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말만 하면 사람의 마음을 다 알 것 같기도 한데 단순히 말만 한다고 사람의 마음을 다 알 수 있는 것도 아니라고 하는 글쓴이(황인찬 시인)의 얘기가 흥미롭습니다.

또한 침묵과 여백이, 말을 하지 않는 일이 더 많은 말을 할 수 있다는 얘기에선 처음 밑줄 친 부분에 나왔던 옛날 광고 카피 하나도 생각납니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뭐 요즘에 이 광고 카피가 ‘말하지 않는데 어떻게 아느냐?‘ 는 식으로 여기저기서 많은 사람들이 반론을 제기하던데, 글쓴이의 글을 읽어보면서 어떤 부분에서는 이 광고 카피 문구가 아직까지도 유효한 의미를 지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언어외에도 비언어적인 의사소통 도구들 (예를 들어, 표정이나 뉘앙스 같은 것들)이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언어와 비언어적인 의사소통 도구들이 온전히 결합해야 사람의 마음을 온전하게 읽어내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명목상으로는 좋게 말했지만 그 내면의 마음은 꼭 좋지만은 않을 수 있고, 혹은 그 반대의 경우도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관계나 감정적 교류같은 것들이 결코 단순하지 않고 여러가지 요소들을 종합적으로 생각하면서 해야 하는 것들이라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쉽지 않은 영역인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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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95~98에 나오는 소설가 이미상 님의 에세이에서는 연말연시에 느껴지는 솔직한 감정들을 가감없이 공감할 수 있어서 뭔가 동질감 같은게 느껴졌다. ‘아, 나만 이런 생각이나 느낌을 갖고 있는 게 아니었구나‘ 같은 거라고나 할까?

이에 더해 이분이 갖고 계신 에세이에 대한 철학(?) 혹은 소신(?)에 대한 내용도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있어서 좋았다. 개인적으로는 자기 얘기 없이 단순히 객관적인 사실만을 전달하는 글은 교과서나 전공책 같은 거로 족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어느정도 있는 게 사실이다. 사실을 기반으로 하더라도 자신만의 생각이나 느낌 같은 걸 약간이라도 남겨주는 게 에세이의 묘미가 아닐까 싶다.

p.100~104에 나오는 조향사 김태형 님의 에세이에선 새로운 세계를 여행한 듯한 느낌을 받았다. 조향사는 제품에 향기를 부여하는 향료를 개발하는 사람인데, 일단 조향사라는 직업부터가 생소했고, 추출과 복제의 과정을 통해 각양각색의 향을 만들어내는 이야기들 또한 그랬다. 하지만, 읽으면서 들었던 느낌은 여러가지 향을 만드는 뭔가 숭고한 일 같다는 것이었다.

독자인 나도 완전히 처음 접하는 분야이기에 여기 나온 몇 페이지의 글만으로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뭔가 고고하다(?)는 느낌도 들었던 게 애초에 향이라는 것의 유래가 장례식장 같은 곳에서 피우는 그 향에서 기원했다는 얘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죽음으로부터 탄생한 재료들을 사용했다는 얘기도 나오는 걸 보면 내 느낌에 좀 더 무게를 실어주는 것도 그리 나쁘진 않을 듯 하다.

향과 관련된 이야기 중간에 ‘CAS N° 107-75-5‘ 이라는 난생 처음보는 일련번호(?)같은 것이 나온다. 이것이 어떻게 추출되는 지를 글쓴이인 조향사께서 설명해 주셨는데, 독자인 내가 화학에 대해 잘 몰라서 무슨 의미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었지만, 대략적인 핵심은 어떤 물질이 다른 물질과 결합했다가 분해하는 과정을 통해 ‘CAS N° 107-75-5‘라는 인공 분자를 추출할 수 있었다는 내용인듯 보였다.

(이렇게 복잡해보이는 것을 개발해내시는 화학자분들께 진심으로 존경의 마음을 표하는 바입니다.)

글 마지막에 조향사 님의 프로필이 있는데 이학 석사 학위를 받으신 걸로 보아 화학을 비롯한 자연과학 쪽에 대한 지식이 일정 수준 이상 있으신듯 보이고, 그렇기에 이러한 향을 느끼고 혹은 새롭게 만들어 내는 일이 가능하셨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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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06~114까지는 김연덕 시인이 쓴 에세이가 나온다. 유리, 물, 다이아몬드에 관한 글인데, 이 글 역시도 생소하면서도 신선하게 느껴졌다. 사람이 아닌 어떤 대상에 대해 쓴 글이라서 그런건지도 모른다. 각각의 물질별로 그 특성을 캐치하여 거기에 맞게 글을 풀어나가는 능력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말하지 않아도 안다는 옛날 광고 카피도 있었지만, 말을 해도 알 수 없는 것이 사람의 마음일 것입니다. 말이란 것은 참 헐거운 그물같은 것이어서 거기에 어떤 의미를 담으려 한다고 해도 그 뜻이 온전히 전해지기는 어려우니까요. 말하는 동안 의미는 조금씩 훼손되거나 소실되어버릴 따름이죠. - P91

말은 참 한계가 많은 도구인 셈입니다. - P91

말로는 도무지 다 전할 수 없어서 어떤 사람들은 억양과 소리에 변화를 주기도 하고, 그건 결국 노래가 되어 마음을 전하게 되기도 합니다. 인상적인 표정이나 몸짓을 갈고 닦는 일은 연기나 무용 등의 육체를 기반으로 한 예술 형식으로 이어지기도 할 테고요. 말로는 도무지 다 할 수 없어서 말을 줄이기로 결심하는 일을 시 쓰기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 P92

예술이란 결국 언어는 물론이고 손짓과 발짓, 그 모든 것을 다 써도 전할 수 없는 무엇인가를 전하기 위해 고도화된 소통 양식이니까요. 때로는 알쏭달쏭하게 느껴질 때도 있겠지만, 그 알쏭달쏭함이 오히려 더 정확한 소통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는 법이지요. - P92

침묵과 여백이, 말을 하지 않는 일이 오히려 더 많은 말을 할 수도 있기 때문 - P92

손짓도 발짓도 눈짓도 없이, 심지어는 이렇다 할 말도 없이모든 것을 전해주는 일, 그것이야말로 시가 가장 잘하는 일 - P93

에세이는 자기 고백에 특화된 장르 아닌가. - P95

에세이 독자로서 나는 자기 이야기를 내놓지 않는 에세이 작가를 증오하며 사생활이라는 긴 혓바닥으로 싹싹 핥지 않은 에세이, 침에 흥건히 젖지 않은 멀끔한 에세이는 재미없다고 느낀다. 남 어떻게 사는지 보려고 에세이 읽지 그거 아니면 왜 읽나. - P95

흥분과 후회. 연말에는 이 두 가지 상태가 번갈아 융기하며 사람을 들었다 놓는다. 사람에 따라서 흥분과 우울, 흥분과 공허로 변주될 것이다. 어찌 되었든 붕 떠올랐다가 뚝 떨어지는 감정의 격한 파고는 한국인에게 비단 연말에만 경험되는 특이한 감각은 아니다. 모닝커피와 에너지 음료로 각성과 흥분 상태를 일으켜 피로를 밀어내며 하루 일과를 시작하고, 하루가 끝날 즈음에는 다시 피로와 우울로 가라앉는 일이 매일 반복된다. 한국, 특히 도시에 사는 사람은 어느 정도는 다들 조울 상태이며 그래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 P97

그러나 12월에는 흥분과 후회, 흥분과 우울, 흥분과 공허의단차가 더욱 큰 것 같다. 휘장을 두른 듯 세상에 걸쳐진 모든 반짝이는 것들, 크리스마스트리와 전구를 휘감아 크리스마스트리 -화 된 보통의 나무들, 캐럴, 카드, <나 홀로 집에>의 케빈이 우리를 설레게 한다.
동시에 한 해가 끝났다는 사실이 마음을 스산하고 심란하게 만든다. - P97

어찌 되었든 연말은 즐겁고 힘든 시기다. 그래도 나에게 힘이되는 것은 많은 사람이 나와 비슷할 것이라는 상상이다. 오늘 나와 웃음만을 나누며 함께 까불댄 동료의 귀갓길이 나처럼 쓸쓸할 것이라는 상상, 올해의 잘못한 일과 잘 못한 일을 꼽다가 불면의 밤을 보낸 내가, 어느 교회 앞 크리스마스트리의 신경쓴 색 조합(파란 리본, 파란 구슬, 파란 별)에 왠지 기분이 좋아지는 것처럼 다른 이들의 마음도 어둡다가 뜬금없이 밝아질 것이라는 상상. - P98

이맘때쯤이면 모두가 비슷비슷한 마음일 것이라는 상상이의외로 마음을 다독여준다. 다들 점멸하는 크리스마스트리의 작은 전구처럼 마음이 밝아졌다가 어두워졌다가 깜빡이며 한 해의 마지막을 보내지 않을까. 오로지 슬프지도 않고 오로지 기쁘지도 않은 그 중간 어디에서 약간은 쓸쓸하지만 그래도 한 해 애썼다, 잘 보냈다, 말하며 자기 자신에게 가혹해지지 않으려 애쓰고 있지 않을까. 그랬으면 좋겠다고 진심으로 생각한다. - P98

나는 글쓰기를 통해서도 연말이라는 지옥을 빠져나가는 방법을 배웠다. 작가마다 다르겠지만 글을 쓴다는 것은 자신을 감정의 롤러코스터에 스스로 개방하는 일이다. 많은 작가가 밤의 흥분 속에서 글을 휘갈기고, 아침의 차분함으로 글을 고친다. 어제는 더없이 좋아보였던 글이 불과 열두 시간 만에 한 글자도 건질 게 없는 넝마로 변하는 일은 흔하다. 이러한 극단을 줄이는 길은 인내심을 가지고 글을 계속 고치는 것뿐이다. - P98

흥분에 겨워 쓴 글은 살아 있지만 거칠고 부정확하다. 그렇다고 자신이 쓴 글을 지나치게 의심하고 부정하면 개성이 사라진다. 흥분과 후회라는 극단 사이에서 미묘한 톤을 찾아가며 글을 계속 쓰고 고치는 지구력이 결국 차분함에 이르게 한다. - P98

통곡 소리는 결코 관을 넘지 못한다. 죽음은 산 사람들의 몫이기 때문이다. - P101

향을 한다는 행위는 애초에 죽은 것들을 다루는 일이다. - P101

오래전부터 조향사들은 꽃과 허브, 나무와 뿌리의 영혼을 추출하고 혼합했다. 고대 이집트에서 조향이란 사제들만이 행할 수 있는 신성한 작업이었다. 그들은 에드푸(Edfu) 신전의 가장 깊숙한 곳에서 신과 죽은 자를 기리는 향기를 빚었다. - P101

오드콜로뉴 (Eau de Cologne)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는 장 마리 파리나(Jean Marie Farina)는 최초의 알코올성 용매에 자신의 향기를 품게 하였다. 그가 사용한 용매는
‘에스프리드뱅(Esprit-de-vin)‘, 즉 와인의 영혼이다. - P101

이렇듯 조향사는 죽음으로부터 탄생한 재료들로 자수를 놓는 일을 하며 살아왔다. - P101

인류가 향분자를 다루기 시작한 가장 원초적인 방식은 천연물에서 특정 물질만을 분리(Isolation)시키는 것이었다. - P101

유럽은 8~10세기경 아랍에서 증류추출(Distillation)의 원리를 도입하여 혼합물을 각기 다른 물질로 분리하는 기술을 발전시켜왔다. 이를 통해 1771년 민트에서 멘솔(Menthol)을, 1816년 바닐라에서 바닐린(Vanillin)을 추출하였다. - P102

1868년 영국의 화학자 윌리엄 퍼킨은 살리실알데히드와 무수초산을 촉매 반응시켜 쿠마린(Coumarin)을 합성하였다. 쿠마린은 우비강(Houbigant)의 후제르 후와이알(Fougere Royale, 1828)에서 통카빈(Tonka bean)을 대체하며 최초로 사용되었다. 20세기 남성 향수 시장을 지배한 전설적인 향수 계열, 후제르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 P102

합성향료의 종착지는 자연에 존재하지 않으며 오로지 향을 조합하기 위해 만들어진 새로운 분자이다. 오늘날의 조향계는 천연물의 영혼을 뽑아내는 것도, 모방하는 것도 아닌 새로운 무언가를 탐색하고 있다. - P102

한 단계 진일보한 방식은 천연물에 존재하는 물질을 복제하는 것이다. 당대 과학자들은 터무니 없을 정도로 비싼 천연 향료와 그것에서 추출된 물질들을 저렴하게 구현하기 위한 연구에 몰두했다. - P102

‘은방울꽃은 영혼을 팔지 않는다.‘
조향계에는 이러한 말이 있다. 프랑스어로 뮤게(Muguet)라불리는 은방울꽃은 연두색 줄기를 따라 방울을 닮은 꽃망울들이 교차로 매달려 있는 청초한 자태를 지녔다. 그 향기는 실로 화룡점정이다. 향으로 망막을 적실 수 있다면 나는 이슬이 맺힌 도톰한 우윳빛 꽃잎을 보았다 할 것이다. - P102

은방울꽃은 5월을 전후로 한 달 남짓의 아주 짧은 시간 동안만 개화한다. 고작 한 달이지만 만인을 자신의 향기에 매료시키기에 부족함 없는 기간이다. - P102

지금껏 수많은 조향사들이 은방울꽃의 아름다움을 추출하기 위해 안간힘을 써왔지만 현존하는 어떠한 기술로도 그것에 도달하지 못하였다. 은방울꽃은 그의 영혼을 팔지 않는다. 다만 은방울꽃은 자신의 영혼을 꿈꾸게 만든다. - P102

1905년 독일의 화학 기업 Knoll 이 개발한 CAS N° 107-75-5의 하이드록시시트로넬알(Hydroxycitronellal)은 자연에서 발견되지 않는 인공 분자이다. 조향계에서는 화이트 플로럴 계열로 분류되며 우비강의 깰끄 플뢰르 (Quelques fleurs, 1912)에서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 P103

CAS N°*107-75-50

*공개 과학 문헌에 기술된 모든 화학물질에 대해 미국 화학물질 초록 서비스(CAS, Chemical Abstracts Service)가 부여하는 고유식별 번호. - P101

C10H2002의 분자식을 갖는 CAS N° 107-75-5는 8개의 탄소로 이루어진 선형 구조이며 알파 탄소에 알데하이드기 (Aldehyde)가 위치해있고, 3번 탄소에 하나의 메틸(Methyl)기, 그리고 7번 탄소에 메틸기와 하이드록실(Hydroxyl) 기를 가지고 있다. - P103

CAS N° 107-75-5의 합성은 시트로넬랄(Citronellal)에서 시작된다. 해당 분자가 디에탄올아민(Diethanolamine)과 반응하여 생성된 옥사졸리딘(Oxazolidine)유도체를 진한 황산에 용해시키면 분자 끝에 위치한 이중 결합이 끊어지며 황산에스테르염이 만들어진다. 이것에 물을 첨가하면 황산에스테르염과 옥사졸리딘 고리가 모두 가수 분해되어 하이드록시시트로넬알을 형성한다. - P103

CAS N° 107-75-5가 가장 빛을 발하는 향수는 디올(Dior)의 디오리시모(Diorissimo, 1956)이다. - P103

디올의 초대 전속 조향사였던 에드몽 후드니츠카 (Edmond Roudnitska)는 자연주의 조향사라 불리었다. 천연향료만을 가지고 향을 만들어내어서가 아니라 합성 향료들을 사용하여 자연의 향기를 담아내는 능력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그 중심에는 CAS N° 107-75-5가 있었다. - P103

디오리시모가 수십여 년 동안 은방울꽃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비결은 마케팅적 효과나 브랜드의 입김 따위가 아닌 오로지 그의 향기이다. 만일 내가 디올의 부띠끄를 기웃거리던 시향자였다면 이들이 마침내 은방울꽃의 향기를 추출하였다고 믿었을 것이다. - P103

조향계는 진정 누군가의 영혼을 구걸하지 않게 되었을까. 그 어떤 향 분자가 개발된다 하더라도 조향사는 무언의 꽃이 전하는 향기를 쫓는 행위를 멈출 수 없다. 세상에 없던 분자가 탄생하면 이는 잡을 수 없는 영혼의 환상을 비추는데에 사용된다. 적어도 조향계에서는 그러하다. - P103

인간은 필멸을 기다리며 죽음을 두려워하는 운명을 타고났다. 하나의 축복이라면 우리는 죽음도 꿈꿀수 있다는 것이다. - P104

CAS N° 107-75-5가 담긴 향료병을 집어들 때마다 그 향기를 거두러 온 은방울꽃의 여신이 자신의 영혼을 내어주는 꿈을 꾼다. 아아, 죽음은 퍽 나쁘지 않은 환상이구나. - P104

죽음은 무어라 읽어도 죽음이다. 하지만 나는 이제 다르게 써볼터이다.

죽음은 꿈, 죽음은 환상. - P104

essay-parfum은 문학과 향기에 대해, 언어와 조향에 관해 신비롭고 낯선 세계를 접해보는 코너입니다. - P100

창 없이 벽으로만 이루어진 집에 산다면 우리는 며칠도 채 견디지 못할 것이다. 흉악 범죄자들이 머무는 교도소의 독방에도 작은 창을 내어주는 이유다. - P106

유리의 투명함이 가능하게 하는, 가능하지 못하게 하는 시야들. 씀으로써 분명해지는 것과 흐려지는 것이 있다는 점에서, 다른 몸으로 가책 없이 살아볼 수 있다는 점에서 유리야말로 쓰기의 상징이라는 생각이 든다. - P108

날씨에 따라 유리가 투과하는 빛의 양이 다르듯, 쓰는 사람이 당면하고 있는 외부 현실에 따라 단어와 문장의 조리개는 다르게 열리고 닫힐 것이다. 조리개는 읽는 이의 얼굴을 쓸쓸하게도 환하게도 무섭게도 만들 것이다. 빛의 목소리는 날마다 달라질 것이다. - P109

자신이 주의력 없이 다루어진 데 대한 화를 이토록 인상적으로 내는 물질을 나는 처음 보았다. 180도 다른 몸이 되어 사람의 혈관에 가까이 가려는 시도를 하는 물질을, 감정이 이렇게까지 확실하게 응집된 물질을 처음 보았다. - P110

소각장에서 책이 소각되면 매운 연기가 콧속으로 들어오듯이, 유리는 자신의 방식대로 사람에게 흔적을 남기는 것이다. - P110

거울은 유리 뒷면을 가공해 만든다. 유리 뒤를 막아 빛이 반사되게 하여 상을 볼 수있게 해주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물의 뒷면은 막힌 것 없이 열려 있다. - P111

다이아몬드와 흑연은 동일한 원자로 구성되어 있지만 분자구조상의 차이로 다른 위치에 있게 되었다. 깊이와 높이와 재질이 다른 상자 속에 머물게 되었다. 다이아몬드는 열쇠로 열고 들어가야 꺼낼 수 있는 장식장 상자 안쪽에, 흑연(연필)은 펜과 각종 잡동사니가 아무렇게나 섞여 들어가 있는 나무 상자 안쪽에. - P113

모든 것은 잠깐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노인이나 시체가 되어도 이 환하고도 외로웠던 순간을 잊지 않을 것이다. - P114

‘회빙환(희귀 빙의 환생)‘이 하나의 장르로 자리매김하면서 여러 매체를 통해 ‘다시살기‘라는 아이디어가 소비되고 있습니다. 내가 아닌 내가 되고 싶은 욕망,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내가 아닌 존재가 되는 일 혹은 내가 아닌 존재에게 ‘들리는‘ 일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 P118

지난주 월요일에 지원에게 갑자기 연락이 왔올 때 예은은 바로 답장하지 않았다. ‘잘 지내?‘ 그 말에 답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날은 온종일 지원의 메시지가 마음에 무겁게 얹혀 있었다. - P121

여행이 정해진 그날부터 예은은 가슴이 설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불편한 마음도 있었다. 지원을 떠올리면 마음속에서 뭔가 불편한 덩어리 같은 것이 느껴졌다. ‘그것‘은 마치 작은 짐승 같았다. 건드리면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털로 뒤덮인 흉측한 작은 짐승, 예은은 그것이 튀어나오지 않기를 바랐다. 특히 이번 여행에서는. - P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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