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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술이론 1 - 구조 대 역사 그 너머 서술이론 1
제임스 펠란.피터 J. 라비노비츠 엮음, 최라영 옮김 / 소명출판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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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이 심각합니다 말 그대로 서사이론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개념어들은 물론 인명까지 이렇게 낯설게 번역할수 있는지요? 역자분도 시전공자 분이시던데 전공지식이 부족하다는 생각만 듭니다. 비싸기만 한책 읽으면서 원서 읽는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게 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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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자국 외 - 2008년 제9회 이효석문학상 수상작품집
김애란 외 지음 / 해토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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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최초의 물음은 어쩌면 이런 것일 수도 있다. 메릴린 로빈슨의 <하우스키핑>의 질문이다.


왜 우리 생각이 어떤 손짓이나 소매의 주름장식이나 아무런 특징도 없는 어떤 특정한 날 오후의 어떤 방 귀퉁이로 돌아가는 것일까? 심지어 우리가 잠들어 있을 때나 너무 늙어서 다른 일에 대한 생각은 다 포기할 때까지도 말이다. 마침내 결합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이 모든 조각들은 다 무엇을 위한 것일까?


모든 조각들이 하나의 완전한 결합을 위해 존재하던 시대는 이미 지나가버렸다. 그렇다면 그 모든 조각들은 무엇을 위한 것일까. 언제부턴가 문학은 이 질문에 응답하기 위하여 부던히도 노력하고 있다. 바야흐로 문학이 거의 모든 글쓰기의 욕망을 포섭하고 있는 시대에, 소설, 그 중에서도 단편소설은 근대적 글쓰기로서 문학의 선봉에 서왔다. 소설이야말로 근대의 욕망을 가장 은밀하게 폭로해왔던 것인데, 근대의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시대에 소설은 이제 그 스스로 새로운 길을 찾아나서고 있다. 그것이 바로 온전한 하나가 되지 못하는 우리들의 조각들에 대하여 말하는 화법이다.




둘.


2008년 문학의 키워드는 "위로와 응원"이었다고 요약할 수도 잇을 것이다. 갈수록 현실에 시선을 돌리고 있는 소설들이 많아지고 있다. 어려운 현실을 살아가기 위해 문학이 지팡이가 되는 것이다. 최근의 단편소설들은 현실의 문제를 날카롭게 환부를 드러내듯 보여주는 데에 그치지 않을 뿐더러, 조각난 주체의 문제를 넘어서고자 하는 소설적 욕망을 잘 형상화하는데 성공하고 있다. 현실이 더이상 주체에 대하여 아무런 확신도 주지 못하는 시대. 자본주의의 본격적인 파급과 함께, 신자유주의의 시대에 주체의 위치는 어디에 속하는 것일까? 백가흠의 <그런 근원>은 하나의 우화로서 이러한 현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남자는 24시간 온종일 캐쉬의 뒤만 졸졸 따라다녔다."
"남자는 진정으로 캐쉬를 걱정했고, 사랑했다. 이제 남자에게 캐쉬는 유일한 가족이었다."



아버지는 죽었다. 가족은 해체되었다. 그 빈 자리를 '캐쉬'가 대신하게 되는 것이 이 소설의 큰 줄기이다. 유교주의로 대변되는 기원으로서의 아버지는 죽고, 정신적인 것은 해체되며, 이제 자본으로 대변되는 물질으로서의 아버지, 가족이 우리 곁에 존재한다. "그가 매니저가 된 것은 순전히 운이 좋아서였다."라는 말. 이제 삶은 순전히 우연성, 우발성에 의해 지배되는 세계를 살아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리 '근원'이 24시간을 감시하며 붙어있을지라도 "캐쉬"에 대해서는 어느 것 하나 파악할 수 없는 것이다. 그녀는 사연없는 간단한 메모 하나만을 남기고 떠나갔다. 


"생각해보니 캐쉬에 대해서 아는 게 별로 없다는 것도 그제야 알게 되었다."


거대한 자본의 구조에 대하여 우리가 알 수 있는 게 무엇일까. 2008년을 휩쓴 금융위기는 더이상 신자유주의로 대변되는 보이지 않는 자본에 대하여 더이상 우리가 파악할 수 없다는 사실, 어떠한 확신도 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삶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도 동일하다. 주체는 산산조각이 났고, 아무런 확신을 줄 수도 없는 그 조각들을 여전히 우리가 붙잡고 있을 뿐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여 여전히 소설을 써야하며, 소설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셋.


문제는 우리가 현실을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진정으로 무엇 하나 납득할 수는 없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지금까지 살아온 그 삶이 어느 순간 '나의 삶'이었다고 말할 수 없게 된 삶의 여로, 족적, 온전한 하나의 이야기가 되지 못하고 도중에 끊어져버렸던 그 지점을 인정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를 특정한 날 어떤 방 귀퉁이로 되돌아가도록 하는 질문은 그런 것들이었다.



"보내줄게. 이 모든 일들이 왜 일어났는지 설명해줘. 납득할 수 있다면, 보내줄게. 선문답은 싫어."
"몇 개의 문장으로 설명할 수 있는 일이었다면 진즉 말했을 거야."
- 240p, <타인의 삶>, 정미경



어느날 나의 삶이 타인의 삶이었음을 알게 되었을 때. 아마도 소설이 탄생하는 지점은 그곳일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 하나의 삶이 끊어진 그 지점으로 되돌아가 조각난 파편들을 붙잡고 불가능할지도 모르는 하나의 이야기를 횡설수설 늘어놓는 것. 실패할지도 모르는 그런 시도를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흔히 소설가들은 자신들이 소설을 쓰는 순간을 외딴 방에 들어가는 것으로 묘사하기도 하지만, 누구에게나 있는 그 외딴 방에 언제까지나 머물러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근대적 글쓰기의 주체 또한 어쩌면 이미 죽었을지 모르는 시점에, 우리는 여전히 우리는 여전히 그 외딴방을 더듬더듬 읽어본다. 대체 그 이야기들은 어디에서들 오는 것일까.




넷.


공을 굴렸다.
공이 있는 곳"까지 엉금엉금 기어가 다시 공을 굴렸다.
깨어지지 않는 공을 굴렸다. 밤새.
- 129p, <북대>, 김도연.



이제 나 혼자만의 공놀이가 가능했던 근대는 끝장이 났다. 주체라는 감옥 안에서 우리도 이제 나갈 때가 되었다. 이 공을 너에게 보낼줄 알고, 그 공을 잡았던 너의 손을 잡을 줄도 알아야 한다. 아니다, 그 '손'이 아니라, '손의 세부'를 만져주는 법을 알아야 한다.


'손'이 아니라 '손의 세부를 만져주는 손길. 엷은 졸음이 몰려오며 어느 순간, '나는 케어 받고 싶다. 나는 관리받는 삶이고 싶다. 누군가 나를 이렇게 영원히 보살펴부었으면 좋겠다. 어린아이처럼-'하고 고해하고 싶어졌다.
- 50p, <큐티클>, 김애란


문제는 우리가 두터운 장갑을 낀채로, 여전히 외딴방을 나설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경우였다. 수잔 손택은 <인 아메리카>에 "내 말 듣고 있나요? 인생을 바꾸는 것은 장갑을 벗는 것만큼이나 쉬운 일이예요." 라고 적었다. 그리고 나의 장갑을 벗는 일은, 너의 손을 잡아주기 위해서 겠지. 누군가의 손을 잡아주는 것은 동시에 나의 부족한 조각을 너를 통해 채우는 일일테니까. 


우영은 병실에 누워 곰곰히 생각해봤었다. 어쩌면 우인에게도, 믿지 못할 사연이 하나쯤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계속 마음이 편치 않았다. 자기도 꼭 모른 척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우인도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었지만 기회가 없어 품고만 살았을지 모른다. 안타깝지만 자신은 떠나야 하고, 우인에게도 벼락같은 무엇인가가 생겨서 그가 더이상 외롭지 않기를, 바를 뿐이었다. 진심으로. 그것 외엔 우영이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 163p, <내게 아주 특별한 연인 3>, 김윤영.



장갑을 벗어던졌을 때, 주체가 사라졌을 때, 세상 모든 것에 이야기 아닌 것이 없었다. 이제 우리는 주체의 감옥에서 벗어나 세상에 유동하는 저 수많은 글들을 읽어야 한다. 책만 읽을 소냐? 당신이 모르는 삶들을 읽어야만 한다. 조너선 사프란 포어의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의 문구처럼 "우리는 언젠가 우리 모두를 잃을 운명"이지만, 그럼에도 이제 우리는 우리에게 온전히 다가가야 한다. 삶을 살았다고, 쉽지 않았다고, 그것이 삶이었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 




다섯.


앞서 <하우스키핑>의 질문을 다시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것은 말할 수 없이 고요하게 무척이나 푸르스름하게 빛나는 저녁, 쨍그랑거리는 소리와 벌레들이 몸을 뒤척이는 소리, 또 늙고 뚱뚱한 개들이 이웃집 앞뜰에서 개 줄을 질질 끌며 방울을 울리는 소리로 가득찬 저녁, 그렇게 무한하면서도 달빛이 환한 저녁에 우리를 한층 예민하고 섬세해진 감각으로 서로를 가깝게 느끼게 된다는 뜻이었다. 예를 들면 두 사람이 어두운 방 안에 조용히 누워 있으면서 상대방이 언제 깨어나는지를 아는 것과 같은 식이었다. 


나를 감싸고 있는 그 모든 것들에서도, 어둠 속에서도 너를 읽는 일. 나는 너의 텍스트였고, 너는 나의 텍스트였다. 그걸 잊어버렸을 때도 흔적은 남는다. 일생 우리를 먹여살리기 위해 칼국수를 팔아온 어머니의 칼자국처럼. 그렇게 사과를 깎으면서도 이제는 여기 없는 당신을 읽게 될테니까. 


사과는 내 손에서 둥글게 자전하며 자신의 우주를 보여주고 있었다. 싱그러운 향기가 났다. 입 안에 침이 고였다. (중략) 사과조각은 우주 멀리 날아가는 운석처럼 뱅글뱅글 돌며 내 안의 어둠을 여행하게 될 터였다. 장례식장을 걸어가며, 정말이지 그런 예감이 들었다.
- 32p, <칼자국>, 김애란



소설을 쓰는 것도, 소설을 읽는 것도, 삶을 사는 것, 삶을 읽는 것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하나의 삶을 읽으려 너와 마주볼 때, 하나의 책을 읽을 때, 비로소 내 입 안에도 침이 고인다. 내가 읽은 그 모든 것들이 우주를 날아가는 운석처럼 내 안의 어둠을 여행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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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학기에는 시에 관한 강의를 많이 듣다보니, 자연히 김승희 교수님 영향을 또한 받게 마련이었지만 확실히 고은 시인의 표현처럼 "아! 라는 감탄사로 요약될 수 있는" 1950년대와 그 이후 한국시가 가지는 애도의 언어, 그리고 우울증의 언어로서의 양상은 흥미로운 주제이다. 물론 이번 학기 내 절친, 베프는 우리 푸코와 그의 광기의 역사였지만, 방학 중엔 에드워드 사이드와 크리스테바를 좀 읽어봐야 겠다. 김승희 교수님의 탈식민주의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상상력은 다양한 논문들에서도 드러나지만 역시 그 시들로 보는 맛 또한 남다르다.

<사랑 8>
 - 프라이데이가 로빈슨 크루소를 만난 날

당신은ㅡ 날 ㅡ 금요일에 구해 주셨지요
식인종들로부터ㅡ
그래서 주인님은 나의 이름을 프라이데이라고 붙이셨지요
주인님을ㅡ 만난ㅡ 날이
내 이름이 되었어요
나는ㅡ 아무ㅡ 것도 아니었기에
그 날이 나의 이름이고 출생이고
영광이었어요

이제 나는 프라이데이예요
맨발에는 가죽 신발이 덮이었고
순진무구한 눈동자에는 벌레 같은 문자들이
기어들어 왔어요
내 이름은 프라이데이
그 날이 나의 이름이고 출생이고 종언이고
저주였어요

그 날부터 나는 애도 중입니다
뉴멕시코 광활한 땅, 망망대지에 푸에블로 인디언
그 날부터 나는 애도 중이에요
보호 구역에서 애도 중인 폐선 자기를 애도하는......
과도한 애도 중......

ㅡㅡ

제국의 언어로 식민지 대상을 명명하는 행위는, 주체를 대상으로 격하시키며, 다른 작품 <식탁이 밥을 차린다>에서처럼 "켈빈 클라인이 나를 입고 / 니나리치가 나를 뿌리다 / CNN이 나를 시청한다 / 타임즈가 나를 구독한다"와 같은 수동태 동사로 만든다. "벌레 같은 문자들"은 심볼릭, 상징세계, 언어의 세계로의 진입을 의미하며 이를 통해 우리는 더이상 주체Subject가 아니라 Subjected to Symbolic 상징의 세계에 복종하는 결핍의 주체가 되는 것이다. 이상의 작품 <날개>에서 "그 삼십삼(三十三) 번지라는 것이 구조가 흡사 유곽이라는 느낌이 없지 않다"라고 말하는 이유는 일본의, 제국의 지리학에 의하여 제국의 언어로 구획지어진 공간은 이미 과거 그대로의 공간, 자연이 아니라 제국주의에 의해 오염된 공간이며 여기에서 '기원으로서의 모태'인 기존의 여성 관념은 해체되고 자본의 대상으로서의 여성의 몸만이 남게 되므로, 그곳이 유곽이 되는 것은 이렇한 필연성이다.

여기에서 이제 애도가 필요한 것이다. 1950년대는 애도의 시대이며, 그 이후로 그러한 죽음을 등에 지고 살아가게 되는 모든 산자들에게는 애도의 문학이 필요했다. 죽음을 상징 세계의 질서화 하는 것이 곧 애도이며, 주체가 2차적 나르시시즘의 대상의 상실을 받아들이며 이와 결별하고 새로운 대상으로 리비도를 대체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와 달리 주체가 대타자의 상실을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것과 결별할 수 없어서 오히려 대상의 상실만을 껴안고서 1차적인 나르시시즘 속에서 머무는 것, 자아를 상실하고 죽음충동으로 나아가는 것이 우울증적 언어의 특징이다.

"그 날부터 나는 애도 중입니다."

비단 1950년대가 아니라, 현대의 우리들 또한 죽은 자들을 업고서 과도한 애도 중이다. 지금도 은밀하고, 혹은 노골적으로 제국주의의 상징들은 "글로벌 시대"라는 기치 아래 신자유주의를 표방하는 거대담론과 함께 우리들을 명명하고, 호명하고 있다. <제국주의가 간다>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니나리치가 너를 부른다 / 향기로운 너를 만들어 주겠다고 / 크리스찬 디오르가 너를 부른다 / 불란서 멋쟁이로 꾸며 주겠다고 / 피에르 가르댕이 너를 부른다 / 나이키가 너를 부른다 / 엘리자베스 아덴이 너를 부른다 / 환상 창조 ㅡ 이브 탄생 / 에스티 로더가 너를 부른다 / 너, 너, 너를!" 이러한 거대담론, 거대한 구조의 호명에 대해 응답하지 않을 수 없는 우리는 갈수록 소외되고 타자화되어 간다. 영원히 A4 규격의 자기소개서 양식 속에서만 자신을 적어야만 하는 것이다.

유명한 마더구스 <누가 울새를 죽였나?>의 물음 또한 이와 같은 맥락이 아닐까 싶다. 결국에는 "누가 죽였나?"는 물음에 대해 "내가 죽였다"고 자수할 수 밖에 없는, 그렇게 수없이 우리들은 죽어갔고 그 시체를 등에 업고서 지나친 애도 속에 살아갈 수 밖에 없다. 애도에 실패할 때 우리는 우울증에 빠져든다. 우리가 잃어버린 그 무엇, 정확히 말할 수 없는 대상의 상실에 대하여 아무리 노력해도 그것을 대체하고 극복할 수 없을 때. 라캉 식으로는 상상계로, 크리스테바 식으로는 기호적인 코라의 세계로, 혹은 어머니의 모체로, 그리고 그러한 상상력의 종착으로서 죽음으로 나아게 된다.

우울증과 애도는 동전의 앞뒷면, 뫼비우스의 띠처럼 서로를 오가고 있고, 여전히 우리는 프라이데이의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이미 프라이데이의 새로운 이름을 밝혀준 작품은 미셸 푸르니에의 <방드리디, 태평양의 끝>였다. 이제 우리도 우리의 이름을 다시 물어보아야 할 때인 듯 하다. 자기소개서로는 내가 누구인지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대체 다양한 회사의 면접 때마다 그들이 원하는 모습대로 바뀌는 그 모습이 당신이라 할 수 있을까? 대체 울새를 죽인 이는 누구인가? 울새는, 누구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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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자초한 고독이건
불우의 고독이건
일생 고독했다는 것은 참
장한 일이다

더욱 고독해야 하는데
이 비 오는 날

주전자 물이 끓는다.

무궁화, 살구나무, 대추나무 비에 젖고
모과나무는 폭포다

오전인데도 어두운 하늘
천둥과 번개는

눈물이며

범죄자 사진 찍기다

폭우는

늘 하늘 아래
땅 위

고매한 정신처럼
추상같이 쏟아진다.

              - <고독>, 김영승



이 시를 보니 기가 막혀서 말이 안 나온다. "그것이 자초한 고독이건 / 불우의 고독이건 / 일생 고독했다는 것은 참 / 장한 일이다 / 더욱 고독해야 하는데 / 이 비 오는 날 / 주전자 물이 끓는다."를 처음 읽었을 때는 숨이 턱하고 막혀서 나는 용케도 죽지는 않았고 대신 심장이 좀 약해졌다. 시를 읽다가 심장이 약해질 걱정을 해야 하는 것도 딴엔 참 장한 일이다. 김영승 시인이 평생 술을 마시며 시를 쓰다가 결국엔 뇌신경에 문제가 생겨서 금주를 하고 난 이후로 쓴 첫 시집인 <화창>을 읽는 것은, 술을 마셔야만 시를 쓰던 사람이 술을 끊고 시를 쓰는 그 마음만큼이나 각오를 해야 할 일이다. 인천 어딘가 반지하방에서 월세로 살던 그가 모든 것이 삐뚤삐뚤보였을 시절엔 술을 마셔야만 "완전 투시안의 사나이"가 되어 오히려 가릴 것도 감출 것도 없이 모든 것을 진실되게 노래했는데, 술을 끊고나서 그에게 세상은 또 어떻게 보일까? 나는 술을 마시지 않으므로, 아주 상상하는 수 밖에 없다. 나도 모르는 낯선 존재가 되어서.


이 아름다운 밤......

내가 낯선 존재라니......

나는 참 기쁘다.
 
  - 시집<화창>의 자서 중. 김영승



방 정리를 좀 하려다가 또 나는 모르는 내가 감추어두었던 물건들이 속속 튀어나와 곤란하게 되었다. 롤러코스터 1집과 에이브릴 라빈 1집, 특히나 "류이치 사카모토 2000"을 듣지 않을 순 없는 노릇이고, 창세기전3 파트2 시디도 튀어나왔으니 일단은 인스톨부터 하고 본다. 그래도 피마새를 도로 정독하는 건 아무래도 벅차다. 안녕. 반갑고도 지긋지긋한 선민종족들아. 너희를 다시 읽으려면 나부터 좀 두억시니가 되어야 겠다. 결국 오늘밤엔 나도 낯선 얼굴짝을 하고 좀 더 고독해야 할텐데, 류이치 사카모토의 "The Sheltering Sky"가 나를 놔주질 않는다. 날씨가 풀려서 밤공기도 참 내겐 다소곳하다. 호빵이나 쪄먹고 잠이나 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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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면대가 막혔다. 나는 길다란 바늘을 찾아와서 이내 세면대의 수챗구멍을 쑤셔댔다. 계속해서 말려 올라오는 뱀의 허물 같은 잘려진 도마뱀의 꼬리 같은 그 구부러진 체모들. 내가 그토록 잊어버리고 싶었던 과거들이 여기에 있다. 어느 집의 누군가의 수챗구멍도 언젠가는 막히기 마련이고 이제, 그 과거들은 이제 다시 돌아온다. 그럼에도 실로 이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았다. 고등학교 때의 나도 군대를 다녀오기 전의 나도 이 사실을 몰랐다. 시간이 지나고 수체구멍은 막혀만 가고, 어쩐지 과거의 나보다 윗머리가 조금 비어보이는 나는 그 사실을 안다. 세면대 수체구멍의 그 심연을 들여다보지 않더라도 거기 내 과거가 흘러들어가 이제는 꽉 막혀져 더이상 어찌할 수도 없다는 것을, 나도 안다. 내 안의 깊은 곳 내장 깊숙히의 어둠도 얼마나 놀랐을까 그렇게 날카로운 바늘이 갑자기 들어왔다면. 나는 몇 번이고 집요하게 들이대던 바늘을 내버려두고, 관리인에게 전화를 해서 그 막힌 곳을 뚫어달라 해야겠다는 어머니의 말을 듣는다. 하지만 꼭 그래야만 할까, 막힌 곳을 뻥 뚫어버리고 우리의 내장을 깨끗히 비워버리면 이 깊은 구멍의 어둠은 사라지는 것일까. 지난 밤의 꿈에 나는 벗겨진 뱀의 허물 도마뱀의 잘려진 꼬리 같은 것들이 저 혼자서도 날듯이 기듯이 그렇게 저 자유로이 나아가는 것을 보았다. 나의 정신도 그 꿈 속에 나온 하늘처럼 맑고 바늘처럼 날이 선채로 이제 저 깊은 구멍을 향해 전속력으로 내려갈 태세를 갖추었다.




파리와 나의 기묘한 공생은 벌써 3일째가 되어간다. 나는 몇 번이고 잡으려 했지만, 이제는 녀석이 내 눈앞을 알짱거리다가 문득 내 팔뚝 위에 앉아도 나는 그저 한 번 팔을 부웅 휘두를 뿐 녀석을 잡기 위해 괜한 힘을 쓰지 않는다. 보아라 놈의 손짓을, 보아라 놈의 발짓을. 치지마,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살게 해줘. 입이 없어 열심히 날개짓으로만 전달하는 저 애처러운 소리를. 계절를 잊어버리고 추위를 맞이한 파리 한 마리가 따뜻함을 찾아 흘러 들어온 내 방. 이곳은 상호간의 협약도 강대국의 감시도 철조망과 무기도 필요없는 DMZ. 파리에게 있어서 나나, 나에게 있어서 파리나, 서로에게 가장 보통의 존재였다. 우리는 서로를 잘 모른다고 할 만큼 잘 알고, 서로를 잘 안다고 할만큼 서로를 모른다. 저나 나나 서로를 때리면 아픈 불쌍할 혈족일 따름이다.

나에게 넌 허무한 별빛
너에게 난 잊혀진 길
이곳에서 우린 변하지 않을 것을 약속했었지.

나는 보통의 존재 어디에나 흔하지
당신의 기억 속에 남겨질 수 없겠지
가장 보통의 존재 별로 쓸모는 없지
나를 부르는 소리 들려오지 않았지



하지만 그래도 가끔은 걱정이 된다. 내가 잠을 자다가 입을 벌렸을 때 녀석이 내 안의 어둠이 궁금해져서 그 안으로, 깊은 수채 구멍 속으로 들어가버리지는 않을지, 걱정이 된다. 부디 내 안의 어둠도, 파리도 너무 놀라지는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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