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이 자초한 고독이건
불우의 고독이건
일생 고독했다는 것은 참
장한 일이다

더욱 고독해야 하는데
이 비 오는 날

주전자 물이 끓는다.

무궁화, 살구나무, 대추나무 비에 젖고
모과나무는 폭포다

오전인데도 어두운 하늘
천둥과 번개는

눈물이며

범죄자 사진 찍기다

폭우는

늘 하늘 아래
땅 위

고매한 정신처럼
추상같이 쏟아진다.

              - <고독>, 김영승



이 시를 보니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온다. "그것이 자초한 고독이건 / 불우의 고독이건 / 일생 고독했다는 것은 참 / 장한 일이다 / 더욱 고독해야 하는데 / 이 비 오는 날 / 주전자 물이 끓는다."를 처음 읽었을 때는 숨이 턱하고 막혀서 나는 용케도 죽지는 않았고 대신 심장이 좀 약해졌다. 시를 읽다가 심장이 약해질 걱정을 해야 하는 것도 딴엔 참 장한 일이다. 김영승 시인이 평생 술을 마시며 시를 쓰다가 결국엔 뇌신경에 문제가 생겨서 금주를 하고 난 이후로 쓴 첫 시집인 <화창>을 읽는 것은, 술을 마셔야만 시를 쓰던 사람이 술을 끊고 시를 쓰는 그 마음만큼이나 각오를 해야 할 일이다. 인천 어딘가 반지하방에서 월세로 살던 그가 모든 것이 삐뚤삐뚤보였을 시절엔 술을 마셔야만 "완전 투시안의 사나이"가 되어 오히려 가릴 것도 감출 것도 없이 모든 것을 진실되게 노래했는데, 술을 끊고나서 그에게 세상은 또 어떻게 보일까? 나는 술을 마시지 않으므로, 아주 상상하는 수 밖에 없다. 나도 모르는 낯선 존재가 되어서.


이 아름다운 밤......

내가 낯선 존재라니......

나는 참 기쁘다.
 
  - 시집<화창>의 자서 중. 김영승



방 정리를 좀 하려다가 또 나는 모르는 내가 감추어두었던 물건들이 속속 튀어나와 곤란하게 되었다. 롤러코스터 1집과 에이브릴 라빈 1집, 특히나 "류이치 사카모토 2000"을 듣지 않을 순 없는 노릇이고, 창세기전3 파트2 시디도 튀어나왔으니 일단은 인스톨부터 하고 본다. 그래도 피마새를 도로 정독하는 건 아무래도 벅차다. 안녕. 반갑고도 지긋지긋한 선민종족들아. 너희를 다시 읽으려면 나부터 좀 두억시니가 되어야 겠다. 결국 오늘밤엔 나도 낯선 얼굴짝을 하고 좀 더 고독해야 할텐데, 류이치 사카모토의 "The Sheltering Sky"가 나를 놔주질 않는다. 날씨가 풀려서 밤공기도 참 내겐 다소곳하다. 호빵이나 쪄먹고 잠이나 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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