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금 하나의 공간이 여러 가지 중복된 기능으로 사용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과거에는 사무실은 사무실, 카페는 카페, 도서관은 도서관으로 확연하게 기능이 분리되어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모바일 기기의 발전으로 특정 공간이 어느 하나만의 기능을 수행하는 시대는 지났다. 따라서 사용자의 용도에 따라 공간을 나누는 것이 무의미해지고 있다. - P77
현대사회에서는 하나가 다중적인 기능을 갖는다. 경계의 모호성은 공간과 기기를 넘어 인간에게까지 확대된다. 점점 남녀의 구분이 없어지고, 노인과 청년의 구분도 사라진다. 적어도 패션상으로는 구분이 잘 안 간다. - P77
건축에서는 이러한 경계의 모호성이 층간 구분이 모호해지는 현상으로 나타난다. 때로는 하나의 큰 공간에 여러 개의 다른 기능이 중첩된다. 과거에는 복도와 방이 명확하게 나누어져 있었다면 이 새로운 공간에는 벽이 없어서 복도와 방의 구분이 모호하다. 한쪽에서는 책상에서 일을 하고 그 옆으로는 사람이 다니고 의자 배치를 다르게 하면 큰 세미나실이 되는 식이다. - P79
유발 하라리는 과거에는 모든 것이 인간 중심이었다면, 오늘날은 동물을 인간과 비슷한 급으로 바라보는 가치관이 지지를 받는다고 말한다. - P82
하라리는 이러한 동물의 권위 상승을 인공지능의 발달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과거 인간은 동물 중에서 가장 뛰어난 지능으로 동물과 차별화되는 의미를 가졌다. 하지만 지금은 인공지능이 퀴즈 게입이나 바둑에서 인간을 이기는 시대가 되었다. 인간은 더 이상 지구상에서 가장 똑똑한 동물이라는 독보적인 자리를 지킬 수 없게 되었다. 인공지능은 지능으로 먹이사슬의 꼭대기에 위치했던 인간을 지금의 자리에서 끌어내려 동물과 같은 계단에 서 있으라고 말한다. - P82
인간은 점점 동물과 동등해져 가고 있다. 그래서 인간들은 동물이 된 자신들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동물의 존엄성을 높이고 있다는 이야기다. - P82
동물과 인간이 비슷해지는 이러한 시대에 한쪽에서는 ‘기술적 인본주의자‘들이 인간을 기계와 동화시키려고 노력 중이다. 일론 머스크는 뇌와 컴퓨터 네트워크를 연결함으로써 인간의 지능적 한계를 없애려고 한다. 기계가 우리 위에 있으니 인간을 기계와 한 범주로 묶으려는 시도인 것이다. - P83
어느 방향이든 인간은 동물과 기계 사이에서 경계의 해체를 경험하고 있다. 이러한 경계의 모호성이 <마리텔> 같은 예능 프로에서도 나타난 것이다. - P83
현대사회의 특징들은 TV 방송 매체에서 잘 드러난다. 왜냐하면 방송은 많은 사람이 보기 때문이다. 방송은 대중이 원하는 것을 반영한다. 대중의 요구는 곧 그 시대의 정신이다. 그래서 방송 프로그램에는 시대정신이 반영된다. - P83
건축도 마찬가지다. 건축은 인간이 하는 일 중에서 가장 큰 돈이 들어가는 일이다. 최초의 디자인은 한 명의 건축가의 머리에서 나올지 몰라도 적어도 그 디자인이 건축되어 우리 눈에 보이려면 공사비 대출을 해 주는 은행, 건축주, 시공자, 허가권자들의 동의가 필요하다. - P83
방송과 마찬가지로 건축물도 여러 명의 공통의 가치관이 반영되어 지어지기 때문에 시대정신을 반영한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우리가 사는 도시가 아름답지 않다면 그것은 어느 한 사람의 잘못이 아니다. 그 안에 사는 많은 사람의 건축적 이해와 가치관의 수준이 반영된 것이다. - P83
좋은 도시에 살고 싶은가? 나부터 좋은 가치관을 갖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 P83
건축은 기본적으로 사람들의 라이프스타일이 바뀌면 그것에 맞추어서 변화한다. - P87
지금의 공간을 좀 더 효율적으로 사용하여 스트레스를 낮추는 방법은 어떨까? 그것은 건축이 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 P88
도시의 카페는 주거 공간의 부족을 메우는 공간이다. - P90
우리가 사는 현대사회는 공간을 즐기려면 돈을 지불해야 한다. 그게 집값이든 월세든 카페의 커피 값이든 마찬가지다. - P91
과거에는 소유하지 않아도 즐길 수 있는 공간들이 많았지만 이제는 ‘몇 평‘으로 계산되는 공간을 얼마나 소유하고 있느냐가 그 사람의 삶의 질을 평가하는 척도가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열심히 일해서 한 평이라도 넓은 집으로 이사 가고 싶어 한다. - P91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세상의 흐름은 지금 거꾸로 1인 가구의 작은 집으로 향하고 있다. - P91
우리도 1인 가구가 늘어나는 변화에 맞는 우리만의 라이프스타일을 만들어야 한다. 돈이 많은 사람만 갈 수 있는 공간들로 채워 갈 것이 아니라 시민들이 무료로 편하게 이용할 수 있는 곳들이 다양하게 많아져야 한다. 그리고 그곳들은 자동차가 아니라 걸어서 갈 수 있을 만한 거리에 분포되어 있어야 하고, 서로 연결되어야 한다. - P92
물리학에서 중력 에너지의 영향은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해서 줄어든다고 배웠다. 예를 들어 지구와 달의 거리가 지금의 2배로 늘어나면 중력의 영향은 4분의 1이 된다는 식이다. 이와 동일하지는 않겠지만 건축 공간에서도 이 중력의 법칙은 비슷하게 적용될 수 있다. 아무리 좋은 공원이 있다고 하더라도 거리가 멀면 그 쓰임새는 줄어든다. - P95
중력의 공식이 공원의 쓰임새에도 적용된다면 다음과 같은 계산이 나올 수 있다. 예를 들어 4천 평짜리 공원이 있다고 하자. 그 공원이 한 시간을 걸어가야 하는 4킬로미터 밖에 떨어져 있으면, 그것은 마치 2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1천 평짜리 공원과 쓰임새가 비슷한 것이라고 볼 수있다. 마찬가지로 1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250평짜리 공원과 쓰임새가 같으며, 5백 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60평 정도의 공원과 비슷한 효과를 낸다. - P95
그러니 아주 작은 마당이라고 하더라도 내 방 앞에 있는 마당은 몇 킬로미터 밖의 수천 평 공원과 비슷한 효과를 가진다고 볼 수 있다. 공원이 우리 가까이 있어야 하는 이유다. - P95
우리나라가 전 세계에서 단위 면적당 가장 많은 카페를 보유한 이유는 결국 우리 국민들에게 앉아서 쉴 곳이 없기 때문이다. - P95
교통기관을 이용하지 않고 걸어서 갈 수 있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경험은 연속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골목길의 옆집 친구 집에 갈 때와 엘리베이터를 타고 다른 층의 친구에게 갈 때의 느낌은 다르다. - P97
우리 중 누구도 ‘우울한데 엘리베이터나 타자‘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하늘을 보고 햇볕을 받으며 골목길을 걸으면 기분 좋지만 답답한 상자인 엘리베이터를 타고 가는 경험은 유쾌하지 않다. 몇 십만 년의 경험이 유전자에 각인되어 우리는 주광성 동물이 되었다. - P96
교통기관을 타면 답답한 실내 공간 속 기억 때문에 경험이 단절된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장소로 가고 싶어 하지 않게 되고 자신의 현재 공간 속에 갇히게 된다. - P96
우리의 도시에는 보행자 중심으로 연결되는 네트워크가 필요하다. - P96
우리 삶의 질이 떨어지지 않고 더 행복해지려면 도시 전체를 내 집처럼 즐길 수 있어야 한다. 보행자 중심의 네트워크가 완성되고 촘촘하게 분포된 매력적인 ‘공짜‘ 공간이 많아지는 것이 건축적인 해답이 될 수 있다. - P96
필자는 전작에서 사람들이 걷고 싶어 하는 성공적인 가로는 ‘지하철역과 공원 사이를 연결하는 1.5킬로미터 정도의 거리‘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 P97
상업 시설 없이 산책로만 있는 곳에 누가 가겠는가? 시간이 많은 사람만 간다. 이말은 현재 우리의 서울에는 시간 많은 사람이 산책하는 길은 많지만 일상 속에서 즐길 수 있는 보행자 도로는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 P97
일상과 자연이 함께 공존하는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 - P97
우리 국민은 지난 40년간 꾸준하게 자가용의 소유를 늘려 왔다. 그 이유는 도시의 도로를 나만의 사적인 공간으로 만들기 위해서다. 내가 차를 소유하면 전국의 모든 도로는 나의 사적인 공간이 된다. 현재 우리의 차도는 실제로는 사적인 이동 공간으로 변화하고 있는 중이다. - P99
도시 내에서 내 소유의 공간이 부족한 사람들은 머무를 공간을 찾아다닌다. 그래서 사람들이 주말마다 산에 가는 것이다. 왜냐하면 도심 속에는 정주할 공간이 없어서다. - P101
안타까운 것은 우리나라 대부분의 녹지공원은 경사져 있다는 점이다. 경사졌다는 것은 앉아 있지 못하고 계속 이동해야 하는 공간이라는 뜻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경사면 때문에 산은 머무를 수 있는 공간이 아니다. 그러니 서울 주변에 아무리 좋은 산이 많아도 우리는 공적인 정주 공간에 목이 마른 것이다. - P101
공공의 정주 공간이 사라지니 우리가 공간을 점유하려면 사적으로 돈을 내야 하는 사회가 되었다. 카페를 비롯해 비디오방, 노래방, 찜질방도 마찬가지다. - P101
힙합 가수들은 후드티를 많이 입는다. 수건을 머리에 둘러쓰고 후드를 쓰기도 한다. 이러한 행위는 시선을 차단해서라도 자신만의 공간을 가지려는 노력이다. - P102
후드티는 미국에서도 흑인 힙합 문화의 상징이다. - P102
건축적으로 보면 후드티를 입는 사람들은 자신의 공간을 가지기 어려운 도시 빈민들이다. 이들은 어떻게든 자신만의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시선을 차단하고 자신의 영역을 만들려고 한다. 지붕이 있는 공간을 소유하지 못하니 모자를 쓰고, 후드를 뒤집어쓴다. 주변이 안 보이니 머리를 좌우로 두리번거려야 한다. 이런 행동이 힙합의 무브(움직임)다. - P103
후드티를 입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행동은 자신만의 사적인 공간이 없을 때 자연 발생적으로 만들어진 행동 패턴이다. 손을 좌우로 넓게 흔드는 것도 힙합 춤의 형태다. 자신의 공간을 확보하려는 액션이다. 이 모든 것이 자신의 공간을 구축하려는 가장 저렴한 방식이다. - P103
힙합 문화에서는 커다란 헤드폰을 끼고 다닌다. 그런 헤드폰은 ‘나는 세상의 소리를 듣지 않겠다‘라는 사회에 대한 저항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다. 청소년기 아이들이 헤드폰을 끼고 다니는 것도 마찬가지다. 큰 헤드폰은 ‘나를 내버려 두라‘는 무언의 메시지다. 벽으로 소리가 차단된 공간을 가질 수 없는 사람이 가장 손쉽게 청각적으로 독립적인 공간을 만드는 방식이 헤드폰이다. - P104
우리는 청각, 시각, 촉각, 후각을 통해서 외부 세계와 소통한다. 이런 감각들 중 일부를 제어하면 외부와 차단된 사적인공간을 만들 수 있다. 헤드폰은 그중 청각 제어 장치다. 우리가 지하철에서 이어폰으로 음악을 듣는 것은 공적인 공간에서 사적인 공간을 만들려는 몸부림이다. - P104
나를 드러내지 않고 다른 사람을 엿보는 것을 ‘관음증‘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런 관음증은 본능이자 권력을 나타낸다. 훔쳐볼 수 있는 사람은 보이는 대상이 되는 사람보다 더 권력을 가지는 것이다. - P104
도시에서 자동차 안의 공간은 일부러 불을 켜지 않으면 항상 밖보다 어둡다. 어두운 자동차 안에 있으면 나를 드러내지 않고 다른 사람을 관찰할 수 있다. 자가용은 관음증을 충족시켜 주는 장치다. 익명으로 댓글을 쓸 때 폭력적이 되는 것처럼, 자동차 안에서는 숨어서 자신을 감출 수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운전할 때 더 난폭해지는 것이다. - P104
자가용이 없을 때 관음증을 가장 손쉽게 만족시킬 수 있는 방법은 선글라스를 쓰는 것이다. 언론에서 사람의 신상을 드러내지 않고 싶을 때 흔히 사진 속 사람들의 눈에 검정색 테이프를 붙인다. 사람의 눈은 이처럼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게 하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그래서 눈을 가려 주는 어두운 선글라스는 밖은 볼 수 있지만 내가 누구인지는 모르게 하는 가장 효율적인 장치다. - P105
자동차, 헤드폰, 장갑, 선글라스는 복잡한 세상 속에서 내 공간을 만들려는 장치들이다. - P105
적어도 화장실만큼은 생리적인 이유로 개인의 사생활이 보장되는 공간 - P105
요즘 주택의 평면도를 보면 화장실이 점점 늘어나는 추세다. 중형 아파트의 경우 예전에는 두 개였다가 최근 지어지는 고급 주택들은 방마다 따로 화장실과 샤워실을 두는 경향이 있다. 이처럼 현대 건축은 사적인 내부 공간의 면적을 늘려 가는 추세다. - P105
여러 사람이 한 집에서 함께 화장실을 사용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화장실을 계속 늘리는 것과 아니면 화장실에 들어와도 문제가 되지 않는 인간관계를 만드는 것이다. - P106
현대사회는 화장실을 계속 늘리는 방식, 즉 사적 공간을 끊임없이 만드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이런 변화의 방향은 건축을 넘어 도시까지 확장된다. 현대 도시는 사적인 공간으로 가득하다. - P106
제한된 도시 공간에서 윤택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이 시대에 맞는 사적 공간과 공적 공간의 황금 비율을 찾아내야 한다. - P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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