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어찌 하다보니 거의 1달 만에 이 책을 집어들었다. 지난번 포스팅 막판에 받아 적는 것과 관련한 요 근래의 논쟁(서울대 우등생들이 좋은 학점을 따기 위해 교수님의 얘기를 글자 한토시도 빼놓지 않고 모조리 받아 적는 행위)을 다뤘었는데, 모든 것이 일장일단이 있듯이 받아 적는 행위도 일장일단이 있음을 저자의 글을 통해 보게 되었다. 이것이 창의성이 중요시되는 요즘 시대에 맞지 않다는 의견도 있었고, 온전한 지식 습득을 위해서 마땅히 거쳐야 하는 행위로 보는 시각도 있었다. 이 논쟁과 관련하여 사람마다 각자의 상황 혹은 목적에 따라 지지하는 의견이 갈릴 것으로 보여지는데, 저자는 이 내용과 관련해서 딱히 부정적으로만 볼 것도 없지 않느냐는 식으로 글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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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이어 나오는 글에는 목표와 방법이라는 것에 대한 저자의 생각이 나온다. 개인적으로는 이 글을 읽으면서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논쟁이 생각났다. 어떤 것이 목적이고 어떤 것이 수단인지 헷갈리는 경우들이 있는데, 저자는 방법이 올바르다면 목표는 저절로 달성되어야 하는거 아니냐는 말과 함께 각종 공부법 책들의 저자들이 강조하는 노하우를 얻는 것 자체가 목표가 되어버린 현실에 대해 얘기한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끊임없이 돌고 도는 생각의 꼬리가 이어지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어서 나름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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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읽다가 닉 드레이크 라는 가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 사람은 살아 생전에는 가수로서 철저한 무명이었는데 죽은 뒤 어떤 계기로 인해 갑자기 그의 곡이 인기를 끌면서 소위 말하는 사후 성공을 하게 된다. 개인적으론 처음 알게 된 얘기였는데, 참 이런 걸 보면 사람일이라는 거는 진짜 알다가도 모를 일인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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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에 연이어 나오는 내용 중에 11월에 대한 느낌을 얘기한 에세이도 개인적으로 흥미로웠고, 오늘 포스팅의 마지막 부분에 나온 ‘고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글을 읽으면서는 고전에 대해 또다른 시각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예전에 이탈로 칼비노가 쓴 ‘왜 고전을 읽는가‘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는데, 둘 다 고전이라는 단어가 들어가서 그런지는 몰라도 그 책과 뭔가 유사한 느낌을 받았다. 오늘 알게 된 이 책을 읽을 기회가 있기를 바래본다.

오늘 포스팅의 마지막에는 환상문학과 관련된 내용이 잠깐 나온다. 이와 관련하여 ‘츠베탕 토도로프‘ 라는 사람이 쓴 《환상문학 서설》에 나오는 내용들이 언급되는데, 환상문학이 가지고 있는 특징에 대해 간략하게나마 살펴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또한 별도로 밑줄치지는 않았지만 이 분야에도 보르헤스, 드 퀸시, 러브크래프트, 렘, 우드하우스, 셀린 등 정말 많은 작가들이 활동했거나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이 책을 통해 처음 접하게 된 작가들인데 기회가 되면 이 작가들이 쓴 책들도 읽어보면 좋겠다.

받아 적기를 스트레스 상황에 대한 임시방편쯤으로 폄하할 수도 없을 것 같다. 1513년 마키아벨리는 친구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단테가 말했듯이, 배운 것을 잘 붙잡아 두지 않는다면 지식이 되지 않기 때문에, 나는 현인들과의 대화에서 얻은 배움을 적어 두었다. - P100

지식은 새로운 것의 생산이고, 생산에는 재료와 창고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잘 붙잡아 둔 배움의 모습은 필기일 수도 있고 암기일 수도 있다. 암기를 위해서라도 필기는 해 두어야 할 것 같다. 생각해 보니 받아 적기 자체에는 별로 죄가 없는 것 같다. - P100

그저 삶은 누구에게나 고생스러운 것이고 선택의 결과는 각자가 감당할 몫이라는 진실 - P102

주어진 과제를 그냥 수행하지 않고 자신의 언어로 재구성한 다음 최적화된 방법을 찾아내는 사람의 통찰 - P102

방법이 올바르다면 목표는 저절로 달성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저절로 달성되는 것들은 중요성이 0으로 수렴되는 게 맞지 않을까? 그들이 목표보다 방법을 더 중시하는 것처럼 보이는 게 당연하다. 왜냐하면 딱히 목표를 따로 강조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 P104

우리는 어릴 때 목표가 우선이고 방법은 부차적이라고 배워 왔다. 살아갈수록 어설픈 목표나 기획은 결국 사람의 노력이나 인내에 의지하려 할 뿐이라는 걸 알게 된다.  - P104

목표가 좋은 것보다 좋은 방법을 찾아내는 게 더 중요한 문제로 보인다. 생각해 보면 좋은 방법을 찾아낼 능력이 있었던 목표는 이미 실현되어 우리가 더 신경 쓸 필요가 없는 상태가 되어 있을 것 같다. - P104

작업 분할의 시간적 이득은 작업 변경을 억제 또는 연기해서 생기는데, 공간이 이를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의 이득은 시간에 지불할 것을 공간에 떠넘김으로써, 공간을 시간과 맞바꿈으로써 생긴 것이기 때문이다. - P107

일본의 요리 고수들은 요리가 끝났을 때 주방 정리도 같이 끝나 있다고 한다. 매순간 치우는 것을 병행하는데, 어떤 일이든 최대 공간을 확보한 상태에서 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 P107

최대 공간 확보의 실질적인 의미는 뭘까? 정신 집중? 안전? 궁금했는데, 이제 이유를 알 것 같다. 급할 때 무엇이든 늘어놓을 수 있기 위해서가 아닐까? 즉, 필요시 시간과 교환할 공간을 갖기 위해서 말이다. - P107

어떤 일이든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생각지 못했던 것들을 늘어놓을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 P107

접어서 봉할 때 나는 소리들이 아주 일정하고 규칙적인 리듬에 도달하는 순간이 있었다. 그러면 손의 움직임은 이미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지고 마음은 잡념이 사라져 평화로웠다. - P110

나는 삶이 피곤해질 때마다 평화롭게 봉투 붙이던 기억으로 되돌아가곤 했는데, 결국 깨닫게 되었다. 단순 작업이 가져다주었다고 믿은 마음의 평형 상태가 실은 그 직장의 안정성을 반영하고 있었을 뿐이라는 걸 말이다. - P110

의미도 없고 파편화된 노동의 종착역은 정신병원이라는 것이다. - P110

물건 하나를 혼자서 완성해야 ‘유기적인 노동‘이고 분업으로 일부만 담당하는 것은 ‘물화(物化)된 노동‘이라고 폄하한 20세기 철학자들의 교설 - P111

주인공의 정신을 파괴하는 주범은 파편화된 노동의 반복 자체라기보다는 미친 듯이 변하는 컨베이어 벨트의 속도임이 곧 드러나기 때문이다. 관리자가 모니터로 노동 과정을 감시하면서 컨베이어 벨트의 속도를 한계 이상으로 밀어붙이는 것이 핵심이다. 그런 적나라한 통제 앞에서는 유기적인 노동도 무력하기는 마찬가지다. - P111

노동의 온전함을 해체하는 것은 단순화가 아니라 관리와 통제라는 것을 받아들이면 우리는 단순 노동 자체를 좀 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 P111

‘오직 단순화하라‘가 일터의 모토가 되면 좋지 않을까.
단순화된 일 속에서 우리는 창의적일 수 있고 때로는 정신적 휴식도 취할 수 있으니 말이다. 좋은 일이란 아마 그 두가지를 다 주는 일을 말하는 것일 게다. - P112

발터 베냐민에 따르면 나쁜 작가의 특성은 "아이디어가 많이 떠올라서 허우적대는" 것이다. 글을 쓸 때면 이런 경향을 피하기 어렵다. 펜대를 잡으면 누구나 조금씩은 문학가가 되기 때문이다. 글의 이상형은 문학이고, 문학은 ‘뭔가를 예쁘게 말하는 것‘이라는 통념이 있으니 이런 경향이 자연스럽다 할 수도 있겠다. - P114

통제력은 훈련의 결과 - P114

토마스 만에 따르면 모든 개성적인 것은 이국적인 것으로 여겨진다고 하는데, 특출한 능력도 비슷한 운명인 듯하다. - P119

좋다고 팔리지는 않아. - P123

오디오북은 타인의 낭독을 듣는 것인데, 이것이 묵독과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고 보이지는 않는다. 묵독 역시 자기 머릿속에 울리는 음성을 듣는다는 건 같기 때문이다. - P127

"이번 11월에는 너한테 전해 줄 소식이 없구나."

미국 시인 앤 섹스턴이 친구에게 보낸 편지의 한 구절이다. 이유는 알 수 없는데, 이 평이한 구절이 소셜네트워크에서 가장 자주 인용되는 섹스턴의 문구 중 하나가 되었다. - P129

11월은 옆으로 비켜서 회고하는 달이다. 비키는 건 우리지 11월이 아니다. 이때가 되면 각 매체들은 올해의 기억들을 정리해서 보여 주기 시작한다. 대체로 ‘올해의 책‘ 목록이 가장 먼저 나오고, 이어 올해의 영화, 공연, 히트 상품 등이 차례로 게재되는 것이 보통이다. - P130

나는 점점 더 한 해를 열 달만 있는 척하고 빨리 마무리하는 게 꽤 사리에 맞는 일이라고 느끼게 되었다. 왜 12월 31일 쯤에 결산을 하지 않는 걸까? 새해의 입구이자 일부인 진짜 연말은 회고를 하기에 적당한 시점이 전혀 아니기 때문이다. - P131

아마 우리는 산다는 것과 회고하는 것이 양립하기 어려운 활동이라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아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 해를 정리하기에 적당한 시점은 아무도 진짜 연말이라고 여기지 않는 시기, 늦가울의 어느 달일 수밖에 없다. - P131

두 달 빠른 결산 관행이 암시하는 교훈이 있다면 이런 것이다. 우리에게 별도의 시간이 주어지는 일은 영원히 없으며, 생각과 정리에 쓸 시간은 우리가 생활하는 시간을 헐어서 마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하필 11월을 회고의 달로 만든 것은 나쁜 선택 같아 보이지 않는다. 아마 우리의 회고는 11월 날씨 덕분에 좀 더 감정이 풍부하고 내면적인 것이 되어 왔을지도 모를 일이다. - P132

재앙은 긴급함과 나른함을 동시 발생시킨다. 재앙은 일상을 파괴하는데, 보통 일상은 우리에게 휴식을 주기보다는 닦달하는 쪽이므로, 일상이 멈춘 틈에 뜻밖의 나른함이 생긴다. - P134

케르테스의 홀로코스트 소설 『운명』에는 아버지가 수용소로 떠나는 날 학교에 결석계를 내러 가는 소년이 나온다. 가는 길에 소년은 봄날의 따사로움과 한가함에 태평해진다. - P134

장서가는 경험을 통해 자기 책들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깨달은 자이다. 그는 질서의 훼방꾼인 책의 물성을 존중해야 함을 안다. - P135

우리가 집에서 하는모든 책 정리는 일차적으로 크기에 지배된다. 이게 중력처럼 당연한 거라서 자각이 쉽지 않지만, 주제나 취향에 따른 의식적인 분류는 그 조건 위에 이차적으로, 부분적으로 가능할 뿐이다. - P135

포툠킨 마을은 18세기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세의 지방 시찰에서 유래한다. 여제의 심복이자 연인이었던 포툠킨은 여제의 방문지마다 가짜 마을을 뚝딱 세웠다. 여제가 떠나면 마을은 재빨리 철거되어 다음 방문지로 운반되었다. 역사가들은 이 전설이 과장이라고 보나, 아무튼 포툠킨이라는 이름은 불멸이 되었다. - P138

바보들은 언제나 속아 넘어가기 마련이고, 안됐지만 내 책임은 없는 것이다. - P139

포툠킨 마을의 질문은 이런 것이었다. ‘가짜로 그렇게 진짜를 덮어도 되는가?‘ 포툠킨 서명은 그에 대한 답처럼 보인다. ‘괜찮아! 내가 아니더라도 권력을 쥐면 누구든 똑같이할 거거든.‘ - P139

감성이라는 말이 엉성해 보여도 그게 가리키는 문제까지 시시해지는 건 아니다. - P143

더 이상의 발전은 없을 것이고 가장 이상적인 형태는 이미 발명되어 있다는 식의 단언은 늘 나를 놀라게 한다. 그걸 어떻게 아는지? - P143

디지털 때문에 뭔가 상실되었다는 게 아날로그가 궁극의 형태라는 증명이 되지는 않는다. 단지 기술이 갈 길이 얼마나 먼지 보여 줄 뿐이다. - P143

"기술은 아직 충분히 발전되지 못했다. 기술은 아직 너무나 세련되지 못했다. 이것이 바로 상황의 진면목이다."『철학을 위한 선언』에서 알랭 바디우가 썼듯이 말이다. "기술은 더 노력해야한다." - P144

고전이란 무슨 뜻인가? 그(생트뵈브)는 먼저 라틴어 ‘클라시스(Classicus)‘의 뜻을 검토한다. 이는 원래 일정 수준 이상의 수입을 가진 시민 계층을 뜻하는 말이었다. 이는 자연스럽게 여타 평범한 작품들과는 다른 급으로 생각해야 할 특별한 작품들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보다시피 여기에는 오래되었기 때문에 존중해야 한다는 생각은 들어 있지 않았다. 그 점에서 고전(古典)이라는 한자어는 딱히 좋은 번역어는 아니다. - P147

고전의 특징은 무엇인가? 그런 건 없다. 정확하게는, 고전을 써내는 공식 같은 건 없다. - P147

어떤 작품이 고전이 되는가? 아무도 모른다. 나중에 알게 될 뿐이다. 생트뵈브는 발표 당시 ‘현대의 고전‘ 같은 간지러운 소리를 들을수록 이십오년 뒤에 초라해질 가능성이 더 큰 것 같다고 말한다. - P147

고전의 순위는 유동적이다. 홍행작가였던 몰리에르는 원래 라신이나 코르네유와 동급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 뒤 몰리에르는 그들을 넘어서는 천재로 떠올랐다. - P147

도대체 고전의 쓸모는 뭘까? 그의 답은 "모든 여행과 경험을 마친 이에게 찾아온 기쁨"이었다. - P147

고전을 수단이 아니라 문학 작품으로 관조할 수 있게 된 상태의 인간 - P148

아마 우리에게 필요한 고전 목록은 어린 학생들에게 강요하는 것이 아닌, 늘그막의 인간을 위한 길잡이여야 할지 모르겠다. 권위로 지정한 텍스트들이 아닌, 지금이라도 읽지 않으면 후회할 작품들로 채워진 목록 말이다. - P148

엥겔스는 "정당의 명칭이 꼭 들어맞는 일은 없다."라고 한적이 있다. 그는 사업가이기도 했으므로, 간판과 본업 사이에 필연적으로 괴리가 생기는 문제에 대해 현실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 P149

이쪽 업계인들이다 마찬가지지만 제일 먼저 살펴보는 곳은 판권면이었는데(그렇다. 우리가 본업을 대하는 태도는 결코 정신적이지 않다.) 중쇄를 찍은 책이 잘 보이지 않았다. - P150

"환상적인 것은 망설임의 시간만큼만 지속된다."라는 토도로프의 유명한 정의 - P152

그(츠베탕 토도로프)에 따르면 환상문학은 세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첫째, 애매성. 사건이 초자연적인 것인지 다른 합리적인 설명이 가능한지 독자가 망설여야 한다. 둘째, 동일시. 독자는 망설이는 등장인물과 자신을 동일시해야 한다. 셋째, 축어성. 사건은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지고 시적, 알레고리적 해석은 금지된다. - P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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