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 포스팅 마지막에서 새로운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 저자는 학문의 경계를 넘어야 함을 강조했었는데 이와 관련된 내용들이 먼저 등장한다. 여기서의 핵심 키워드로 ‘통섭‘이라는 단어가 가장 뇌리에 꽂힌다. 이 두글자가 저자 글의 핵심을 잘 나타낸 말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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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쭉 읽어나가다 보니 일원론과 이원론에 대해서도 나온다. 솔직히 본문을 읽기전에는 이런 것들에 대해 잘 몰랐었는데, 책을 읽으면서 대략적으로 유추해볼 수는 있었다.

여기 일일이 밑줄치진 않았지만, 과거 철학자 데카르트가 이원론을 주장했다고 하는데 저자는 데카르트가 이원론을 주장한 근거 중에 하나[인간의 뇌를 해부했는데 송과체pineal gland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을 보고 일반 동물들과는 달리 인간에게만 영혼이라는 게 존재한다]가 그(데카르트)가 죽기 얼마전에 사실이 아닌 것[인간만이 아니라 동물에게도 송과체pineal gland가 존재한다]으로 밝혀졌다는 근거를 들면서 이원론은 과학적 근거가 빈약하다는 논리를 내세우면서 찰스 다윈이 주장한 일원론이 과학적으로 옳다는 확신을 갖는 모습을 보인다.


이 책을 읽다보니 저자께서 오래전부터 수많은 책들을 썼던 분이시라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개인적으로는 저자의 책을 읽은 것이 이 책이 처음인지라 저자의 이력에 대해서는 잘 몰랐었다. 오늘 읽은 부분에서 일원론과 다윈의 진화론과 관련된 내용을 보면서 저자의 이력이 문득 궁금해져서 인터넷에 검색해보았더니 일원론자이면서 찰스 다윈의 진화론을 신봉하는 진화론자라는 얘기들이 나왔다.

과거 중고등학교 과학시간에 진화론에 대한 내용이 나오면 진화론을 부정하는 논리(?) 혹은 주장(?)인 창조론이라고 해서 교과서에 정식으로 수록되어있지는 않았지만 진화론에 반하는 얘기들도 있다는 것을 여기저기서 들어서 알고 있다.(요즘 교과서는 어떤지 모르겠으나 과거 내가 중고등학교 다닐 때는 창조론관련 내용은 아예 수록되어 있지 않았다.)

어쨌든 진화론과 창조론 혹은 위에서 잠깐 언급했던 일원론과 이원론 같은 각각의 주장의 대립들은 과학계에서 꽤나 불꽃 튀는 이슈들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러한 이슈를 지금 읽고 있는 이 책에서 보고 생각해보게 될 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다. 어쩌면 이런 것도 저자의 말처럼 우연한 만남인지도 모르겠다.

독자인 나는 개인적으로 진화론과 창조론 어느 한쪽이 절대적으로 옳거나 다른 한쪽이 절대적으로 틀리다고 생각하는 입장은 아니다. 과학자가 아닌 일반인인 나의 지극히 주관적인 결론부터 말하자면 두 얘기 간에 약간 절충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입장인데 어찌보면 이는 오늘 읽은 앞 부분에서 저자가 말한 통섭과 공생(심비오틱 symbiotic)과도 비슷한 맥락이라고 생각한다.


오늘 밑줄 친 문장 중에 이런 부분이 있다.

[태초에 물 속에 살던 물고기 중에 일부가 뭍으로 올라오면서 육지동물이 생겨났고, 그 육지동물 중 누구는 파충류가 되고, 누구는 조류가 되고, 누구는 포유류가 되고, 포유류 중에서 영장류로 진화한 친구들이 있고, 그 영장류들이 가지를 치다가 그 가지의 어느 한 끝에 호모 사피엔스라는 동물이 태어난 것이지, 태초부터 인간을 태어나게 하기 위해 이 모든 생물이 존재했던 것은 절대 아니거든요.]

인용한 위의 문장에서 개인적으로는 맨 앞에 나온 문장인 ‘태초에 물 속에 살던 물고기 중에‘라는 부분이 독자인 내 마음에 자꾸 걸렸다. 태초에 뭐가 있을라면 무언가 사소한 것이라도 창조되어 있는게 있어야 맞는 말 아닌가? 하다못해 좁쌀만한 크기의 씨앗이라도 있었어야 맞는거 아니냐는 말이다. 어떻게 아무것도 없는 태초에 저 물고기는 도대체 어디서 나왔단 말인가? 진화론의 입장을 따르자면 태초에 물 속에 살던 저 물고기의 조상은 과연 누구인지에 대해 진화론만으로는 논리적인 설명이 안되는게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내가 위에서 어느 한 쪽의 주장만 옳고 다른 한 쪽은 무조건 틀렸다는 식의 사고를 경계하면서 진화론과 창조론 간에 통섭과 공생이 필요하다는 얘기를 한 이유가 바로 이러한 의문 때문이다. 이러한 통섭과 공생의 관점에 입각해서 위에 인용한 문장을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관점으로 설명해보자면 ‘태초에 물 속에 살던 물고기‘의 경우는 창조론의 논리로 설명이 가능한 부분인듯 하고, 나머지 그 뒤에 나오는 무슨 육지동물이 파충류, 조류, 포유류, 영장류 등으로 진화한 것은 진화론의 논리로 설명이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누군가는 양다리 걸치지 말고 어느 한 쪽으로 입장을 확실히 정해라 하면서 욕할 수도 있겠지만 이 책의 저자께서 강조하시는 통섭과 공생의 관점으로 본다면 진화론이든 창조론이든 관계없이 각각의 얘기들 혹은 주장들을 상호간에 존중하는 것이 맞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께서 책의 앞부분에서는 통섭과 공생을 말씀하시면서 데카르트와 함께 언급된 일원론과 이원론 논쟁도 그렇고 위에 독자인 내가 인용한 문장에서도 진화론만이 절대적으로 옳고 창조론은 단지 가설정도에 불과하다는 식의 뉘앙스로 말씀하시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아서 한 사람 안에 두 개의 자아가 있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드는 지점이었다. 독자인 내 생각에 어쩌면 저자는 아예 창조론이라는 것 자체를 과학이라고 인정하지 않기에 애초부터 통섭과 공생의 범주에 들어올 수 없는 영역이라고 생각하시는 건지도 모르겠다. 근데 내가 위에 인용한 문장에서 지적한 부분을 창조론의 가설(?) 혹은 논리(?) 를 사용하지 않고 진화론의 논리로만 설명하기에는 뭔가 2%부족해보이는 건 비단 나만의 느낌일까? 진화론을 절대적으로 신봉하시는 분들은 비단 너만의 느낌이라고 하시겠지만, 나처럼 생각하는 사람들도 분명히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쉽사리 결론을 내리기 힘든 진화론과 창조론에 관련된 이슈들을 얘기해보면서 한편으로는 이래서 우리는 완벽한 절대자 혹은 신이 아니라 그냥 하나의 인간이고 사람일 뿐이라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더 이상 어느 한 개인이 문제의 답을 찾는 시대가 아닙니다. 한 학문 분야에서 해결책을 찾는 그런 시대는 지났습니다. 21세기는 학문이 만나야 답을 찾을 수 있는 시대입니다. 그런 시대에 걸맞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겁니다. 자연과학을 하면서 인문 소양을 갖춘 사람, 인문학자지만 자연과학을 이해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이번 세기에 살아 남는 겁니다.

생태학은 태생적으로 통섭적인 학문입니다.

"통섭적 인생을 사셔야 한다."

‘손잡지 않고 살아남은 생명은 없다‘

우리가 왜 공정하고 공평하고, 양심적으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근원적인 답이 자연이 그런 곳이기 때문이라는 거죠.

"다윈 선생님이 모든 문제에 침 발라놨다."

자연은 그리 험악한 곳이 아니라는 것

"자연은 서로 돕고 사는 곳이다."

자연은 경쟁 일변도의 전쟁터가 아니라 서로 손잡으며 아름아름 돕고 사는 곳

가진 자가 공평하게 살면, 그건 그 사람들만 계속 유리한 거잖아요. 그건 아니에요.

그건 공정이 아니에요, 공평이죠.

"너희들은 능력을 인정받은 사람들인데, 너희가 부정하게 살면 저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너희랑 경쟁하면서 살아야 하냐."

"가진 자가 공정을 얘기하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공정이라는 단어가 가진 자의 입에서 나오면 안 된다."

자연이 이러니까 우리도 이래야 한다는 건 옳지 않죠. 당위성은 없다는 건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의 지혜‘라는 것은 하루 이틀 새에 만들어진 게 아니잖아요. 오랜 진화의 역사를 거치면서 형성된 현상이기에, 거기서 얻는 지혜나 지식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늘 자연 속에서 인간의 위치를 세심하게 들여다보면서 살아야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제가 계속 ‘호모 심비우스‘를 주장하고 "알면 사랑한다"라는 얘기를 하는 이유가 끊임없이 자연을 관찰하고 공부하면서 우리를 되돌아보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말았으면 해서예요.

자연계에서 우리는 ‘가진 자‘잖아요. 우리는 이미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야말로 발자국 하나까지 신경쓰면서 내디뎌야 해요.

이런 노력을 해야 자연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다

살아보니 인생 퍽 길군요.

기후 및 생물다양성 위기를 맞으며 이제는 더할 수 없이 중요한 분야가 된 생태학

공평은 양심을 만나야 비로소 공정이 됩니다. 양심이 공평을 공정으로 승화시켜줍니다.

속 깊고 따뜻한 공정이 우리 사회의 표준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여러분 각자에게 반짝, 하며 빛날 기회가 적어도 한 두차례는 올 겁니다.

미래학자들의 예측에 따르면 여러분은 적어도 직업을 대여섯번 갈아타며 살 것이랍니다.

여러분은 앞으로도 쉼없이 배우고 일하고 또 배우고 일해야 합니다. ‘융합의 세기‘ 21세기를 살아내려면 ‘통섭형 인재‘가 되어야 합니다. 겸허한 자세로 평생 도전할 마음의 준비를 하십시오.

치열하게, 그러나 사뭇 겸허하고 따뜻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저는 제 동료들에 비해 출발이 많이 늦었습니다. 불공정한 지름길로 넘나들지 않고 주변과 손잡고 함께 천천히 걸었는데도 오늘 이런 자리까지 왔습니다. 인생 살아보니 참 기네요.

"혼자만 잘 살면 무슨 재민겨?"

제가 평생토록 관찰한 자연에도 손잡지 않고 살아남은 생명은 없더군요.

자연과학은 사실 인문학입니다.

인문학이 질문하는 학문이라면, 기술은 답을 찾아내는 분야입니다. 자연과학은 답을 찾아낸다기보다 오히려 질문하는 학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생물은 무생물보다 훨씬 아름다운 존재일겁니다.

자연을 있는 그대로 연구하는 ‘생태학‘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에게는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속성이 하나 있습니다. 모든 생명은 반드시 이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죽음‘입니다. 참 아이러니하죠.

적어도 지구에 태어난 생명은 반드시 죽습니다. 생명에게는 언제나 한계가 있어요. 생명의 한계성, 이게 생명의 가장 보편적인 특성이라고 생각합니다.

태초에 생명의 늪에서 우연치 않게 자기를 복제할 줄 알던 어떤 화학물질, 이게 DNA입니다. 최근에는 어쩌면 RNA일 수도 있다는 연구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DNA 혹은 RNA같은 유전물질은 허구한 날 자신과 똑같이 생긴 화학물질을 계속 복제하는 일을 합니다.

태초부터 지금까지 생명실험은 끊이지 않고 계속된 겁니다.

따지고 보면, 지구의 생명 역사는 DNA 혹은 RNA 일대기에 불과합니다. 태어나서 아직 죽지 않은 그 친구의 삶을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겁니다.

우리는 얼마 있으면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갈 한계성을 지닌 개체지만, 우리를 만들어낸 DNA라는 유전 물질은 계속 이어질 수 있다는 겁니다.

지금 우리 인간이 자행하고 있는 어마어마한 환경파괴, 생명 파괴 현상은 결국 가족을 죽이는 일입니다.

생명은 시간적으로 그 옛날부터 지금까지 쭉 이어져 있지만, 사실 지금 이 순간, 공간적으로도 다 이어져 있다는 겁니다.

DNA의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이 성공해서 DNA를 많이 복제해주나 개미가 성공해서 DNA를 많이 복제해주나, 아니면 병원균이 창궐해서 DNA를 많이 복제해주나 아무 차이가 없습니다. DNA의 입장에서 보면, 모든 게 다 연결돼 있기 때문이죠. 생명은 이처럼 영속성과 더불어 연속성을 지닙니다.

생명은 태초에 하나로부터 전부 갈려 나온 겁니다. 생명은 일원성을 지닙니다. 이 부분이 제가 평생 연구하고 있는 찰스 다윈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가장 큰 교훈 중 하나입니다. 이 세상은 따로따로 만들어진게 아니라, 모든 생명체가 진화의 과정을 거쳐 하나로부터 분화돼 나왔다는 얘기를 한 겁니다.

인간은 어쩌다보니 우연의 우연의 우연의 우연의 결과로 태어난 겁니다. 태초에 물 속에 살던 물고기 중에 일부가 뭍으로 올라오면서 육지동물이 생겨났고, 그 육지동물 중 누구는 파충류가 되고, 누구는 조류가 되고, 누구는 포유류가 되고, 포유류 중에서 영장류로 진화한 친구들이 있고 그 영장류들이 가지를 치다가 그 가지의 어느 한 끝에 호모 사피엔스라는 동물이 태어난 것이지, 태초부터 인간을 태어나게 하기 위해 이 모든 생물이 존재했던 것은 절대 아니거든요.

여러분이 지금 이 순간 이곳에 있는 건 어마어마한 확률의 우연 덕입니다. 곱하고 곱하고 곱해서,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겁니다. 그래서 생명은 우연의 결과물입니다.

찰스 다윈이 1859년에《종의 기원》이라는 책을 냈는데요, 제일 유명한 문장 중 하나입니다.

"태초에 하나로부터 아름다운, 이 기가 막힌 형태들이 진화해왔고, 지금도 진화하고 있다."

다윈은 유전자의 존재를 전혀 모르던 사람입니다. DNA의 존재를 모르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논리적으로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이 거슬러 올라가면 하나로부터 왔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유추해낸 사람입니다.

적자 생존의 영어 표현은 ‘survival of the fittest‘라는 최상급입니다. 그런데 저는 다윈 선생님이 실수하셨다고 생각합니다. ‘the fittest‘라고 하면, 최고로 적응 잘한 친구 하나만 살아남았다는 뜻입니다. 만약 우리말로 제대로 번역했다면, 그냥 적당히 적자생존이 아니고 ‘최적자생존‘ 이라고 해야 맞는 겁니다. (중략) 서양 사람들은 저 표현을 들을 때마다 1등이 아니면 죽는구나, 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을 겁니다. 하지만 이 세상이 1등만 남겨놓고 모두가 죽는 세상은 절대로 아니잖아요. 세상이 어려워지면 꼴등이 떨어져나가는 거죠. 꼴지만 아니면 살아남을 가능성을 갖고 사는 거죠.

생존투쟁은 피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자원은 한정되어 있는데 자원을 원하는 존재들은 어마어마하게 많아서 경쟁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 경쟁에서 이기는 방법이 반드시 남을 죽이고 남의 피를 빨아야만 되는 것이라고 설명하시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것도 방법입니다. 하지만 다른 방법도 있다는 걸 다윈 선생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저 같은 생물학자에게 자연계의 가장 위대한 성공사례가 뭐냐고 물으면 열 명 중에 아홉 명이 이렇게 말합니다. 꽃을 피우는 식물과 그들을 방문해서 꽃가루를 옮겨주고 그 대가로 꿀을 얻는 곤충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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