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방주들‘의 마지막 부분인데, 우유니 소금사막에 있는 소금을 소재로 어떤 감정을 표현하려는 것 같은데, 독자인 내가 부족해서인지 명확하게 딱 뭐라고 표현하기 힘들었지만 어떤 모호한 아련함(?) 같은게 느껴졌다. 하여튼 뭔진 정확히 모르겠지만 약간의 아쉬운 감정 같은게 느껴졌고, 개인적으로 하나 궁금한거는 친구로 나왔던 진주라는 인물은 도대체 어디로 갔는가 하는 점이다. 금전적인(?) 이유로 도망을 갔다곤 했는데, 도대체 어떻게 되었는지... 알 길이 없다. 작품 해설 같은게 있다면 독자입장에서 좀 더 이해에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약간의 아쉬움이 남는 이야기였다. 그래도 전반적으로 어떤 이야기의 전개 같은 것은 나쁘지 않았다고 본다. 소재도 비교적 최근의 소재들을 등장시켜서 현실감도 많이 느껴졌었기에 몰입감있게 읽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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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작품은 지혜 작가님의 ‘북명 너머에서‘라는 작품이다. 백화점에서 일하는 한 여자의 이야기다.

‘조옥‘ 과 ‘성자‘ 라는 두 인물이 중심이 되어 이야기가 이어진다. 현재와 기억을 오가는 장면들을 인상적으로 표현해서 뭔가 짜임새가 있는 듯한 느낌을 받은 작품이었다. 내용자체는 그냥 보통 사람들에게 있을 법한 이야기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만 그러한 내용을 통해 뭔가 담담하면서도 아련한 듯한 감정이 느껴져서 작가님의 표현 방식이 깔끔하다고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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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 작품은 김멜라 작가님의 ‘이응 이응‘ 이라는 작품이다. 이응 이응 이건 어떤 걸 지칭하는 거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이런저런 얘기들 속에 마치 대명사처럼 등장하는데 뭔가 쉽사리 예측 되지는 않는다.

읽다보니 어떤 성적인 것과 관련된 것으로 보여진다. 어떤 의도로 이런 얘기들을 풀어내는 건지는 알 수 없으나 이런 소설에 나오는 각종 단어나 문장들을 종합해보면 그쪽과 관련한 생각들이 이어지는 것처럼 느껴진다.

근데 또 계속 읽다보니 도대체 뭔지 알다가도 모를 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특정한 물건을 지칭하는 건지 아니면 내가 생각하지 못한 어떤 또다른 새로운 건지 알 수가 없다. 미래에 나올 법한 어떤 혁신적인 기술이 도입된 기계인가 하는 생각도 들고... 아무튼 뭔가 불확실한 무언가이다.

우유니에서 꼭 남겨야 한다는 착시 사진은 거리나 각도를 맞추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몇 분씩 부동자세를 하고 낯선 사람들에게 손이나 허리를 내어주어야 하는 상황들이 어딘지 치열하고 기이했다. 어느새 차 안에서 느꼈던 내밀한 감동이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어쩐지 진주가 다른 방식으로 나와 함께 여행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거기 있는데 없는 식으로. 없는데 자꾸만 있다고 치게 되는 식으로. 속이 울렁거렸다. 애써 외면하려고 했던 말들이 자꾸 선명해지고 있었다. 머릿속을 꽉 누르고 있던 그 순간이 떠오르자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식은 땀 한 줄기가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라는 마음에서였다.

원래 코인투자라는 게 그렇잖아요. 대박 아니면 쪽박.

나는 그제야 안개가 자욱한 길에서 표지판을 발견한 것 같았다.

일을 하는데 허튼 구석이 없는 손길. 가장 정확한 방법으로 가장 정확한 것을 움켜쥐는 동작이 반복되었다.

피할 수 없을 만큼 맑고 투명한 눈이었다. 무엇인가 실재하지 않는 것, 보이지 않는 것이 인간을 흔들기 이전의 눈, 그런 눈이 나를 차분하게 올려다보곤 했다.

사막 한가운데서, 나는 누구보다 나 자신을 믿고 있어.

물론, 여자의 생각이 그런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밑도 끝도 없이 그 눈빛이 그렇게 보였다. 모멸감도 죄책감도 담겨 있지 않은 맑고 단단한 눈.

문득 가방 속에 있는 레몬 사탕이 생각났다. 멀미를 대비해 챙겨온 거였다.

사탕을 입에 문 아이가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내게 건냈다. 표면이 맨들맨들한 암염이었다. 사막의 열기와는 다른 무엇인가가 따뜻하게 느껴졌다. 나는 오랫동안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체온을 머금고 있는 소금 덩이가 풀 수 없는 암호 같았다.

마트에서 돌조각처럼 생긴 소금을 비싼 값에 팔던 것이 기억났다. 피사볼 안데스 솔트.

소금 안에 사람이 있었다는 거, 이렇게 만져지고 따뜻하다는 거, 그런 것들로 이루어진 게 실은 우리가 살던 세상이었다는 것을 아무도 알아차리려고 하지 않는 것이 서글펐다. 훨씬 복잡하고 섬세한 무엇인가가 소금 속에 있다는 것이 우주에서 나만 아는 비밀 같았다.

가슴에서부터 무엇인가 뜨거운 것이, 뜨거우면서도 차가운 것이 동시에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나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당시 어머니가 주문처럼 외던 말이 떠오른다. 분시를 모르면 배설이 뒤집혀. 그건 자기 분수에 맞춰 살아야 한다는 뜻이자 헛된 희망의 위험을 경고하는 말이기도 했다.

연인처럼 옷과 사람 사이에도 저마다의 궁합이 있는 법이니까. 저 옷이 나를 마음에 들어할 때 사람도 옷의 완전한 주인이 되는 것이다.

말끝마다 잘 아시겠지만, 이라거나 별로 어려운 건 아닌데, 라고 덧붙이는 모습은 일부러 선을 긋는 것처럼 거리감이 느껴졌고 나중에는 그런 차가움마저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조옥은 손님이 걸어오는 모습만 봐도 그가 옷을 살 손님인지 아닌지 구분할 수 있다고 했다. "중요한 건 손님이 뭘 입었느냐가 아니라 뭘 보느냐예요. 어떻게 보는지 알면 더 좋고."

목적없이 구경하러 오는 사람에게선 어떤 절박함도 느껴지지 않는 법이다. 강을 건너는 사람은 다리 아래 무엇이 있는지 알 필요가 없으니까.

내가 구덩이라면. 혹은 진흙이라면. 물과 바람을 따라 자유롭게 변한다면. 진득한 몸으로 어디든 달라붙을 수 있다면. 아니 연못이라면. 흐르고 넘쳐 원하는 곳 어디로든 갈 수 있다면. 뛰어들 수 있다면. 녹아서 사라질 수 있다면.

무언가를 이루려면 몸의 허락이 필요했다.

바깥은 봄인데 내 몸 어딘가는 여전히 겨울이었다.

어니언스와 조동진, 김추자가 우리의 레퍼토리였다. 조옥은 팝송도 많이 신청했는데 엘튼 존이나 프린스, 핑크 플로이드 같은 생소한 외국가수들의 노래를 많이 알고 있었다.

피곤에 지쳐 잠들 때까지 남편은 결혼을 앞둔 젊은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다. 그런 모습을 보면 오래된 기억이란 게 공기 중에 머물다 특정한 조건에 나타나는 화학 현상 같기도 했다.

비가 오면 관절이 쑤시듯 어떤 과거는 우리 주위를 떠돌다 머릿속 피가 빠르거나 느리게 흐르는 순간 몸 속으로 들어와 설명하기 어려운 상황을 재현하고 떠나간다.

독한 타르 연기가 냄새를 내뿜으며 그와 나 사이에 피어오른다. 그때 나는 아주 잠깐 어머니를 이해한다. 사랑과 증오가 담배 속처럼 한데 말려 도저히 분리할 수 없는 상태를.

가끔 돈이 궁한 날이면 조옥에게 빌려준 몇 만원이 생각났고 그것들로 할 수 있는 일들을 떠올렸다.

점점 그조차도 떠올리지 않게 되었을 때 나는 남편과 아이를 돌보고 고향을 떠나 도시에 정착하느라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오직 조옥이라는 사람을 알았다는 사실만 기억에 남은 채.

흔적 없이 사라진 노른자처럼.

기술적으로 빼낼 수 없는 머릿속 골짜기에 갇혀 오도 가도 못하는 그의 기억들을 생각한다. 어디에도 없고 오직 당신의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시간이 왜 하필 그곳인지도.

그의 눈동자 어디에서도 나와의 지난 시간을 떠올린다는 단서는 없다. 내가 누구야? 말해봐, 나를 알아? 나는 눈을 감고 나의 골짜기를 떠올린다.

그곳은 오직 저 너머, 오래전 북명을 떠난 상태에서만 볼 수 있다. 여기서부터도 아주 멀고 되돌아가는 길이나 단서 따위 없으므로 누구도 그곳을 찾을 수 없다. 이제 나는 북명으로 되돌아가는 길을 모른다. 길을 잃은 남편의 머릿속처럼 나의 기억 또한 너무 먼 미래에 와 있으므로.

나는 무릎을 꿇고 구덩이 바닥에 고인 검은 웅덩이를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물에 비친 내 얼굴이 낯설어 알아볼 수 없을 때까지, 가로등이 꺼지고 온 세상이 어둠이 내릴 때까지.

이무기가 돌아올 때까지.

"그 짓이 맞나 틀리나 긴가민가 할 땐 똑같은 짓을 한 번 더 해봐."

나이나 직업, 실제 이름을 말하지 않으면서 처음 마주한 사람과 대화를 이어가기란 쉽지 않았다.

"말은 항상 느리죠. 생각에 비하면 언제나 느려요."

"당연하죠. 좋은 이응은 이응 생각을 잊게 해요."

카뭐가 쓴《이방인》이라는 책에 나오는 뫼르소의 말이었다. 팬티를 갈아입는 인간은 자기 분수를 알아야 한다는 말. 뫼르소는 사형 집행을 앞두고 자신에게 그런 판결을 내린 자들이 팬티를 갈아입는 인간이란 사실에 치를 떤다고 했다.

"나쁘고 안 나쁘고를 떠나서 그게 사람이란 거야. 그게 이응이야."

성별 정체성이랑 성 표현 정체성이 어떻게 다른지 모르겠다며, 억지로 느끼려고 하는 건 이응의 정신이 아니라고 했다.

그렇다고 이응을 대단하게 여기는 건 아니었다. 단지 식욕이나 수면욕처럼 바이오리듬에 따라 몸이 원할 때 채워줘야 하는 신체적 욕구일 뿐이었다.

이응이 어떤지는 어릴 때부터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근육의 수축과 경련 그리고 이완. 오감을 채워주는 이미지에 둘러싸여 양극과 음극의 전기자극에 따라 맥박과 혈압이 높아지고 나중에는 모든 긴장이 풀리며 상쾌해진다.

무의식의 상태로 들어서는 델타파부터 휴식과 이완을 주는 알파파까지. 이응은 단계별로 우리의 뇌파를 유도해 우리의 몸과 의식을 열린 상태로 만들어준다고 했다.

내가 좋아하는 건 아무도 찾지 않는 고전문학 서가에 앉아 책을 통해 누군가의 느낌이나 감정을 들여다보는 것이었다.

글로 쓰고, 종이에 인쇄된 인간의 욕구가 나에게는 위협적이지 않을 만큼만 생생했고, 그렇기에 안전하게 나를 열 수 있었다.

좋아지려면 시간이 필요하니 기다려줘야 한다고.

"차차 가리겠지. 차차 배우겠지. 너무 몰아붙이지 마라."

하지만 보리차차는 차차 좋아지거나 나아질 수 없었다. 세상은 그렇게 S자 곡선을 그릴 때까지 기다려주지 않는 법이니까.

"쾌감을 느끼는 게 두렵나요? 죽는 게 무서워요? 삶과 죽음, 그 모든 것이 컬러볼 안에서 하나로 이어져 있다는 걸 믿지 못하는 거예요?"

우유수염은 이응의 현자처럼 말했다. 아니, 말한다기보다 나를 향해 짖는 것 같았다. 나의 방어적인 태도를 비난하듯이, 반짝이는 두 눈에 원망을 가득 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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