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자신에게 잘못을 저지르고 불쾌하게 만들어도 전혀 화를 내지 못하던 사람이 마침내 그에 응대할 수 있는 자신만의 방식을 발견하게 되는 일 (라디오 체조2), 주식으로 억만장자가 되었지만 삶의 감각을 상실한 사람이 이를 되찾기 위해 과감한 결단을 내리는 일(어쩌다 억만장자), 지나친 책임감으로 자신을 억압해왔던 사람이 일탈을 통해 삶에 숨구멍을 내고 새로운 시간 감각을 마련하게 되는 일(「피아노 레슨」), 자의식과잉으로 좀처럼 자연스럽게 행동할 수 없었던 사람이 비슷한 유형의 사람들과 함께 수치심을 불러올 게 틀림없는 대규모 행동에 과감히 뛰어드는 일 (퍼레이드)이 모두 이라부의 이런 특별한 치료법 덕분에 가능해지는 거야. - P174
너는 오늘 혼자 회의에 들어갈 후배가 걱정되어 나와의 약속을 미뤄야 할 것 같다고 했지. 함께 회의에 들어가야겠다고. 나는 그 말에 기다렸다는 듯, 마감 때문에 오히려 잘되었다고 답했고, 이라부라면 틀림없이 되물었을 것이다. 후배가 고생하면 안 되나? 회의를 망치면 어때서? 마감을 미루면 큰일이라도 나나? 하고. - P174
책을 모두 읽었을 때, 장난처럼 결심한 건 ‘펑크‘였어. 이라부의 목소리를 불러내어선, 한 사람의 인생에서 정작 무엇이 중요한가? 그런 큰 질문을 자신에게 던지고, 마감보다는 그간 해보지 않았던 걸 해보는 게, 그 뒷일을 감당해보는게 좋겠다고 답했었는데. - P174
소설을 읽는 건, 어떤 목소리를 내 안에 빌려오는 일. 너에게 이라부의 목소리가 심겼으면 좋겠다. - P175
인간 사카구치 안고는 「타락론」에서 이렇게 말했다. 인간은 살아내고, 인간은 타락한다. 그 외에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편한 지름길은 없다. - P177
온몸으로 살아내고, 온몸으로 타락하는 이야기를 써보고 싶다. 구원은 글쎄, 나도 모르겠다. - P177
이 만화, 저 만화에서 공통으로 나오는 구도를 패턴화해서 가져오기만 하면 그뿐이다. 수학 공식 같은 거였다. - P196
수학 공식은 원리를 이해하지 않아도 된다. 그냥 받아들이고 암기하면 문제는 풀린다. 인수분해 공식은 인수분해 공식인 거다. 인수란 무엇이고 분해는 왜 하는지 궁금해하면 그때부터 인생이 복잡해진다. - P197
그 마음들 덕분에 소연은 돈을 벌 수 있었지만 그 마음들 덕분에 소연은 응급실에 실려가기도 했다. 마감을 못지켜서 죽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몸을 돌보지 않아 암에 걸렸다. 갑상선절제술을 했다. 세상 사람들이 짝짓기하고 싶다는 욕망은 소연의 삶과 죽음과도 연결되어 있었다. - P197
모차르트라도 들으면서 뇌를 정화해봐. - P198
히카루의 조언대로 모차르트 들었어. 교향곡 41번은 언제 들어도 장엄하고 고결한 음악이야. - P199
너무 낙담하지 마. 인간은 원래 그렇게 생겨 먹었는 걸. - P200
역시 대가는 기개가 남다르다. 누군가의 상상을 현실로 만드네. - P200
지금 이곳에서 아무것도 그릴 수 없고, 아무것도 쓸 수 없다면 앞날은 어떻게 되든 일단 확 떠나버리자. - P201
누군가는 단 한사람을, 누군가는 더 많은 사랑을, 누군가는 느린 사랑을, 누군가는 오롯이 자신을 향한 사랑을 원한다. - P203
소설을 쓰는 동안 이해가 오해를 낳고, 오해가 이해를 부르는 상황을 자주 마주했다. 사랑과 미움이 뒤엉켜 둘로 나눌 수 없었고, 오랜 미움 끝에 난데없이 사랑이 드러나기도 했다. 나는 결국 사랑 안에 미움도 포함시킬 수밖에 없었다. 미움이 사랑의 하위 감정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어쩌면 미움만이 아니라 질투와 시기, 자조와 슬픔 역시 사랑에 포함될지도 모른다. 가족을 사랑하는 일 역시 그러할 것이다. - P203
랭보는 말했다. 사랑은 재발명되어야 한다고, 나는 사랑의 무한한 가능성을 들여다보던 중 가족 또한 재발명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혈연과 제도 기반의 가족은 지금의 우리에겐 너무나 작은 개념이고, 모든 결속의 공동체는 언젠가 이별의 공동체로 변모한다. 마음과 상황은 항상 유동하기에 앞으로 누굴 사랑하고, 누구와 결속될지는 알 수 없지만 언젠가 이별해야 한다는 숙명과 그럼에도 사랑을 계속하리라는 결심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 P203
이제와서, 이유가 중요한가. 과연 이유를 찾을 수가 있나. 아프면 이유부터 찾지만 정작 중요한 건 앞으로의 일인 것을…… - P215
결핍은 당사자만 크게 느끼는지도 모른다. - P217
모든 사랑이 좋은 게 아니라는 것을 여로는 지금 막 깨달았다. - P217
막막한 대양에 혼자 부표를 잡고 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배는 이미 한참 전에 가라앉았다는 사실을 혼자만 모르고서. - P218
"미로야, 가족은 떨어져 있더라도 가족이야.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아." - P219
영한은 늘 그랬다. 웃지 말아야 할 때 꼭 웃었다. - P221
여로의 마음속엔 다른 감정이 숨어 있었다. 이제야 그걸 깨달았다. 언젠가 호태가 극적으로 변하리라는 기대. 생물학적 아버지에 대한 일말의 애정. 소위 말하는 ‘정상‘ 가족에 대한 끝없는 집착. 남편이 돌아오기만 하염없이 기다리는 근대 여성 같은 수선의 소망을 간간이 떠올리면서 여로는 호태에게 전화해 안부를 묻고, 푸념과 고민을 들어주었다. 그런 노동은 명백히 바라는 결말이 있어서 한 것이었다. - P221
"괜찮아?" 여로는 속으로만 답했다. 괜찮겠냐? - P223
"굳이 답하고 싶지 않은 질문이다. 패스할게." - P223
"괜히 같이 가자고 했다. 나 혼자 다녀올걸." - P223
깨진 조각을 이어 붙이려던 행동의 결과가 이것이라니. - P224
"사람들은 서로 더 노력해야 한다고 쉽게 말하겠지.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게 있잖아." - P226
부정적인 말은 절대로 하지 말자. - P233
"하트도 그렸네." 누군가 그렇게 말했다. 빈정거림인지 감탄인지 알 수가 없었다. 여로는 그들의 감정을 투명하게 읽을 수 없었지만 시민의 입장에선 그게 더 나았다. 형사들의 감정이 투명하게 읽힌다면 도시의 치안이 걱정되었을 테니까. - P234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거야." - P234
어쩌면 쪽지 같은 건 쓰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럴 가능성이 더 높다. 쪽지가 무얼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그 시절엔 무언가를 했다. 여로가 독사 같다고 생각했던 형사는 여로의 말을 믿어주었다. 여로는 호태가 통장에 모아놓은 300만 원을 인출해 이사 비용에 보탰다. 수선은 그 일을 아직까지도 모르고 있다. - P234
어쩌면 내가 모르는 것을 엄마가 알고, 엄마가 모르는 것을 내가 아는 이런 일들이 무수히 많을지도 몰라. 우리는 서로에게 얼마나 많은 것들을 감추었을까. - P235
여로는 더 이상 아무것도 감추고 싶지 않았다. - P235
여로는 직감했다. 눈앞에 열어보고 싶지 않은 상자 하나가 떨어져 있음을. 그것은 사랑에 관한 그들 가족의 실책과 실망, 기대와 상처, 모순되는 주장과 자기 연민이 가득 차 있는 상자였다. 여로는 그것을 못 본척하며 주방을 서성이다 결국 상자를 집어들고서 자신의 방으로 걸어 들어갔다. - P235
일단 시작하면 어떻게든 되리란 믿음 - P237
이 소설은 어디에 도달하게 될까. 함께 지켜보는 가운데 서로에게 좋은 것을 발견해가면 좋겠다. - P237
신인을 기용하는 일은 윤희재 감독이 선호하는 방식이었다. 얼굴이 알려지지 않은 배우가 영화에 등장하면 다른 이미지가 겹치지 않고 캐릭터 그 자체로 보여진다는 이점 때문이었다. - P238
"이상하죠? 잘못한 건 없는데 잘못한 기분이 드는 거요." - P243
무언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연기 공부를 위해 수없이 많은 영화를 보면서 알아낸 공식이 있었다. 가장 불길한 장면은 가장 평화로운 장면 뒤에 붙어 온다. - P244
스캔들은 예방만이 답이었다. 그래서 지나치게 조심하는 태도는 필수였다. - P244
오전부터 줄곧 틀어둔 빌 에반스의 음반이 거실 한구석에 세워놓은 긴 스피커에서 울려퍼지고 있었다. 윤 대표와 나 사이에 침묵이 돌 때마다 아련한 피아노 선율이 어색하게 파고들었다. - P246
"나을 씨도 알겠지만, 이런 이슈가 생각보다 파장이 커요. 불이 난 거랑 똑같아요. 초기에 잡지 않으면 미친 듯이 번져가죠." - P246
나쁜 친구, 일진, 그런 단어를 곱씹어보는데 한 가지가 떠올랐다. 그러자 매듭지어진 기억이 풀려난 듯 누군가 떠올랐다. 내 기억에 그 아이는 ‘앵두‘라는 별칭으로 새겨져 있었다. 그 애가 정소민일까. 본명이 무엇인지 기억나진 않았다. "최대한 빨리 이 일을 해결해야 해요." 윤소이 대표가 현실을 일깨웠다. 심각한 사안이고 느긋하게 관망할 일이 절대 아니었다. 주저앉아 울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 P247
그거 알아? 공벌레는 어디서 올지도 모를 공격을 막으려고 내내 몸을 말고 있다가 자신을 보호하기는커녕 그 상태로 어딘가 알 수 없는 곳으로 굴러가버린대. 공벌레한테 정말 무서운 건 바람이야. 그 바람이란 녀석 때문에 공벌레의 몸은 알 수 없는 곳으로 휩쓸려가버려. 그러다 바람이 멈추고 갑자기 몸을 폈을 때, 운이 나쁘면 뒤집힌 상태라서 어디로도 갈 수 없게 된대. 다시 몸을 말고 발이 땅에 닿을 때까지 바람이 자신을 다시 굴려줄때까지 기다려야 해. 스스로 몸을 굴릴 수 없는 게 공벌레의 비극이랄까. - P248
악몽은 우리를 다시 만나게 하려고 찾아온 걸까. 그렇다면 악몽에도 효용이 있는 것이다. 그날은 그것으로 충분했다. 큐의 다정한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안정되었다. - P250
전화를 끊자 다시금 오겸이 애인과 헤어진 일과 윤 대표의 불안하게 접힌 미간과 정소민이 쓴 글이 떠올랐다. 이불을 머리까지 뒤집어썼다. 이불을 덮어도 그런 일들이 덮어지진 않았다. - P250
큐의 느긋함과 친절한 분위기가 미친 듯이 그리웠다. 내가 어떻게 큐랑 헤어질 생각을 한 걸까? 왜 그때 연락을 받지 않았던 걸까? 큐에게 미안해서 한편으로는 자신이 한심해서 멍하니 눈만 뜨고 있었다. - P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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