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 포스팅에 이어서 이 소설 앞부분에 나왔던 린샹푸와 샤오메이, 아창간의 관계에 대한 흩어져 있던 퍼즐들이 조금씩 덩어리를 이루며 맞춰쳐가는 듯한 느낌을 지속적으로 받을 수 있었다.

작년 가을 쯤에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욘 포세 작가의 작품들 중에 ‘보트하우스‘라는 작품을 읽은 적이 있는데 그때 썼던 리뷰 중에 소설의 구조에 대한 얘기를 잠깐 썼던 기억이 났다. 그 당시 욘 포세는 각 등장인물의 관점에 따라 동일한 사건을 두 번 기록했었다. 마치 ‘데칼코마니‘처럼 말이다. 동일한 사건도 그것을 보는 등장인물의 시각과 생각에 따라 다르게 보여질 수도 있지만 어찌됐든 겉으로 드러난 사건들은 동일한 것이기에 ‘데칼코마니‘라는 표현을 썼었는데, 지금 읽고 있는 이 위화 작가의 ‘원청‘이라는 소설에서도 욘 포세의 ‘데칼코마니‘ 방식과 얼추 비슷한 형태로 내용이 전개된다는 느낌을 받았다.

약간의 차이라고 한다면 ‘데칼코마니‘ 그림이 완벽한 좌우대칭이 아니라 약간은 위아래로 어긋난(?)느낌이 있다는 점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동일한 사건이 시간적으로 어긋나게 그려져서 전체적으로는 비슷해보이지만 약간의 차이가 있는듯한 느낌이다.
이유인즉, 지금 읽고 있는 아창과 샤오메이의 관점에서 쓰여진 소설 뒷부분의 초반부 내용은 이 전체 소설의 앞부분에선 전혀 언급되지 않았던 비하인드 스토리였기 때문이다.

린샹푸를 만나기 전 아창과 샤오메이라는 사람이 겪었던 일련의 일들은 이 전체 소설의 앞부분에선 일절 언급이 없다가 지금 독자인 내가 읽고 있는 뒷부분에 와서야 그 비밀이 밝혀진 것이다. 뒤늦게나마 린샹푸가 메인이었던 이 전체 소설의 앞부분과 아창과 샤오메이가 등장한 뒷부분이 어찌어찌(?)하여 결국에는 연결되는 구조가 이루어진 것이다. 작품의 내용과 별개로 소설이 구성되는 방식 자체가 참으로 탁월하면서도 신선하게 느껴졌던 부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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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내용으로 돌아와서, 샤오메이가 린샹푸와 잠시 함께 있다가 떠나는 장면이 나온다. 떠난 뒤 아창이 있을 법한 곳을 찾아 헤매다가 웬 거지하나를 갑자기 만나게 되는데, 이게 무슨 일인지... 그 거지가 아창이었다. 그동안 들고 왔던 돈을 모두 다 써서 역참인근에서 구걸생활을 하는 중이었던 것이다. 샤오메이는 눈물을 보인다.

어찌됐든 이 둘은 다시 재회하여 다른 곳으로, 정확히 말하면 남쪽으로 떠나는데, 길을 가는 와중에 린샹푸의 아이를 임신하였음을 깨닫는다. 이에 샤오메이는 아이를 낳기 위해 다시 린샹푸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려 한다.

돌아온 샤오메이는 린샹푸의 딸을 출산하고 지역 풍습에 따라 산파가 일러주는대로 행동한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아창과 약속한 한 달이 지나고, 샤오메이가 낳은 딸도 스스로 목을 가눌 수 있을 정도로 자라자 샤오메이는 이제 떠날 결심을 한다.

샤오메이는 자신의 결심에 따라 린샹푸의 집을 나와서 아창이 있기로 약속했던 장소인 딩촨으로 가서 아창과 재회한다. 오랜만에 만난 그들은 잠시 얘기를 나눈뒤 다시 남쪽으로 이동을 시작한다. 아창은 처음에 그들의 좋은 추억이 남아있는 상하이로 갈 줄 알았는데 샤오메이가 아창의 부모님이 계신 시진으로 갈 거라는 얘기를 하자 살짝 놀란다.

한편 시진에 있는 아창의 어머니는 샤오메이와 아창이 집을 떠난 뒤 어느 날 부턴가 부쩍 말 수가 줄더니 우울감에 빠져버렸다. 또한 아창의 아버지는 아창이 자신이 모아두었던 많은 돈을 들고 도망간 것에 대한 원망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갈수록 기력이 쇠해지던 아창의 어머니는 함께 있을 때 구박하고 타박만 했던 대상인 샤오메이를 마지막 순간 다급히 찾다가 결국 숨을 거둔다.

아창의 어머니가 먼저 숨을 거두고 해가 바뀐 뒤 아창의 아버지도 기력이 쇠약해진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그 때 아창과 샤오메이가 돌아온다. 아창의 아버지는 두 사람에게 아창의 어머니가 사망했다는 사실과 함께 죽기 전에 있었던 일들을 덤덤하게 이야기 해준다.

샤오메이는 린샹푸 집에서 가을의 절반과 겨울을 보낸 뒤 2월 초봄에 조용히 떠났다.

린샹푸는 북쪽 대지처럼 강인한 데다 선량하고 생기발랄하며 현실에 만족하는 사람이었다.

샤오메이는 아창이 매일 어떻게 지내는지, 딩촨의 역참에서 멸시받지는 않는지 알 수가 없어 마음을 졸였다. 그러다 밭에 나가 농작물을 살피고 돌아온 린샹푸가 그녀 앞에 서면 그녀의 생각은 아창에게서 빠져나와 린샹푸에게로 옮겨갔다. 린샹푸는 그녀를 편안하게 해주었다.

작업실에서 린샹푸가 나무를 두드리고 대패질하는 소리가 흘러나오면 그녀는 베틀소리로 호응했다.

칼로 물을 가르면 물이 더 세차게 흐르는 것처럼 아창에 대한 걱정이 깊어질수록 이곳 생활에 더 잘 적응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샤오메이의 마음에 미묘한 변화가 생기고 눈빛도 달라졌다. 아창을 걱정하는 동시에 린샹푸가 밭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그런 날들이 부지불식간에 하루 또 하루 지나가다가 급히 혼례를 치렀을 때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혼례를 치른 밤 린샹푸가 벽 틈새에서 나무 상자를 꺼내 금괴를 보여주었을 때 샤오메이는 화들짝 정신을 차리고 자신이 떠나야 할 때임을 감지했다. 그러고 나자 갑자기 길이 끊긴 막막한 대지 위에 서 있는 듯 막막해졌다.

남색 장삼이 사라진 뒤에는 아창이 떠올랐다. 궁상맞은 차림새와 아쉬움이 가득한 표정 그리고 남색 장삼을 입지 않은 그의 모습에 샤오메이는 금괴가 담긴 상자를 떠올리며 몸서리를 치고는 떠날 때가 되었다고 확신했다. 몸에서 이상한 신호가 느껴져 조금 걱정스러웠지만 깊이 생각하지는 않았다.

린샹푸는 세상 어떤 여자도 따라올 수 없을 거라며 샤오메이의 손재주를 칭찬했다. 하지만 린샹푸가 아무리 진심으로 기뻐해도 그 기쁨이 샤오메이에게 전해지지는 않았다. 샤오메이의 눈에서 흐르는 근심을 린샹푸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부엌 탁자와 부뚜막에 음식이 잔뜩 쌓였는데도 린샹푸는 눈치채지 못하고 명절 분위기가 난다며, 금방 설을 쇘는데 어째 또 설이 오는 것 같다고 웃었다.

떠나기 전날, 샤오메이는 린샹푸가 밀을 살피러 밭에 나갔을 때 벽 틈새에서 그 상자를 꺼내 큰 금괴 열일곱 개와 작은 금괴 세 개를 바라보았다. 잠시 망설이다가 그녀는 큰 금괴 일곱 개와 작은 금괴 한 개를 흰 천으로 잘 싸서 작은 보따리에 넣고는 상자를 도로 벽 틈새에 집어넣었다.

구들 앞에서 샤오메이는 잠든 린샹푸를 달빛에 의지해 자세히 살펴보았다. 아쉬움과 죄책감이 밀려들었다. 이제 평생 다시는 만날 수 없을 이 남자를 그녀는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샤오메이의 얼굴에 눈물이 흘러내리고 흐느낌이 터져나왔다.

눈물은 어느새 새벽바람에 마르고 이제 그녀의 가슴에는 아창만 가득했다. 아창과 헤어진 지 5개월이 되었다는 게 떠올랐다. 그녀는 그 5개월을 따라 잡으려는 듯 큰길에서 걸음을 재촉했다.

오후부터 땅거미가 내릴 때까지 샤오메이는 그렇게 망연히 서 있었다. 그때 멀리에서 남루한 거지가 달려오며 손을 흔드는 게 보였다. 그 거지가 부르는 소리도 들렸다.
"샤오메이."
샤오메이는 아창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잰걸음으로 다가갔다. 아창의 얼굴이었다.

아창은 멀리를 가리키며 방금 저쪽에서 왔다고, 매일 저기에서 역참 쪽을 바라보았다고, 하루에도 몇 차례나 보면서 샤오메이가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매일 쳐다봤다고 털어놓았다. 그러고 나서 아창은 울면서 말했다.
"결국에는 왔네."
샤오메이는 눈물이 앞을 가려 아창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아창에게 할 말이 무척 많았지만 흐느낌밖에 나오지 않았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는 생각하지 않고 그저 남쪽으로 향했다. 남쪽이 그리워서, 남쪽으로 가야지만 편안할 것 같아서였다. 그 안식처가 구체적으로 어디인지는 몰라도 양쯔강을 건넌 뒤 살펴보고 결정하면 될 듯했다.

샤오메이는 기쁜 기색없이 우울한 눈빛이었다. 아창과 재회한 뒤 떠올랐던 웃음도 마차의 흔들림 속에서 차츰 사라졌다. 린샹푸에게서 멀어질수록 그곳에 남겨놓고 온 게 점점 많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게다가 린샹푸의 곁에 있을 때 몸에서 나타났던 이상 반응이 황허를 건넌 뒤 남하하는 마차 속에서 더욱 뚜렷해졌다.

샤오메이는 아이가 들어섰음을 알았다.

샤오메이는 믿음직스럽다는 눈빛으로 아창을 보면서 두 손을 배 위에 올려놓았다. 그건 배 속 아이를 지키겠다는 손짓이었다.

양쯔강이 보이긴 하지만 물소리는 들리지 않는 여관방에서 샤오메이가 갑자기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린샹푸는 모든 것을 주었는데 자신은 그의 금괴를 훔치고 아이까지 데려간다는 생각에 불안과 죄책감이 밀려들었다. 샤오메이는 양쯔강이 이대로 넘어가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경계처럼 느껴졌다. 그러면 린샹푸는 자기 아이를 알지도 못하고 볼 수도 없을 터였다.

샤오메이는 눈물을 훔친 뒤 그동안 계속 맴돌던 생각을 입 밖으로 꺼냈다. 돌아가야겠다고, 린샹푸에게 돌아가 그곳에서 아이를 낳아야겠다고 말했다.

"그 사람 혈육이라고."

아창은 의아함을 떨칠 수 없었다. "금괴를 돌려주지 않는다고?"
"안 돌려줘." 샤오메이가 말했다. "아이를 돌려주는 거지."

"좋은 사람이니까 죽이지 않을 거야."

"죽이더라도 아이를 낳을 때까지는 기다려주겠지."

양쯔강 근처에서 묵은 그날 밤, 샤오메이와 아창의 관계가 뒤집혔다. 이후에는 샤오메이가 아창을 따르지 않고 아창이 샤오메이를 따랐다.

두 사람은 상의한 끝에 딩촨으로 돌아가고, 아창은 다시 딩촨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이번에는 아주 오래 기다려야 할 거야."
"아무리 오래 걸려도 기다릴게."
"여차하면 나는 그곳에서 죽을지도 몰라."

샤오메이는 금괴를 가지고 다니면 무겁고 위험하니까 내일 큰 전장을 찾아가 은표로 바꾸자고 했다.

샤오메이는 린샹푸에게 가까워지자 마음이 물처럼 평온해졌다. 흔들리는 마차 속에서 그녀는 온갖 벌을 떠올렸지만 어떤 벌이 떨어지든 상관없었다. 아이만 낳게 해주면 기꺼이 받아들일 작정이었고, 그녀는 린샹푸가 아이를 낳게 해줄 거라고 믿고 있었다.

샤오메이는 딸의 출생이 다시 떠나라는 재촉처럼 느껴져 억지로 웃을 뿐이었다.

떠나기 전에 산파는 샤오메이에게 복숭아나무 가지를 꺾은 뒤 거기에 붉게 칠한 땅콩 다섯 개와 동전 일곱개를 붉은 끈으로 묶어 놓으라고 당부했다. 복숭아나무 가지는 액운을 쫓고 땅콩은 장수, 동전은 북두칠성의 보살핌과 번성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종이를 넣으면 나중에 학식 있고 예의 바른 사람이 될 겁니다."

"대파가 있으니 똑똑하고 유능한 사람으로 자랄 겁니다."

샤오메이는 딸이 첫 달을 넘긴 뒤에도 떠나지 않았다.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딸과 린샹푸에게 이별을 고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면서도 차일피일 미뤘다.

가축은 굴레를 풀어준 다음에 꼭 산책을 시켜줘야 한다고 말했다.

딸이 목을 가눈 건 성장의 첫걸음을 내디뎠다는 뜻이었다. 샤오메이는 그 첫걸음을 지켜보면서 이제 떠나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지난 번에 떠날 때는 아쉬움과 죄책감이 가득했다면 이번에는 억장이 무너졌다. 이번에는 린샹푸뿐만이 아니라 이제 막 세상에 나온 딸까지 떠나는 거였다.

샤오메이의 대답에 아창은 깜짝 놀랐다.
"시진으로 돌아가는 거야."

아창이 완무당 시리촌에서 샤오메이를 데리고 멀리 타향으로 간 뒤 아창 어머니의 얼굴에서는 엄격함이 사라지고 대신 우울함이 그 자리를 메웠다.

"종이로 어떻게 불을 감쌀 수 있겠어요?"

아창의 아버지는 원래 부지런하고 손재주가 뛰어난 며느리를 마음에 들어해서 아창의 어머니가 기어코 그녀를 내쫓았을 때 며칠을 속상해 했다. 하지만 이제는 툭하면 샤오메이를 구미호라고 욕하며 아들이 그 구미호한테 홀려서 집을 나갔다고 원망하다가 끝에는 샤오메이가 처음 꽃무늬 옷을 훔쳐 입었을 때 내쫓아야 했다고, 그때 마음이 약해진 게 잘못이었다고 후회하며 탄식했다.

그토록 위엄 있던 여자가 점점 눈에서 빛을 잃더니 때로는 정신마저 놓았다. 어느 날 밤 그녀는 숨이 곧 끊어질 듯 헐떡이다가 갑자기 샤오메이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가서 샤오메이 좀 불러와요."
"여기 없다고." 아창의 아버지가 말했다. "샤오메이는 그 불효자식이랑 떠났어."
"떠났다고...."
아창의 어머니가 조용해지더니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 엄격한 여자, 평생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던 여자가 세상을 떠날 때는 샤오메이에 대한 그리움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수선집 문 앞에 걸린 직사각형 간판이 얼룩 덜룩 더러워지기 시작하더니 중간에 새겨진 ‘직‘자는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희미해졌다.

또 한 해가 지나자 아창의 아버지도 병이 들었다. 아내와 똑같은 병인지 계속 기침하고 피를 토했다.

입동이 지난 어느 오후, 두 사람이 멘 가마 두 대가 선가 수선집 앞에 멈추더니 앞 쪽 가마에서 아창이 내렸다. 그는 머뭇거리며 가게로 다가갔다가 안 쪽에 멍하니 앉아있는 아버지를 발견했다. 고작 2년 만에 꺼져 가는 촛불처럼 쇠약해진 아버지를 보고 아창은 안절부절 못하며 소리쳤다. "아버지."

"제가 불효를 저질렀어요. 어머니께 잘못했어요."
샤오메이도 울며 시아버지에게 말했다. "모두 제 탓이에요."

"임종 전에 계속 네 이름을 부르며 장부를 줘야 한다고 하더라. 네가 없다고 하는데도 듣지 않고 계속 불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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