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는 지난번 포스팅의 마지막에 자연계의 가장 위대한 성공사례로 식물과 곤충간의 협력하는 관계를 언급했었는데 이는 저자가 이 책에서 지속적으로 강조하는 공생이라는 관점에 정확히 부합하는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자연속 공생관계를 보면서 한편으로는 왜 우리 인간은 서로 손을 잡는데(서로 협력하는데)인색할까 라는 질문을 던지며 마치 철학자들이 가질법한 궁금증을 품는다. 이는 저자가 자신의 전공인 자연과학(생태학)뿐만 아니라 인문학 분야에도 조예가 깊기 때문이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또한 위 내용과는 별개로 독서에 관한 저자의 소신을 밝히는 부분이 있는데, 저자는 머리를 비우는 취미 독서보다는 자신이 모르는 분야를 배워나가는 기획 독서를 할 것을 독자들에게 권면한다. 사람들이 일상을 살아가며 지친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머리를 식히기 위해 취미 독서를 한다고 하는데, 저자는 이런 오락적인(?) 취미 독서보다는 독자 개개인이 잘 모르는 분야를 알아가는 기획 독서가 더 가치있는 것임을 얘기하고 싶었던 것 같다. 이러한 주장의 근거는 바로 DNA에 관한 얘기를 하다가 나온 것인데, 인간의 DNA에는 다른 동물들과 달리 ‘앎‘이라는 것을 추구하는 본능이 있다는 점에서 착안한 생각이다. 독자인 내가 저자의 사고의 흐름을 역추적해보자면 새로운 지식을 배운다는 것은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DNA인지라 이 DNA를 발전시키고 더 나은 DNA로 개발시키기 위해서라도 단순한 재미만을 추구하는 취미 독서를 하기보다는 뭐라도 하나 더 배우는 기획 독서를 하는 것이 진화생태학자인 저자의 생각에서는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지식을 많이 배워둬야 DNA를 더 좋은 쪽으로 진화시킬 수 있다는 생각이 밑바탕에 깔려있는 것 같기도 하다.


연이어 나오는 내용 중에는 ‘공진화‘라는 개념이 눈에 띄었는데, 자연에 존재하는 각종 식물들과 저자의 연구 대상인 개미가 서로 협력하면서 함께 진화해나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 일일이 밑줄치진 않았지만 본문을 읽다보면 다양한 형태의 개미들이 등장하고 각자의 역할들이 있는 것들을 보게 되는데 개미들의 사회가 인간사회와 유사한 면도 있고 종의 개별 특성에 따른 차이점도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저자는 자신의 연구분야인 개미와 인간을 비교하며 살펴봄으로써 개미들로부터 협동하는 것을 우리 인간들이 배웠으면 하는 바램을 나타내는데, 인간사회에서 협동이 쉽지 않은 이유가 희생하는 것에 대해 인간들이 꺼리기 때문이라는 얘기도 덧붙인다. 이외에도 저자의 연구분야인 개미와 관련된 다양한 이야기들을 통해 자연에서 우리 인간들이 배울만한 것들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잠시나마 가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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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포스팅의 후반부에선 ‘진사회화‘라는 개념이 눈에 띄었는데 이는 개미나 꿀벌같은 종에서 나타나는 것으로 인간과는 달리 자신들이 가장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특정한 개체에게 전적으로 번식의 역할을 맡기고 나머지 개체들은 이 특정한 개체의 번식활동을 옆에서 돕는 그런 방식을 말한다. 책에 직접적으로 나온 표현은 아니지만, 진사회화를 독자인 내가 이해한 말로 풀어보자면 ‘될성싶은 개체한테 모든 것을 몰아주는‘ 것이라고 생각해보면 될 것 같다. 즉, 우월한 유전자를 가진 개체를 번식의 도구로 써서 후세대에게 그 우월 유전자를 물려준다는 의미다. 어찌보면 굉장히 현명한 선택을 개미나 꿀벌들이 하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을 듯 하다.


오늘 포스팅의 마지막 부분에선 저자가 미국 유학생활을 하면서 현지인 친구로부터 배웠던 과학적 글쓰기와 관련된 에피소드들이 나오는데 문학적 감수성이 풍부했던 저자가 과학적 글쓰기와 자신이 기존에 갖고 있던 글쓰기 방식이 배치되면서 겪었던 혼란들에 대한 일화들이 나온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는 저자가 했던 여러가지 고뇌들이 지면 너머로 조금이나마 느껴졌던 것 같다.

자연계에서 가장 무거운 존재가 누군인지 아십니까? 무게로 가장 성공한 존재.

자연계의 모든 동물을 다 모아본들 식물의 무게에 비하면 그야말로 조족지혈입니다. 지구는 식물이 완벽하게 장악한 행성입니다. 무게로 가장 성공한 집단이 식물이고, 숫자로 가장 성공한 집단이 곤충입니다. 이 어마어마하게 성공한 두 집단이 만나 서로 잡아 죽여서 성공한 게 아니고, 손을 잡았다는 겁니다.

이렇게 대단한 경우(식물과 곤충의 공생관계)가 있는데, 왜 우리는 이걸 연구하면서도 손 잡고 가는 것에 인색할 수밖에 없게끔 살고 있을까? 이게 생물학자인 제가 ‘나는 누구냐?‘ ‘우리는 누구냐?‘하는 차원에서 던지는 질문입니다. 도대체 우리는 어쩌다가 이런 식으로 프로그래밍 되고 말았을까.

최근 몇 년 동안 굉장히 열심히 생각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영어로 ‘coopetition‘이라고 하는데요. 경쟁competition 이란 단어와 협력cooperation 이란 단어의 합성어입니다. 경쟁하는 듯, 협력하는 듯, 이런 뜻이죠.

어떻게 경쟁과 협력이 기가 막히게 조화를 이루느냐, 이게 결국 우리의 삶 아닌가요?

우리 평소에 같이 삽니다. 어느 정도 돕고 삽니다. 그래도 마지막 순간엔 남들보다 내가 요만큼은 낫고 싶은 거죠. 그래서 그 순간에 우리가 남을 해치기도 하는 것 같아요.

"전문인들이 사는 21세기에 진정한 전문인은 치열하게 공부하고 치열하게 일한다. 그냥 놀고 먹으면서 성공하려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상대를 존경하고 따뜻하게 대하면서도, 치열하게 일하고 공부해서 이기는 거다."

함께 가면서 더 열심히 일한 사람이 성공할 겁니다.

호모 사피엔스는 자기와 비슷하게 생긴 놈들이 주변에서 얼쩡거리는 꼬락서니를 못 봐줍니다. 자연계에서 우리처럼 배타적인 동물은 처음 봅니다. 주변에 있는 비슷한 놈들을 몽땅 제거해 버리고 혼자 살아남았습니다. 그래놓고 스스로 ‘현명한 인간‘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사피엔스가 ‘wise‘라는 뜻입니다. 이렇게까지 자화자찬을 해도 되는건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자연계의 다른 생물과 공생하겠다는 뜻에서 ‘호모 심비우스Homo symbious‘로 거듭나야 한다

자연의 순리를 연구하는 학문이 ‘생태학‘입니다.

"인간은 DNA의 존재를 알아버린 유일한 동물이다."

DNA가 저를 만들어서 이 세상에 내놓은 겁니다. 제가 무엇을 한들 DNA의 손바닥 안에 있습니다. 기왕에 이렇게 된 거, 기가 막히게 한바탕 즐기고 가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게 DNA에게 끝내 도움이 되면 참 좋고요.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제가 꼭 뭘 이뤄야 한다는 강박관념도 사라져요. 그렇다고 포기할 이유도 없습니다. 왜? 제가 포기해도 DNA한테는 별 상관 없습니다. DNA는 또다른 존재를 가지고 실험할 겁니다.

"유전자의 폭력에 항거할 수 있는게 인간이다."

유전자가 모든 걸 다 장악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이미 유전자의 존재를 알아버린 우리는 유전자가 폭력을 저지르는 것에 항거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인간이라는 동물은 DNA의 존재까지도 알아버린 대단한 존재입니다. 우리를 빼놓고 이 세상에 그 어느 동물도 ‘앎‘이라는 것을 제대로 추구하는 동물이 없습니다. 우리는 앎을 추구하게끔 허락받은 동물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새로운 걸 알아가는 과정을 겪으며 삽니다.

책 안에 우리가 알고자 하는 인류의 모든 지식이 담겨 있습니다.

취미 독서만 하지 마세요.

지식을 전달하라고 책을 만들어 놨는데, 왜 머리를 비우세요?

취미 독서만 하지 말고 기획 독서를 하십시오. 내가 모르는 분야를 공략하셔야 합니다. 나는 분석철학에 대해 제대로 공부한 적이 없다, 나는 진화심리학이 뭔지 모른다, 나노과학이 뭘까, 공략하십시오.

모르는 책을 붙들었는데, 잘 넘어간다? 천하의 거짓말입니다. 안 읽힙니다. 하지만 그걸 붙들고 씨름하다보면 첫 책은 안 읽혀도 두 번째, 세 번째 책쯤 가면 신기하게 책장이 넘어가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어느덧 그 분야에 발을 들여 놓으신 거예요.

내 지식의 지평을 넓혀가는 겁니다. 그게 바로 인문학이 원하는 겁니다.

자연에서 우린 정말 많은 힌트를 얻습니다. 자연이 어떻게 하고 있는지를 들여다보고 우리도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 이것 역시 호모 심비우스의 정신입니다.

개미 사회에서는 이런 합종연횡이 굉장히 흔해요. 여왕개미들끼리 손잡는 일들이 아주 비일비재합니다. 다만 문제는, 나중엔 여왕이 한 분만 남으셔야 해요. 한 나라의 통치자가 둘일 수는 없잖아요. 이건 인간 사회도 마찬가지고 동물 사회도 마찬가집니다. 통치자가 둘인 경우는 정말 드뭅니다. 그래서 천하를 평정하고 나면 서로를 숙청하는 피비린내 나는 정쟁이 벌어집니다.

‘공진화‘라고 합니다. 두 종이 서로 조율하면서 함께 진화한다는 겁니다. 개미가 혼자 진화하는 게 아니라 식물과 서로 조율하면서 서로에게 이득이 되며 함께 진화한 거죠.

마크 트웨인이 이렇게 얘기한 적이 있어요.
"실화보다 더 재미있는 소설은 없다."

인간과 가장 비슷한 동물은 영장류 중에서도 침팬디와 보노보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유전자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유전자를 비교해봤더니 거의 99퍼센트가 똑같습니다. 자연계에서 이렇게 가까운 사촌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굉장히 가까운 사촌입니다.

우리(인간과 개미)가 얼굴이 닮았다는 건 아니고, 하는 짓이 엄청나게 닮았다는 겁니다.

개미와 인간이 지구를 양분하고 있는 두 지배자

1경이라는 게 10의 16제곱입니다. 0을 열여섯 개를 써야 그게 1경입니다.

협동하는 자가 성공한다

협동을 할 줄 아는 동물이 몇 안 돼요. 그 이유가 뭘까요?
협동하려면 희생이 따릅니다. 누군가가 희생해야 협동이 가능한 거지, 다 몸 사리고 손해 안 보려고 하면 협동이 안 됩니다.

이 희생이 어려운 거죠.

과연 우리 인간이 희생을 잘하는 동물일까요? 개미는 우리 인간에 비하면 기꺼이 희생하는 동물입니다.

꽃 안에만 꿀 샘이 있는 게 아니고, 식물 중에는 꽃 밖에도 꿀샘을 가진 식물들이 있습니다. 꽃 안에 있는 꿀샘은 벌과 나비를 위한 것이지만, 꽃 바깥에 있는 꿀샘은 오로지 개미를 위한 겁니다. 개미가 와서 그 꿀샘에서 단물을 채취하는데, 개미가 오르락내리락하기 시작하면 이 식물에 아무도 얼씬거리지 못합니다.

이 세상에 개미가 옮겨주지 않으면 발화하지 않는 식물이 수백 종입니다.

개미는 굉장히 많은 식물과 이런 관계를 맺고 삽니다. 굉장히 이로운 동물이고, 온갖 동식물과 손잡고 살 줄 아는 동물입니다.

개미들의 희생 정신, 조직력, 협동, 의지, 이런 것들은 충분히 배울 만한 것들이에요.

옛날 중국 사람들은 개미에 대해 뭔가 더 많이 알고 있었나봐요. 개미를 한자로 ‘의蟻‘라고 쓰는데요 의로울 의자에 곤충 부를 하나 붙여놨어요. 저 글자가 만들어진 게 적어도 3~4천 년 전일 텐데, 중국 사람들은 개미를 가리켜 의로운 곤충이라고 얘기했다는 거죠. 참 대단합니다.

우리가 보는 가시광선을 불편해하는 곤충들은 붉은 등을 켜놓고 관찰하면 전혀 영향을 받지 않고 하던 짓 다 하거든요. 개미는 붉은 등 안 켜도 되고요. 실험실에서 못 나오게 미끄러운 것을 바르고 풀어놓으면 연구가 가능해요.

"한번 생각해봐라. 굴에서 살고 여러 생태적 조건들이 비슷하면 그런 진화가 꼭 곤충에게서만 일어나야 한다는 법은 없다."

혼인비행을 마친 딸(꿀벌)이 집에 돌아오면 엄마가 집을 내줍니다. 자기 집을 내주고 자기를 따를 일벌의 절반을 데리고 나갑니다. 그게 분봉이에요.

개미나 꿀벌의 사회성을 ‘진사회성eusociality‘이라고 부르거든요. 누군가가 홀로 번식하고 사회의 다른 구성원들은 번식을 포기한 채 그 한 존재의 번식을 돕는 형태로 진화하는 걸 진사회성이라고 불러요. 사회성의 진화로 보면, 우리는 엄밀한 의미에서 진사회성에 도달하지 못한 사회성을 가지고 있는 거죠.

저는 여왕개미처럼 내 일개미를 키워서 그 일개미들과 같이 해야 하는 거예요. 그때부터 제자 키우는 일에 총력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자를 키워서 동료를 만들어야 하니까..

과학 논문은 맨 앞에 초록abstract이 있잖아요. 내가 뭘 얘기한다, 뭘 발견했다는 것부터 짧게 쓰고 서론introduction, 방법method 쓰고 결과results와 고찰discussion을 쓰는 거잖아요.

다짜고짜 결론부터 얘기하고 나면 소설이 재미없잖아요. 그래서 저는 일단 숨기는 거예요. 하고 싶은 얘기를 꽁꽁 숨겼다가 맨 마지막에 꺼내놓는 거죠. 그런데 이게 과학 논문으로는 절대 안 맞는 겁니다.

"지면 비워놨습니다."

제가 의생학을 구상했습니다. 의자가 ‘헤아릴 의 擬‘ 자입니다. 의성어, 의태어 할 때. 다른 말로 하면 흉내낸다는 뜻입니다. 자연을 흉내내는 학문이다, 자연을 모방하는 학문이다, 자연을 표절하는 학문이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 개념 중에 자연 모방biomimicry 이라는 말이 있어요. 자연에서 우리가 가져다 쓸 게, 배울 게 많다는 겁니다.

가방이나 신발에 찍찍이velcro 많이 붙어 있죠? 우리가 발명한 게 아닙니다. 도꼬마리 같은 식물이 동물의 털에 자기 씨앗을 붙여서 멀리 이동시키려고 개발해놓은 겁니다. 그걸 우리가 그대로 베꼈습니다. 현미경을 들여다 보면서 굉장히 비슷하게 베껴서 쓰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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