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두려운 일‘이라는 제목의 글로 시작한다. p.193에 밑줄 친 문장에서 유추해보자면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인식하는지 여부가 굉장히 중요해 보인다. 말을 좀 더 보태자면 정상이 비정상화되는 것보다 비정상이 자신을 정상이라고 착각하는 것이 더 두려운 일이라는 얘기다. 나는 과연 비정상을 정상이라고 착각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게 되는 시간이었다.


다음에 나오는 글은 ‘전쟁 극장‘이라는 글이다. 얼핏 보면 무슨 전쟁 영화를 상영하는 극장이라고 오해할 수도 있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 이 말은 전쟁이 진행되는 영역을 지칭하는 theater of war라는 영어를 우리말로 번역하면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밑줄 친 문장에 이 말의 유래가 간단히 소개되는데 ‘아 이런 관점에서 이러한 말이 나왔구나‘하고 감탄했다.

또한 여기 별도로 밑줄치진 않았는데, 비교적 최근에 발생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의 전쟁과 관련하여 우크라이나의 대통령인 젤렌스키가 우리 국회의원들에게 화상으로 연설을 했던 일화가 나오는데 부끄럽게도 우리나라 국회의원들이 젤렌스키의 연설에 관심없이 딴 짓을 하는 모습이 전 세계에 알려졌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보면서 개인적으로는 우리나라 국회의원들이 저들의 전쟁을 강 건너 불구경하듯 보고 있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앞서 말했던 진짜 현실판 ‘전쟁 극장‘이라는 게 씁쓸하긴 하지만 이런게 아닌가 싶었다. 이에 덧붙여 저자는 유사시 한반도에 전쟁이 발발했을 때 이러한 우리 국회의원들의 태도로 인해 전 세계로부터 외면받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를 나타낸다. 국민을 대표한다는 국회의원들이 남의 나라 전쟁이라고 영화보듯이 보는 이런 태도를 보인다면 ‘한국 전쟁‘ 때 우리를 도와줬던 나라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참 부끄럽기 그지없다.

현실판 ‘전쟁 극장‘ 이야기와 더불어 전쟁의 본질에 대해서도 잠시나마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p.204에 밑줄친 내용인데, 전쟁이라는게 결국에는 정치적으로 유리한 조약 체결을 위한 도구로써 사용되는 것이라는 저자의 얘기는 나를 포함한 독자들에게 전쟁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생각해보게 한다.


다음으로는 요즘 무서운 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챗GPT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 이 책이 에세이 형식의 글이다보니 챗GPT와 관련된 전문적인 내용이 나오는 것은 아니고 챗GPT와 문학을 연계하여 생각한 저자의 생각을 엿볼 수 있었다. 특별히 마지막 부분에서 챗GPT의 발전 수준과는 별개로 자신의 경험을 문학의 언어로 재발견하려는 욕구가 우리들 마음속에 영원할 거라는 얘기는 뭔가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다.

위의 말을 약간만 더 확장해서 챗GPT같은 기술의 발전과 무관하게 인간의 내면에 잠재되어있는 어떤 근본적인 욕구 혹은 본능은 영원할 거라는 말로 일반화해볼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다만 이것이 어떤식으로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칠지는 좀 더 생각해봐야 할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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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 나오는 내용은 중국의 한 농민공에 관한 얘기다. 농민공이란 중국에서 이주 노동자를 지칭하는 용어인데, 일반적으로 노동자들의 경우 노동하는데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를 거의 다 소진하기 때문에 책과는 거리가 먼 경우들이 많다고 하는데 여기 소개된 첸지라는 농민공은 그렇지 않았던 것 같다. 그는 노동 후의 무력감을 달래고자 책을 읽기 시작했고, 그 중에 철학자 하이데거의 책에 매료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첸지가 어떤 저자의 책에 푹 빠졌는지가 중요하다기 보다는 자기 삶의 자유를 찾기 위해 철학을 추구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 이야기를 보면서 남녀노소 국적을 불문하고 우리가 독서를 하는 근원적인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되었다. 거창한 것이든 사소한 것이든 사람들마다 자신이 처해있는 상황과 환경에 따라 독서를 하는 다양한 이유들이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은 정보를 획득하기 위한 목적으로 책을 읽을 수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문학작품들을 통해 인간에 대한 이해를 심도있게 하기 위해 독서할 수도 있으며, 에세이 같은 글을 통해 공감과 위로를 받기 위해 독서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혹은 단지 재미를 위해서 읽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외에도 정말 다양한 이유들이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그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자신이 독서를 하는 이유에 합당한 어떤 것을 얻어간다면 그걸로 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저자도 p.212에 밑줄친 부분에서 잠깐 언급했지만 내가 어떤 책을 읽지 않는다고 해서 그 책을 읽는 사람에게 ‘저런 책을 쓸데없이 왜 읽고 있지?‘라고 함부로 말해서도 안될 것이다. 남이 뭘 읽든 참견하지 말자는 말이다.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넘기면 그만인 것에 딴지 걸지 말자는 얘기다. 그냥 저 사람에게는 저 책이 필요하니까 읽는가보다 하면 그만인 것이다. ‘남이 뭘 읽든 신경쓰지마‘라는 말이 참 단순하면서도 강력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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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 나오는 것은 ‘완전한 소모‘라는 제목의 글이다. 이 책에 직접적으로 나온 단어는 아니지만 ‘미니멀리즘‘이라고 해서 가급적 자신이 소유하는 물건을 줄이고 간소한 삶을 추구하자는 주의가 있다. 이미 그렇게 살고 계신 분들도 있을 것이고 반대로 집에 쇼핑한 각종 물건들로 가득찬 분들도 있을 것이다. 지금 살고 있는 형태가 미니멀리즘이든 아니든 관계없이 자신이 갖고 있는 물건을 완전히 써보지도 못하고 버리는 행위는 단지 그 물건과의 관계의 단절을 의미할 뿐 그 이상도 그 이하의 의미도 없다는 저자의 얘기가 인상적으로 느껴졌다.

독자인 나도 얼마 전에 잘 쓰지 않고 공간만 차지하는 듯한 물건을 버린 경험이 있었는데, 이 부분을 읽으면서 그 물건을 버렸던 기억이 다시금 떠올랐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 물건을 쓸만큼 써서 처음 구입했을 때 느꼈던 효용만큼의 효용을 더 이상 느끼지 못했기에 과감하게 더 이상의 미련없이 버릴 수 있었다. 버리는 것도 이렇게 기분좋고 유쾌한 버림이 있는 반면 막상 사놓고 별로 쓰지도 못한채 공간만 차지하다가 피치못할 사정으로 버리게 되는 경우들도 많이 있는듯 하다. 이런 걸 보면 애초에 어떤 물건을 구입할 때 좀 더 신중해질 필요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든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독자인 나도 예전에 사놓고 아직 제대로 사용해보지 못한 물건들이 적지 않게 방에 존재한다. 오늘의 독서를 통해 이러한 바람직하지 못한 소비습관에 대해 재점검해보는 시간을 가져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나에게 진짜 필요한 것을 소비하는지 아니면 없어도 살아가는데 전혀 지장없지만 단지 싸고 예쁘다는 이유로 소비하는 건 없는지 반성해보게 되는 시간이었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 드는 생각은 나를 비롯해 현대인들이 소비라는 것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관대해진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환경적인 측면도 생각해서 지금부터라도 꼭 필요하지 않은 소비는 조금이라도 줄이는 쪽으로 가는게 맞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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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포스팅의 마지막 부분에는 ‘겨울 이야기‘라는 글과 관련된 내용이 나온다. 이것은 셰익스피어의 연극 제목이자 에리크 로메르의 영화 제목이기도 하다. 독자인 나의 추측으로는 연극과 영화라는 형태만 다를 뿐 문맥상 동일한 내용을 가지고 상연 혹은 상영하는 듯 보여진다. 개인적으로는 처음 보는 작품인데 인터넷에 검색해보니 꽤나 뿌리깊은 작품인듯 보인다. (독자인 내가 이쪽 분야에 무지한 편이라 너그러이 양해바란다.) 어쨌든 이 극의 내용을 놓고 저자는 인생에 대해 간단한 논의를 전개한다. 핵심은 사람이 진정한 인생을 사는 경우도 있지만 대충(혹은 임시적인) 인생을 사는 경우도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좀 풀어서 나만의 설명을 보태자면 사람이 자기가 꿈꾸던 삶을 현실에서 살아간다면 진정한 인생을 사는 경우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 못한(꿈꾸던 삶이 아닌) 경우에는 적당히 현실과 타협하며 그냥저냥 대충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이 글(‘겨울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에 죽음과 부활이라는 단어도 잠깐 나온다. 이것이 지칭하는 의미를 좀 더 자세히 풀어보면 대충 사는 인생을 죽이고 진정한 인생을 살아가는 부활을 맛보자는 얘기인데, 이러한 부활을 이루어내기 위해서는 대충 사는 인생을 살아갈 때 사랑했던 것들을 과감히 놓아야 한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책에 앞서 언급한 대충 사는 인생을 살아갈 때 사랑했던 것들에 대한 예시가 직접적으로 나오진 않았지만, 인생을 살면서 다가오는 각종 유혹이나 쾌락 혹은 온갖 부질없는 것들을 지칭한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p.221에 밑줄 친 문장을 토대로 생각해보면 이해가 무난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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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24에 밑줄 친 부분은 ‘슈레버 사건‘이라는 글에 나온 글인데 사정 상 다음 번 포스팅에서 이 글의 내용에 대한 얘기를 이어가도록 하겠다.

아마 한 조직이 선한지 악한지 알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은 두목보다 착한 부하가 생존이 가능한지를 살펴보는 것일지 모른다. - P190

평범한 사람이 악당이 되는 것보다, 악당이 자신을 지극히 평범하고 정상적인 사람이라고 여기기 시작하는 것, 그게 훨씬 두려운 일이 아닐까. - P193

개인과 마찬가지로 권력 집단 역시 한번 발을 잘못 디디면 심연을 향해 한 방향으로만 가는 것이다. 간혹 계획이 좌절될 때, 문득 정신 차리고 뒤돌아설 수 있을까. 그보다는 더 끔찍한 다음 단계로 질주하는 것이 보통 아닐까. - P201

원고를 읽는데 ‘전쟁‘ 옆에 ‘극장‘이라는 말이 나온다. 그러면 편집자는 머리가 복잡해지기 시작한다. 군사학 용어로 전쟁이 진행되는 영역을 뜻하는 theater of war를 번역자가 ‘전쟁 극장‘이라고 무심코 옮겼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 P202

전쟁 극장은 클라우제비츠 이전부터 있던 말이다. 속설에 의하면 전황이 궁금한 왕과 영주들이 지도를 가지고 보고받는 것으로는 만족할 수가 없어, 좀 더 실감할 수 있도록 전쟁을 극화해 궁정 무대에 올리게 한 것이 어원이라고 한다. - P203

클라우제비츠는 극장을 외부 현실로부터 분리된 독립적인 공간이라는 의미로 사용한다. 서양 문화에서 극장이 이 정도로 광범위하고 깊게 뿌리내리고 있는 것인가 하고 놀랄 때가 있는데, 우리는 수술실의 옛 명칭이 수술 극장(operating theater)이었음을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 P203

군사(軍事)라는 것의 극장적 요소들은 흔히 지적되고 있다. 실용적이라 보기 어려운 번쩍이는 군복이라든지, 해마다 광장에서 펼쳐지는 열병식 같은 것들이 그러하다. 이런 것은 보여 주기 위한 것이다. - P203

실제 전쟁 역시 마찬가지다. 전략적으로 의미가 없을 것 같은 민간인 지역을 초토화시켰다는 뉴스가 나온다. 물론 이는 공격자가 자신들이 이처럼 무자비하다는 것을 의도적으로 알리려는 것이다. - P203

전쟁은 자체의 목적과 효율성을 따르는 게 아니라 정치에 복종할 뿐이다. "전쟁은 다른 수단을 이용한 정치의 연장"이라는 경구처럼, 전쟁 중에도 외교 협상은 계속된다. 전쟁 중 정치가 사라지거나 우위를 잃는 일은 발생하지 않는다. 정치의 입장에서 최종 목적은 유리한 강화 조약의 체결이며, 전쟁은 이를 위한 협상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전쟁이 평화 협상과 반대이기는커녕 바로 그 테이블에 펼쳐 놓는 수단임을 이해할 때 우리는 전쟁의 민얼굴에 좀 더 접근하게 된다. - P204

그 극장의 진짜 무대는 스크린이 아니라 관람석이라는 것 - P204

챗지피티(chatGPT)-3는 샌프란시스코의 인공지능 스타트업 오픈에이아이가 공개한 프로그램이다. - P206

화이트칼라 노동을 기계가 대신해 주는 미래가 갑자기 우리에게 맛보기로 제공된 것이다. 몇 초 만에 끝나는 것을 노동이라고 부르게 될지는 의문이지만 말이다. - P206

사람들의 의견은 대체로 ‘약간 아쉬운 부분은 있지만 이걸 기계가 썼다니 놀라울 따름‘으로 수렴된다. - P206

그 이름이 가리키듯 챗지피티는 대화용 프로그램인데, 중요한 건 말을 할 줄 안다는 것이다. - P207

우리는 인공지능의 아버지 앨런 튜링이 "기계가 생각할 수 있는가?"라는 어려운 문제를 "사람이 이 기계를 사람으로 착각할 수 있는가?"라는 판별 가능한 테스트로 바꾸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대화하면서 기계가 기계인지 사람이 못 알아차리는 지경이 되면, 그 기계는 지능이 있다고 가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 P207

체호프의 단편 「문학 교사」(1894)에는 세상 사람이 다아는 것밖에 말할 줄 모르는 인물이 나온다. - P207

시기가 문제일 뿐이다. - P208

편지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자신의 체험을 문학화하려는 욕구인데, 이는 문학가가 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정신적 곤경의 탈출구로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 P208

자신의 경험을 문학의 언어로 재발견하려는 욕구는 "우리들 마음속에 영원할" 가능성이 있다. - P209

농민공(農民工)은 중국에서 이주 노동자를 가리키는 용어이다. - P210

"인간은 시적으로 산다."라는 하이데거의 말 - P211

하이데거가 예로부터 사회주의권에서 언제나 인기 철학자였다는 사실 - P211

자기 삶의 자유를 찾기 위해 철학을 추구하는 태도가 훨씬 훌륭 - P212

‘그가 뭘 읽든 넌 신경 쓰지 마‘ - P212

핸디캡 (지적이든 경제적이든)은 참견쟁이들을 모여들게 하는 좋은 조건 - P212

경제적인 욕망도 네 처지에 맞게 가지라고 충고하는 세상에서 독서에 관한 참견쯤이야 애교일지도 모르겠다. - P212

노동과 가난. 사람들을 가차없이 책과 멀어지게 하는 이유들이 첸지의 경우에는 반대로 책을 집어들게 했다. - P213

‘못 찍은 사진도 지우지 말 것‘ - P214

물건을 줄이는 삶, 간소한 삶에 대한 담론은 늘 있었지만 대유행이 되기도 했다. 공간은 비울수록 아름답고, 옷은 몇 벌이면 충분하고, 매일 물건 하나씩 줄여야 하며, 그게 지구에도 이롭다는 것이다. - P215

이 담론이 다이어트와 똑같은 갈망을 가리키고 있는 것은 명백하다. 나는 이 삶을 지고 가는 것이 힘들고, 출발점에서 새로 시작하고 싶으며, 자신과 주변에 대한 지배력을 회복해야겠다는 것이다. 물건들은 체중과 같고, 물건이 없거나 버려서 생긴 불편은 배고픔이나 운동의 고통과 등가이다. - P215

간소한 삶과 다이어트의 유사성은 피상적인데서 그친다. 다이어트는 자기의 지방을 태우지만, 간소한 삶은 물건을 내버릴 뿐이다. - P215

지방은 본래 태우라고 쌓아 두는 것이므로, 다이어트는 지방의 본질을 존중하고 목적의 실현을 돕는다고 할 여지도 있다. - P215

물건을 버리는 것은 이와 다르다. 여기에는 일방적인 관계 단절이 있을 뿐 물건의 특성을 존중한다거나 적절한 사용법을 찾아보려는 관심은 들어 있지 않다. 자신이 물건뿐 아니라 다른 대상에도 이런 패턴을 반복하고 있다면, 과연 간소함으로 삶의 변화를 얻을수 있을지는 회의적이다. - P216

‘우리는 허기진 사람처럼 물건을 사서 공간을 채우므로‘ 따라서 ‘뭔가 반대되는 조치가 필요하다‘는 고정관념이 생겼다. 진실은, 큰 시간 단위로 보면, 우리가 열심히 버리고 있다는 것이다. - P216

우리는 공간이 좁아서, 또는 새 물건을 들이기 위해, 또는 심리적, 심미적 이유에서 많은 사물들과 작별한다. - P216

일상이 된 이 버리는 삶은 삶의 허망함의 주된 원인으로 느껴질 정도이다. 허망함은 정직한 감정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물건과 의미 있는 연관을 만드는 데 실패했고, 물건의 가능성을 완전히 써 버리지도 않은 채 버리고 있음을 잘 알고 있으며, 우리가 인생을 다루는 방식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이미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 P216

물건을 끝까지 다 사용했을 때 쾌감이 일어난다고 말했던 스토아 철학자들이 있었다. 예컨대 치약이나 장판 테이프를 끝까지 다 쓰면 우리는 실제로 기쁨을 얻는다. 그게 왜 그렇게 되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이것이 자연스럽고 긍정적인 감정이라는 건 확실하다. - P216

삶의 목적은 자신을 생산하는 것이고 인간은 그것을 완전히 소모해야 한다고 말한 키르케고르 - P217

자신을 소모할 때 인간은 출발점에 서게 되는 거라고 - P217

인생의 실마리는 물건을 치우는 쪽보다. 사용 방법을 이해하고 끝까지 써 보려고 하는 쪽에 섰을때 더 찾기 수월해지는 건지 모른다. - P217

셰익스피어의《겨울 이야기》. 배우자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연극이다. - P219

에리크 로메르의 영화 「겨울 이야기」의 질문은 이런 것이다. 우리는 인생을 언제 시작할 수 있는가? - P219

죽음만 우리의 상상 속에서 유예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진정한 인생을 사는 날도 계속 연기되고 있는데, 내가 준비가 안 되었거나 객관적인 조건이 갖추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 P219

"지금까지 난 대충 산 겁니다!" - P219

자신이 임시적으로 사는지 진짜로 사는지 타인이 알아차릴 수 없다는 문제가 있지만 적어도 본인들은 그걸 구분하면서 산다. - P220

어쩌면 우리가 타인을 공감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가장 빠른 길은 그의 진짜 삶과 임시적인 삶, 양보할 수 없는 것과 어찌되든 상관없어 하는 것을 가려서 살펴 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 P220

내게는 중요한 일인데 이 일에 엮인 상대방은 이게 자신 인생의 본령이 아니라고 여긴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 온도차를 내가 감수하면 되는 걸까? - P220

인생을 살고 있지 않은 사람에게 실무적이든 윤리적이든 책임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 P220

왜 우리는 인생을 살지 않는가. 사랑했던 것을 놓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그것의 죽음과 부재를 받아들이고 애도를 표하자. 그게 책임을 질 수 있는 인간으로 돌아오는 첫걸음이다. 부활은 아마 그 다음에야 가능한 것일 게다. - P221

슈레버는 1903년 『어느 신경병 환자의 회상록』을 출판했다. 여기서 신경병(Nervenkrankheit)은 정신병이라는 말과 같은 의미이며 신경증(neurosis)과는 다르다. - P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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