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란...
소주는 서울에서 제일 사나이다운 잘난 사람들의 언어라고, 김요섭 시인은 적었다. 소주는 커녕 알콜이라는 게 식도로 넘어가는 법을 모르는 나 같은 사람도, 이런 문장을 몇 번이고 입안에서 오물거리다가 결국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요즘 나는 이런 문장에 심취하게 된다. 읽을 때 가슴 속에서 쨍하는 파열음이 일어나고 스파크가 튀는 문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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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요즘 나의 사명감은 사물을 새롭게 보고, 가능하다면 참신한 언어로 그걸 옮겨보고자 하는 것인데, 이러한 강박관념이 오히려 나 자신의 진부함을 알게 해준다. 아이러니와 패러독스. 진실을 말하자면, 문제는 내가 사물의 참신함아 아니라 나 자신의 징표만을 찾으려고 애쓰는 것일 수도 있다. 갈수록 내가 읽고 있는 작품들 또한 더이상 신선함이 없고 진부하게만 느껴지는 것인데, 그것은 순전히 내 자신의 문제였다. 말하자면 나 자신이 어떤 것들, 시대나 세계 같은 것들, 혹은 삶의 대척지 같은 것들과 맞부딪쳐 파열음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자꾸만 이를 회피하고 빗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자꾸만 나는 내면의 울림이 아니라 바람결에 잠시 머물다가는 중얼거림 같은 것밖에 말하지 못하고 있는데, 자꾸만 내가 읽은 문장들이 나를 배신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지고, 때때로 내 안에 더이상 아무런 이야기도 남아있지 않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나는 이것이 군대를 가기 전에도, 갔다온 뒤에도 고질적으로 내 안에 언제나 있어왔던 문제라는 것도 알고 있다.
최근 나는 인간성에 대하여 말하자면, 그는 상점가의 실물크기 사진 밖에 떠오르지 않고, 세상에 대하여 말하자면, 무언가 긁적이는 듯 하면서도 실상 아무 것도 말하지도 쓰지도 않는데, 나 자신에 대하여 말할라치면, 아예 쥐구멍을 찾아 들어가지도 않는 자의식의 몸뚱이를 처치곤란으로 비비적 거리고 있을 뿐이기도 햇다. 내 안에 아무런 이야기가 남아있지 않다는 걸 깨달았을 때부터 나는 줄곧 남의 이야기만을 기술좋은 앵무새처럼 조금씩 변형하게 그럴듯하게 늘어놓고 있는데, 실상 이런 상황을 어느 정도 즐기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내가 적당한 마조히스트라는 건 쉬쉬해봤자 더이상 비밀도 아니다. 그리하여,
산다는 것은 내게 딴은 필요 이상의 "야유"에 지나지 않는다.
어느샌가 나는 이런 문장들을 찾고 있었다. 이것은 이쯤에서 다시금 내가 알고 있던 문장들로 돌아가야 할 때라는 신호였다.나는 다시 긍정적으로 돌아온다. 아이러니와 패러독스. 나는 이 정신의 독한 독약만을 잊지 않는다. 읽던 책은 던져버리고, 입을 다물어야지. 때때로 막다른 골목에서는 더이상 질주하지 않아도 좋다. 질주하지 않아서, 막다른 골목은 더이상 막다른 골목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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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이 좋아진 이유는 또 하나 있는데, 오늘 요즘 듣고 봤던 시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시를 본 탓이다. 작금 우리의 문제를 깨진 장독에 물을 채워야 하는 콩쥐의 문제와 비교한 이 시를 보고 무릎을 칠 수 밖에 없었던 나. 이게 08학번 후배님의 시였으니 더더욱 순수하게 감탄할 수 밖에.
우리는 각자 우리의 깨진 장독을 품고 어찌할 바를 몰라 여전히 물을 부을 수 밖에 없는데, 이것은 최근 1000대가 무너진 코스피 지수 방어를 위해 연기금을 쏟아붓는 현정부의 대처방식에서도 고스란히 증명되었다. 한계를 모르는 블랙홀, 진공청소기, 믹서기처럼 모든 것을 빨아들이고 파쇄하고 있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자기 장독이 깨지지 않았다고 자신할 수 있는 자는 어디 있으랴.
짐바브웨에서는 화폐에도 유통기한이 있어 하루 아침에 수많은 돈더미가 쓰레기더미가 되고, 어느 시대에도 고귀한 가치일 줄 알았던 금값도 유동하는데 과연 어떤 종류의 가치가 작금의 사람에게 생의 확신 비슷한 것을 줄 수 있을까, 그러니 한달사이 집세가 20만원에서 35만원으로 올랐대봤자 놀랄 일도 아니다. 그걸 누구에게 불평할 수 있을까. 집주인? 혹은 2MB? 요즘 나는 몇몇 작품들과 이론 속에서만 확인했던 사실, 우리가 체험하고 있는 이 놀랍도록 고도화된 구조를 넘어갔을 때, 우리가 상정했던 거대한 대타자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제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니 다시 문제는 깨진 나 자신의 장독에게로 돌아오고, 내가 때로는 이런 되지도 않는 소리나 지껄이며 활자를 낭비하는 것도 그런 탓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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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면 이제 도로 기분이 나빠질 참이니까, 이제 진짜 이쯤에서 그만둬야지. 흥. 냉장고 안에는 어머니가 사놓은 소주 한 병이 있고, 이러다보면 나까지 서울에서 제일 사나이다운 잘난 사람들의 언어를 사용하게 될 판이니까. 또한 내가 소심한 남자라는 사실까지도 이제는 더이상 비밀도 아니다. 이렇게 내게 비밀이 없으니 "사람이 비밀이 없는 것은 재산이 없는 것처럼 가난하고 허전한 일이다"고 했던 이상의 말이 참으로 옳은 문장임을 이제 나도 아주 잘 알겠다. 이제 사는 것은 분명 필요 이상의 야유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