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제품과 달리 유리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다. 생산공정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리 공장에서는 거대한 전기로에 폐유리를 비롯한 유리 재료를 넣고 고열로 녹여 유리물이 흘러나오면 그것을 몰드에 넣고 제품을 찍어낸다. 전기로는 통상 웬만한 사무실 크기 정도다. 주문받은 제품의 수량만큼 찍어내면 남은남은 유리물은 다 버린다. 그래야 불을 끄고 청소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주문량이 적을수록 그만큼 남는 유리물이 많아진다.
만일 100만 개 정도의 제품을 계속 생산한다면, 중간에 유리물을 퍼내거나 전기로의 불을 껐다 켰다 하지 않고 계속 가동시킬 수 있다. 소량 생산으로는 어렵겠지만 대량 생산 체제로 바꾼다면 원가를 크게 낮출 수 있었다. 일본 유리 업체로부터 OEM 생산도 하는 업체였기에 품질도 믿을 만했다.
스스로 노력해서 주문량을 유지할 수 있도록 품질을 관리하고 비용을 줄여가는 것이 제조업체가 해야 할 몫이다. 그런데 그런 노력은 하지 않고 주문량을 보장해달라니. 그런 요구는 수용할 수가 없었다.
의무적으로 주문량을 정해 계약해달라는 것은 있을수 없는 일이다. 오늘 잘 팔리는 상품이 내일도 잘 팔린다는 보장은 없다.
그런데 팔리든 안 팔리든 무조건 주문량을 보장해달라니. 소비자들에게 계속 선택받을 수있도록 좋은 제품을 생산하기 위해 진력을 다하는 것이 제조업체의 기본자세가 아닌가. 적당히 안주하려는 태도가 몹시 불쾌했다.
지금은 고객의 욕구가 우선시되는 시대다. 모든 가치는 고객으로부터 나온다. 고객을 중심에 놓고 고객이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때 감동받는지를 주의 깊게 들여다보고 집중하고 또 집중해야 한다.
고객들 자신조차 미처 몰랐던 욕구를 먼저 찾아내 만족시켜 줘야 살아남을 수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스스로 높은 수준을 유지할 수 있도록 매일 갈고 닦아야 한다. 내일이 보장되는 삶은 없으니 말이다.
소비자들은 ‘균일가‘와 ‘저가‘를 동일시하는 경향이있다. ‘저가는 곧 싸구려‘라는 인식도 있다. 값이 싸면 으레 물건의 질도 나쁘리라 생각한다. 어찌 보면 지난 30년은 이런 통념과의 길고 긴 싸움이었다. 우리 상품은 저가이긴 하지만 싸구려는 아니라는 것, 그 자부심 하나로 여기까지 왔다.
내가 가장 많이 하는 말중의 하나가 상품에 혼(魂)을 담으라는 것이다.
아무리 사소한 상품이라도 혼이 들어가지 않으면 그 가치가 나올수 없다. 1,000원짜리든 5,000원짜리든 마찬가지다. 정성이 들어가야 원하는 상품이 나온다. 대충 만들면 쓰레기밖에 안 된다. 그래서 상품 하나하나에 집중해한다.
‘혼‘을 담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원료 투입부터 세부적인 작업 과정, 마무리와 검사, 패킹에 이르기까지 상품개발의 전 과정에 역량을 총 집중해야 한다. 장인들이 작품을 만들 듯 강력한 몰입이 필수다. 내 경험으로는 그래야만 완전한 제품이 나올 수 있었다. 집중과 몰입이 없으면, 즉 혼을 불어넣지 않으면 불량품이 나오는 등 로스가 발생한다.
상품은 정독해야지 다독하면 안 된다. 철저하게 상품 하나하나에 올인하고 최선을 다해야 그 하나하나가 생명력을 가진다. 그러다 보니 신상품을 개발하는 단계가 꽤 까다롭다.
나는 어디에 놓여 있든 우리 상품을 한눈에 알아본다. 변심한 애인의 눈빛만 봐도 금방 풀이 죽는 연인처럼 상품도 마찬가지다. 개발자의 관심과 애정을 담뿍 받으며 개발된 신상품들은 매장에서도 반짝반짝 빛이 난다. 그러나 개발자의 애정 어린 시선도 관심도 받지 못한 채 매장에 나오면 풀이 죽은 채 고객에게도 외면당하는 상품이 되고 만다.
물론 개인이 직접 사용해보고 그 내용을 콘텐츠로 만들어 올릴 수 있다. 하지만 광고비를 들여 과장되게 제품을 미화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인위적으로 좋은 이미지를 만들어 광고하는 게 의미가 있을까?
우리가 보기에 아무리 싸고 좋은 제품이라도 고객이 불편을 느낀다든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경쟁자와의 싸움이 아니라 우리 자신과의 싸움이다. 거기에서 살아남은 상품만이 곧 경쟁력 있는 상품이기 때문이다.
흔히 균일가숍은 국민 소득이 낮은 저개발 국가에서 잘될 것이라고 예상하지만, 실상은 그 반대이다. 오히려 미국이나 일본처럼 중산층 비율이 높은 국가에서 더 반응이 좋다. 선진국 소비자일수록 다양한 구매 경험이 있어, 더 합리적이고 알뜰한 소비문화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용도에 따라 다양한 제품을 사용할 수있는 사회는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발전한 사회라는 것을 의미한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이라면 다양성이 존재하기 힘들다.
불과 10~20년 전 우리나라를 생각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집 안에 가위 하나로 종이도 자르고 옷감도 자르고 머리카락도 잘랐다. 용도에 맞는 가위가 따로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혹여 알고 있다 해도 그것을 구매할 여력이 되는 사람이 많지도 않았다.
꽃이 열매를 맺는 데만 시간이 걸리는 것은 아니다. 현재 팔림새가 좋지 않더라도 단종시키지 말고 꾸준히 구색을 갖추면 고객의 눈에 드는 시점이 반드시 온다. 그 시간을 준비하고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