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실의 개별검토안건. 지금껏 그런 제목하에 발표된 것들은 대부분 사업부 조직변경이나 인원조정, 공중파 광고에 대한 비용 검토 같은 굵직한 이슈였다.
임원 회의에서 발표는 매주 반복하는 일상이다. 전혀 떨릴리 없는 자리지만 이번만은 달랐다. 약간의 긴장이 감정을 고조시키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목구멍을 타고 올라온 목소리는 약간 들떠 있었다.
김강현은 성공하지 못하면 직책장을 해임하겠다는 조건을 걸었고 3달이라는 타임 리미트까지 주었다. 아주 무리한 조건이었지만 그 덕에 그 기간안에 무슨 일을 하더라도 김강현의 손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권리도 얻었다. "그래. 잘해보라고."
"결국 점점 치열해지는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메이저 경쟁사와 차별화된 신제품 출시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있는 걸 잘 지킬생각을 하세요. 수십억 투자해서 라인 다 뜯어고치는 투자를 오너가 오케이할 것 같습니까?" 점잖은 타이름으로 막타를 날리는 김강현. 그는 승리자의 미소를 짓고있었다. 이로써 자신을 제외한 모든 임원이 ‘현실도 모르는 바보‘가 되었다. 저게 저승사자 김강현의 본 모습이었다.
"모두 기억하실 겁니다. 한국공조는 5년 전까지 가습기를 제조했습니다."
내 목소리에 점점 더 힘이 실렸고 이어지는 단어들은 물흐르듯 자연스러워졌다.
김강현의 별명은 저승사자다. 대항하기 어려울 만큼 논리적이고 상대를 찍어 누르고 그위에 서는 걸 즐기는 인간이다.
하지만 난 그런 김강현을 너무 잘 안다. 그랬기에 그의 비리까지 함께 뒤집어쓰고 파멸을 맞이했었다. 원 역사에서는 그런 결말에 이르면서도 난 단 한 번도 그에게 반기를 들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새롭게 시작된 직장 생활에서 난 김강현이라는 썩은 밧줄을 잡을 마음이 없다. 그렇다면 김강현으로부터 날 지켜줄 새로운 밧줄에게 러브콜을 보내야겠지.
새로운 밧줄을 붙잡으려면 버려야 할 것은 확실하게 버려야겠지.
피식 웃으며 동기들을 둘러보았다. 오랜 세월 잊고 살았던 동기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나마 속 털어놓을 만한 놈들은 이놈들 뿐이었다.
고작 6시간 남짓한 수면시간이었지만 아침은 활기찼다.
어설프게 가드 올려봐야 소용없다. 대표의 지시라는 건 타이슨 핵펀치 같은 거니까.
자존심이 강한 사람들의 고유한 특성이다. 비록 까칠하기야 하겠지만 공식적인 전장에서 패했다고 하여 감정적으로상대를 대하진 않을 거다.
TF 멤버 라인업이 완성되었다. 마음 같아서는 팀 이름을 어벤져스라고 짓고 싶었는데 그럴 수 없어 그냥 ‘신제품 개발 TFT‘라고 했다. ‘밋밋하다 밋밋해! 맘에 안 들지만 어쩌겠어. 회사란 게 그렇지 뭐.
‘종합 가전회사‘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집안에 쓰는 모든 형태의 가전 라인업을 모두 갖춘 가전회사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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