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초반부라 전체적인 그림이 머릿 속에 그려지지는 않지만, 이런 저런 내용들을 통해 마치 흰 도화지에 밑그림을 그려나가는 듯한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내 경우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의 작품은 몇 년전에 《고양이를 버리다》라는 작품을 읽어본 게 전부인데, 지금 읽고 있는 이 책에 나오는 문장 하나하나에서 예전의 그 감성이 얼추 비슷하게 느껴졌다. 참 담백하고 수수한 문장이라고나 할까. 문장이 참 정갈하고 아름답다고 표현해도 좋을 듯 하다. 한문장 한문장 읽으면서 그냥 본능적으로 밑줄 긋기를 해야할 것 같은 느낌이 오는 문장들에 밑줄을 쳐보았다. 전부 다는 아니더라도 놓치면 아쉬울 것 같은 문장들이 종종 보였다.

그 땅에서는 성스러운 알프강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동굴을 빠져나가 땅 아래 암흑의 바다로 흘러갔다.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 「쿠블라칸」

Where Alph, the sacred river, ran Through caverns measureless to man Down to a sunless sea.

Samuel Taylor Coleridge, Kubla Khan」 - P5

"도시는 높은 벽으로 사방이 둘러싸여 있어." - P12

"그래, 지금 여기 있는 나는 진짜 내가 아니야. 대역에 지나지 않아. 흘러가는 그림자 같은 거야." - P13

"어떻게 하면 그곳에 들어갈 수 있는데?"
"그냥 원하면 돼. 하지만 무언가를 진심으로 원한다는 건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야. 시간이 걸릴지도 몰라. 그사이 많은 것을 버려야 할지도 몰라. 너에게 소중한 것을. 그래도 포기하지마. 아무리 오랜 시간이 걸려도, 도시가 사라질 일은 없으니까." - P15

"아니야, ‘꿈 읽는 이‘가 직접 꿈을 꿀 필요는 없어. 도서관서고에서, 그곳에 보관된 수많은 ‘오래된 꿈‘을 읽기만 하면 돼. 하지만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야." - P16

너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할 수 있어. 네게는 자격이 있으니까. 그리고 그곳에 있는 나는 너의 그 일을 도와. 매일 밤 네 곁에서." - P16

"나는 ‘꿈 읽는 이‘이고, 도시의 도서관에서 매일 밤 수많은
‘오래된 꿈‘을 읽는다. 그리고 내 곁에는 언제나 네가 있다. 진짜 네가." 나는 제시된 사실을 소리 내어 되뇐다. - P16

"맞아. 그런데 하나 기억해줘. 만약 내가 그 도시에서 너를 만난다 해도, 그곳에 있는 나는 너에 대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걸." - P16

나는 안다. 그렇다, 내가 지금 가만히 어깨를 안고 있는 것은 너의 대역일 뿐이다. 진짜 너는 그 도시에 살고 있다. 높은 벽에 둘러싸인, 아득히 먼 수수께끼의 도시에.
내 손안의 어깨는 무척 매끄럽고 따뜻해서, 나는 진짜 너의어깨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지만. - P17

‘물을 보고 있으면 왠지 마음이 차분해져" 라고 너는 말한다. "물이 내는 소리를 듣는 게 좋아." - P19

하지만 그런 것들은 좀더 나중으로 미뤄도 되리라고, 나는 본능적으로 느낀다. 지금 내게 필요한 건 한 달에 한두 번 너를 만나 얼굴을 보고, 단둘이 긴 산책을 하고, 여러 가지 솔직한 이야기를 나누는 일이다. 서로의 정보를 친밀하게 교환하고, 보다 깊이 알아가는 일이다. - P20

그렇게 근사한 시간에 그 외의 요소를 성급하게 불러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랬다가는 거기 있던 소중한 무언가가 망가져서, 다시는 원상태로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 신체적인 건 나중 일로 남겨두자.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혹은 직감이 내게 그렇게 일러준다. - P21

주로 네가 도시의 큰 틀을 말해주면 내가 그에 대해 실제적인 질문을 하고 네가 대답해서 보충하는 식으로 도시의 구체적인 세부가 결정되고 기록되어갔다. 그 도시는 원래 네가 만들어낸 것이다. 혹은 네 안에 예전부터 존재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걸 눈에 보이는 것, 말로 묘사할 수 있는 것으로 구축해내는 데는 나도 적잖이 힘을 보탰다고 생각한다. 네가 말하고, 나는 그것을 받아적는다. 고대 철학자나 종교가 저마다 충실하고 면밀한 서기를, 혹은 사도라고 불리는 이들을 배후에 거느렸던 것과 마찬가지로 나는 유능한 서기로서, 혹은 충실한 사도로서 그것을 기록하기 위한 작은 전용 공책까지 마련했다. 그 여름, 우리는 그 공동 작업에 푹 빠져 있었다. - P21

짐승들은 우리가 가늠할 수 없는 독자적인 사이클과 질서속에 살고 있다. 모든 것은 규칙적으로 반복되고, 질서는 그들자신의 피와 맞바꾸어 주어진다. 격렬한 일주일이 지나고 보드라운 4월의 비가 핏물을 씻어낼 무렵, 짐승들은 다시 원래대로 정밀하고 온화한 존재로 돌아간다.
하지만 그 광경을 내가 직접 목격한 것은 아니다. 너에게 이야기를 들었을 뿐이다. - P26

너는 그런 사정을 띄엄띄엄 조각내어 들려준다. 오래된 코트 주머니에서 너덜너덜해진 무언가를 하나씩 꺼내놓는 것처럼. - P29

너는 가족 이야기를 할 때면 어째서인지 항상 자기 손바닥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마치 줄거리를 따라가려면 그 위에 새겨진 손금(인지 무언지)을 꼼꼼히 해독하는 일이 필수불가결하다는 듯이. - P29

학교에서 가장 편하게 느끼는 장소는 도서실이다. 그곳에서 혼자 책을 읽고 공상하며 시간 보내는 걸 좋아한다. 읽고 싶은 책은 대부분 학교 도서실에서 독파했다. - P29

나는 특별히 글을 잘 쓰는 편이 아니다. 책 읽는 건 어릴 적부터 무척 좋아해서 틈날 때마다 손에 잡고 살았지만, 직접 글을 쓰는 재능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국어 시간에 우리 반 모두가 대회에 낼 에세이를 의무적으로 써야 했고, 그중 내가 쓴 글이 뽑혀서 심사위원회에 보내졌으며, 최종심사에 남더니 생각도 못한 높은 등수로 입상까지 했다. 솔직히 내 글의 어디가 그렇게 뛰어난지 이해할 수 없었다. 다시 읽어봐도 특출난데 없이 평범한 작품으로만 보인다. 그래도 몇 명쯤 되는 심사위원이 읽고서 상을 줘도 되겠다고 생각한 이상, 뭐라도 괜찮은 구석이 있었으리라. 담임이었던 여자 선생님은 나의 입상을 무척 기뻐했다. 태어나서 그때까지, 학교 선생님이 내가 한 어떤 행동에 그렇게 호의적인 반응을 보인 건 처음이었다. 그래서 쓸데없이 토 달지 않고 감사히 상을 받기로 했다. - P30

그녀의 동생은 고양이털 알레르기다. - P32

네 목소리가 네 목소리처럼 들리지 않는다. 내가 기억하는 너의 목소리와 다르다. 아니면 이 방에서는 물건이든 사람이든 그 소리가 보통과 다르게 울리는지도 모른다. - P37

"무슨 일로 오셨나요?" 네가 묻는다.
내가 찾는 것은 ‘오래된 꿈‘이다.
‘오래된 꿈‘ 말이군요." 너는 작고 얇은 입술을 일자로 다물고 나를 본다. 물론 너는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
"아시겠지만," 너는 말한다. "‘오래된 꿈‘은 ‘꿈 읽는 이‘가 아니면 열람할 수 없습니다."
나는 말없이 진녹색 안경을 벗고 눈꺼풀을 들어올려 네게 보여준다. 누가 봐도 명백히 꿈 읽는 이의 눈이다. 한낮의 눈부신 빛 속으로는 나갈 수 없는.
"알겠습니다. 당신에게는 그 자격이 있군요." 너는 말하고 눈을 살짝 내리깐다. 아마 내 눈의 상태가 네 마음을 동요시켰을 것이다. 별수없다. 나는 이 도시에 들어오기 위해 눈을 그렇게 변질시켜야만 했다. - P37

"어디서 그쪽을 만난 적이 있었을까?" 나도 모르게 묻고 만다. 무익한 질문인 줄 알면서도. - P38

(그렇다. 너는 왼손잡이다. 이 도시에서도 이곳이 아닌 도시에서도) - P38

"아뇨. 뵌 적 없는 것 같습니다." 너는 대답한다. 말투가 깍듯한 건 아마 너는 아직 열여섯 살 그대로인데 나는 열일곱 살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너에게 나는 이제 훨씬 나이 많은 어른 남자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지만 시간의 흐름이 가슴을 찌른다. - P38

너는 테이블 너머에서 그런 내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자기손으로 만든 약초차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걱정스러운 것이리라. 나는 너를 향해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문제없어, 라고 말하듯이. 그러자 너도 입가에 안도의 미소를 띤다. 그리운 미소다. 나는 오랫동안 그 미소를 보지 못했다. - P39

시계가 없어도 무음 속에서 시간은 흘러간다. 발소리를 죽이고 담장 위를 걸어가는 야윈 고양이처럼. - P39

너를 상대로는 무슨 말이든 술술 써내려갈 수 있었다. 내가 생각하는 것, 느끼는 것을 신기할만큼 고스란히 글로 옮길 수 있었다. 그렇게 막힘없이 글이 써지는 건 난생처음이었다. 앞서 말했듯 나는 그전까지 스스로 글재주가 없다고 생각했다. 아마 나도 몰랐던 능력을 네가 훌륭히 끄집어내준 것일 테다. 너는 내 글에 담긴 소소한 유머를 늘 좋아해주었다. - P41

당시 나는 내 손으로 직접 만질 수 있는 세계에 매달리고 싶었던 것 같다ㅡ가능하면 어느 정도의 유머를 함께 담아서. 사랑이나 연애 같은, 요컨대 내면적인 마음의 움직임을 대놓고 글로 쓰기 시작하면 나 자신이 점점 막다른 골목으로 몰릴 듯한 기분이 들어서다. - P42

나와 반대로 네 편지에는 구체적인 신변잡기보다 내면의 생각 같은 것이 많았다. 혹은 꿈의 내용이나 짧은 픽션 같은 것. 특히 꿈 이야기 몇 가지가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너는 곧잘 긴 꿈을 꾸었고 세부까지 선명히 기억했다. 마치 실제로 일어났던 일을 떠올리듯. 나로서는 믿기 힘든 일이었다. 나는 꿈을 거의 꾸지 않고, 꿨다 한들 내용을 거의 기억하지 못한다. - P42

"난 머리맡에 공책과 연필을 챙겨두고 눈을 뜨면 제일 먼저지난밤 꿈을 기록해, 시간에 쫓겨 바쁠 때도 마찬가지야. 특히 생생한 꿈을 꾸다가 한밤중에 깼을 땐 아무리 졸려도 그 자리에서 최대한 자세하게 적어둬. 그것들이 중요한 꿈일 때가 많고, 소중한 것들을 많이 가르쳐주거든."
"소중한 것들?" 내가 묻는다.
"내가 모르는 나에 대한 것." 너는 대답한다. - P42

너에게 꿈이란 현실세계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들과 거의동급이었고, 간단히 잊히거나 지워지는 것이 아니었다. 꿈은 너에게 많은 것을 전달해주는 귀중한 마음의 수원 같은 것이었다. - P43

"그런 건 훈련의 산물이야. 너도 노력하면 분명히 무슨 꿈을꿨는지 조목조목 자세하게 기억해낼 수 있을걸. 한번 시험해봐. 네가 어떤 꿈을 꾸는지 무척 궁금하니까."
좋아, 해볼게, 나는 말했다. - P43

가끔 네 꿈에 내가 등장하기도 했다. 그 말을 들으면 나는 매우 기뻤다. 어떤 형태로건 네 안에 있는 상상의 세계에 참여할 수 있었으니까. - P43

너는 여러 가지를 숨기지 않고 스스럼없이 말해주는 것처럼보인다. 그래도 진실은 아무도 모른다. 내 생각에, 이 세계에서 마음속에 비밀을 품지 않은 사람은 없다. 그것은 사람이 세계를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일이다.
그렇지 않을까? - P44

"만약 이 세계에 완전한 것이 존재한다면, 바로 이 벽이야.
누구도 이 벽을 넘을 수 없어. 누구도 이 벽을 부술 수없고."
문지기는 그렇게 단언했다. - P45

아니, 이 세계에 완전한 것이란 없어, 나는 속으로 중얼거린다. 형체를 지닌 것이라면 무엇이든 반드시 약점이나 사각이 있다. 하지만 그 말을 입 밖으로 내진 않는다.
"이 벽은 누가 만들었나요?" 나는 물었다.
"아무도 만들지 않았어"라는 것이 문지기의 굳건한 견해였다. "처음부터 여기 있었지." - P46

도서관 서고에는 책 대신 오래된 꿈이 무수히 놓여 있다. 긴세월 손을 댄 사람이 없었던 듯 어느 것이나 표면에 희뿌연 먼지가 얕게 내려앉아 있었다. 오래된 꿈은 달걀처럼 생겼는데, 크기와 색깔은 하나하나 다르다. 여러 종류의 동물들이 낳고간 알 같다. - P47

표면은 대리석처럼 딱딱하고 매끈하게 반질거린다. 그러나대리석 같은 묵직함은 없다. 어떤 소재로 이뤄졌는지, 어느 정도의 강도를 지녔는지 나는 알 수 없다. 바닥에 떨어뜨리면 깨져버릴까? 어찌됐건 매우 주의깊게 다뤄야 한다. 희귀한 생물의 알을 다룰 때처럼. - P47

‘꿈 읽는 이‘는 보아하니 나 말고는 없는 듯했다. 적어도 지금으로선 내가 이 도시의 유일한 꿈 읽는 이다. 나 이전에 다른 꿈 읽는 이가 있었을까? 있었는지도 모른다. 꿈 읽기에 관한 규칙이며 절차가 이토록 세세히 정해져 유지되어오는 것을 보면 아마 그랬을 것이다. - P48

너는 커다란 흰색 헝겊으로 오래된 꿈에 하얗게 쌓인 먼지를 주의깊게 닦아 내 앞 책상 위에 올려놓는다. 나는 진녹색 안경을 벗고 오래된 꿈의 표면에 양손을 얹는다. 손바닥으로 그것을 감싼다. 오 분쯤 그러고 있으면 오래된 꿈이 깊은 잠에서 차츰 깨어나 표면이 얇게 빛나기 시작한다. 양 손바닥에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온기가 전해진다. 그리고 그들이 꿈을 잣기 시작한다. 누에고치가 실을 뽑듯이, 처음에는 머뭇거리며, 이윽고 걸맞은 열의를 담아서. 그들에게는 해야 할 이야기가 있다. 그들은 껍질 밖으로 나갈 때가 오기를 선반 위에서 참을성 있게 기다려왔을 것이다. - P49

그러나 그들의 목소리가 너무 가냘퍼서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온전히 알아들을 수 없다. 그들이 비추는 이미지는 충분한윤곽을 그려내기 전에 흐려지고 허물어져 허공으로 사라진다. 어쩌면 그들 탓이 아니라 나의 새로운 눈이 아직 제대로 기능하지 않아서인지도 모른다. ‘꿈 읽는 이‘로서 나의 이해력이 자리잡지 못해서인지도 모른다. - P49

"서두를 필요 없어요. 이곳에는 시간이라면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 P50

"저는 이곳 말고 다른 도시는 몰라요. 여기서 태어나 벽 바같으로 한 번도 나간 적이 없어서."
그렇게 말하는 너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상냥하다. 네가 꺼내는 말들을 높이 8미터 남짓한 견고한 벽이 빈틈없이 보호해주고 있다. - P52

"왜 여기까지 오셨어요? 다른 데서 이 도시를 찾아온 사람을 만난 건 당신이 처음이에요.‘
"왜일까." 나는 말끝을 흐린다.
너를 만나기 위해 여기까지 온 거야. 라고 털어놓을 순 없다. 그러기에는 아직 이르다. 그전에 나는 이 도시에 대해 더욱 많은 사실을 배워둬야 한다. - P52

너는 내가 예전에 살았던 멀리 동쪽에 있는 도시에 대해 알고 싶어한다. 그 호기심이 나와 너의 거리를 조금 좁혀준다.
"그곳은 어떤 도시였나요?" - P52

"당신이 살던 도시에서 사람들은 어떤 생활을 하나요?"
나는 그 질문에 그럴듯하게 대답할 수 없다. 정말이지, 우리는 그곳에서 어떤 생활을 했을까?
너는 묻는다. "아무튼 이 도시와는 상당히 다를 테죠? 크기도 구성도,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상도, 어떤 부분이 가장 다를까요?"
나는 밤공기를 가슴 가득 들이켜고 알맞은 언어와 적절한 표현을 찾는다. 그리고 말한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누구나 그림자를 데리고 살았어." - P53

그렇다. 그 세계에서 사람들은 누구나 그림자를 데리고 살았다. 나도 ‘너‘도 각자의 그림자를 하나씩 지니고 있었다.
나는 네 그림자를 잘 기억하고 있다. 인적 없는 초여름의 길위에서 네가 내 그림자를 밟고, 내가 네 그림자를 밟았던 걸기억한다. 어린 시절 곧잘 했던 그림자밟기 놀이다. 어쩌다 시작했는지 몰라도 우리는 어느새 그 놀이를 하고 있었다. 초여름의 길 위에서 둘의 그림자는 몹시 까맣고 농밀하고 생기가 있었다. 밝히면 그 부분이 정말로 아프다고 느낄 정도로, 물론 무해한 놀이에 지나지 않았지만 우리는 진지하게 서로의 그림자를 밟았다. 그것이 무척 중요한 결과를 가져올 행위인 것처럼. - P54

네가 내 가까이 있어주었을 때도, 어딘가로 사라져버린 후에도, 언제나 변함없이. - P56

꿈은 내가 만드는 게 아니라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갑자기 ‘여기요‘ 하고 건네주는 거고, 나 혼자서 내용을 마음대로 바꿀 수도 없으니까(아마도). 그리고 어느 연극이나 영화에서든 조연은 중요하잖아. 조연에 따라 그 연극이나 영화의 인상이 상당히 달라지지. 그러니까 비록 주연이 아니더라도 좀 참아주고,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같은 걸 목표로 삼기를. - P57

그리고 나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날의 일상에 꼼짝없이 붙들려, 지구의 보잘것없는 표면에 어찌어찌 달라붙어 살아가고 있어. 그 중력에서 벗어나는 건 제아무리 힘이 장사라 해도, 제아무리 돈이 많은 갑부라 해도 불가능해. - P5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