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정도전이 왕권강화를 위해 수용하고 퍼트렸던 주자학이라는 것이 지금 이 시대까지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저자의 말을 통해 느낄 수 있었다.

또한 저자의 글을 통해 그동안 살아오면서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였던 생각이라든가 가치들에 대해 좀 더 비판적으로 생각해보게 되는 계기를 마련해주는 책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미국의 저명한 무대 디자이너인 패트리샤는 자신의 창조적 활동의 비결을 묻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인간의 비전이란 칠판과 같죠. 한번 줄이 그어지면 여간해서 지워지지 않습니다. 저는 유사한 것을 미리 보지 않습니다." - P123

조선이라는 칠판에 한번 그어진 주자학은 결코 지워지지 않았고, 지우개로 지우면 지울수록 더욱더 지저분해지고 말았다. 후대의 중국 학자들조차도 "윤리와 과학을 혼란스럽도록 뒤섞어놓은사상"으로 평가하는 주자학은 정치적 필요에 의해 조선 왕조의기틀로 자리매김되면서 커다란 재앙을 잉태하게 된다. - P123

많은 학자들이 분석하듯이 주자학은 공자, 맹자가 말했던 순진한 윤리적 메시지가 아니었다. 그것은 과학적 검증도, 열린 토론도 거치지 않은 한 사나이의 깊은 사유가 만들어낸 불완전한 우주론적 에세이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우주를 담론의 대상으로 하는 도가적 발상에 불과할 뿐 더 이상의 우주적 통찰도 철학적 성찰도 아니었다.
이것은 주자학을 신봉하고 연구하며 500년을 보낸 조선시대의 불행했던 역사가 알려주는 우울한 결론이기도 하다. - P126

‘윤리와 과학을 혼란스럽도록 뒤섞어놓은 사상인 주자학의내용을 단순화시키면 이런 말이 된다.
"우주는 어떤 특정한 힘에 의해 논리적으로 움직인다. 인간은그 특정한 힘이 만든 존재다. 따라서 인간에게는 그 특정한 힘이 지니고 있는 특정한 논리가 내재되어 있다." - P126

그런데 주자는 자신이 이 논리의 체계를 알아냈다는 것이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태극이며, 음양이며, 이(理)며, 기(氣)며하는 따위의 것들이 모두 주자에 의해 다시 해석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 사용되고 있기도 하다. 즉, ‘어떤 특정한 힘‘은 태극이며, 논리적으로 움직이는 상황은 음과 양이서로 순환한다는 설명과 동일한 의미다. 그리고 ‘인간에게 내재하는 특정한 논리‘를 풀어내겠다는 것이 바로 점술이다. 다소 지나치게 간소화한 느낌이 없진 않지만 그렇다고 틀린 점도 별로 없을 것이다. 현란한 수식과 포장이 없을 뿐이다. - P126

앞서도 언급했지만 나는 우리 사회 병폐의 원인을 유교에서찾았고, 그 중에서도 주자학을 주범으로 지목했다. 나는 그의 여러 담론과 책들을 읽어보았다. 하지만 주자가 살았던 깊은 산수(지금도 교통이 불편)와 그가 살았던 남송의 역사를 살펴보면서 나는 그의 우주론적 에세이에 담긴 조금은 서글픈 한 사내의 고독과 우울을 알게 되었다. - P127

정치적 좌절, 깊은 산, 지금도 밤이면 별들이 폭포처럼 쏟아지는 중국의 내륙 지역, 이곳에서 사색에 익숙한 사내 주자는 무엇을 했을까? 그는 이런 독백을 하고 있다.

"맑고 높은 기를 받은 사람은 귀한 사람이 되고, 맑고 두터운기를 받은 사람은 부자가 된다. 그러나 약하고 얇으며 흐린 기를받은 사람은 어리석고 불초한 사람이 되고, 가난하고 비천한 사람이 되며 일찍 죽게 된다."

너무도 허망하다. 한 사내의 한밤중의 사색이 만든 에세이 몇편을 두고 우리는 조선 500년 동안 허송세월을 했던 것이다. 그가 주해를 달았던 경서들을 가만히 보노라면 이러한 자신의 공상을 경서에 ‘덮어쓰기‘ 한 냄새가 물씬하다.

스스로 땅을 보고, 물을 보고, 사람을 보고, 세계를 보았어야했을 세월을 그렇게 허송세월로 다 날려버리고 만 것이었다. - P128

그러면 왜 500년 동안 이들은 이렇듯 황폐한 사상을 붙들고 마침내 파멸로 치달았는가? 거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는 듯하다.
하나는 결론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건 당연했다. 가설에불과한 한 사내의 수상록을 종교로, 진실로 믿으며 분석을 해댔으니 답이 나올 리 만무했다.
다른 하나는 권력을 쥔 사람들의 사상 체계가 철저하게 주자학으로 무장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정도전에 의해 주자학으로 시작된 나라에서 주자학을 비판하는 것은 바로 체제비판 아닌가? 그것은 바로 주류에서 밀려나는 것을 의미하고 잘못 엮이면 삼족이 멸망하는 역적의 누명까지 뒤집어쓸 수 있는 무서운 재앙의 시작이 아닌가? 실제로 수많은 사화들이 유교와 주자학의 해석 논쟁에서 비롯되지 않았는가? 더구나 주자학의 정치적 이슈였던 ‘존왕양이‘ 사상은 조선시대 내내 왕실과 사대부들을 지배해 쇄국정책으로 이어졌고, 나라가 망하는 불행을 자초하기에 이르지 않았는가? - P130

도덕이며 우주론은 모두 허황된 이야기였다. 그건 가면에 불과했다. 그들은 그것을 매개로 정적들을 제거하는 데 혈안이 되어있었다. 어차피 황당한 논리였으니 결론이 날 리가 없었다. 그것은 정도전이 초기에 힘을 기르기 위해 이색, 권근, 정몽주, 우현보 등을 무자비하게 탄핵하면서부터 뿌린 씨앗이 맺은 열매이기도했다. 그리고 그것은 저 먼 옛날 은나라의 조갑이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위해 조상을 끌어들일 때부터 잉태된 씨앗이었고, 한무제를 위한 동중서의 계략 속에 감추어진 씨앗이었다. 또 자신의 철학적 사유를 《논어》,《맹자》에 덮어씌운 주자의 영민함과도 맥을 같이 한다. - P131

잘못된 출발, 정적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이 비열한 싸움, 당쟁으로 불리는 싸움의 시작은 처음부터 예고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당쟁이 만드는 죽음들은 연극 <어느 무정부주의자의 사고사>처럼 우아하지도 않았다. 나라의 문을 꽁꽁 걸어 잠그고 벌인 당쟁의 결과는 너무도 엄청났다. 짱시의 깊은 산 속에서 별을 헤며 끄적였던 한 불면증 환자의 에세이가 불러온 파국치고는 너무 비참한 것이었다.
그 파국의 그림자가 지금껏 길게 드리워져 있다. - P131

한국인과 중국인은 유난히 역사에 매달린다. 험난한 사건과문제에 맞닥뜨리기만 하면 바로 과거의 역사 속에서 해답을 찾아보고 비슷한 상황을 꺼내 위안의 말잔치를 풍성하게 차린다. 모든 정답은 과거에 있다는 답답한 문제 해석 의식 때문이다.
"옛것을 익혀 새로운 것을 안다(溫故知新)." - P132

물론 때로 과거를 참고할 필요는 있겠지만 동양인들은 이 논리를 천고 불변의 진리로 못 박아버렸다. 그리고 이를 증명하기위해 2,000여 년 이상 중국과 한국의 지식인들은 수많은 해석들을, 아니 억지들을 써왔다. 그리고는 새로운 현상이 나올 때마다 낡은 경전을 뒤적였다. 때문에 이 옛것에 맞지 않는 것들은 가치를 부정당했고, 새로운 것을 주장하는 문인, 지식인들은 경전을 펼쳐대는 지식인들에 의해 매장당해왔다. - P133

새로운 것은 새로운 곳에 있다. 현재보다 낮은 수면에 미래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제까지의 언어를 계속하는 한 새로운 미래는 만들어지지 않는 법. 물론 역사 전체를 부정하겠다는 억지를 부리려는 생각은 아니다. 하지만 동양인들, 그리고 한국인의 뇌리에 각인된 ‘온고지신‘의 ‘뒤돌아보기 문화‘는 미래를 지향하는 우리들의 발목을 수시로 붙잡는다. 뭣좀 해보려는 젊은이들의 발목을 꽉꽉 틀어잡는다. 도저히 앞으로 나갈 수가 없다. - P133

한자의 기원을 통해 볼 때, 조상의 祖(조)라는 글씨는 제단의 상형문인 ‘示(시)‘와 남성성기를 상형해낸 ‘且(차)‘로 구성되어있다. 즉 ‘祖‘는 남성 우월의 가부장제도가 자리잡기 시작하는 청동기시대 전반부터 형성된 개념으로, 이러한 발생론적 이유 때문에 제사 때는 여성이 제례에 참석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것은 바로 남성들만의 축제이며 남성이 사회의 모든 가치와 재산권력을 계승해가고 있다는 사내들만의 은밀한 축제였던 것이다. - P133

이 축제에는 대단히 내밀한 남성 우월의 문화적 설계가 숨겨져 있다. 즉 여성은 제례 음식을 준비하는 과정에서부터 철저하게 보조자로서의 문화적 위치만을 부여받게 된다. 그들의 공간은 마당보다 조금 낮은 부엌 (전통적으로 동양의 부엌은 마당보다 낮다)에 국한되며, 그곳에서 자신들의 참석이 허가되지 않을 마루 위의 제례 음식을 만드는 것이다. ‘남성우월‘과 ‘어르신네 말씀‘을 위한 세밀한 설계다. - P134

이 ‘뒤돌아보기 문화‘ 가 만든 또 하나의 악습은 주검 숭배 문화, 이른바 독특한 상례 문화다.
한국의 수많은 당쟁들이 바로 이 상례를 중심으로 전개되었음은 새삼스런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다. 애도의 기간 상복의 종류, 상례 참가자 등의 결정을 ‘빌미‘로 서로의 정적을 제거하기 위한 긴 음모에 빠져들어간다. 주검을 둘러싼 권력과 돈의 쟁탈전은 지금도 그치지 않고 있다.
주검의 처리는 가족 구성원 사이에서 자신의 권위와 권력을확인할 수 있는 훌륭한 기회다. 거기에는 수많은 지식과 정보가 난무하게 마련이다. 주검을 어디에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대한 소란은 언제나 상가집을 더욱 분주하게 만든다. 특히 주검을 주검으로 처리하지 않고 ‘또 다른 삶의 연장‘으로 해석하는 유교의 상례 문화는 주검 치장과 분묘 치장 문화를 만들었다. - P134

주검을 ‘또 다른 삶의 연장‘으로 보는 문화 역시 중국 은나라의 매장 문화에서부터 비롯된다. 은대의 묘지 내부를 위에서 내려다보면 모두 亞(아)‘자 형태로 되어 있다. 즉 가운데 시체를 두는 곳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으로 길이 뻗은 형태이다. 주검의 혼백이 떠나갔다가 다시 어느 쪽 길을 통해서든지 돌아올 것이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모습이다. 또 돌아올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주검을 생전의 모습과 동일하게 치장함과 동시에 그의 영혼 복귀를 기원하는 갖가지 장치들을 해놓았다. - P135

그 대표적인 것이 시신의 입 안에 목을 집어넣는 습속이었다. 고대부터 혹은 영원히 죽지 않는 영물로 여겨져왔으며, 인간을 부활시킬 수 있는 물체로 간주되었다. 때문에 옥을 시신의 입에 물려놓곤 했는데, 현재는 생략에 생략을 거듭한 끝에 입에 쌀을 퍼넣기도 한다. 뭔가를 집어넣긴 집어넣는데 혹은 비싸고 하니까 대체 상품으로 내놓은 것이 바로 저승길 도시락인 것이다.
이밖에도 수의나 부장품 등의 여러 복잡한 것들이 있는데, 이는 모두 주검 치장 문화에서 비롯된 것으로 우리의 매장 문화를 만든 배경이기도 하다. 동시에 이런 문화적 풍토는 장기 기증이나 이식 수술 같은 몸 나누기 문화, 심지어는 헌혈마저도 쉽지 않게 하는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묘지 안에는 생전에 쓰던 물품들을 비치해두었고심지어 사람들까지 생매장을 하기도 했다. 이것이 바로 순장이며, 분묘 치장이 극에 달했던 ‘제 정신이 아닌 상태‘ 였다. - P135

특히 공자가 『논어』에서 한 다음과 같은 대목은 분묘 치장 문화를 더욱 부추긴다.
"죽으면 예를 갖추어 장사를 지내고, 또 예를 갖추어 제례를지내야 한다."
물론 공자는 다음과 같은 말을 통해 호화스런 풍토에 나름의 안전장치를 해놓으려는 시도는 했다.
"예는 사치스러워서는 곤란하며 검소하게 해야 한다. 상례의 경우는 슬퍼하는 마음이 우선되어야 한다." - P136

도덕의 깃발(새로운 정치 세력의 초기)→과거 청산을 위한 초법적 힘→룰(rule)의 파괴→전문가 집단의 위치 박탈→ 객관적 경보 장치의 무력화→사회 각 계층의 전문 시스템 부식 시작→외부 충격 또는 내부적 혼란으로 인한 붕괴→수습을 위한 새로운 도덕의 깃발 - P144

이 사이클에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부분은 초법적 ‘힘‘ 의 발휘를 위해 각 분야의 스페셜리스트의 입지를 약화시키고 그들이 있어야 할 자리를 정치적으로 메움으로써 적절하게 작동해야할 전문가들의 경고 사이렌이 울리지 못한다는 점이다. 경고 사이렌이 울리지 못함으로써 사회 전체의 기능들은 골다공증처럼 내부적으로 부식되어 조금의 충격만 주어지면 바로 붕괴로 치닫게되는 것이다. - P144

‘우리 민족은 하나‘ 라는 민족주의와 전체의 미래보다는 권력장악이 급선무였던 현실주의자의 충돌, 이어 벌어지는 이승만의 김구 밀어내기, 힘의 공백을 메우기 위한 친일파의 대거 등용은 새로운 정부가 깨끗한 출발이 될 수 없음을 밝히는 명백한 선언이었다. 원죄를 지고 있는 ‘힘‘ 들은 자신의 입지 강화를 위해 또 다시 ‘법‘을 초월하는 ‘힘‘을 사용하기에 이르렀고, 이는 또 사회전반의 도덕적 해이를 불러오게 된다. - P147

우리 사회의 거의 모든 기업이나 대학, 연구소 등 조직을 들여다보면 외형은 좀 달라 보이지만 의사결정 구조나 정책 입안 등에서 거의 동일한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있다. 기업 총수의 개인적 희망이나 취미로 인해 결정되는 사업아이템, 전문가의 분석을 재해석할 수 있는 정치적 결단(?), 연구소의 연구원이 능력보다는 여전히 ‘친구의 아들‘로 채워지는 현실, 연구비의 책정이 동문이나 스승, 제자의 학연 등에 영향을 받는 현실을 우리는 여전히 목도할 수 있다. - P148

컴퓨터에 내장된 프로그램은 순서만 되면 언제든 작동하게 마련이다. 우리 역사 속에 내장된 붕괴 사이클의 프로그램이 재작동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 P149

노인 문제를 연구하는 학자 브린에 의하면 노인은 "생리적, 신체적으로 쇠퇴기에 있는 사람이며, 심리적인 면에서 정신기능과 성격이 변하고, 사회적인 면에서 지위와 역할이 상실되어가는 사람"이다. 또 다른 학자는 노인을 "생활상의 장애를 경험하는 사람"이라고까지 정의하고 있다. - P150

우리 사회는 한번 굳어진 어휘에 대해서는 검증할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다. 언어란 변하고 죽고 다시 태어나는 것. 따라서 시대에 맞는 언어를 늘 새로운 마음으로 골라 사용해야 하는 법. 언어란 사회 공동의 가치를 담는 그릇, 따라서 언어를 새롭게 해석하고 선택한다는 뜻은 바로 사회 공동의 가치를 담을 그릇을 다시 씻고 다시 만들어간다는 유연한 태도를 의미한다. - P151

한자의 뜻으로 보면 老人(노인)은 ‘늙은 사람‘이 된다. 고대 갑골문을 통해 보면 老는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서있는 모습이다. 이 노인을 대하는 우리 사회의 일관된 태도는 孝(효)다. 추는 노인을 아들(딸이 아니다)이 업고 있는 모습인데 이건 단순히 ‘어부바‘ 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건 동양이 만들어낸 일종의 불로장수 프로그램 중의 하나다.
즉, 효라는 한자의 모습은 조상이 아들인 자손을 통해 성씨를 이어가고 핏줄을 이어간다는 의미를 담은 그래픽으로, 이 핏줄의전수는 바로 짧은 생물학적 생을 극복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조금 철학적 설명이 되겠지만, 어쨌든 이 효라는 것은 인생의 허무를 일찌감치 깨달은 동양의 노인들이 찾아낸 ‘존재의 연속 기원 프로그램‘인 셈이다. 나는 죽어도 나의 존재는 자식들을 통해 연속되고 싶다는 기원이 담긴 것이 바로 효라는 글씨였다.
‘아들 못 낳는 것이 최대의 불효‘ 라는 유교의 단죄는 바로 여기서 기원한다. 분만실에 들어가는 며느리의 손을 붙들고 꼭 아들낳으라고 당부하는 시어머니의 눈물 어린 호소 역시 이런 분위기가 낳은 웃지 못할 문화적 해프닝이다. - P152

문헌들에서 보듯이 효도는 ‘정‘에 의존한다. 전통의 효도는 부모와 자식이 같은 공간, 같은 시간대에 있어야만 가능한 가치 규범이다. 하지만 주택, 직장, 맞벌이, 자녀 교육 등의 문제를 안고 있는 현대 사회의 여러 상황들은 이를 근본적으로 불가능하게 한다.
유교적 교훈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정(情)‘과 ‘심(心)‘에 호소하는 이들 교훈들은 산업화가 가져온 가족 구성원들의 다양한 위치 변동과 상황 변화를 효과적으로 해석하고 대체할 수 없게 만든다. 또 이 교훈은 노인들의 경제 상황, 자녀들의 경제 상황, 노인들의 취향, 건강 상태, 심리적 특성 등을 전혀 고려할 수 없는 상황에서 만들어진 그저 마음 편하게‘ 만을 강조하는 단점이 있다.
이것은 노인에게 필요한 수많은 보호 프로그램 중 하나인 ‘사랑의 보호(loving care)‘ 한 종목에만 해당될 뿐이다. - P154

내가 아는 정보통신 계통의 교수 하나는 학생이 만들어온 컴퓨터 프로그램이 작동을 하지 않으면 무조건 F를 준다. 그의 논리는 간단하다. 아무리 정성을 들이고 밤을 새워 만들었어도 그 프로그램이 작동하지 않으면 컴퓨터 안에서는 무용지물이다. 흔히 말하는 ‘성의 점수‘ 나 리포트 대체 같은 건 아예 말도 못 붙이는 항목이다. - P154

‘정성껏‘이라는 말이 대단히 따뜻해 보이지만 사실은 그것이 우리 사회를 엉망으로 만든 요인 중의 하나다. ‘성의를 봐서 봐주고‘ ‘정성을 봐서 봐준‘ 결과들이 만든 건 엉성한 조직력이다. 냉정한 프로들의 설 자리를 빼앗는 것이 바로 이 ‘성의‘문화다. - P155

이가 망가지고 혀의 점막이 퇴화해 미각이 둔해지며 내장 역시 기능이 떨어지고, 특히 소화기능도 낮아진 노인들을 펄펄 뛰는 손주들과 한 밥상에서 ‘진지‘를 드시게 하는 성의는 진지한 해결책이 아니다. 서로의 기호와 신체 기능에 따라 식단이 달라져야 하지 않겠는가? - P155

마찬가지로 미래에 대한 준비 없이 ‘효도할 자식만‘을 키워온 노인들은 이제 당혹해하고 있다. ‘효도할 자식들‘은 전혀 효도할 능력도, 시간도, 공간도 없다. 효도에 대한 생각과 수준이 서로 달라져 서로 사랑해야 할 두 세대는 오히려 갈등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며느리와 시어머니를 한 부엌에 넣는 일은 일종의 문화적 가학행위다. 한 부엌 두 여자의 ‘잘못된 만남‘은 어서어서 사라져야 한다. 부엌이란 단순히 반찬을 만드는 장소가 아니다. 그곳은 독특한 자기만의 삶의 공간이고, 창조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 P155

적지 않은 노인들이 버려지고 있고, 방 안에 수감되는가 하면, 때론 원치 않는 손주들까지 봐야 하는 사회 봉사(?) 명령까지 받고 있다. 노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실제로 그들은 손주들 뒷바라지를 즐기지 않는다. 많은 젊은이들이 노인들이 내 아이를 즉 손주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집에서 ‘노시면서‘ 아이들을 봐주시기를 희망한다. 때로는 이것을 효도의 한 덕목으로 착각하는 경우도있다. 손주를 안겨드렸다는 착각이다. - P155

노동력을 잃은 노인들의 노후문제는 진작부터 사회가 맡았어야 할 숙제였다. 서구의 양로원을 비웃으며 효도의 가치를 자랑스러워하던 우리 사회의 노인들. 이제 그들의 처지는 한여름 노래를 부르던 베짱이 신세가 되고 말았다. - P156

최근의 통계에 의하면 전체 노인의 85.9% 이상이 건강에 문제가 있음을 호소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한 효도가 아닌 구체적 의료 서비스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일본이 현재 약 30만 명의 양로 간호사를 국가 차원에서 배출하고 있으며 앞으로는 노인들에게 식사를 배달하도록 하겠다는 소식은 한없이 우리를 부럽게 만들고 있다. 일본인들은 양로원이라는 말 대신 ‘노인의 홈‘ 이라고 부른다. 장애자를 ‘챌린지맨‘으로 불러주듯이. 바로 이것이다. 노인들의 문제는 효도로 풀어야 하는 것이 아니고 국가와 사회에서 제도와 설비와 관심으로 풀어야 하는 것이다. - P157

우리가 이런 제도와 설비 마련에 더딘 것은 경제적인 이유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바로 우리 사회가 이제껏 가장 아름다운 가치로 숭상해왔던 효도에 대한 터부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모두의 가슴속에서 거품처럼 부글대는 이 문제를 숨기면 숨길수록 희생자는 점점 많아져간다.
시대는 변했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효도의 이름 아래 빚어지는 억지가 아니다. 노인과 자녀들 모두의 사랑이 상처를 입지 않을 균형 있는 제도다. 그것은 사람을 사랑할 줄 알고 사랑의 고귀함을 느낄 수 있는 사람만이 빚어낼 수 있는 일종의 예술품일 것이다. - P157

아마존을 누비며 끝없이 연구 활동을 했던 레비스트로스, 그의 연구의 일관된 질문은 ‘인간을 인간답게 해주는 것은 무엇일까? 였다. 그는 인간을 인간답게 해주는 것은 인간이 본래적으로 지니고 있는 원시의 자유스러운 창조 정신이라고 생각했다. - P159

유교 문화의 단점 중의 하나는 이렇듯 조그만 끈이라도 있으면 붙들고 매고 늘어지는 견강부회, 쉬운 말로 억지다. - P160

작품을 인격과 결부시키는 것이 동양적 그림과 글씨 품평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 P162

삶의 시간이 서로 달랐다 하더라도 인간의 감정은 언제나 동일한 법이니까 말이다. - P165

여성을 여성답게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단순히 남성으로부터 독립되고, 성적인 해방감을 만끽하기 위해 수시로 섹스파트너를 바꾸어보고, 담배도 꼽아 피워보는 것이 여성을 여성답게 할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일까? 정치적으로 안배되는 장관 자리 몇 개가 여성도 ‘인간‘임을 증명할 수 있는 키워드가 될까? 그건 역시 변변한 수영장 하나 없는 동네에 살면서 아시안 게임 수영 금메달리스트를 향해 박수를 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는 우리들의 모습만큼 공허한 것이 아닐까? - P167

여성을 여성답게 할 수 있는 열쇠는 이 원시의 순수 속에서
‘여성‘ 이라는 모델로 가공하기 시작한 틀을 찾아내 부수는 데 있는 것이 아닐까? 남성의 모럴로 특징지어지는 유교의 문화적 틀을 깨뜨리는 데서 해답을 찾아내야 하지 않을까? 발랄하고 건강했던 원시의 순수한 인간을 재능도, 자유도, 목소리도 없는 ‘여성‘으로 만들어버린 일방적 계약을 파기하는 데서부터 시작되어야 하지 않을까? 유교 문화의 굴레 속에서 신음하던 자신들의 재능과 자유와 아름다움을 다시 찾아내야 하지 않을까? 결국 여성이 의지해야 할 자리는 폭력의 변사또도, 순정의 이도령도 아니다. 여성 자신이다. - P167

여성의 아름다움은 자유스러움에 있다. 신은 모든 자유분방한 아름다움을 여성 안에 감추어놓았다. 여성에게 인간을 탄생시킬수 있는 신비한 능력을 주었고, 자녀에 대한 다함없는 사랑을 심어 두었고, 남성들의 창조력을 촉발시킬 수 있는 매력을 넣어두었다. 때문에 모든 남성들은, 그가 아무리 둔감하고 능력이 없다 하더라도 한 여자를 사랑하는 순간부터 돌변하기 일쑤다. 숨겨졌던 모든 에너지가 일순에 분출하면저 걷잡을 수 없이 폭발하기 일쑤다. - P168

유교를 바탕으로 한 동양의 수많은 옛 예술품들, 음악과 미술, 서예 작품들이 여간해서는 평범한 우리들의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이유는, 그곳에는 건강한 여성들의 나부상이 자리할 만한 공간이 없어서였기 때문은 아닐까? - P168

성의 개방 문제를 윤리적 측면에서 풀어야 하는 당위성은 인정해야 하지만, 한국과 중국이 여성을 그 문화적 유배지에서 풀어사회로 진출시키던 근대에 이르러 비로소 사회적 발전을 이루고 있다는 현상을 그저 우연의 일치로만 해석하고 지나칠 수도 없을 것이다. 프로이트적인 측면에서 보아도 성의 억압은 다양한 성격결함과 소극적 특성을 야기한다. 중국과 한국의 폐쇄적 태도의 배경에는 정절이라는 성의 문화적 관리 제도가 숨어 있음을 간과해서는 곤란하다. - P169

모든 남성은 여성의 인격을 무의식중에 간직하고 있다. 남성들은 그것을 자신의 영혼처럼 느끼며 여성을 동경하고 사랑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아니마‘로 불리는 감정이다. 이 아니마는 최초에는 어머니를 통해 깊은 가슴속으로부터 나와 근친상간적인 모자일체의 세계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점차 자신만의 신비한 여성을 찾아가고 만들어가게 된다. 이 여성을 찾아가는 과정이 바로 남성들의 성취동기이며 에너지다. - P169

이런 점에서 유교는 남성들의 아니마를 억압하는 문화 구조를 갖추고 있다. 그들에게 주어진 여성은 신사임당과 황진이 그리고 춘향이에게서 볼 수 있듯이 단 세 가지의 여성이다. 그리고 그것은 언제나 쉽게 얻어지는 것들이었다. 권력과 돈을 통해서 성취동기이며 에너지인 아니마를 억압당한 유교 사회의 남성들이 자신의 분신인 여성을 위해 몸을 던지지 않을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 P169

그리고 그들의 의식과 행동이 불알 발린 내시의 그것과 유사함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공통적으로 여성을 잃어버린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 P170

남자들은 여성을 완벽하게 소유하기 위해 여성을 틀어쥐었지만 결국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여성을 완벽하게 소유하기 위해 만든 유교의 많은 장치들이 결국은 여성을 죽여버렸다. 유교 속의 여성은 더 이상 인간도 여성도 아니었다. 그것은 왜곡된 생명체에 불과했고 원한으로 뭉쳐진 카오스에 불과했다. 결국 여성들은 폭발해버렸고, 남자들을 떠났다. 원시 속의 순수한 여성을 잃어버린 동양의 남자들은 그래서 결국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있다. - P170

‘남녀 차별 금지법‘이 통과되었다. 하지만 남녀 차별의 오랜 문화가 만들어냈던 아니마의 억압은 아직 회복되지 못했다. 남성들은 아직 진정한 여성을 만나지 못하고 있다. 남과 여란 답답한 유교적 테두리 안에만 가두어 두기에는 에너지가 너무도 넘쳐나는 존재들이다. 테두리를 벗겨내야 한다. 인간으로서 서로를 보아야한다. 그리고 여성을 원시 속의 순수로 돌려보내야 한다. 거기에 남성의 위안이 있다. - P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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