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권 막판에 예전에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되었던 가습기 살균제와 관련된 이야기가 잠깐 나오는데 그로 인해 사랑하는 아이를 잃고 아내마저 연명치료에 들어가게 된 한 남자의 사연이 참 안타깝게 느껴졌다.
과거로 회귀한 주인공은 이 남자의 사연을 떠올리며 가습기 살균제 피해를 막기위해 동분서주하면서 3권이 마무리 된다. 4권에서는 또 어떤 스토리가 펼쳐질지 궁금해진다.

난 어금니를 악물었다. 일대일 경쟁 발표에서 선순위는 불리하다. 후순위 발표자는 이쪽의 발표를 들으며 즉석에서 반박할 논리를 준비할 수 있으니까.
"추가로 유니콘이라는 통합브랜드를 철자로 표기하는 것보다는 직관적으로 인지할 수있도록 형상화된 이미지로 만들어보는 게 어떨까 합니다."
"힘들죠. 근데 어쩔 수가 없었어요. 이렇게 하지 않으면 이길 수 없는 판이었거든요." "참 이럴 때 보면 진짜 독하다니까?"
"저도 재사용 필터가 좋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매장에서 근무할 때 봉투형 청소기 많이 접해봤는데 고정적으로 소모품비가 들어가는 제품은 선호도가 급격히 떨어져 가는 추세거든요."
공장으로서는 생산량을 맞추지 못하는 것보다 치명적인 게 가동률이 떨어지는거다.
아이들이 세균에 노출될까봐. 가습기 속에 낀 물때를 매일 청소하기 힘들 아내를 생각해 직접 사 왔던 가습기 살균제. 그것이 두 아이와 반려자를 그 지경으로 만든 것임을. 보건복지부의 공식 발표가 있었던 그해. 남자는 생업을 내팽개치고 시위 현장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문제를 일으킨 기업은 과징금이라는 솜방망이 처벌을 받았을 뿐이고 상황이 악화하자 폐업을 하고 도주했다. 정부에서는 몇 년째 조사 중이라는 답변만 돌아왔다. 그가 바랐던 건 단 하나였다. 가해자의 진심어린 사과. "제가 죄인입니다. 제가......." 결국 가해자는 자기 자신이 되고 말았다.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남자는 무릎에 얼굴을 파묻은 채 흐느꼈다. 바람에 날아온 벚꽃잎이 차창 밖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야, 어디 가?" 난 움직이던 발을 멈추고 공장장을 뒤돌아보았다. "그거 만들지 마세요." "뭐? 뭘?" "가습기요." "가습기를? 왜?" "그건 따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대표님한테도 보고드릴테니 일단 생산은 전부 보류해주세요."
빠르게 차를 몰아 공장에서 가장 가까운 마트로 들어섰다. 뛰듯이 진열대 사이를 지나쳐 마침내 도착했다. 그리고 내 눈은 경악으로 물들었다. [가습기 메이트, 가습기 싹싹, 가습기.... 가습기......] 뉴스에서 봤던 그 악마의 제품들이 버젓이 진열되어 판매되고 있었다. 난 진열대 앞에서 돌처럼 굳었다. 가습기 살균제 사망 사건.
2011년에 유발요인이 특정되어 엄청난 피해로 인해 나라를 뒤집어 놨던 사건. 혹자는 그것을 일러 집안에서 일어난 대참사라고 표현한다. 원인은 가습기 살균제의 성분으로 쓰였던 PHMC(폴리헥사메틸렌 구아니딘), 주로 살균세정제로 청소목적에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제품이었지만 모두가 간과했던 게 있었다. 그건 초음파 가습기의 작동원리와 관련이 있었다.
물을 공기 중에 분사할 수 있도록 작은 입자로 무화시켜 분사하는 가습기. 그리고 그안에 섞여 들어간 PHMC는 무화된 물 입자에 섞여 폐로 직접 침투한다. 이렇게 폐의 말단에 도착한 PHMC는 폐조직을 손상시켜 영구히 회복이 불가능한 상태로 바꿔버린다. 바로 폐 조직에 영구한 장애를 입히는 ‘폐의 섬유화‘. 200명 이상의 사망자, 잠정 피해자만 수십만에 이르는 엄청난 대참사가 이 땅에 일어난 것이다.
"뭔일 있어요?" 내 책상 옆으로 걸어온 경하나가 물었다. "네, 뭔 일이 좀 있네요."
"큰일 나기 싫으시면 절대로 이거 쓰지 마세요. 진짜로 위험한 물건이니까." "위험하다구요? 이게 왜 위험해요?" 난 어처구니없는 얼굴을 한 경하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진짜요?" "네. 정말로요." 19층 회의실. 난 경하나에게 가습기 살균제의 진실을 털어놓았다. 물론 미래에 일어날 참극까지 말할 순 없었다.
다만 이 안에 들어 있는 화학성분이 기화되어 폐로 들어가면 영구적이고 치명적인 해를 입을 수 있다는 사실만을 알려주었다. 경하나가 테이블 위에 올려진 살균제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하긴 상식적인 얘기예요. 피부에 닿아도 트러블을 일으키는 게 살균제인데 민감한 폐조직에 직접 닿는 거니까." "그렇죠. 문제는 그걸 아무도 모른다는 거구요."
"팀장님이 이걸 어떻게 알았는지는 물어봐야 소용없겠죠?" 조심 심각해진 표정의 그녀가 물었다. 난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받는 질문도 아니거니와 이제는 별 대답할 이유도 없어진 질문이었다. 회귀한 이후 열 달. 내 비상식적인 지식에 대해서는 다들 각자 나름의 생각을 하고 있는걸 이미 알고 있다. 오재은은 신내림, 경하나는 외계인 감금에서 생각을 바꿔 지금은 초인적인 예지능력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거로 안다.
"유해성을 검증할 방법이 있을까요?" 검증과 실험의 영역은 나보다는 그녀가 훨씬 잘할 수 있는 영역이다. 그래서 조금 전 그녀에게 털어놓을 생각을 했던 것.
"으흠......." 잠시 고민하던 경하나가 입을 열었다. "일단 우리 연구소 능력으론 불가능할 거예요. 단순 유독성 검사라면 가능하겠지만 그건 효과가 없을 거 같네요. 이렇게 제품화되어 버젓이 팔린다는 건 액체 상태에서는 유해성 검증이 끝났다는 뜻일 테니까요." 경하나가 제품 겉면에 표시된 ‘아이에게도 안전‘이라는 글자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2013년 손님으로 태웠던 남자의 비극을 들은 이후 나 또한 이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그래서 알게 되었다. 경하나의 말처럼 가장 큰 난관이 이 부분이라는 걸. 살균제 제조사, 식약청. 몇 번이나 반복된 내 제보를 받고도 그들이 전혀 움직이지 않는 이유 역시 마찬가지.
[기화 상태라는 제한적 조건에서 폐 조직이라는 한정된 장기에서만 극단적으로 치솟는 유독성.]
볼펜 끝을 잘근잘근 씹던 경하나가 한참의 침묵 후에 입을 열었다. "제대로 유독성을 검증하려면 최소 동물실험 데이터 정도는 필요해요. 그러니까 그걸해줄 수 있는 곳은 몇 곳으로 압축되죠."
"그 정도 연구를 가장 많이 하는 건 일단 대학이나 사설연구소죠." "그쪽으로 부탁하면 검증을 해줄까요?" 난 급하게 되물었지만. "아뇨. 일단 연구 중인 과제와 맞는지부터 따지고 들 거예요. 동물실험까지 필요한 연구를 한두 명이 할 수는 없을 테니까요. 과연 나서는 연구소가 있을지 또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장담할 수 없어요."
"단, 이게 있다면 그 모든 걸 재끼고 빠르게 연구를 시작할수는 있겠죠." 테이블 위로 올라온 경하나의 두 손가락이 동그라미를 그렸다. 난 무겁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 역시 알고 있다. 지난 삼전과의 미세먼지 전쟁을 통해 우린 연구비로 연구소를 움직일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연구비라는 게 최소 몇 억에서 시작한다는 사실도.
"물론 방송국에 제보하는 방법도 있지만, 그 경우도 마찬가지죠. 방송국의 흥미를 끌수 있는 주제여야 하고 명백한 증거가 없는 지금 상태라면 방송국도 연구소에 의뢰해 유해성을 검증해야 할 테니까요." 이야기하면서도 딱히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지 경하나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까 결국 한 단계만 더 늘어나는 꼴이죠." "휴...... 만만치가 않네요." 어느 정도는 예상은 했다.
기업과 정부 기관의 소극적인 대응도. 개인의 입장에서는 딱히 방법이 없는 유해성 규명도. 몇 년 전부터 꾸준히 원인불명의 폐 질환에 의한 영유아 사망자가 나오고 있는 현재 상태에서도 진짜 원인이 밝혀지는 건 지금으로부터 무려 4년이 지난 후다. 그리고 국가 차원의 재조사와 피해 보상이 시작된 건, 그뒤로 다시 4년 후. 바짝바짝 속이 탔다.
어린아이를 둔 가정에서는 벌써 가습기를 사용하기 시작했을 거다. 다 여물지도 않은 그 어린 폐 속에 저 악마의 액체가 흘러 들어가고 있다고 생각하니 피가 거꾸로 돌았다. 고개를 숙이고 테이블 아래 두 주먹을 단단하게 쥐었다. ‘결국 못 막은 건가?‘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맞다! 생각해 보니 그런 연구를 할 수 있는 데가 하나 더 있어요." "네?"
"삼전이라면 가능할 거예요." "삼전이...... 왜요?" "아. 걔들 반도체 공장 몇년 전에 난리 났었잖아요." 삼전이 반도체가 주력인 건 이미 안다. 하지만 반도체랑 화학 성분 유해성 조사랑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그때 핵심이 반도체 가공에 들어가는 화학성분 유해성여부였거든요." "아!"
그제야 떠올랐다. 삼전 반도체 사건. "그거 정치적으로 민감했던 사안이라 자체적으로 설비 마련하고 유해성 검증 수도 없이했어요." 내 눈이 점점 커졌다. "그거 최근이거든요. 그러니까 삼전이라면 검증이 가능할 거예요." 거기까지 들었을 때 난 더는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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