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학기에는 시에 관한 강의를 많이 듣다보니, 자연히 김승희 교수님 영향을 또한 받게 마련이었지만 확실히 고은 시인의 표현처럼 "아! 라는 감탄사로 요약될 수 있는" 1950년대와 그 이후 한국시가 가지는 애도의 언어, 그리고 우울증의 언어로서의 양상은 흥미로운 주제이다. 물론 이번 학기 내 절친, 베프는 우리 푸코와 그의 광기의 역사였지만, 방학 중엔 에드워드 사이드와 크리스테바를 좀 읽어봐야 겠다. 김승희 교수님의 탈식민주의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상상력은 다양한 논문들에서도 드러나지만 역시 그 시들로 보는 맛 또한 남다르다.

<사랑 8>
 - 프라이데이가 로빈슨 크루소를 만난 날

당신은ㅡ 날 ㅡ 금요일에 구해 주셨지요
식인종들로부터ㅡ
그래서 주인님은 나의 이름을 프라이데이라고 붙이셨지요
주인님을ㅡ 만난ㅡ 날이
내 이름이 되었어요
나는ㅡ 아무ㅡ 것도 아니었기에
그 날이 나의 이름이고 출생이고
영광이었어요

이제 나는 프라이데이예요
맨발에는 가죽 신발이 덮이었고
순진무구한 눈동자에는 벌레 같은 문자들이
기어들어 왔어요
내 이름은 프라이데이
그 날이 나의 이름이고 출생이고 종언이고
저주였어요

그 날부터 나는 애도 중입니다
뉴멕시코 광활한 땅, 망망대지에 푸에블로 인디언
그 날부터 나는 애도 중이에요
보호 구역에서 애도 중인 폐선 자기를 애도하는......
과도한 애도 중......

ㅡㅡ

제국의 언어로 식민지 대상을 명명하는 행위는, 주체를 대상으로 격하시키며, 다른 작품 <식탁이 밥을 차린다>에서처럼 "켈빈 클라인이 나를 입고 / 니나리치가 나를 뿌리다 / CNN이 나를 시청한다 / 타임즈가 나를 구독한다"와 같은 수동태 동사로 만든다. "벌레 같은 문자들"은 심볼릭, 상징세계, 언어의 세계로의 진입을 의미하며 이를 통해 우리는 더이상 주체Subject가 아니라 Subjected to Symbolic 상징의 세계에 복종하는 결핍의 주체가 되는 것이다. 이상의 작품 <날개>에서 "그 삼십삼(三十三) 번지라는 것이 구조가 흡사 유곽이라는 느낌이 없지 않다"라고 말하는 이유는 일본의, 제국의 지리학에 의하여 제국의 언어로 구획지어진 공간은 이미 과거 그대로의 공간, 자연이 아니라 제국주의에 의해 오염된 공간이며 여기에서 '기원으로서의 모태'인 기존의 여성 관념은 해체되고 자본의 대상으로서의 여성의 몸만이 남게 되므로, 그곳이 유곽이 되는 것은 이렇한 필연성이다.

여기에서 이제 애도가 필요한 것이다. 1950년대는 애도의 시대이며, 그 이후로 그러한 죽음을 등에 지고 살아가게 되는 모든 산자들에게는 애도의 문학이 필요했다. 죽음을 상징 세계의 질서화 하는 것이 곧 애도이며, 주체가 2차적 나르시시즘의 대상의 상실을 받아들이며 이와 결별하고 새로운 대상으로 리비도를 대체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와 달리 주체가 대타자의 상실을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것과 결별할 수 없어서 오히려 대상의 상실만을 껴안고서 1차적인 나르시시즘 속에서 머무는 것, 자아를 상실하고 죽음충동으로 나아가는 것이 우울증적 언어의 특징이다.

"그 날부터 나는 애도 중입니다."

비단 1950년대가 아니라, 현대의 우리들 또한 죽은 자들을 업고서 과도한 애도 중이다. 지금도 은밀하고, 혹은 노골적으로 제국주의의 상징들은 "글로벌 시대"라는 기치 아래 신자유주의를 표방하는 거대담론과 함께 우리들을 명명하고, 호명하고 있다. <제국주의가 간다>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니나리치가 너를 부른다 / 향기로운 너를 만들어 주겠다고 / 크리스찬 디오르가 너를 부른다 / 불란서 멋쟁이로 꾸며 주겠다고 / 피에르 가르댕이 너를 부른다 / 나이키가 너를 부른다 / 엘리자베스 아덴이 너를 부른다 / 환상 창조 ㅡ 이브 탄생 / 에스티 로더가 너를 부른다 / 너, 너, 너를!" 이러한 거대담론, 거대한 구조의 호명에 대해 응답하지 않을 수 없는 우리는 갈수록 소외되고 타자화되어 간다. 영원히 A4 규격의 자기소개서 양식 속에서만 자신을 적어야만 하는 것이다.

유명한 마더구스 <누가 울새를 죽였나?>의 물음 또한 이와 같은 맥락이 아닐까 싶다. 결국에는 "누가 죽였나?"는 물음에 대해 "내가 죽였다"고 자수할 수 밖에 없는, 그렇게 수없이 우리들은 죽어갔고 그 시체를 등에 업고서 지나친 애도 속에 살아갈 수 밖에 없다. 애도에 실패할 때 우리는 우울증에 빠져든다. 우리가 잃어버린 그 무엇, 정확히 말할 수 없는 대상의 상실에 대하여 아무리 노력해도 그것을 대체하고 극복할 수 없을 때. 라캉 식으로는 상상계로, 크리스테바 식으로는 기호적인 코라의 세계로, 혹은 어머니의 모체로, 그리고 그러한 상상력의 종착으로서 죽음으로 나아게 된다.

우울증과 애도는 동전의 앞뒷면, 뫼비우스의 띠처럼 서로를 오가고 있고, 여전히 우리는 프라이데이의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이미 프라이데이의 새로운 이름을 밝혀준 작품은 미셸 푸르니에의 <방드리디, 태평양의 끝>였다. 이제 우리도 우리의 이름을 다시 물어보아야 할 때인 듯 하다. 자기소개서로는 내가 누구인지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대체 다양한 회사의 면접 때마다 그들이 원하는 모습대로 바뀌는 그 모습이 당신이라 할 수 있을까? 대체 울새를 죽인 이는 누구인가? 울새는, 누구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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