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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자국 외 - 2008년 제9회 이효석문학상 수상작품집
김애란 외 지음 / 해토 / 2008년 8월
평점 :
하나.
최초의 물음은 어쩌면 이런 것일 수도 있다. 메릴린 로빈슨의 <하우스키핑>의 질문이다.
왜 우리 생각이 어떤 손짓이나 소매의 주름장식이나 아무런 특징도 없는 어떤 특정한 날 오후의 어떤 방 귀퉁이로 돌아가는 것일까? 심지어 우리가 잠들어 있을 때나 너무 늙어서 다른 일에 대한 생각은 다 포기할 때까지도 말이다. 마침내 결합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이 모든 조각들은 다 무엇을 위한 것일까?
모든 조각들이 하나의 완전한 결합을 위해 존재하던 시대는 이미 지나가버렸다. 그렇다면 그 모든 조각들은 무엇을 위한 것일까. 언제부턴가 문학은 이 질문에 응답하기 위하여 부던히도 노력하고 있다. 바야흐로 문학이 거의 모든 글쓰기의 욕망을 포섭하고 있는 시대에, 소설, 그 중에서도 단편소설은 근대적 글쓰기로서 문학의 선봉에 서왔다. 소설이야말로 근대의 욕망을 가장 은밀하게 폭로해왔던 것인데, 근대의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시대에 소설은 이제 그 스스로 새로운 길을 찾아나서고 있다. 그것이 바로 온전한 하나가 되지 못하는 우리들의 조각들에 대하여 말하는 화법이다.
둘.
2008년 문학의 키워드는 "위로와 응원"이었다고 요약할 수도 잇을 것이다. 갈수록 현실에 시선을 돌리고 있는 소설들이 많아지고 있다. 어려운 현실을 살아가기 위해 문학이 지팡이가 되는 것이다. 최근의 단편소설들은 현실의 문제를 날카롭게 환부를 드러내듯 보여주는 데에 그치지 않을 뿐더러, 조각난 주체의 문제를 넘어서고자 하는 소설적 욕망을 잘 형상화하는데 성공하고 있다. 현실이 더이상 주체에 대하여 아무런 확신도 주지 못하는 시대. 자본주의의 본격적인 파급과 함께, 신자유주의의 시대에 주체의 위치는 어디에 속하는 것일까? 백가흠의 <그런 근원>은 하나의 우화로서 이러한 현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남자는 24시간 온종일 캐쉬의 뒤만 졸졸 따라다녔다."
"남자는 진정으로 캐쉬를 걱정했고, 사랑했다. 이제 남자에게 캐쉬는 유일한 가족이었다."
아버지는 죽었다. 가족은 해체되었다. 그 빈 자리를 '캐쉬'가 대신하게 되는 것이 이 소설의 큰 줄기이다. 유교주의로 대변되는 기원으로서의 아버지는 죽고, 정신적인 것은 해체되며, 이제 자본으로 대변되는 물질으로서의 아버지, 가족이 우리 곁에 존재한다. "그가 매니저가 된 것은 순전히 운이 좋아서였다."라는 말. 이제 삶은 순전히 우연성, 우발성에 의해 지배되는 세계를 살아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리 '근원'이 24시간을 감시하며 붙어있을지라도 "캐쉬"에 대해서는 어느 것 하나 파악할 수 없는 것이다. 그녀는 사연없는 간단한 메모 하나만을 남기고 떠나갔다.
"생각해보니 캐쉬에 대해서 아는 게 별로 없다는 것도 그제야 알게 되었다."
거대한 자본의 구조에 대하여 우리가 알 수 있는 게 무엇일까. 2008년을 휩쓴 금융위기는 더이상 신자유주의로 대변되는 보이지 않는 자본에 대하여 더이상 우리가 파악할 수 없다는 사실, 어떠한 확신도 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삶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도 동일하다. 주체는 산산조각이 났고, 아무런 확신을 줄 수도 없는 그 조각들을 여전히 우리가 붙잡고 있을 뿐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여 여전히 소설을 써야하며, 소설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셋.
문제는 우리가 현실을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진정으로 무엇 하나 납득할 수는 없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지금까지 살아온 그 삶이 어느 순간 '나의 삶'이었다고 말할 수 없게 된 삶의 여로, 족적, 온전한 하나의 이야기가 되지 못하고 도중에 끊어져버렸던 그 지점을 인정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를 특정한 날 어떤 방 귀퉁이로 되돌아가도록 하는 질문은 그런 것들이었다.
"보내줄게. 이 모든 일들이 왜 일어났는지 설명해줘. 납득할 수 있다면, 보내줄게. 선문답은 싫어."
"몇 개의 문장으로 설명할 수 있는 일이었다면 진즉 말했을 거야."
- 240p, <타인의 삶>, 정미경
어느날 나의 삶이 타인의 삶이었음을 알게 되었을 때. 아마도 소설이 탄생하는 지점은 그곳일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 하나의 삶이 끊어진 그 지점으로 되돌아가 조각난 파편들을 붙잡고 불가능할지도 모르는 하나의 이야기를 횡설수설 늘어놓는 것. 실패할지도 모르는 그런 시도를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흔히 소설가들은 자신들이 소설을 쓰는 순간을 외딴 방에 들어가는 것으로 묘사하기도 하지만, 누구에게나 있는 그 외딴 방에 언제까지나 머물러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근대적 글쓰기의 주체 또한 어쩌면 이미 죽었을지 모르는 시점에, 우리는 여전히 우리는 여전히 그 외딴방을 더듬더듬 읽어본다. 대체 그 이야기들은 어디에서들 오는 것일까.
넷.
공을 굴렸다.
공이 있는 곳"까지 엉금엉금 기어가 다시 공을 굴렸다.
깨어지지 않는 공을 굴렸다. 밤새.
- 129p, <북대>, 김도연.
이제 나 혼자만의 공놀이가 가능했던 근대는 끝장이 났다. 주체라는 감옥 안에서 우리도 이제 나갈 때가 되었다. 이 공을 너에게 보낼줄 알고, 그 공을 잡았던 너의 손을 잡을 줄도 알아야 한다. 아니다, 그 '손'이 아니라, '손의 세부'를 만져주는 법을 알아야 한다.
'손'이 아니라 '손의 세부를 만져주는 손길. 엷은 졸음이 몰려오며 어느 순간, '나는 케어 받고 싶다. 나는 관리받는 삶이고 싶다. 누군가 나를 이렇게 영원히 보살펴부었으면 좋겠다. 어린아이처럼-'하고 고해하고 싶어졌다.
- 50p, <큐티클>, 김애란
문제는 우리가 두터운 장갑을 낀채로, 여전히 외딴방을 나설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경우였다. 수잔 손택은 <인 아메리카>에 "내 말 듣고 있나요? 인생을 바꾸는 것은 장갑을 벗는 것만큼이나 쉬운 일이예요." 라고 적었다. 그리고 나의 장갑을 벗는 일은, 너의 손을 잡아주기 위해서 겠지. 누군가의 손을 잡아주는 것은 동시에 나의 부족한 조각을 너를 통해 채우는 일일테니까.
우영은 병실에 누워 곰곰히 생각해봤었다. 어쩌면 우인에게도, 믿지 못할 사연이 하나쯤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계속 마음이 편치 않았다. 자기도 꼭 모른 척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우인도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었지만 기회가 없어 품고만 살았을지 모른다. 안타깝지만 자신은 떠나야 하고, 우인에게도 벼락같은 무엇인가가 생겨서 그가 더이상 외롭지 않기를, 바를 뿐이었다. 진심으로. 그것 외엔 우영이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 163p, <내게 아주 특별한 연인 3>, 김윤영.
장갑을 벗어던졌을 때, 주체가 사라졌을 때, 세상 모든 것에 이야기 아닌 것이 없었다. 이제 우리는 주체의 감옥에서 벗어나 세상에 유동하는 저 수많은 글들을 읽어야 한다. 책만 읽을 소냐? 당신이 모르는 삶들을 읽어야만 한다. 조너선 사프란 포어의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의 문구처럼 "우리는 언젠가 우리 모두를 잃을 운명"이지만, 그럼에도 이제 우리는 우리에게 온전히 다가가야 한다. 삶을 살았다고, 쉽지 않았다고, 그것이 삶이었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
다섯.
앞서 <하우스키핑>의 질문을 다시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것은 말할 수 없이 고요하게 무척이나 푸르스름하게 빛나는 저녁, 쨍그랑거리는 소리와 벌레들이 몸을 뒤척이는 소리, 또 늙고 뚱뚱한 개들이 이웃집 앞뜰에서 개 줄을 질질 끌며 방울을 울리는 소리로 가득찬 저녁, 그렇게 무한하면서도 달빛이 환한 저녁에 우리를 한층 예민하고 섬세해진 감각으로 서로를 가깝게 느끼게 된다는 뜻이었다. 예를 들면 두 사람이 어두운 방 안에 조용히 누워 있으면서 상대방이 언제 깨어나는지를 아는 것과 같은 식이었다.
나를 감싸고 있는 그 모든 것들에서도, 어둠 속에서도 너를 읽는 일. 나는 너의 텍스트였고, 너는 나의 텍스트였다. 그걸 잊어버렸을 때도 흔적은 남는다. 일생 우리를 먹여살리기 위해 칼국수를 팔아온 어머니의 칼자국처럼. 그렇게 사과를 깎으면서도 이제는 여기 없는 당신을 읽게 될테니까.
사과는 내 손에서 둥글게 자전하며 자신의 우주를 보여주고 있었다. 싱그러운 향기가 났다. 입 안에 침이 고였다. (중략) 사과조각은 우주 멀리 날아가는 운석처럼 뱅글뱅글 돌며 내 안의 어둠을 여행하게 될 터였다. 장례식장을 걸어가며, 정말이지 그런 예감이 들었다.
- 32p, <칼자국>, 김애란
소설을 쓰는 것도, 소설을 읽는 것도, 삶을 사는 것, 삶을 읽는 것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하나의 삶을 읽으려 너와 마주볼 때, 하나의 책을 읽을 때, 비로소 내 입 안에도 침이 고인다. 내가 읽은 그 모든 것들이 우주를 날아가는 운석처럼 내 안의 어둠을 여행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