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편견‘이라는 것에 대한 얘기로 시작한다. 살면서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누구에게나 어느정도의 편견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저자가 생각하는 편견에 대한 관점을 알아봄과 동시에 독자인 나는 편견에 대해 어떠한 관점을 가지는게 바람직할지 정리해보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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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다가 p.212에 편견과 고정관념에서 기인하는 ‘무사유‘ 라는 것이 나온다. 쉽게 말해 ‘아무 생각이 없다‘는 뜻인데, 이러한 것의 위험성을 잘 나타내는 문학 작품으로 저자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을 소개한다. 뭐 이미 아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이것도 일종의 편견 혹은 고정관념이려나? 아무튼...), 나치 시대에 유대인을 학살하는 집행자의 역할을 맡았던 ‘아이히만‘이라는 인물에 대한 얘기다. 그를 잡아서 심문해보니 자기는 단지 시키는 대로 했을 뿐 뭘 잘못한 건지 잘 모르겠다는 반응을 보였다는 얘기는 위에 언급한 ‘무사유‘의 폐혜를 대표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어떤 특정한 편견에 사로잡혀 그것이 초래할 것들에 대해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을 수 있음을 마음깊이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편견에 관한 글의 후반부에서 저자는 자신이 가진 편견에 대해 ‘왜?‘ 라는 의문을 품는 습관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이를 통해 편협한 사고에서 벗어나 좀 더 넓은 시각으로 대상을 바라보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올바르지 않은 편견 혹은 상황이 바뀌었음에도 그냥 예전부터 굳어져 있는 생각이라는 이유로 아무런 의심없이 믿어왔던 편견들이 새롭게 바뀔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좀 더 보태자면 책에 직접적으로 나온 얘기는 아니지만 자신이 가진 편견이나 고정관념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서 대화하고 소통하며 자신의 생각을 날마다 업데이트하는 것도 편견이나 무사유를 깨는데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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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편견‘에 대한 내용에 뒤이어 나오는 내용은 ‘용서‘에 대한 것이다. 살다보면 용서가 되는 일들도 있겠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들도 발생하는 것을 보게 된다. 이 책에선 이청준의 소설《벌레 이야기》를 언급하며 ‘용서란 무엇인가‘에 대해 얘기한다. 읽다보니 이 소설이 이창동 감독의 영화《밀양》의 원작이라는 얘기도 나와서 별도로 인터넷에 검색해보니 책에 간략하게 나온 핵심 내용들과 유사한 부분이 많이 있음을 볼 수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이 책이나 원작 소설 혹은 영화《밀양》을 참조하시길 바란다.

여기서 간단히 핵심적인 이슈만 언급하자면 도무지 용서가 되지 않을 때 어떤 종교적인 가르침에 따라 용서할 것을 강요받는 경우가 《벌레 이야기》,《밀양》에 공통적으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용서의 주체인 나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어떤 종교적 신념으로 용서를 강요받아 용서할 대상을 용서하는 것을 저자는 ‘거짓 용서‘ 혹은 ‘값싼 용서‘라는 말로 정의한다. 마치 이러한 껍데기같은 용서는 마음속 깊은 내면에서는 용서되지 않은 마음이 그대로 남아 있기에 자신의 내면에 내적 갈등을 유발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에 반해 ‘진정한 용서‘에 대해서도 얘기하는데 이는 p.231에 밑줄 친 부분을 참조하시길 바란다.

또한 상대방의 죄를 용서하라는 어떤 종교적 신념같은 것에 너무 얽매여서 진정으로 용서되지 않는 것까지 용서해보려고 애쓰지 않기를 저자는 독자들에게 주문하는데 종교적 가르침이나 신념같은 것에 얽매여있던 사람들에게는 한줄기 빛과도 같은 위로가 되는 말이었지도 모르겠다.

물론 진정한 용서가 된다고 한다면 얘기가 다르겠지만 사람들마다 생각과 가치관이 다 다른데 어떤 종교든 관계없이 마음으로 용서가 안되는 일에 대해 억지로 용서를 강요하는 것은 또다른 형태의 폭력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인류의 비극적 역사는 대부분 인간의 오만과 편견에서 비롯되었습니다. - P210

편견은 공정하지 못하고 한쪽으로 치우친 생각 때문에 상대에게 공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 P210

영국의 철학자 에드워드 버크는 "우리는 오래된 편견을 던져 버리는 대신 그것을 상당히 소중히 여긴다. 더욱 수치스러운 것은 그것이 편견이기 때문에 소중히 여긴다"라고 말하기도 했죠. 그만큼 벗어나기 힘든 것이 편견입니다. - P210

편견은 왜 이렇게 버리기가 힘든 걸까요? 편견은 상황이나 대상을 단순화하고 일반화하는 데 유용하기 때문입니다. - P210

편견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공공연한 편견,
암묵적 편견, 자동적 편견입니다. 첫 번째 ‘공공연한 편견‘
은 대외적으로 특정 집단이나 대상에 대해서 편견 어린 말이나 행동 그리고 태도를 서슴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 P211

두 번째 ‘암묵적 편견‘은 겉으로는 편견을 갖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지만, 다른 동기로 위장이 가능한 경우에는 언제든지 편견을 드러내는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흑인이 감독인 영화를 비평하는 경우에 영화 자체를 비평한다는 명목하에 더 신랄하게 비판하는 경우입니다. - P211

세 번째 ‘자동적 편견‘은 뇌에서 자동적으로 편견을 갖게 되는 경우입니다. 흑인에 대한 편견 때문에 흑인이 무표정한 표정만 짓고 있어도 무섭다고 느낀다거나, 흑인의 외투 속에 총이 있을 것이라고 오해하는 경우입니다. - P212

우리는 왜 이런 고정관념에 숱하게 사로잡히는 걸까요? 여기에도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우선 효율성 때문입니다. 어떤 대상에 대해서 편견을 가지면 파악하기가 훨씬 쉽죠. 사람의 다면적 모습을 모두 이해하기 위해서는 많은 에너지를 써야 하지만, 편견을 갖고 바라보면 그런 수고를 들일 필요가 없으니까요. - P212

두 번째 이유는 사회 문제나 부조리와 관련한 문제의식을 표출하는 데 유용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이 경우에는 소수의 집단을 골라서 증오의 대상으로 삼는 경우가 많습니다. - P212

마지막 이유는 나의 정체성을 좀 더 뚜렷하게 정립하기 위함입니다. 이 과정에서 타인과 나를 보다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다고 믿곤 하죠. - P212

편견과 고정관념에서 기인하는 ‘무사유‘ - P212

무사유를 이야기할 때 빠질 수 없는 책이 바로《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고요. 정치 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쓴 이 책은 사고하지 않는 삶이 얼마나 끔찍한 비극을 낳을 수 있는지 깨닫게 해줍니다. - P213

"저는 지시한 대로 했을 뿐입니다." - P214

아이히만은 다만 ‘생각하지 않는 인간‘이었습니다. - P214

현대사회에도 아이히만처럼 사고하지 않는 이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수많은 정보가 쏟아지는 매일매일을 살아가다 보면 깊이 생각할 틈이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 P214

무엇이든 묵인하고 방관하는 것, 고민하지 않는 삶은 큰 문제입니다. 폭력이 자행되는 현실을 보고도 침묵하는 것, 불법이 공공연히 저질러지는 현실을 보고도 방관하는 것, 부조리한 판결과 집행에도 분노하지 않는 것말입니다. - P214

지금 내 삶이 불안하고 고달프다고 해서 사회의 부조리함에 대한 생각을 멈춰서는 안 된다 - P215

불안함 속에서 흔들리며 사는 게 인생이고 어떻게든 치열하게 노력하고 몰입하면서 이 불안감의 진동을 떨치며 살아가는 게 또 인생입니다. - P215

철학자 에리히 프롬이 말한 자유는 ‘불안‘과 일맥상통합니다. - P215

우리는 과거 노예들에게는 없던 자유를 얻었지만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해 도피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이 자유로부터 도피하는 순간 모든 비판적 성찰은 사라지고 맙니다. 사회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없다는 것은 한나 아렌트가 경계한 무사유의 인간이 되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 P216

우리는 자유의 범주를 긍정이 아닌 부정의 영역까지 넓혀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야 주체성을 유지하면서 살 수 있습니다. 자유와 함께 동반되는 불안을 받아들이면 자유가 버거워 절대적인 권력에게 자신을 내맡기는 우를 범하지는 않겠죠. - P216

"당시 나는 일종의 본디오 빌라도의 감정과 같은 것을 느꼈다. 나는 모든 죄로부터 자유롭게 느꼈기 때문이다." - P217

나치즘 안에서 그렇게 잔인한 행동을 했던 수많은 사람이 개인적으로도 부도덕한 사람들이었을까요? 그들은 어쩌면 충실한 신앙인이었고 굉장히 모범적인 사람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 P218

단지 비뚤어진 자기합리화를 통해 부도덕한 권위에 충성했을 뿐 - P218

자기합리화가 강화될수록 점점 더 강한 편견을 낳게 되고, 그것이 일상화되면 상상도 할 수없는 참극을 불러올 수도 있습니다. - P218

편견에 잠식되어 더 이상 사유하지 않은 채 자기합리화만 일삼는 것을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이라 꼬집은 것 - P218

세상에 절대적인 신념과 올바름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편견의 시작 - P219

시대마다 올바름의 기준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러니 사회적 이슈가 생겼을 때는 시대를 공유하는 사람들끼리 늦더라도 천천히 합의를 이루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 P219

개개인을 하나의 인격체로 바라보고 저마다의 삶을 존중해 주어야 합니다. - P219

사회 문제를 바라볼 때도 그것을 어느 집단의 문제로 규정지어 버리면 답이 없습니다. 특히나 우리 사회에 혐오가 일상화되면서 극혐, 남혐, 여혐, 틀딱충, 맘충 등 나쁜 말들이 일상어처럼 쓰이는데 이또한 경계해야 합니다. 편견이 무조건 혐오가 되는 건 아니지만, 일상적으로 혐오표현을 쓰다 보면 점점 더 혐오가 만연한 사회가 되기 때문이죠. 말에는 그만큼의 힘이 있습니다. - P220

편견과 혐오에서 한 발 물러나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가요? 저는 질문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왜일까?‘라는 궁금증에서 시작된 질문은 편견과 고정관념의 근간을 뒤흔들 생각의 무기가 될 수 있습니다. - P220

‘변하지 않는 것이 정말 미덕일까?‘ - P221

사람은 누구나 상황과 동기에 따라 변하고, 그것은 오히려 긍정적인 신호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늙어가는 것처럼 당연한 일일 수도 있고요. - P221

‘나는 얼마나 변했을까? - P221

내가 가진 수많은 편견과 선입견을 깨부수기 위해 던져야 할 질문 - P222

‘용서란 무엇인가‘를 논할 때 절대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는 소설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이청준의 소설「벌레 이야기」입니다. - P225

용서에 관해 이야기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아마도 용서의 주체와 용서받는 자의 자세 그리고 용서를 하는 태도일 겁니다. - P225

흔히 죄는 용서를 통해 구원받을 수 있고, 고통은 용서하는 순간 줄어든다고 하죠. 그래서 용서는 죄지은 자를 구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한 것이라 말하기도 합니다. - P226

그런데 어느 누가 용서의 주체에게 용서를 강요할 수 있을까요. 용서는 어디까지나 상처받은 자의 영역입니다.
누구도 그 영역을 침범해서는 안 되죠. 그것이 이웃이라도, 친구라도, 심지어는 가족이라도 말입니다. 그가 평생 용서하지 않는다고 한들 누구도 그것을 문제 삼을 수는 없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큰 고통을 겪었을 당사자가 용서의 주체로서 스스로 용서할지 말지를 결정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고 그 방식 또한 주변에서 강요해서는 안됩니다. - P227

하지만 어느 누가 고통받는 이에게 ‘이제는 용서할 때가 되었다‘라는 말을 할 수 있을까요. 용서의 주체는 언제나 자기 언어로 얘기할 수 있어야 하며 용서하고 싶을 때 자신의 방식대로 그것을 흘려보낼 수 있어야 합니다. - P228

누군가에게 나의 방식을 강요하는 무지막지한 존재는 아닌지 - P228

누구라도 그들처럼 선한 의도를 앞세워 나의 방식을 강요하기는 쉬우니 항상 그러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 P228

용서하는 주체도 타인의 언어가 아닌 자신의 언어로 이야기해야 하듯이, 용서를 구하는 자도 타인의 언어가 아닌 자신의 언어로 용서를 구해야만 진정성 있는 회개라고 할 수 있습니다. - P229

용서에는 크게 세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방편적 용서, 역할 기대적 용서, 진정한 용서입니다. ‘방편적 용서‘는 나를 위한 용서를 의미합니다. 내 마음이 불편하거나 상대와의 관계 악화를 염려해서 하는 용서죠. 이런 용서는 진정으로 상대의 잘못을 이해했다기보다는 겉으로만 용서하고 속으로는 여전히 경멸과 분노의 마음이 남아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 P231

‘역할 기대적 용서‘는 주변 사람들의 권유에 못 이겨서 하는 용서입니다. 나의 마음에서 우러나는 진정한 용서가 아니기 때문에 복수와 분노의 마음은 여전히 남아 있어서 내적 갈등을 유발합니다. - P231

마지막으로 ‘진정한 용서‘는 말 그대로 동등한 위치에서 자발적으로 상대방을 이해하고 수용하면서 사랑의 마음으로 용서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상처받은 일을 잊어버리는 것과 다르고, 참거나 묵인하는 것과도 다릅니다. 법적인 처벌을 면해주는 것과도 다르죠. 이렇게 용서의 종류를 정리해 보면 거짓 용서와 진정한 용서가 구분됩니다. - P231

거짓 용서는 ‘값싼 용서‘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회개하고 구원받았다고 말하는 이들을 쉽게 용서하는 사회는 계속 억울한 피해자를 만들어낼 것입니다. - P231

무엇보다 용서는 화해와 다릅니다. 화해는 쌍방이 동의하는 행위입니다. 그러니까 용서를 구할 일에 화해를 강요해서는 안 되는 것이죠. - P232

때로는 용서할 필요가 없는 일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절대자가 아니기에 모든 것을 다 용서할 필요도 없고 용서할 수도 없잖아요. 만약 나에게 거듭 상처를 주면서 값싼 용서를 구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와의 관계를 과감히 정리하라고 조언해 주고 싶습니다. - P232

인간은 신이 아니기에 모두를 용서하는 삶을 살 수는 없습니다. 그럴 필요도 없고요. - P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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