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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끗하고 연약한 7
이쿠에미 료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08년 5월
평점 :
절판
24세. 남자. 지금까지 귀신을 본 일은 단 한 번도 없다. 단 한 번 태양을 손에 넣어본 일도 없다. 그러니, 태양을 잃는 고통에 대해서도 말할 수 없다. 살아있는 사람에 대해 말하는 것은 조심스럽고, 아무래도 귀신에 대해서도 말할 수 없다. 하지만, 달에 대해서는, 어쩌면, 아마도, 어렴풋이. 이런 생각을 해봤다. 사람의 다정함이라는 게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면, 다정한 사람들은 자신들만 상처입도록 살아가는 사람이로구나. 하지만 그런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건, 햇빛의 반사가 없이도 스스로 빛을 내는 달과 같은, 이야기니까. 이쿠에미 료에게 있어서 달이라는 게 그런 거라는 걸 나도 어렴풋이는 안다.
그러니까, 정말 너무 좋아하는데, 좋아하므로 남에게 말하고 싶지 않은 존재도 있는 법이다. 이제 만화 같은 건, 얼마 보지도 않는데 문득 잠자리에 들어서 이불을 덮어쓰고 그 온기를 느끼기 시작한 10분 이내, 그녀의 작품들에 대한 생각이 머리 속을 맴돌다가 결국에는 만화책을 펴들었고 자는 시간은 무한정 미뤄지고 말았다. 사는 게 먹먹해지면, 나는 그녀의 만화를 떠올리고, 그 달과 같은 사람들을 생각한다. 그건 아무래도 마냥 좋은 일만은 아닌데, 살아있는 사람이 햇빛을 받지 않고 살아갈 수는 없으므로, 달에 대해 생각하고 달과 같이 살아간다는 것은 멈춰진 시간 속에서 변하지 않고 살아간다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내내 생각했었어. 나나, 우리들이, 어차피 같은 마음을 안고 있다면, 언제까지고 함께 있는 게 좋지 않았을까...
아니, 하지만, 안된다는 거 알아. 하지만.... 내가 하루타를, 하루타를, 그리고 칸나를, 잊는다해도,
잊고 누군가와 행복한다고 해도, 칸나도 행복할까? 하루타에게도 누군가가 곁에 있어 줄까?
그건 내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는 거야. 그러니까 우리가 함께 있어야 했던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어.
아니, 하지만 그건 안돼. 하지만 모르겠어. 하지만... 만약... 하지만, 하지만, 만약, 나, 그동안 내내
그런 생각만 해왔어. ........칸나.
칸나는, 누구를 좋아했을까? 난 알 수가 없으므로, 이젠 생각하지 않을 거야.
과거의 한 지점을 통해서만 끊임없이 자신을 되돌아보는 사람들이 있으며, 그들과 그들 주변 사람들은 깨끗하고, 연약하다. 울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대신 울어줄 수 있으니까. 다정함이 무기가 될 수 있다고 해서, 누군가를 위해 대신 울어줄 수 있는 다정함까지 나쁘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럴 수는 없었다. '그와 달'에서 아키의 말대로 사람이 사람을 잊는다는 것은, 혹은 기억은 잊어도 이미지를, 감각을 잊는다는 것은 무엇보다 힘든 일이니까. 그건 환상이 아니라, 사람의 삶을 영원히 변형시키는 힘의 작용이었으니까. 칸나는 핸드폰 문자를 싫어한다. 하루타가 사고로 죽었을 때 그녀에게 문자를 보내고 있었으니까. 사람이라는 게 그렇게 생겨먹었다. 어쩌면 살아간다는 건 그렇게 살아있는 것에 대한 가능성을 줄여나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사람의 삶을 비추어 보면 영원에 가까운 태양도, 그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점에서 사람과 다를 것이 없으므로, 모든 것은 그렇게 변해가는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빛에 이끌리는 사람들은 어쩔 수가 없다. 한 순간 한 순간이 새로운 인생이라 할지라도, 우리 모두가 언제나 새로울 수는 없으니까, 삶이라는 건 언제나 진행형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이야기는 지금까지의 우리의 이야기였으니까.
"나리는.... 애인 없어요? 이럴 때 같이..."
"내 이름은 아키야."
"아키...는 이런 곳에 같이 올 애인이 없어요?"
"그건 프로포즈 하기 전에 확인해."
"저~기~요~!"
"당신이 왜 할머니를 심하게 따르게 됐는가를 얘기해."
"내, 내 이름은 우라라."
"우라라가 할머니의 광팬인 이야기를 해봐."
모든 것을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 그 이야기가 그 이야기가 되어야 하는지를. 왜 내가 나여야만 하는지를. 그러나 설명하려고 노력하는 것까지 멈출수는 없었다. 그러니까, 살아가려면. 그래도, 살아가려면. 모든 이야기에는 결말이 있어야하니까. 물론 그 이야기의 결말이 모든 것을 이야기주지는 않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모든 것을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그보다는 더 많은 것들을 알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가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나는 조금 안심했다. 안심했던 것 같다. 이를테면 이런 말들이 가능할 때.
아라타가 본 나는, 다른 사람을 냉정히 관찰하는 말 수 적은 사람인 모양이다.
나는 엄마가 할머니를 위해, 간을 하기 전에 1인분의 식사를 덜어놓는 것을 알고 있다.
아빠가 사실은 내 걱정도 하고 있는 걸 알고 있다.
아키 오빠는, 아마, 귀신의 진위는 별개로 치고, 이제 얼마 남지 않은 포세이돈 곁에
있어주려고 돌아 왔을 거라는 것도.... 알고 있다.
투닥거려도, 손을 잡고 편의점에 가는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알고 있다.
아라타,
한여름의 태양빛에 반짝이는 반짝이는 바다는 무섭지만,
달이 뜨는 평온한 바다라면, 조금은 봐도 좋을 것 같아....
마음이라는 건, 그렇게 조금씩 내려 쌓이는 것이니까. 모든 것을 말할 필요는 없는 거니까. 결말 따윈 이야기에서 아무래도 좋은 거니까. 그건 결말이면서 결말이 아니니까. 그렇게 마음이 조금씩 내려 쌓이면 그 모든 사실과 거짓과, 삶까지도 덮어버릴 테니까. 결말 같은 건 애초에 있지도 않았던 거구나. 이쿠에미 료의 만화를 보면서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언제나 잠이 들곤 했다. 달이 뜨는 평온한 바다를 꿈꾸면서. 그건 멈춰있는 시간이었지만, 꿈이면서 동시에 꿈이 아니었다. 어쩌면 꿈조차 될 수 없었다. 너무나도 깨끗하고 연약해서. 도저히 내버려 둘 수 없는 어떤 것들이었다.
놀이공원은 정말 즐거웠어.
관람차에서, 그 때...
우리들이 작아져가는
지상을 내려다보는 가운데
하늘을 올려다보던 칸나가 강하게 인상에 남았어
칸나, 난 아무 말 할 수 없지만
다만,
우리들은 살아서 앞으로 나아가는 거구나... 하는 생각을 해.
그녀에게도, 누군가 그 달을 함께 바라봐 주기를. 그렇게,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