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읽은 부분에서도 여러가지 다양한 이야기들이 나오지만, 특별히 p.123 부터 나오는 ‘나‘와 ‘나의 그림자‘와의 대화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현실에선 있을 수 없는 설정이지만, 이 소설 속에선 어떤 도시의 벽을 기준으로 ‘나‘와 ‘나의 그림자‘ 가 분리되어 둘이 하나로 붙어 있는 것이 아닌 애초부터 아예 다른 존재인 것 마냥 묘사된다.

그들 간의 대화를 찬찬히 살펴보면서 나는 이 ‘그림자‘ 라는 것이, 이 책의 독자들 개개인이 처한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여지가 많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 그들의 대화 내용을 일부분 밑줄 치기도 했는데, 개인적으로는 여기 나오는 ‘그림자‘로 상징되는 것이 가까운 내 주변에 있으면서도 ‘등잔 밑이 어둡다‘는 속담처럼 너무 가까이 있어서 오히려 잘 못 보거나, 평소에 같이 있는 시간이 길어서 함께 하는 것에 대한 고마움을 잘 느끼지 못하면서 살아가는 주변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 같다고 느껴졌다. 독자들에 따라 그 대상이 조금씩은 다를 수 있겠지만, 누군가에게는 이 ‘그림자‘가 자신을 위해 뒷바라지 해주는 부모님이 될 수도 있을 것이고, 또다른 누군가에게는 늘 자신과 함께 하는 친구 혹은 형제 자매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범위를 좀 더 밖으로 넓히면 우리가 늘상 만나지만 평소엔 너무나도 당연한 것처럼 여겨져서 그것에 대한 고마움을 느끼지 못한채 마주치게 되는 버스기사님 같은 분들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이외에도 내 삶을 영위해 나가는데 알게 모르게 도움을 주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이 책에 나온 ‘그림자‘ 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건 지극히 내 주관적인 해석이기에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이 ‘그림자‘와 관련된 부분을 읽으면서 ‘이렇게 보고 느끼는 사람도 있구나‘ 정도로 봐주시면 좋을 것 같다. 이 책의 독자가 처해있는 상황이나 주변 환경 등 여러 요인들에 따라 ‘그림자‘의 의미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그림자‘라는 컨셉을 가지고 나를 포함한 이 책의 독자들에게 이런저런 생각들을 해볼 수 있도록 해주신 이 책의 저자분께도 감사드린다. 저자인 무라카미 하루키가 생각하고 의도한 이 ‘그림자‘의 의미는 어떤 것이었을지도 문득 궁금해진다.

너는 그럴 때 없어? 꿈과 현실 사이에 선을 긋기 힘들어지는・・・・・・ 아마 나는 다른 사람보다 그런 경향이 훨씬(저울의 바늘이 헛돌 정도)로 강한 게 아닌가 싶어. 어떤 이유로 인해, 아마도 타고난 기질 덕에. - P58

실은 상관없을지 모르지만, 꿈을 기록하기에는 몽당연필이 제일 좋아. 길이가 8 센티미터 안 되는 것. 전날 밤에 몇 자루를 칼로 잘 깎아둬. 기다란 새 연필은 절대 안돼! 왜 그럴까? 왜 꼭 짧은 연필이어야 꿈 얘기를 문제없이 써둘 수 있는 걸까? 생각해보니 희한하네. - P59

이 도시 사람들에게는 그림자가 없다. 그림자를 버릴 때처음으로 그것에 뚜렷한 무게가 있었음을 실감한다. 평소 생활에서 지구의 중력을 느낄 때가 거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물론 그림자를 버리는 일은 간단하지 않다. 뭐가 됐건 오랜 세월 함께하며 친밀해진 상대와 갈라서는 건 아무래도 심란한 일이다. 이 도시에 도착했을때, 나는 입구에서 문지기에게 내 그림자를 맡겨야 했다. - P65

"걱정할 것 없어." 문지기가 나를 격려하듯 말했다. "그쪽도 그림자 없는 생활에 차츰 익숙해질 거야. 머지않아 그림자를 달고 다녔다는 사실마저 잊게 될걸. 그러고 보니 그런 일이 있었더랬지, 하듯 말이야." - P67

"일단 이 문을 넘어 도시에 발을 들인 자는 두 번 다시 이 문을 통해 밖으로 나갈 수 없다. 벽이 허락하지 않아. 그게 이 도시의 규칙이야." - P68

"한 가지 더. 그쪽은 지금부터 ‘꿈 읽는 이‘가 될 테니 ‘꿈 읽는 이‘의 눈을 받게 된다. 이것도 규칙이야. 눈 상태가 안정될 때까지 얼마간 불편을 겪을 수도 있어. 그것도 알고 있지?"
그리하여 나는 도시의 문을 넘었다. 그림자를 버리고, ‘꿈 읽는 이‘로서 눈에 상처를 내고, 두 번 다시 그 문을 넘지 않는다는 암묵의 ‘계약‘을 맺고. - P68

"어두운 마음은 어딘가 먼 곳으로 보내져 결국 생명을 다하게 돼요." - P70

이 도시에서 나는 더이상 외톨이가 아니라는 생각과, 그럼에도 철저히 외톨이라는 생각 사이를. 내 마음은 그렇게 정확히 둘로 쪼개져 있다. - P71

"걱정 마요"라고 너는 테이블 맞은편에서 내 눈을 들여다보며 말한다. "조금 시간이 걸릴 뿐이에요. 망설이지 말고 이대로 계속하세요. 당신은 올바른 장소에서 올바른 일을 하고 있으니까."
너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온화하지만 확신에 차 있다. 도시의 높은 벽을 이루는 벽돌처럼 견고하고 흔들림이 없다. - P75

내게 침묵은 조금도 고통스럽지 않다. 오히려 그 침묵을 환영했는지도 모른다. 침묵은 기억을 일깨워주므로. - P76

‘직공 지구‘의 공동주택 앞에서 너는 걸음을 멈추고 빈약한불빛 아래서 내 얼굴을 잠시 들여다본다. 꼭 무슨 중요한 일을 떠올리려는 것처럼 미간을 가볍게 찡그리고는 하지만 결국 아무것도 떠올리지 못한다. 가능성은 형태를 얻지 못한 채 어딘가로 빨려들어가 사라진다. - P76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없어요. 그저 시간이 걸릴 뿐이에요." 너는 그렇게 말한다.
그러나 내게는 그만한 확신이 없다. 과연 시간을ㅡ이 도시가 시간이라고 명명한 것을ㅡ그렇게까지 신뢰해도 괜찮을까? 그리고 이 끝나지 않을 듯 기나긴 가을 뒤에는 대체 무엇이 찾아올까? - P77

나는 바다에 비가 내리는 광경을 볼 때마다 어떤 감동을 받는다. 아마 바다가 영겁에 걸쳐 혹은 거의 영겁에 가까운 시간 동안 변화하지 않는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바닷물은증발해 구름이 되고 구름은 비를 내린다. 영원한 사이클이다.
바닷물은 그렇게 조금씩 교체되어간다. 그러나 바다라는 총체가 변화하는 일은 없다. 바다는 늘 똑같은 바다다.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실체인 동시에, 하나의 순수하고 절대적인 관념이기도 하다. 내가 바다에 쏟아지는 비를 보면서 느끼는 건 (아마도) 그런 종류의 엄숙함이다. - P79

"이렇게 기다리는 동안은 이제부터 무슨 일이 일어날지, 무슨 일을 할지, 가능성이 무한히 열려 있잖아. 안 그래?" - P82

맞는 말인지도 모른다. 실제로 상대를 만나고 나면 그 무한의 가능성은 불가피하게 오직 하나뿐인 현실로 치환된다. 너는 그게 괴로운 것이리라. 네가 하려는 말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나 자신의 생각은 다르다. 가능성은 그저 가능성일 뿐. 실제로 네 곁에 있으면서 네 몸의 온기를 피부로 느끼고, 손을 잡거나 그늘에서 남몰래 입맞춤하는 쪽이 훨씬 좋다. - P82

그건 시커먼 대형견 같은 거야. 한번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면 손쓸 도리가 없어. 아무리 튼튼한 목줄을 매어 잡아당겨도ㅡ - P83

오래 지나지 않아 나는 조금씩 깨닫는다ㅡ네가 어느 특정한 장소를 향해 걷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너는 그저 한 장소에 머무르고 싶지 않아 걸음을 옮길 뿐이다. 이동 그 자체가목적인 이동이다. 네 보폭에 맞춰 나는 나란히 걷는다. 역시침묵을 지키면서. 하지만 나의 침묵은 올바른 어휘를 찾아내지 못한 사람의 침묵이다. - P85

이 세상은 내가 아직 겪어보지 못한 일들로 가득하다. 더욱이 여자의 심리에 관해서라면 내 지식은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새하얀 공책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나는 평소와 다른 네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모른다. 하지만 일단 침착해야 한다. 나는 남자고, 너보다 한 살 많지 않은가. 실제로는 대단한 차이가 아닐지도 모른다. 아무 의미 없는 말인지도 모른다. - P86

그네를 타던 두 여자아이는 보이지 않았다. 그네 두 개가 5월의 햇빛 아래 미동도 없이 늘어져 있다. 타는 사람 없이 멎어있는 그네는 왠지 몹시 내성적으로 보인다. - P87

내가 좀더 강하면 좋을 텐데. 좀더 힘주어 너를 안고 좀더 믿음직한 말을 해줄 수 있다면 좋을 텐데ㅡ단 한 마디로 그자리에 걸린 나쁜 주문을 확 풀어버리는, 올바르고 적확한 말을 하지만 지금의 나는 아직 그만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그 사실을 슬프게 생각한다. - P88

"내가 해주고 싶은 말은," 문지기는 말했다. "머리 위에 접시를 얹고 있을 땐 하늘을 쳐다보지 않는 편이 좋다는 거야."
그 말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 잘 와닿지 않았다. 다만 철학적 성찰보다 실제적인 경고에 가까우리란 건 이해할수 있었다. - P90

이 도시에는 원래부터 호기심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혹은 존재하더라도 극히 희박하며 범위도 좁게 제한되어 있거나 생각해보면 그게 이치에 맞는지도 모른다. 만약 도시에 사는 사람들 대부분이 여러 가지에, 이를테면 벽 바깥의 세계에 호기심을 느낀다면, 그(혹은 그녀)는 바깥세계를 한번 보고 싶다는 생각을 품을지도 모르고, 그런 마음의 움직임은 도시에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도시는 벽 안쪽에서 빈틈없이 완결된 상태여야 하니까. - P91

지금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과거에 이 도시에 살았던 듯하다. 평범한 생활을 영위하면서. 그러나 어느 시점에 무언가가 일어나 많은 주민들이 이 도시를 버리고 떠났다. 가재도구도 변변히 챙기지 못한 채 황급하게.
대체 무슨 일이 있었을까? - P93

남은 주민들이 그 ‘무언가‘를 입에 올리는 일은 없다. 말하기를 거부하는 건 아니다. 그 ‘무언가‘가 무엇이었는지, 집합적기억을 송두리째 상실한 듯 보인다. 아마 그들은 제 손으로 떼어낸 그림자와 더불어 그런 기억도 빼앗기고 말았으리라. 이 도시 사람들은 지리에 대한 수평적 호기심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역사에 대한 수직적 호기심도 딱히 느끼지 않는 듯했다. - P94

벽은 내 ‘호기심‘에 별로 개의치 않는 듯했다. 그러려고 마음만 먹으면 벽은 나의 탐색을 얼마든지 방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를테면 쓰러진 나무로 길을 막거나, 빽빽한 덤불로 바리케이드를 치거나, 길 자체를 알아볼 수 없게 만들어버리거나. 벽이 가진 힘이라면 그쯤은 간단하다ㅡ매일 벽을 가까이서 관찰하면서 그런 인상이 강해졌다. 이 벽에는 그만한 힘이있다. 아니, 인상이라기보다 확신에 가까웠다. 더욱이 벽은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빈틈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그 시선이 피부로 느껴졌다. - P95

그러나 그런 방해 행위는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이렇다 할 장해물 없이 벽을 따라 나아가며 그 형상을 공책에 자세히 기록했다. 벽은 나의 그런 시도에 조금도 신경쓰지 않는다고 할까. 오히려 재미있어한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네가 그리고 싶다면 얼마든지 해봐라. 그래봐야 아무런 소용도 없을 테니까. - P95

벽에 대한 꿈도 꾸었다. 꿈속에서 벽은 시시각각 살아니서 움직였다. 마치 거대한 장기의 내벽처럼. 아무리 정확하게 글로 쓰고 그림으로 그려도 벽은 곧장 모습을 바꾸어 내 노력을 무위로 돌려버렸다. 내가 글과 그림을 고쳐쓰면 벽은 또 지체없이 변화했다. 견고한 벽돌로 이뤄졌는데 어떻게 저리도 유연하게 모습을 바꿀 수 있는지, 나는 꿈속에서 고개를 갸웃했다. 벽은 눈앞에서 변화를 거듭하며 나를 조롱했다. 벽이라는 압도적 존재 앞에서는 나의 매일 같은 노력도 아무 의미가 없다ㅡ벽은 그 사실을 과시하려는 것이다. - P96

아무리 그래도 사람은 기억을 완전히 비워낸 채로 살아갈 수 없다. 물론 진실이 절묘하게 바꿔치기되거나 기억이 날조되지 않았다는 확증은 없다. 그러나 노인의 이야기가 내 귀에는ㅡ적어도 열 때문에 아직 머릿속이 약간 몽롱했던 나의 귀에는ㅡ실제로 있었던 일처럼 들렸다. - P97

"한 가지 말할 수 있는 건ㅡ거기 있던 게 결코 사람이 봐서는 안 되는 세계의 광경이었다는 걸세. 그러나 한편으로는 누구나 자기 안에 품고 있는 세계이기도 하지. 내 안에도 있고, 자네 안에도 있어. 그럼에도 역시, 사람이 봐서는 안 되는 광경이라네. 그렇기에 우리는 태반이 눈을 감은 채로 인생을 보내는 셈이고." - P102

"이해하겠나? 그걸 보면, 사람은 두 번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지 못해, 일단 눈으로 보면.……… 자네도 모쪼록 조심하게나. 되도록 그런 것에 가까이 가지 않게끔. 가까이 가면 반드시 안을 들여다보고 싶어지지. 그 유혹을 물리치는 건 보통 일이 아닐세." - P103

"난 너의 그런 면을 좋아하는 것 같아."
"머릿속이 엉망진창으로 엉키지 않는 면을?"
"그게 아니라, 분석이나 충고 따위 하지 않고 말없이 나를지지해주는 면을." - P107

"어릴 때부터 이렇게 까다로운 성격이었어. 그래서 나를 좋아해주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어. 나를 품어주는 사람도 없었고. 돌아가신 할머니 말고는 단 한 사람도. 하지만 할머니는 이제 이 세상에 없고, 이 세상에 없는 사람 생각이 어땠는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어. 할머니는 그저 뭘 착각했던 건지도 몰라."
"나는 널 좋아해."
"고마워." 너는 말한다. "그렇게 말해주니 무척 기뻐. 하지만 그건 분명 아직 나를 모르기 때문일 거야. 만약 나를 더 잘알게 되면ㅡ"
"만약 그렇다 해도 너를 좀더 잘 알고 싶어. 여러 가지를, 모든 것을."
"그중엔 모르는 편이 나은 것도 있을 거야."
"그래도 누군가를 좋아하면 자연히 그 사람의 모든 걸 알고싶어지는 거야." - P109

"하나도 빠짐없이 네 것이 되고 싶어." 너는 말을 잇는다.
"너와 하나가 되고 싶어. 정말이야." - P110

"그래도 서두르진 마. 내 마음과 몸은 조금 떨어져 있거든.아주 조금 다른 곳에 있어. 그러니까 좀더 기다려주면 좋겠어. 준비가 될 때까지. 이해해?" - P110

"가끔 내가 무언가의 누군가의 그림자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 너는 중요한 비밀을 털어놓듯 말한다. "여기 있는 나한테는 실체 같은 게 없고, 내 실체는 다른 어딘가에 있어. 지금 여기 있는 나는 언뜻 나처럼 보여도 실은 바닥이나 벽에 비친 그림자일 뿐・・・・・… 그런 생각을 지울 수 없어." - P111

"만약 그렇다면, 다시 말해 네가 누군가의 그림자일 뿐이라면, 너의 실체는 어디 있을까?"
"나의 실체는 진짜 나는 아주 먼 도시에서 완전히 다른 생활을 하고 있어. 도시는 높은 벽에 둘러싸여 있고 이름이 없어. 벽에 하나뿐인 문은 억센 문지기가 지키고 있고. 그곳에 있는 나는 꿈을 꾸지 않고 눈물을 흘리지도 않아." - P112

"나는 그곳에 갈 수 있어? 진짜 네가 있는 이름이 없는 그 도시에."
너는 고개를 돌려 내 얼굴을 가까이서 바라본다. "만약 네가정말로 그러기를 원한다면." - P112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눈앞에 놓인 꿈을 하나하나 읽어나가는 것뿐이다ㅡ그 이유도 목적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채. - P117

꿈을 하나 읽고 나면 잠시 쉬어야 한다. 책상에 팔꿈치를 괴고 양손으로 얼굴을 가려 어둠 속에서 눈을 쉬게 하며 피로가 걷히기를 기다린다. - P117

그럼에도 하나하나의 꿈은 제각기 기쁨과 슬픔, 분노를 내포한 채 어딘가로 빨려들듯 사라지는 것 같았다ㅡ내 몸을 그대로 통과해서. - P118

꿈 읽기 작업을 거듭하는 사이 나는 그런 ‘통과의 감각‘을 강하게 느꼈다. 그들이 원하는 건 일반적인 의미의 이해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되는 면이 있었다. 그리고 나를 통과해 가는 그것들은 때때로 나의 안쪽을 기묘한 각도에서 자극하고, 오랫동안 망각했던 내 안의 몇 가지 감흥을 일깨웠다.
긴 세월병 바닥에 쌓여 있던 오래된 먼지가 누군가의 숨결에 의해 허공으로 훅 피어오르는 것처럼. - P118

그건ㅡ일시적인 고열ㅡ은 아마 신참 꿈 읽는 이의 통과의례같은 것, 피할 수 없는 과정인 모양이다. 그렇게 나는 조금씩이 도시의 일부로 받아들여지고 시스템에 동화된다. 나는 그점을 기쁘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너도 이렇게 기뻐해주고 있으니까. - P119

"이봐, 눈이 아직 아픈가?" 문지기가 말했다.
"많이 좋아지긴 했지만 가끔 아픕니다."
"조금만 참아. 생활에 익숙해지면서 통증도 사라질 테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 P122

그림자가 사는 곳은 도시와 바깥세계의 중간 지점이다. 나는 바깥세계에 나갈 수 없고, 그림자는 도시로 들어올 수 없다. ‘그림자 쉼터‘는 그림자를 잃은 사람과 사람을 잃은 그림자가 교류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다. - P122

"나도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그림자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본체에서 억지로 벗겨져나간 그림자는오래 살지 못해요. 나보다 먼저 왔던 그림자들은 죄다 이 ‘쉼터‘에서 차례차례 죽어나간 모양이에요. 겨울의 짐승들과 마찬가지로." - P125

그림자는 말했다. "당신이 인생에서 무얼 추구할지는 당신소관이죠. 누가 뭐래도 당신 인생이니까요. 나는 그저 부속물일 뿐이에요. 훌륭한 지혜를 가진 것도 아니고 현실에서도 거의 쓸모가 없죠. 그래도 말입니다. 내가 아예 없어지면 나름대로 불편한 점이 있을걸요. 잘난 체하고 싶진 않지만, 나도 지금껏 아무 이유 없이 당신과 함께 행동해온 게 아니라고요." - P125

그림자는 어깨를 살짝 움츠렸다. "결국 당신이 결정할 일이니 나야 할말 없고요. 그런데 만약 원래 세계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면, 그런 마음이 아직 남아 있다면, 되도록 빨리 결정을 내리는 게 좋아요. 지금이라면 어떻게 해볼 수 있어요. 하지만 내가 죽어버리면 늦어요. 그것만은 꼭 기억해두세요.
"기억해둘게." - P126

그림자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들어 나를보았다. "그래서……… 생각하던 사람은 만났고요?"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다행이네요." 그림자는 말했다.
바람이 소리 내며 느릅나무 가지 사이를 지나갔다.
"어쨌거나 이렇게 면회까지 와주고 고마워요. 만나서 반가웠어요." 그러고서 그림자는 두툼한 장갑을 낀 한 손을 살짝들어올렸다. - P126

"육체는 영혼의 신전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더라만." 문지기가 말했다. "맞는 소리인지도 모르지. 하지만 나처럼 날마다가련하게 죽어나간 짐승들 뒤처리나 하다보면 육체 따위, 신전은커녕 그저 너저분한 폐가라는 생각밖에 안 들어. 그리고 그런 궁상맞은 용기에 욱여넣어진 영혼 그 자체에 점점 신뢰를 잃는단 말이지. 그까짓 거, 사체와 함께 유채기름을 끼얹어 확 불살라버리면 되지 않나 싶을 때도 있어. 어차피 살아서 고통받는 재주 말고는 없으니 어때, 내 생각이 틀렸나?"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영혼과 육체에 대한 물음에 나는 그저 혼란스러울 뿐이다. 특히 이 도시에서는. - P127

"아무튼 그림자가 하는 말은 진지하게 듣지 않는 게 현명해." 문지기는 다른 손작두를 집어들면서 말했다. "그쪽한테 무슨 소리를 했는지 몰라도, 하여간 입은 살았으니까 자기가살고 싶다는 일념으로 그럴싸한 소리를 되는대로 지껄이거든. 조심 또 조심하는 게 좋아." - P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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