩달아 가르친다. - P231

에어로빅 열풍은 건강의 새로운 방식뿐 아니라 여성성의 새로운 방식마저 만들어냈다. 80년대에 적절한 여자가 되기 위해선 제인 폰다나 타밀리 웹 같은 외모를 지녀야했다. 폰다나 웹 같은 몸매는 죽었다 깨나도 얻지 못할 여성들(날씬하지도 강하지도 않고 백인도 이성애자도 아닌 여성들)에게, 피트니스 혁명은 또 하나의 달성 불가능하며 억압적인 이상을 만들어냈을 뿐이다. 에어로빅 운동의 이상을 쟁취하는건 실로 많은 이에게 불가능했다. - P231

아무리 노력해봤자 강철 엉덩이를 만들 수 없다는 걸 일찍이 알아차린 몇몇 여성들이 있었다. 그들은 에어로빅이 줄 수 있는 다른 것들에서 즐거움을 누릴 방법을 찾아냈다. - P231

"당신네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보고 싶어서요!" - P234

"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 거예요. 이게 나니까요. 나답게 해결할 겁니다." - P235

‘레드 로버(두 팀으로 나뉜 아이들이 손을 맞잡고 상대 팀 술래가 통과하지 못하게 막는 놀이-옮긴이)‘ - P236

버가드는 체중 감량을 위해 너무 큰 대가를 치렀다는걸 깨달았다. 어렸을 적 이후 처음으로 엉덩이를 만졌을 때 튀어나온 뼈를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야말로 그가 오랫동안 꿈꿔온 몸매의 증표였다. 하지만 음식을 깨작거리며 몇 달을 지내고 보니, 자기 몸과 분리된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 P237

"이런 생각이 들었죠.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대체 왜 이러고 있는 거야?‘" 버가드는 회상한다. 그는 많은 특권을 누리고 있었다. 하버드 대학에서 공부하고 있었고, 의미 있는 친구들과 지인들을 곁에 두고 있었다. 그가 인생에서 느끼는 성공과 힘은 거기서 나오지, 저울이 가리키는 숫자에서 나오지 않았었다. "커다란 깨달음이었어요.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이 게임에선 어차피 이길 수 없어. 이길 수 있는 다른 게임을 하자." - P237

1983년에 버가드는 어릴 적 거실에서 춤출 때 느낀 즐거움을 다른 뚱뚱한 여성들도 느끼도록 돕겠다는 사명을 안고 베이 지역으로 이사했다. 그리고 뜻이 맞는 지역 여성들 몇사람과 힘을 합쳐, 뚱뚱한 여성들을 위한 에어로빅 수업을 시작했다. 에어로빅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의 가능성을 확장할뿐만 아니라 에어로빅 자체의 목적을 근본부터 새로 상상하는 혁명적인 발상이었다. - P238

수업의 원칙은 단순했다. "뚱뚱하거나 체중이 많이 나간다고 해서 반드시 운동해야 하는 건 아닙니다. 운동을 전혀 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하지만 누구에게나 운동할 권리는 절대적으로 보장되어 있습니다." 그는 필요한 것과 원하는 것을 구별하는 게 핵심이었다고 설명한다. "뚱뚱한 사람들에게 운동은 벌과 속죄를 연상시킵니다. 그 연상관계를 뒤집어서, 운동이 인간의 기본적 권리라는 걸 알리고 싶었어요." - P238

버가드의 수업은 직접 짠 안무 운동과 자유 댄스와 근력운동을 신중하게 조합한 것으로서 매우 구체적인 수강생을 겨냥했다. "우리 수업은 체중 90킬로그램이 넘는 여성들만받는다고 홍보했어요. 자기 허벅지가 좀 굵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한 게 아닌 걸 분명히 해두고 싶었거든요. 체중에 대한 낙인을 자주 경험하는 사람들을 위한 공간을 만들려고 한 거예요" - P238

버가드가 훗날 팻 라이언스Pat Lyons와 함께 쓴, 몸집이 큰 여성을 위한 운동 지침서인 《대단한 몸매 Great Shape》에서 저자들은 비만이나 과체중이라는 단어보다 ‘크다‘거나 ‘뚱뚱하다‘라는 단어를 선택한 까닭을 설명한다. "‘뚱뚱하다‘라는 단어를, 가치판단이 들어가지 않는 중립적인 방식으로 사용하면서 그 의미를 정상화하고 안에 든 독소를 빼내려는 시도였죠." - P239

라이언스와 버가드는 《대단한 몸매》에 적었다. "우리가 알게 된 건, 체중 때문에 생겨났다고 생각하는 고통이 사실 움직임 없는 삶, 놀이 없는 삶, 심호흡과 열정 없는 삶에서 비롯한다는 것이다. 자, 보시라. 움직임, 놀이, 심호흡, 열정 모두 당장 우리 것이 될 수 있다!" 그들은 이어서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신체 활동이 그 자체로 목적이 될 수 있을까?" - P239

"우리에게 뭘 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건 우리의 몸이에요." 복잡한 기예보다 편안함을 우선시하는 그의 조언이었다. "수강생들이 자기가 안전한 공간에 있다는 걸 알아차렸으면 했어요. 하고 싶은 말은 뭐든 해도 괜찮았어요. 신음하고 투덜거려도 됐고요." - P241

"그중에 죽도록 날씬해지고 싶은 여성들은 거의 없었어요. ‘강철 엉덩이‘는 이번 생에 갖게 될 리 없는 사람들이었죠. 그들이 가진 비판 정신의 핵심이 바로 그거였어요. 이상은 거짓말이고, 모든 사람이 달성할 수는 없는거라고요." - P243

<번즈 오브 스틸>은 여성들에게 강한 엉덩이를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비디오 제목에 내포된 의미는 그 이상이다. 인간의 몸에 붙은 살의 한계를 초월하는 엉덩이를, 완벽하지 못하고 치욕스러우며 탈출 불가능한 우리의 신체로부터 엉덩이를 해방해주겠다는 것이다. 강철 엉덩이는 인간의 엉덩이가 아니다. 제조된 엉덩이, 규격화된 엉덩이다. 연마되고 완벽하게 다듬어진 엉덩이다. 그러나 우리가 거듭 확인하고 있듯, 몸은 규격화될 수 없다. 살은 언제나 저항한다. - P244

버가드와 캔티-레트섬 같은 여자들은 이런 저항에서 하나의 운동을 만들어냈다. 뚱뚱한 엉덩이가 게으름과 자기 통제의 부족으로 해석되는 세상에서, 뚱뚱한 에어로빅을 하는 여자들은 자기들도 건강하다고, 자기들도 자신을 통제할 수 있다고 증명했다. 게으른 지방질 엉덩이를 들고 일어나 움직이라고 말하는 깡패들에게 보란 듯 반기를 들었다. - P244

그들은 몸의 현실을 받아들였다. 몸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수용했다. 그리고 세상에 대고 말했다. 뚱뚱한 엉덩이는 즐거운 엉덩이이고, 건강한 엉덩이라고. 즐겁고 건강한 내 엉덩이에 당신들은 신경을 꺼달라고. - P244

버가드는 내게 설명한다. "내가 평생을 살면서 부린 모든 요술의 목적이 이거였어요. 즐거운 공간을 만들고, 그 즐거움을 세상에 전파해서 사람들에게 이해시키는 것이요. 이게 당신이 타고난 권리라고, 원하는 만큼 당신의 몸에서 즐거움을 느껴도 된다고 말하고 싶었어요." - P244

나 자신의 엉덩이를 제외하고 내가 1990년대에 제일 많이생각한 엉덩이는 아마 케이트 모스Kate Moss의 엉덩이였을 것이다. 대략 170센티미터의 신장으로 패션모델치고는 작은 축에 속했던 그의 몸에는 부족한 키를 보완하고도 남을 장점이 있었다. 깡마른 몸, 시크하고 중성적인 느낌 그리고 얼음처럼 싸늘하고 무관심한 분위기였다. - P247

뼈가 드러날 만큼 앙상하고 수척한 모스의 몸매와 어려 보이는 외모는 1990년대 미디어 지형에서 주류를 차지한 이상적 몸매의 전형이었다. 나 역시 그가 풍기는 저항과 보헤미안적 분위기의 강력한 조합을 어찌나 갈망했는지 모른다. 내 몸은 결코 그렇게 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그와 같은 몸을 지니면 내가 감히 닿을 수 없다고 느껴진 공간들에 받아들여질 것 같았다. 진정성, 어두운 매력 그리고 두말할 것 없이 로큰롤의 공간들에. - P248

내가 모스의 몸에서 그런 공간들을 연상한 건, 캘빈 클라인의 의도였다. 모스는 1991년에 디자이너 캘빈 클라인과 처음 광고를 찍었다. 상반신은 나체로 드러낸 채 헐렁한 푸른색 청바지를 입고 바닥에 앉은 그는 몸이 어찌나 말랐는지,
척추가 스테고사우루스의 삐죽삐죽한 척추판처럼 튀어나와있었다. 얼굴은 공허했고 표정은 수수께끼 같았으며 혼란스러울 정도로 어려 보였다. 이 광고로 모스는 ‘그런지‘ 룩을 상업화한 버전인 ‘헤로인 시크‘ 룩의 가장 두드러진 아이콘이 되었다. - P249

그런지 음악은 레이건이 정권을 잡고 있던 1980년대의 과잉 소비주의·보수 정치·기업 영향력·미국에서 노동계급과 중간계급의 기회를 극적으로 빼앗아간 경기 침체에 대한 저항 정신을 담아낸 장르로서, 불필요한 건 전부 내버린 날것의 느낌을 강조했다. - P249

패션으로서의 그런지 역시 같은 분위기를 담아냈다. 관습적 미의 기준을 거부하고 누더기에 가까운 중고 의류와 길고 더러운 머리칼, 수척하고 영양결핍인 신체와 같은 현실 노동계급의 거친 요소들을 미화시킨 것이다. 그런지 룩에서 지향하는 신체는 성별에 관계없이 중성적이고 비쩍 말랐으며, 뻔뻔하게도 약물 주사를 자주 연상시켰다. - P249

이런 미학을 추구한 예술가들은 부르주아적이고 상업적인 가치를 명시적으로 거부했지만 (적어도 처음엔 그래 보였지만) 그들에게 멸시받고 있던 기업들은 브룩 실즈와 크리스티 브링클리로 대표되는 "쭉쭉빵빵한" 글래머 여성들의 시대에서 벗어날 기회를 포착하고 조바심이 났다. - P249

"그런 여성들은 싫었어요. 왜, 있잖아요... 가슴이 큰 여성들이요." 캘빈 클라인이 2017년에 설명했다. "그런 여성들은 자기 몸을 부풀리죠. 인공 보형물 같은 걸 넣어서요. 그게 기분 나빴어요. 매력없고 건강하지 못하고 나쁜 메시지를 준다고 느끼거든요." - P249

사실 1980년대의 패션모델과 1990년대 클라인의 취향에 맞은 모델들의 몸은 잘 뜯어보면 별로 다르지 않다. 양쪽 다 눈에 띄게 훤칠하고 날씬했는데, 90년대에 새로 유행한 몸이 근육이 덜하고 전통적 여성미가 덜하다는 정도의 차이가 있었다. 클라인은 패션이 언제나 추구하는 것, 그러니까 참신함을 찾고 있었던 것뿐이었다. 그런지 룩과 케이트 모스의 몸에 그가 찾던 것이 있었다. - P250

물론 마르고 굴곡 없는 몸이 스타일리시한 저항과 함께 연상된 것은 이게 처음이 아니었다. 19세기 말에 병약하고 밋밋한 몸은 방랑주의와 저항문화와 관련되었는데, 그 전형으로 시인 랭보와 키츠를 꼽을 수 있다. - P250

("어릴 적 나는 몸무게가 45킬로그램 이상 나가는 사람은 서정 시인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낭만주의 시인이자 비평가 테오필 고티에 Théophile Gautier의 말이다.) - P250

1920년대의 플래퍼는 새로운 유형의 성적·정치적 자유를 주장하고 표현하고자 몸에서 여성적인 굴곡을 지웠다. 플래퍼룩을 탄생시킨 1920년대 경제 호황의 낙관주의는 수그러들었지만, 날씬하고 중성적인 여성을 저항과 동일시하는 상징은 계속 명맥을 이어나가 비트족 · 히피 · 펑크를 비롯해 20세기에 폭발한 다양한 저항문화에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당시 주류 패션은 이런 저항문화의 스타일을 전유하는 데에는 선수였다. - P250

케이트 모스의 엉덩이는 1990년대 전반에 어디서나 볼 수있는 가장 눈에 띄는 엉덩이였지만, 그 엉덩이의 부피는 크지 않았다. 굴곡이 거의 없으며 전반적으로 매끈한 몸매를 매력으로 내세운 백인 여성의 뒤편에 붙은 엉덩이는 작은 혹 같았다. 당시엔 작고 납작한 엉덩이가 지난 몇십 년 동안 그랬듯 미국 여성 대부분의 이상이자 목표로 굳어진 것 같았다. - P252

그때 (나를 포함한) 사람들은, 말하자면 ‘심판의 날‘이 다가오고 있다는 걸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비쩍 마른 엉덩이의 지위는 사실 상당히 위태로웠다. 주류 백인 문화에서 오랫동안 무시당한 아름다움과 몸과 섹시함의 개념들이 슬슬 제자리를 찾아나서고 있었다. 이런 문화적 변화로 인해, 향후 30년 동안 많은 사람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엉덩이의 모양은 극단적으로 달라진다. - P252

"난 큰 엉덩이가 좋고 거짓말은 못 해!" - P254

서 믹스어랏은 이 노래 "베이비 갓 백Baby Got Back"으로 세상의 ‘베키‘들에게, 아니 온 세상 사람들에게 똑똑히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었다. 자신이 큰 엉덩이를 좋아하고, 다른 남성들도 똑같다는 거다. 그는 거짓말을 할 생각 따위는 없다. - P255

‘베키‘들이 다른 여자의 몸에 대해 (어쩌면 자기 자신의 몸에 대해서도) 역겹다고 선언하는 엉덩이를 서 믹스어랏은 당당하게 추앙하고 대상화한다. ‘베키‘들은 엉덩이를 보고 진저리치지만, 서 믹스어랏은 자극받는다. - P255

"베이비 갓 백"은 신나는 비트를 지닌 노래이고 뮤직비디오에는 시각적 농담이 가득 담겨 있다. 그러나 서 믹스어랏은인터뷰를 할 때마다 이 노래가 ‘노벨티 송novelty song (유머와 익살을 담은 노래-옮긴이)‘이 아니며 농담 따먹기를 의도한 게 아니라고 분명히 밝혀왔다. 오히려 그는 확고한 메시지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 메시지는 당시 그의 연인이었으며 엉덩이 큰 혼혈 여성이었던 에밀리아 도시-리바스 Amylia Dorsey Rivas의 경험에서 비롯한다. - P255

"에이미랑 같이 투어 중에 어느 호텔에 갔는데, 슈퍼볼 기간이라 스퍼즈 매켄지Spuds MacKenzic(맥주 브랜드 버드와이저 광고에 사용된 가상의 개-옮긴이)가 등장하는 버드와이저 광고가 있더군요. (...) 그 광고에 나온 여자들은 머리를 크게 부풀리고 다리는 새 다리처럼 말라빠져서 무슨 정지 표지판처럼 보였어요." 1980년대의 유물이었던 ‘정지 표지판‘룩이 서 믹스어랏의 눈에는 우스꽝스럽게 보였다. - P256

"우리 게토 지역 여성들은 그렇게 생기지 않았어요. 굴곡깨나 있는 여성들이, 아니, 나처럼 배가 나왔다는 게 아니라 매일 8킬로미터를 달리고, 배에 빨래판 같은 식스팩이 있고, 둥글고 아름답고 탄력 있는 근사한 엉덩이를 가진 여성들이, 몸매를 가린답시고 허리에 스웨터를 묶고 다니더라니까요!" - P256

그와 그의 친구들에게 TV속 머리를 부풀린 깡마른 여성들의 모습은 그리 섹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당대 대중문화의 지형을 지배하고 있던 건 그런 유형의 여성들이었기에, 배우이자 성우였던 도시-리바스는 일거리를 찾기가 힘들었다. - P256

"내가 자란 시애틀 교외에선 패리스 힐턴 같은 몸매가 아니면 철저히 무시당했어요." 도시-리바스 본인이 <벌처>에 들려준 이야기다. "세상에서 광대뼈가 제일 높은 사람이어도, 엉덩이가 조금만 넓으면 꽝이었다고요." 애인 (믹스‘라고 불렀다)에게 왜 일거리를 못 구하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그는 답하곤 했다. "뒤태를 보면 알잖아." - P256

"뮤직비디오에 말라깽이 모델 같은 여자가 나오지 않으면,내 노래가 미국 주류에게 먹히지 않을 거라고 느꼈어요. 그땐 그게 엄연한 사실이었다고요." 서 믹스어랏은 변화를 일으키고 싶었다. 엉덩이 큰 여성들이 자기 몸에 달린 걸 자랑스러워하길, 미디어에서 모습을 드러낼 기회를 잡길 바랐다. 그래서 그는 흑인 여성의 몸을 추켜세우는 노래를, 자신이 도시-리바스의 몸에서 가장 좋아하는 부분을 떠받드는 노래를 쓰기로 했다. 서 믹스어랏에게 이 노래는 개인적 선언인 만큼이나 정치적인 선언이었다. - P257

"베이비 갓 백" 노래와 뮤직비디오는 제작에 참여한 사람들에게도 분분한 해석을 이끌어냈다. 그냥 끝내주게 재미있다고 여긴 사람이 있는가 하면 불편하고 여성을 대상화한다고 본 사람도 있었고, 반대로 여성에게 힘을 준다고 느낀 사람도 있었다. - P257

오프닝 대사는 도시-리바스 본인이 맡아서, 자신의 것과 같은 엉덩이를 역겹게 여기는 백인 여성들의 목소리를 따라 했다. <벌처>에 들려준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노래가 마음에 들었다. 노래가 자기 모습을 드러낼 기회라고 생각되었다. 심지어 심오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 P257

"사람들은 이 노래가 모멸감을 준다고 했어요. 하지만 저는 평생 저랑 비슷한 느낌을 받으며 살아온 사람들에겐 이 노래에 모멸적인 구석이 하나도 없다고 받아치곤 했죠." - P257

"엉덩이가 있는 여자에 대한 노래지, 창녀에 대한 노래가 아니라고요." - P258

"뮤직비디오에 나오는 여성을 캐스팅한 담당자들은 우리 작업이 문화적으로 어떤 의미인지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어요." 작업에 참여한 백인들 대부분은, 엉덩이 큰 여성들이 기괴하게 성애화되지 않고서도 욕망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개념을 도통 받아들일 수 없었다. - P258

뮤직비디오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맞닥뜨린 걸림돌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엉덩이를 논할 때 자주 일어나는 오해를 풀어야 했다. 볼기 얘기지, 구멍 얘기가 아니라는 것 말이다. 항문 성교, 똥에 대한 금기를 다루는 곡이 아니라는 점을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했다. - P258

마침내 완성된 "베이비 갓 백" 뮤직비디오가 MTV에 제출되자, 심의위원회에서는 여성의 얼굴을 잘라내고 신체 부위만 보여주는 뮤직비디오 방영을 금지하는 새로운 방송국 정책을 들어 비디오를 틀 수 없다고 말했다. MTV에서는 카메라로 여자의 신체 부위를 컷으로 잘라 보여주는 것도 그만두기로 했다. 최소한의 시각적 페미니즘을 받아들여, 여성을 문자 그대로 온전한 사람으로 그리도록 한 것이다. 희망과 꿈과 커리어가 있는 사람으로 그릴 필요까지는 없었지만, 최소한 머리는 있어야 했다. - P259

하지만 "베이비 갓 백"이 방송 부적격 판정을 받은 게 진짜로 성차별과 여성의 대상화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엉덩이와 흑인을 전면으로 지나치게 내세웠기 때문인지는 의심스럽다. - P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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