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에 다 같이 영화를 보는 것은 우리 가족에게 있어서 일종의 전통이 됐다. 수년 전부터 작은아빠 집에서 차례를 지내기 시작하면서 할 것 없이 텔레비전이나 보다가 흩어지느니 문화생활이라도 같이하자면서 시작됐다.
단숨에 우리 사이에 있던 벽을 허물 수는 없겠지만, 그 높이가 조금은 낮아진 듯한 기분이었다.
돈이란 게 참으로 재미있었다. 돈이 벌리기 시작하니까 기분이 너무 좋았다. 그런데 돈을 쓰니 더 좋았다. 나는 가족들을 보며 마음속으로 소리쳤다. 내가 잘 돼서 다들 호강시켜줄게!
"원래 뭐든지 차곡차곡 쌓여서 한 방에 터지는 거야. 당장은 괜찮아도, 버틸만해도, 그게 쌓여서 나중에 한 방에 터지는 거라고. 무슨 큰 병 하나씩 달고 살거나 터진 사람들 대부분 5년, 10년, 길게는 20년 전부터 진행이 되어온 거야."
"이잉? 내가 거짓말하는 줄아나 보네. 진짜로 그래. 건강은 있을 때 챙겨야 돼. 사람 몸이라는 게 교체가 안 되잖아. 그래서 최대한 멀쩡할 때부터 관리를 잘해서 오래 가게 해야된다고. 물론, 고장 나서 고칠수도 있지. 그런데 못 고치는 경우도 있어, 자동차처럼 전손처리해야 된다고."
어떻게 이렇게 한 순간에 여러 개가 터지는지. 버티고 버티던 게 한계에 다다른 듯했다.
"쉴 때는 쉬어야지. 돈도 좋지만 아프면 다 무슨 소용이냐. 너만의 문제가 아니야. 나한테도 그렇고 밤에 일한다는 곳에도 폐를 끼치는 거야."
어떤 사람들은 사인이 암인게 차라리 낫다고들 한다. 주변 정리를 할 수 있다고. 주변사람들도 천천히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다면서.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마지막에 고통이 너무 크다. 모르핀에 의지하지만, 결코 그 고통을 다 덜어내지는 못한다. 주변 사람들 또한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같이 죽어간다. 암은 그렇게 지독한 병이다. 마지막이 다가올 때는 의식도 서서히 멀어진다. 가족인데도 알아보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극심한 스트레스는 신체의 자기방어능력을 떨어뜨리니, 자연히 아픈 곳이 생기기 쉽게 만든다.
"커피도 가능하면 피하셔야돼요. 위장에 자극이 많이 갑니다."
"풍부한 단백질에 좋은 기름으로 지방 그리고 탄수화물은 적당히 드셔야 합니다. 음식도 조금 심심하게 드셔야 하고요. 짠 거는 안 됩니다. 생선이 참 좋습니다. 고등어 같은거요. 달걀도 좋고요. 물은 충분히 드시되 필요 이상으로 많이 드실 필요는 없습니다." "정확하게 말해. 얼마나?" "물은 하루에 1.5리터에서 2리터 정도만 드시면 됩니다." "그리고 또?" "오리탕도 몸보신 하실 때 좋으시고, 마늘도 좋고요."
"잉어나 가물치 같은 것도 좋지 않나?" "아, 좋죠. 제가 말씀드린 것들 지키시면 일단 배부터 들어가실 겁니다." "그려? 안 되면?" "꼭 될 겁니다. 좋아지실 겁니다." "......알았어. 해볼게." 마냥 쉽지는 않았지만 노인들은 대부분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도 처음에나 그렇지, 결국에는 해보겠다고 했다.
"그런 말이 있어요. 예순부터는 해가 지날 때마다 다르고, 일흔부터는 달이 지날 때마다, 여튼부터는 하루마다 다르다고." "하이고, 맞아유, 진짜 그래유."
"무엇 하나 제가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4기 암을 이겨낸 분들도 계시죠. 텔레비전에 많이 나오잖아요. 하지만 그만큼 극소수에 불과하기에 텔레비전에도 나오는 거죠." 마음은 무거웠지만, 솔직한 마음을 털어놨다. "그런 기적이 일어날지 안 일어날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해보지 않으면 모르는 거잖습니까? 완치를 약속드리지는 않겠습니다. 약속할 수가 없으니까요. 한 가지만 여쭈겠습니다. 병원에서 몇 개월 남았다고 했죠?"
"저랑 좀 더 노력해 보시죠. 조금이라도 가족들과 함께하실 수 있는 시간을 늘려보죠. 혹시 모르죠, 기적이 일어날지도. 진심으로 기적이 일어나길 바랍니다. 제가 약속드릴 수 있는 부분은 단 하나입니다."
"시간을 벌어주신다고요?" "아니요, 적어도 마지막까지 최대한 온전한 정신을 유지하고 존엄성을 지키실 수 있도록 해드리겠습니다. 고통이 덜하도록 도와드리겠습니다." "아......." 김현자는 말문이 막히는 듯 입을 몇 번이나 벌렸다가 다시 다물기를 반복했다. "제가 약속드릴 수 있는 것은 이것뿐입니다. 하지만 그이상 뭐가 어떻게 될지는 모두 어머님께 달려 있습니다. 지금처럼 생활하셔도 어떻게 될지는 모르는 겁니다. 나으실 수도 있겠죠."
"하지만 기왕이면 치열하게 싸워보는 것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의지가 중요합니다. 희망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제가 상상도 못할 만큼 힘드신걸 압니다. 그래도 끝까지 싸워야 합니다. "가능할까요? 나을 수 있을까요?" "그건...... 하늘만이 알겠죠. 하지만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김현자는 여전히 망설이는듯했다. 그리고 곧 그 마음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지금까지 안 해본 게 없을 정도에요. 하지만 호전되는 경우는 없었죠. 오히려 간수치가 올라간 적도 있고, 위경련 때문에 응급실에 실려간 적도 있어요. 그래서, 조금 무섭습니다. 오히려 더 아프면 어쩌나하는 걱정도 들고요."
"몸에 무리를 주는 약을 쓰거나 할 게 아니기 때문에 그런 부분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어머님을 치료해 드린다는 게 아닙니다. 애초에 그럴 자격이 있는 사람도 아니고요. 하지만 남들보다 건강관리를 위한 것을 많이 알고 있습니다." 나는 진심을 다해 말했다. "반드시 치유에 도움을 드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나머지는 전부 어머님의 의지에 달려 있습니다." "그럼 해봐요."
그때 얘기를 듣고 있던 이필순 할머니가 김현자를 끌어안았다. "잘 생각했다, 잘 생각했어. 포기하면 안 돼야....... 애미보다 먼저 가는 자식이 어디 있다니......." 이필순 할머니가 엉엉 울었고, 김현자도 끝내 눈물을 보였다. 나는 착잡한 마음으로 그저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간절히 빌었다. 제발 김현자가 낫기를. 수많은 사람들이 건강하기를.
"여기 어머님께서 제가 말씀드린 대로 하셔야 돼요. 일단 기력이 따라줘야 합니다. 지금 몸이 너무 약해지셨어요. 입맛 없어도 무조건 드셔야 합니다. 정말 정 안 먹히면, 건강에 좋은 게 아니어도 일단 드셔야 됩니다. 그래야 싸울 힘이 생깁니다."
"네....... 정말 고맙습니다. 그리고 처음에 너무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지쳐서.......무서워서..." 나는 김현자의 손을 꼭 잡았다. "알아요. 저도 아버지께서 투병생활을 오래하셔서 잘 알고 있습니다."
"오래오래 사셔야죠. 할머님도 같이 관리 열심히 하세요. 또 누군가 같이하면 힘도 더 나는 법이니까요."
4기는 암이 전이된 상태를 뜻한다. 김현자는 대장암으로 시작됐지만, 현재 간에도 상당부분 전이가 됐었고, 폐에도 아직 확신은 못하지만 암으로 의심된다는 소견이 있는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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