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어느 한 개인이 문제의 답을 찾는 시대가 아닙니다. 한 학문 분야에서 해결책을 찾는 그런 시대는 지났습니다. 21세기는 학문이 만나야 답을 찾을 수 있는 시대입니다. 그런 시대에 걸맞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겁니다. 자연과학을 하면서 인문 소양을 갖춘 사람, 인문학자지만 자연과학을 이해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이번 세기에 살아 남는 겁니다.
우리가 왜 공정하고 공평하고, 양심적으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근원적인 답이 자연이 그런 곳이기 때문이라는 거죠.
자연은 경쟁 일변도의 전쟁터가 아니라 서로 손잡으며 아름아름 돕고 사는 곳
가진 자가 공평하게 살면, 그건 그 사람들만 계속 유리한 거잖아요. 그건 아니에요.
"너희들은 능력을 인정받은 사람들인데, 너희가 부정하게 살면 저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너희랑 경쟁하면서 살아야 하냐."
"가진 자가 공정을 얘기하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공정이라는 단어가 가진 자의 입에서 나오면 안 된다."
자연이 이러니까 우리도 이래야 한다는 건 옳지 않죠. 당위성은 없다는 건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의 지혜‘라는 것은 하루 이틀 새에 만들어진 게 아니잖아요. 오랜 진화의 역사를 거치면서 형성된 현상이기에, 거기서 얻는 지혜나 지식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늘 자연 속에서 인간의 위치를 세심하게 들여다보면서 살아야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제가 계속 ‘호모 심비우스‘를 주장하고 "알면 사랑한다"라는 얘기를 하는 이유가 끊임없이 자연을 관찰하고 공부하면서 우리를 되돌아보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말았으면 해서예요.
자연계에서 우리는 ‘가진 자‘잖아요. 우리는 이미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야말로 발자국 하나까지 신경쓰면서 내디뎌야 해요.
이런 노력을 해야 자연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다
기후 및 생물다양성 위기를 맞으며 이제는 더할 수 없이 중요한 분야가 된 생태학
공평은 양심을 만나야 비로소 공정이 됩니다. 양심이 공평을 공정으로 승화시켜줍니다.
속 깊고 따뜻한 공정이 우리 사회의 표준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여러분 각자에게 반짝, 하며 빛날 기회가 적어도 한 두차례는 올 겁니다.
미래학자들의 예측에 따르면 여러분은 적어도 직업을 대여섯번 갈아타며 살 것이랍니다.
여러분은 앞으로도 쉼없이 배우고 일하고 또 배우고 일해야 합니다. ‘융합의 세기‘ 21세기를 살아내려면 ‘통섭형 인재‘가 되어야 합니다. 겸허한 자세로 평생 도전할 마음의 준비를 하십시오.
치열하게, 그러나 사뭇 겸허하고 따뜻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저는 제 동료들에 비해 출발이 많이 늦었습니다. 불공정한 지름길로 넘나들지 않고 주변과 손잡고 함께 천천히 걸었는데도 오늘 이런 자리까지 왔습니다. 인생 살아보니 참 기네요.
제가 평생토록 관찰한 자연에도 손잡지 않고 살아남은 생명은 없더군요.
인문학이 질문하는 학문이라면, 기술은 답을 찾아내는 분야입니다. 자연과학은 답을 찾아낸다기보다 오히려 질문하는 학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생물은 무생물보다 훨씬 아름다운 존재일겁니다.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에게는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속성이 하나 있습니다. 모든 생명은 반드시 이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죽음‘입니다. 참 아이러니하죠.
적어도 지구에 태어난 생명은 반드시 죽습니다. 생명에게는 언제나 한계가 있어요. 생명의 한계성, 이게 생명의 가장 보편적인 특성이라고 생각합니다.
태초에 생명의 늪에서 우연치 않게 자기를 복제할 줄 알던 어떤 화학물질, 이게 DNA입니다. 최근에는 어쩌면 RNA일 수도 있다는 연구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DNA 혹은 RNA같은 유전물질은 허구한 날 자신과 똑같이 생긴 화학물질을 계속 복제하는 일을 합니다.
태초부터 지금까지 생명실험은 끊이지 않고 계속된 겁니다.
따지고 보면, 지구의 생명 역사는 DNA 혹은 RNA 일대기에 불과합니다. 태어나서 아직 죽지 않은 그 친구의 삶을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겁니다.
우리는 얼마 있으면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갈 한계성을 지닌 개체지만, 우리를 만들어낸 DNA라는 유전 물질은 계속 이어질 수 있다는 겁니다.
지금 우리 인간이 자행하고 있는 어마어마한 환경파괴, 생명 파괴 현상은 결국 가족을 죽이는 일입니다.
생명은 시간적으로 그 옛날부터 지금까지 쭉 이어져 있지만, 사실 지금 이 순간, 공간적으로도 다 이어져 있다는 겁니다.
DNA의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이 성공해서 DNA를 많이 복제해주나 개미가 성공해서 DNA를 많이 복제해주나, 아니면 병원균이 창궐해서 DNA를 많이 복제해주나 아무 차이가 없습니다. DNA의 입장에서 보면, 모든 게 다 연결돼 있기 때문이죠. 생명은 이처럼 영속성과 더불어 연속성을 지닙니다.
생명은 태초에 하나로부터 전부 갈려 나온 겁니다. 생명은 일원성을 지닙니다. 이 부분이 제가 평생 연구하고 있는 찰스 다윈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가장 큰 교훈 중 하나입니다. 이 세상은 따로따로 만들어진게 아니라, 모든 생명체가 진화의 과정을 거쳐 하나로부터 분화돼 나왔다는 얘기를 한 겁니다.
인간은 어쩌다보니 우연의 우연의 우연의 우연의 결과로 태어난 겁니다. 태초에 물 속에 살던 물고기 중에 일부가 뭍으로 올라오면서 육지동물이 생겨났고, 그 육지동물 중 누구는 파충류가 되고, 누구는 조류가 되고, 누구는 포유류가 되고, 포유류 중에서 영장류로 진화한 친구들이 있고 그 영장류들이 가지를 치다가 그 가지의 어느 한 끝에 호모 사피엔스라는 동물이 태어난 것이지, 태초부터 인간을 태어나게 하기 위해 이 모든 생물이 존재했던 것은 절대 아니거든요.
여러분이 지금 이 순간 이곳에 있는 건 어마어마한 확률의 우연 덕입니다. 곱하고 곱하고 곱해서,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겁니다. 그래서 생명은 우연의 결과물입니다.
찰스 다윈이 1859년에《종의 기원》이라는 책을 냈는데요, 제일 유명한 문장 중 하나입니다.
"태초에 하나로부터 아름다운, 이 기가 막힌 형태들이 진화해왔고, 지금도 진화하고 있다."
다윈은 유전자의 존재를 전혀 모르던 사람입니다. DNA의 존재를 모르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논리적으로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이 거슬러 올라가면 하나로부터 왔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유추해낸 사람입니다.
적자 생존의 영어 표현은 ‘survival of the fittest‘라는 최상급입니다. 그런데 저는 다윈 선생님이 실수하셨다고 생각합니다. ‘the fittest‘라고 하면, 최고로 적응 잘한 친구 하나만 살아남았다는 뜻입니다. 만약 우리말로 제대로 번역했다면, 그냥 적당히 적자생존이 아니고 ‘최적자생존‘ 이라고 해야 맞는 겁니다. (중략) 서양 사람들은 저 표현을 들을 때마다 1등이 아니면 죽는구나, 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을 겁니다. 하지만 이 세상이 1등만 남겨놓고 모두가 죽는 세상은 절대로 아니잖아요. 세상이 어려워지면 꼴등이 떨어져나가는 거죠. 꼴지만 아니면 살아남을 가능성을 갖고 사는 거죠.
생존투쟁은 피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자원은 한정되어 있는데 자원을 원하는 존재들은 어마어마하게 많아서 경쟁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 경쟁에서 이기는 방법이 반드시 남을 죽이고 남의 피를 빨아야만 되는 것이라고 설명하시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것도 방법입니다. 하지만 다른 방법도 있다는 걸 다윈 선생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저 같은 생물학자에게 자연계의 가장 위대한 성공사례가 뭐냐고 물으면 열 명 중에 아홉 명이 이렇게 말합니다. 꽃을 피우는 식물과 그들을 방문해서 꽃가루를 옮겨주고 그 대가로 꿀을 얻는 곤충의 관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