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욕심 부려야지. 탐욕스러운 게 아니라, 건강한 욕심. 욕심이 있어야 앞으로 나아가지."
"네잎클로버의 꽃말은 행운이야. 그리고 세잎클로버의 꽃말은 행복이고, 사람들이 행운만 찾다가 곁에 있는 행복을지나치곤 하거든? 행복이 제일 중요한 거잖아. 다들 행복하게 살길 원하고! 뭐 원래 가게 이름이 행복 건강즙이기도 했고."
일에 대해 확신은 없었다. 누가 성공의 확신을 가질 수 있겠는가. 그 누구도 100%를 확신할 수는 없다. 하지만 확실한 한 가지가 있었다. 이 일을 하고 싶었다.
시간은 절대 멈추는 법도 없고 기다려주지 않는다. 언제나 그 일관성을 유지한다. 하지만 그 시간을 어떻게 쓰느냐, 어떻게 대하느냐는 순전히 본인에게 달려 있다. 내가 느끼는 시간도 많이 달라졌다.
전보다 시간이 빨리 가는 느낌이다. 회사에 다닐 때는 시간이 빨리 지나가길 바랄 때가 종종있었다. 당연히 나의 세월이 훅 지나가길 원한 것은 아니다. 회사 생활을 할 때는 시간이 빨리 지나가길 바랐다. 지겨운 야근이 빨리 끝나길 바랐고, 얼른 시간이 지나 월급날이 오길 바랐다. 하지만 지금은 하루하루가 아쉽다. 정신을 차려보면 어느새 일요일이 얼굴을 들이밀고 있다. 하는 만큼 벌어서, 온전한 내 것인 무언가를 꾸려 나가서 그런 듯하다.
보통 사장이 손을 떼면 가게가 망한다고들 하던데, 손을 대려고 하면 다 저리 가라고하니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다. 행복함이 묻어나는 헛웃음.
"다 숨통 트일 곳이 있으니 나오는 거지. 준비도 안 하고 그냥 때려치겠냐?" "그러니까, 알아서 잘하겠지." 오정득이 눈을 흘겼고, 나는 씩 웃어 보였다.
"너 알아보는 사람들이 많을 거 아냐. 그것도 장사 잘 되는 거 훤히 드러냈고. 남 잘 되는 꼴 못 보는 사람들 많다. 그러니까 조심해라. 행동 하나하나 조심해야 돼."
"옛날 생각도 나고 해서 이렇게 찾아온 건데-내가 말을 끊었다. "그 옛날 생각에 대해 느끼는 게 다 같지가 않잖아." "뭐....... 그건 그럴 수도 있겠네."
오정득은 여전히 아무 말도않은 채 굳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안영기는 기분이 썩 좋아보이지는 않았지만, 조금 전보다는 확실히 수그러져 있었다. 전부 과거의 영향이리라. 오정득은 학교폭력의 피해자였고, 2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안영기의 얼굴을 보자마자 부글부글 끓는다.
이미 지나간 과거라지만 결코 그 얼룩은 지워지지 않는 법.
안영기는 탐욕으로 가득한 눈을 번뜩이며 혀로 입맛을 다셨다. 나는 테이블 위에 손을 얹으며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차 영업하러 온 거야?"
더 이상 이런 얘기를 들어주고 있고 싶지 않았다. 조금 묵직한 걸 툭 던졌다.
"영업 그만해라. 친구끼리 불편해진다." 최선을 다해 좋게 말했지만, 직설적이었다. 역시나 그 말이 관통했는지 안영기의 표정이 불편해졌다.
다시 얼굴색을 싹 바꾸고 영업을 시도한다. 계속 약을 팔아대네. 무사고? 침수차나 아니면 다행이지. 그나저나 계속 저렇게 끊임없이 떠들 생각인가? 약은 언제쯤 떨어질까. 아마 약발이 들 때까지 도돌이표를 신명나게 찍어대겠지. 좀 더 묵직한 한 방을 날렸다. "그만하라고. 적당히 하라고 했지?" "어?"
"생각 없다는데 계속 왜 그래? 그래도 오랜만에 이렇게 보게 돼서 안 그러려고 노력하는데, 좀 심하잖아. 이제 그만 가라." 안영기는 당황스러움이 잔뜩 드리운 얼굴로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거기에 대고 오정득이 마지막 한 방을 날렸다. "차를 사더라도 너한테는 안 사." "아......." 안영기는 혼자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역시나 그리 반갑지 못했다. 그래도 자동차 영업이면 양반이지. 다짜고짜 돈 빌려달란 소리 안 나온 게 운이 좋았던거라고 여겼다.
무엇을 하든 제법 잘 돼서 달달한 냄새를 풍기기 시작하면 온갖 벌레들이 꼬이게 마련이니까.
"저번에 다른 프로 나오시는 거 봤는데, 진짜 거기 제품이 효과가 좋은가 봐요." "전부 유기농 재료로만 깨끗하게 만들고 있으니 품질에 자신 있습니다. 하지만 저희 제품만 드신다고 되는 건 아니고, 생활습관이랑 식습관 자체를 전부 개선해 주셔야 합니다." "그렇구나. 나도 사먹어야겠다."
간단한 인사를 나눴다. 방송에서는 간혹 전문의와 한의사가 대립되는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있었는데, 실제로는 다들 웃으며 담소를 나누는 모습이었다. 반면에 방송에서는 친한 사이 같던 사람들이 멀찍이 떨어져 앉아서는 눈도 마주치지 않는 모습이기도 했고,
"노화를 막아주는 회춘 명약의 정체가 무엇인가요?" "바로 포도입니다."
"포도는 왕들의 명약이라고도 불렸습니다. 뛰어난 항산화 작용을 가지고 있는데요. 바로 안토시아닌, 레스베라트롤, 폴리페놀이 풍부하기 때문입니다. 안토시아닌은 노화를 일으키는 활성산소 생성을 억제해주고, 레스베라트롤은 세포를 젊게 유지시켜주는 장수 유전자 시트루인을 활성화하는데 도움을 줍니다." "오, 놀랍네요 그럼 폴리페놀은 어떤 역할을 하나요?" 그 물음에 가정의학과 전문의가 대답을 줄줄 늘어놨다. 또다시 연예인들이 ‘그거 커피에도 들어 있는 거죠‘ ‘나도빨리 포도 먹어야겠다‘ 같은 말들을 늘어놨다.
비만 체형인 중년 남자 개그맨이 조금 걱정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그런데 포도가 달잖아요. 당도가 높은데, 저처럼 살찐 사람들한테는 안 좋은 거 아니에요? 노화 막으려다가 비만이 되면 아무 소용 없잖아요." 그러자 처음 보는 젊은 여자 연예인이 말을 보탰다. "맞아요, 저도 조금만 먹으면 살이 잘 붙는 스타일이라서 아무래도 단 건 좀 피하게 되더라고요."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을 내놨다. "실제로 포도는 웬만한 과일들에 비해 당도가 높은 편입니다. 하지만 너무 지나치게 많이 섭취하는 것만 아니면 오히려 다이어트에 도움이 되는 과일입니다." "당도가 높은데 어떻게 다이어트에 도움이 된다는 거죠?" "레스베라트롤 성분이 있기때문이죠. 당분이 지방으로 전환되는 것을 억제하고, 축적된 지방을 제거하는 데도 도움을 줍니다."
"잼을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잼은 다들 좋아해. 설탕이 많이 들어가서 문제지." 나는 입가에 옅은 미소를 머금어 보였다. "설탕이 1g도 들어가지 않는 포도잼을 만드시면 됩니다. 건강한 단맛을 가진 포도잼이죠." "그런 포도잼은 어떻게 만드나요?" 여자 MC가 물었다. "아주 간단합니다. 깨끗이 씻은 포도를 통째로 갈아서 센불에 끓이면 됩니다."
"그럼 물처럼 되지 않나요? 아무래도 잼에는 설탕이 들어가야 점성이 생기잖아요." "식초를 조금 넣어주시면 됩니다." "식초요?" "네, 포도의 팩틴과 식초의 산이 만나면 점성이 생기게 됩니다. 이때 약불로 줄여서 타지 않도록 저어가며 걸쭉해질때까지 끓여주신 뒤에 보관하시면 끝입니다." 여기저기서 ‘나도 해먹어봐야겠다‘ ‘저런 식으로 포도잼을 만드는 방법은 처음 알았네요.‘ 등의 리액션을 했다.
"그럼 포도를 먹을 때는 알맹이만 먹으면 되나요?" "포도의 좋은 성분들은 껍질과 씨에 많이 함유돼 있습니다. 때문에 껍질과 씨까지 통째로 드셔주는 게 좋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주제인 노화 방지를 위해서는 보랏빛 포도가좋지만, 성인병이나 골다공증예방을 위해서는 칼륨이 풍부한 청포도가 좋습니다."
남자 개그맨이 손으로 잔을 꺾는 제스처를 하며 물었다. "그런데, 내가 술을 좋아하는데, 포도주도 몸에 좋습니까?" "가능하면 음주 자체를 권하는 편은 아니지만, 가끔 적당히 드실 수도 있죠. 그리고 기왕 드시는 거 포도주면 더 좋을 거긴 합니다." "오, 이제 와인 좀 따야 되나?" "그런데 일반적으로 만드는 포도주 말고, 가지까지 함께 들어가야 더 좋습니다." "가지? 포도 가지를 왜 넣어요? 그거 버리는 거 아닌가?"
"포도 가지에는 껍질이나 씨, 과육보다도 항산화 성분이 많이 함유돼 있습니다. 그래서 포도주에 가지까지 넣거나, 이 가지를 말려서 차로 마셔도 좋습니다. 이때 포도알을 조금 추가해서 차를 우려내면 좀 더 단맛을 즐기실 수 있습니다." 여자 MC가 감탄하는 모습을 보였다. "정말 버릴 게 하나도 없네요." "네, 포도처럼 접하기 쉬우면서 항산화 성분이 뛰어난 과일도 드뭅니다. 다들 포도 많이 드시고 노화 방지해서 건강해지시길 바랍니다. 저도 제철일 때는 과일로 먹고, 다른 때도 거의 매일 즙이나 주스로 먹고 있습니다."
"어떤 거든 SNS 하시면 홍보도 되고 좋으실 거예요."
할리우드 스타 중에는 아웃스타그램에 게시물 하나만 올려도 광고비로 수억을 받는다고 하던데. 요즘은 블로그보다 이용자 숫자가 훨씬 많으니 해봐도 괜찮을 듯했다. "네, 저도 이따 시작해 봐야겠네요." 내가 웃어 보이자 양미희도 생긋 웃었다.
빼어난 미모에 젊은 한의원 원장이라는 점 때문에 크게 이목을 끌었다. 어떤 분야든 실력 이전에 외모 혹은 그에 상응하는 무언가가 튀면 더 관심을 받는 세상이니까. 그렇다고 실력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나름대로 한의학 업계에 혁신을 일으킨 여자였다. 현대의학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최신기기 도입 등 다양한 시도를 통해 한의학에 대한 편견을 깨는 것으로도 유명했으니까.
뭐가 어찌됐든 매력적인 이성의 접근은 즐거운 일이었다.
"그럴 때도 있는 거야. 살다보면 별의별 일이 다 있어. 아마 곧 오해는 풀릴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감사합니다. 괜찮아요."
할아버지는 서글서글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뭐든지 쉽지가 않지? 좀 잘된다 싶으니 주위에서 질투도 하고 말이야." "보고 계셨군요" "알면서 물어서 미안하다." "아니요, 사과하실 건 아니죠. 안부 물어봐주신 건데."
"아무튼...... 원래 세상살이가 그렇다. 사촌이 땅을 사도배가 아프다는데, 나 두들겨팼던 놈이 잘 되면 얼마나 배가 아프겠냐?" "그러게요. 저 같아도 그러겠어요." 뻔히 알고 있던 사실인데도 할아버지를 통해서 들으니 새삼 다르게 다가왔다. 할아버지는 정말 아무 일도 아니라는 양 웃어 보였다. "더 심한 꼴도 얼마든지 볼수 있어. 죽어도 남 잘 되는 꼴은 못 보는 사람들이 있거든."
"그리고 질투하는 사람만 있을것 같으냐? 뭐라도 하나 빼먹으려고 다가오는 놈들부터 해서 별의별 놈들이 다 있지." "무슨 말씀인지 알 것 같습니다." "당연히 속이야 상하겠지. 속상할 수밖에. 하지만 거기에만 묶여서 진짜 중요한 걸 놓치지는 말라는 얘기야." 나는 고개를 한 번 크게 끄덕이고는 씩 웃어 보였다. "명심하겠습니다."
"네, 해주세요. 무슨 얘긴데요?" "사람들이 질투하고 배알꼴려서 남 앞길 가로막으려고 하고, 뒤에서 붙들고 늘어지는 얘기에 관한 거야."
대나무 망태기 안에 게가 가득 들어있는데 뚜껑이 없었지. 그래서 이첨지가 ‘여보게, 이 안에 게가 전부 살아 있는 것이 아닌가?‘라고 물었지. 그러자 어부는 ‘그렇습니다.‘하고 대답했어. 해서 이첨지는 ‘도망이라도 치면 어쩌려고 뚜껑을 덮어놓지 않는단 말인가.‘ 라고 했지. 그러자 어부가 말하기를..." 할아버지는 마치 어부가 된양 말했다. "당췌 조선 게라는 것들은 자기 몸 상하는 것보다 남 잘되는 것이 더 걱정인지라, 한놈이 망태기 밖으로 나가려고 하면 다른 놈들이 힘을 합쳐 끌어내립니다. 무슨 뚜껑이 필요하겠습니까."
나는 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할아버지는 나의 반응이 마음에 들었는지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자 이첨지는 ‘과연 조선 땅에서는 게나 사람이나 다를 바가 없구나!‘하고 감탄하며 큰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는 옛날 이야기다." "엄청나게 공감이 돼서 조금은 씁쓸할 정도네요."
"옛부터 그랬던 거란다. 대부분의 사람들 성향이 그래. 그러니 마음 편히 먹거라." "네, 꼭 그럴게요."
어떤 식으로든 화제가 되는건 좋은 일이라더니. 가게의 매출이 수직으로 상승했다.
오정득은 아이튜브의 방향성을 바꿔서 일상 같은 걸 올리기 시작했다. 이제는 조회수가 수천씩은 찍히고 있었다. 재미있는 점은 그냥 밥을 먹고 산책을 하는 영상의 댓글에 회계나 세무 관련 질문도 적지 않게 올라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막상 회계 및 세무관련 영상은 조회수 자체도 엄청 적었는데.
황금기라고 부를 수 있는 시기일지도 모른다. 할아버지에게 능력을 전수받기 전까지의 인생만 생각한다면, 그 시기가 그나마 가장 찬란했던 때인 듯하다. 문제는 그 황금이 도금이었다는 거지만.
인성도 모르는 거다. 한 단면만 가지고 사람을 판단할 수는 없다. 사람이 얼마나 복잡한 동물인데. 최악의 사람이 기막힌 타이밍에 좋은 모습을 보일 수도 있는 거고, 좋은 사람이 아이러니하게 최악의 모습을 보일 수도 있는 거니까.
양미희의 입장도 이해가 된다. 진실이 어떨지 모르는 상태에서 엮이기 싫은 게 당연했다. 아마 나 같아도 그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해가 된다는 거지, 포용까지 되는 건 아니다. 양미희와의 인연은 여기까지. 개인적으로 잘 맞는 것 같지가 않다.
이 만남이 어떻게 이어져도 좋았다. 사업이든 남녀 관계든 오늘로 끝이든. 그 와중에 주머니 속의 휴대폰은 몇 번 더 진동을 울렸다.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양미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좋게 말하면 능동적으로 직진할 줄 아는 사람이었지만, 조금 다른 시각으로 나쁘게 보자면 질척거리는 스타일인 듯하다.
점심식사가 거의 다 끝나갈 무렵이었다. 음식의 맛 자체는 괜찮았다. 그렇다고 엄청 훌륭해서 감탄을 자아내고 머릿속에 파도가 치며 뒤통수 뒤로 우주가 펼쳐지는 그런 맛은 아니었다.
나도혜는 정말이지 헷갈리는 여자였다. 양미희에게 연락이 온 걸보고 일부러 그랬는지(오직 양미희에게 엿을 선사하기 위해), 아니면 내게 정말 호감이있던 건지, 그냥 그녀의 대화방식이 이런 건지. 어쩌면 나름대로의 비즈니스 스킬일지도 모른다. 적당히 상황을 파악하고, 잡다한 이야기 속에서도 자잘하게 오가는정보의 교류 그리고 뜸들이기로 유혹을 하는 그런 것.
"예. 그리고 이미 배불러서 이건 괜찮으니 원장님 드세요." 나는 디저트를 슥 밀었다. "이제 본론으로 넘어가죠."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뒤 눈을 마주쳤다. "아, 네." 나도혜의 두 눈에서 당황스러운 기색이 보였다. 난 저 눈빛을 안다. 과거에 많은 사람들에게서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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