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술이론 1 - 구조 대 역사 그 너머 서술이론 1
제임스 펠란.피터 J. 라비노비츠 엮음, 최라영 옮김 / 소명출판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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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이 심각합니다 말 그대로 서사이론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개념어들은 물론 인명까지 이렇게 낯설게 번역할수 있는지요? 역자분도 시전공자 분이시던데 전공지식이 부족하다는 생각만 듭니다. 비싸기만 한책 읽으면서 원서 읽는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게 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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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자국 외 - 2008년 제9회 이효석문학상 수상작품집
김애란 외 지음 / 해토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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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최초의 물음은 어쩌면 이런 것일 수도 있다. 메릴린 로빈슨의 <하우스키핑>의 질문이다.


왜 우리 생각이 어떤 손짓이나 소매의 주름장식이나 아무런 특징도 없는 어떤 특정한 날 오후의 어떤 방 귀퉁이로 돌아가는 것일까? 심지어 우리가 잠들어 있을 때나 너무 늙어서 다른 일에 대한 생각은 다 포기할 때까지도 말이다. 마침내 결합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이 모든 조각들은 다 무엇을 위한 것일까?


모든 조각들이 하나의 완전한 결합을 위해 존재하던 시대는 이미 지나가버렸다. 그렇다면 그 모든 조각들은 무엇을 위한 것일까. 언제부턴가 문학은 이 질문에 응답하기 위하여 부던히도 노력하고 있다. 바야흐로 문학이 거의 모든 글쓰기의 욕망을 포섭하고 있는 시대에, 소설, 그 중에서도 단편소설은 근대적 글쓰기로서 문학의 선봉에 서왔다. 소설이야말로 근대의 욕망을 가장 은밀하게 폭로해왔던 것인데, 근대의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시대에 소설은 이제 그 스스로 새로운 길을 찾아나서고 있다. 그것이 바로 온전한 하나가 되지 못하는 우리들의 조각들에 대하여 말하는 화법이다.




둘.


2008년 문학의 키워드는 "위로와 응원"이었다고 요약할 수도 잇을 것이다. 갈수록 현실에 시선을 돌리고 있는 소설들이 많아지고 있다. 어려운 현실을 살아가기 위해 문학이 지팡이가 되는 것이다. 최근의 단편소설들은 현실의 문제를 날카롭게 환부를 드러내듯 보여주는 데에 그치지 않을 뿐더러, 조각난 주체의 문제를 넘어서고자 하는 소설적 욕망을 잘 형상화하는데 성공하고 있다. 현실이 더이상 주체에 대하여 아무런 확신도 주지 못하는 시대. 자본주의의 본격적인 파급과 함께, 신자유주의의 시대에 주체의 위치는 어디에 속하는 것일까? 백가흠의 <그런 근원>은 하나의 우화로서 이러한 현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남자는 24시간 온종일 캐쉬의 뒤만 졸졸 따라다녔다."
"남자는 진정으로 캐쉬를 걱정했고, 사랑했다. 이제 남자에게 캐쉬는 유일한 가족이었다."



아버지는 죽었다. 가족은 해체되었다. 그 빈 자리를 '캐쉬'가 대신하게 되는 것이 이 소설의 큰 줄기이다. 유교주의로 대변되는 기원으로서의 아버지는 죽고, 정신적인 것은 해체되며, 이제 자본으로 대변되는 물질으로서의 아버지, 가족이 우리 곁에 존재한다. "그가 매니저가 된 것은 순전히 운이 좋아서였다."라는 말. 이제 삶은 순전히 우연성, 우발성에 의해 지배되는 세계를 살아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리 '근원'이 24시간을 감시하며 붙어있을지라도 "캐쉬"에 대해서는 어느 것 하나 파악할 수 없는 것이다. 그녀는 사연없는 간단한 메모 하나만을 남기고 떠나갔다. 


"생각해보니 캐쉬에 대해서 아는 게 별로 없다는 것도 그제야 알게 되었다."


거대한 자본의 구조에 대하여 우리가 알 수 있는 게 무엇일까. 2008년을 휩쓴 금융위기는 더이상 신자유주의로 대변되는 보이지 않는 자본에 대하여 더이상 우리가 파악할 수 없다는 사실, 어떠한 확신도 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삶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도 동일하다. 주체는 산산조각이 났고, 아무런 확신을 줄 수도 없는 그 조각들을 여전히 우리가 붙잡고 있을 뿐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여 여전히 소설을 써야하며, 소설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셋.


문제는 우리가 현실을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진정으로 무엇 하나 납득할 수는 없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지금까지 살아온 그 삶이 어느 순간 '나의 삶'이었다고 말할 수 없게 된 삶의 여로, 족적, 온전한 하나의 이야기가 되지 못하고 도중에 끊어져버렸던 그 지점을 인정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를 특정한 날 어떤 방 귀퉁이로 되돌아가도록 하는 질문은 그런 것들이었다.



"보내줄게. 이 모든 일들이 왜 일어났는지 설명해줘. 납득할 수 있다면, 보내줄게. 선문답은 싫어."
"몇 개의 문장으로 설명할 수 있는 일이었다면 진즉 말했을 거야."
- 240p, <타인의 삶>, 정미경



어느날 나의 삶이 타인의 삶이었음을 알게 되었을 때. 아마도 소설이 탄생하는 지점은 그곳일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 하나의 삶이 끊어진 그 지점으로 되돌아가 조각난 파편들을 붙잡고 불가능할지도 모르는 하나의 이야기를 횡설수설 늘어놓는 것. 실패할지도 모르는 그런 시도를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흔히 소설가들은 자신들이 소설을 쓰는 순간을 외딴 방에 들어가는 것으로 묘사하기도 하지만, 누구에게나 있는 그 외딴 방에 언제까지나 머물러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근대적 글쓰기의 주체 또한 어쩌면 이미 죽었을지 모르는 시점에, 우리는 여전히 우리는 여전히 그 외딴방을 더듬더듬 읽어본다. 대체 그 이야기들은 어디에서들 오는 것일까.




넷.


공을 굴렸다.
공이 있는 곳"까지 엉금엉금 기어가 다시 공을 굴렸다.
깨어지지 않는 공을 굴렸다. 밤새.
- 129p, <북대>, 김도연.



이제 나 혼자만의 공놀이가 가능했던 근대는 끝장이 났다. 주체라는 감옥 안에서 우리도 이제 나갈 때가 되었다. 이 공을 너에게 보낼줄 알고, 그 공을 잡았던 너의 손을 잡을 줄도 알아야 한다. 아니다, 그 '손'이 아니라, '손의 세부'를 만져주는 법을 알아야 한다.


'손'이 아니라 '손의 세부를 만져주는 손길. 엷은 졸음이 몰려오며 어느 순간, '나는 케어 받고 싶다. 나는 관리받는 삶이고 싶다. 누군가 나를 이렇게 영원히 보살펴부었으면 좋겠다. 어린아이처럼-'하고 고해하고 싶어졌다.
- 50p, <큐티클>, 김애란


문제는 우리가 두터운 장갑을 낀채로, 여전히 외딴방을 나설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경우였다. 수잔 손택은 <인 아메리카>에 "내 말 듣고 있나요? 인생을 바꾸는 것은 장갑을 벗는 것만큼이나 쉬운 일이예요." 라고 적었다. 그리고 나의 장갑을 벗는 일은, 너의 손을 잡아주기 위해서 겠지. 누군가의 손을 잡아주는 것은 동시에 나의 부족한 조각을 너를 통해 채우는 일일테니까. 


우영은 병실에 누워 곰곰히 생각해봤었다. 어쩌면 우인에게도, 믿지 못할 사연이 하나쯤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계속 마음이 편치 않았다. 자기도 꼭 모른 척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우인도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었지만 기회가 없어 품고만 살았을지 모른다. 안타깝지만 자신은 떠나야 하고, 우인에게도 벼락같은 무엇인가가 생겨서 그가 더이상 외롭지 않기를, 바를 뿐이었다. 진심으로. 그것 외엔 우영이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 163p, <내게 아주 특별한 연인 3>, 김윤영.



장갑을 벗어던졌을 때, 주체가 사라졌을 때, 세상 모든 것에 이야기 아닌 것이 없었다. 이제 우리는 주체의 감옥에서 벗어나 세상에 유동하는 저 수많은 글들을 읽어야 한다. 책만 읽을 소냐? 당신이 모르는 삶들을 읽어야만 한다. 조너선 사프란 포어의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의 문구처럼 "우리는 언젠가 우리 모두를 잃을 운명"이지만, 그럼에도 이제 우리는 우리에게 온전히 다가가야 한다. 삶을 살았다고, 쉽지 않았다고, 그것이 삶이었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 




다섯.


앞서 <하우스키핑>의 질문을 다시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것은 말할 수 없이 고요하게 무척이나 푸르스름하게 빛나는 저녁, 쨍그랑거리는 소리와 벌레들이 몸을 뒤척이는 소리, 또 늙고 뚱뚱한 개들이 이웃집 앞뜰에서 개 줄을 질질 끌며 방울을 울리는 소리로 가득찬 저녁, 그렇게 무한하면서도 달빛이 환한 저녁에 우리를 한층 예민하고 섬세해진 감각으로 서로를 가깝게 느끼게 된다는 뜻이었다. 예를 들면 두 사람이 어두운 방 안에 조용히 누워 있으면서 상대방이 언제 깨어나는지를 아는 것과 같은 식이었다. 


나를 감싸고 있는 그 모든 것들에서도, 어둠 속에서도 너를 읽는 일. 나는 너의 텍스트였고, 너는 나의 텍스트였다. 그걸 잊어버렸을 때도 흔적은 남는다. 일생 우리를 먹여살리기 위해 칼국수를 팔아온 어머니의 칼자국처럼. 그렇게 사과를 깎으면서도 이제는 여기 없는 당신을 읽게 될테니까. 


사과는 내 손에서 둥글게 자전하며 자신의 우주를 보여주고 있었다. 싱그러운 향기가 났다. 입 안에 침이 고였다. (중략) 사과조각은 우주 멀리 날아가는 운석처럼 뱅글뱅글 돌며 내 안의 어둠을 여행하게 될 터였다. 장례식장을 걸어가며, 정말이지 그런 예감이 들었다.
- 32p, <칼자국>, 김애란



소설을 쓰는 것도, 소설을 읽는 것도, 삶을 사는 것, 삶을 읽는 것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하나의 삶을 읽으려 너와 마주볼 때, 하나의 책을 읽을 때, 비로소 내 입 안에도 침이 고인다. 내가 읽은 그 모든 것들이 우주를 날아가는 운석처럼 내 안의 어둠을 여행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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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끗하고 연약한 7
이쿠에미 료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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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24세. 남자. 지금까지 귀신을 본 일은 단 한 번도 없다. 단 한 번 태양을 손에 넣어본 일도 없다. 그러니, 태양을 잃는 고통에 대해서도 말할 수 없다. 살아있는 사람에 대해 말하는 것은 조심스럽고, 아무래도 귀신에 대해서도 말할 수 없다. 하지만, 달에 대해서는, 어쩌면, 아마도, 어렴풋이. 이런 생각을 해봤다. 사람의 다정함이라는 게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면, 다정한 사람들은 자신들만 상처입도록 살아가는 사람이로구나. 하지만 그런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건, 햇빛의 반사가 없이도 스스로 빛을 내는 달과 같은, 이야기니까. 이쿠에미 료에게 있어서 달이라는 게 그런 거라는 걸 나도 어렴풋이는 안다.

그러니까, 정말 너무 좋아하는데, 좋아하므로 남에게 말하고 싶지 않은 존재도 있는 법이다. 이제 만화 같은 건, 얼마 보지도 않는데 문득 잠자리에 들어서 이불을 덮어쓰고 그 온기를 느끼기 시작한 10분 이내, 그녀의 작품들에 대한 생각이 머리 속을 맴돌다가 결국에는 만화책을 펴들었고 자는 시간은 무한정 미뤄지고 말았다. 사는 게 먹먹해지면, 나는 그녀의 만화를 떠올리고, 그 달과 같은 사람들을 생각한다. 그건 아무래도 마냥 좋은 일만은 아닌데, 살아있는 사람이 햇빛을 받지 않고 살아갈 수는 없으므로, 달에 대해 생각하고 달과 같이 살아간다는 것은 멈춰진 시간 속에서 변하지 않고 살아간다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내내 생각했었어. 나나, 우리들이, 어차피 같은 마음을 안고 있다면, 언제까지고 함께 있는 게 좋지 않았을까...
아니, 하지만, 안된다는 거 알아. 하지만.... 내가 하루타를, 하루타를, 그리고 칸나를, 잊는다해도,
잊고 누군가와 행복한다고 해도, 칸나도 행복할까? 하루타에게도 누군가가 곁에 있어 줄까?
그건 내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는 거야. 그러니까 우리가 함께 있어야 했던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어.
아니, 하지만 그건 안돼. 하지만 모르겠어. 하지만... 만약... 하지만, 하지만, 만약, 나, 그동안 내내
그런 생각만 해왔어. ........칸나.


칸나는, 누구를 좋아했을까? 난 알 수가 없으므로, 이젠 생각하지 않을 거야.

과거의 한 지점을 통해서만 끊임없이 자신을 되돌아보는 사람들이 있으며, 그들과 그들 주변 사람들은 깨끗하고, 연약하다. 울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대신 울어줄 수 있으니까. 다정함이 무기가 될 수 있다고 해서, 누군가를 위해 대신 울어줄 수 있는 다정함까지 나쁘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럴 수는 없었다. '그와 달'에서 아키의 말대로 사람이 사람을 잊는다는 것은, 혹은 기억은 잊어도 이미지를, 감각을 잊는다는 것은 무엇보다 힘든 일이니까. 그건 환상이 아니라, 사람의 삶을 영원히 변형시키는 힘의 작용이었으니까. 칸나는 핸드폰 문자를 싫어한다. 하루타가 사고로 죽었을 때 그녀에게 문자를 보내고 있었으니까. 사람이라는 게 그렇게 생겨먹었다. 어쩌면 살아간다는 건 그렇게 살아있는 것에 대한 가능성을 줄여나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사람의 삶을 비추어 보면 영원에 가까운 태양도, 그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점에서 사람과 다를 것이 없으므로, 모든 것은 그렇게 변해가는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빛에 이끌리는 사람들은 어쩔 수가 없다. 한 순간 한 순간이 새로운 인생이라 할지라도, 우리 모두가 언제나 새로울 수는 없으니까, 삶이라는 건 언제나 진행형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이야기는 지금까지의 우리의 이야기였으니까.

"나리는.... 애인 없어요? 이럴 때 같이..."
"내 이름은 아키야."
"아키...는 이런 곳에 같이 올 애인이 없어요?"
"그건 프로포즈 하기 전에 확인해."
"저~기~요~!"
"당신이 왜 할머니를 심하게 따르게 됐는가를 얘기해."
"내, 내 이름은 우라라."
"우라라가 할머니의 광팬인 이야기를 해봐."


모든 것을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 그 이야기가 그 이야기가 되어야 하는지를. 왜 내가 나여야만 하는지를. 그러나 설명하려고 노력하는 것까지 멈출수는 없었다. 그러니까, 살아가려면. 그래도, 살아가려면. 모든 이야기에는 결말이 있어야하니까. 물론 그 이야기의 결말이 모든 것을 이야기주지는 않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모든 것을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그보다는 더 많은 것들을 알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가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나는 조금 안심했다. 안심했던 것 같다. 이를테면 이런 말들이 가능할 때.

아라타가 본 나는, 다른 사람을 냉정히 관찰하는 말 수 적은 사람인 모양이다.
나는 엄마가 할머니를 위해, 간을 하기 전에 1인분의 식사를 덜어놓는 것을 알고 있다.
아빠가 사실은 내 걱정도 하고 있는 걸 알고 있다.
아키 오빠는, 아마, 귀신의 진위는 별개로 치고, 이제 얼마 남지 않은 포세이돈 곁에
있어주려고 돌아 왔을 거라는 것도.... 알고 있다.
투닥거려도, 손을 잡고 편의점에 가는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알고 있다.
아라타,
한여름의 태양빛에 반짝이는 반짝이는 바다는 무섭지만,
달이 뜨는 평온한 바다라면, 조금은 봐도 좋을 것 같아....


마음이라는 건, 그렇게 조금씩 내려 쌓이는 것이니까. 모든 것을 말할 필요는 없는 거니까. 결말 따윈 이야기에서 아무래도 좋은 거니까. 그건 결말이면서 결말이 아니니까. 그렇게 마음이 조금씩 내려 쌓이면 그 모든 사실과 거짓과, 삶까지도 덮어버릴 테니까. 결말 같은 건 애초에 있지도 않았던 거구나. 이쿠에미 료의 만화를 보면서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언제나 잠이 들곤 했다. 달이 뜨는 평온한 바다를 꿈꾸면서. 그건 멈춰있는 시간이었지만, 꿈이면서 동시에 꿈이 아니었다. 어쩌면 꿈조차 될 수 없었다. 너무나도 깨끗하고 연약해서. 도저히 내버려 둘 수 없는  어떤 것들이었다.

놀이공원은 정말 즐거웠어.
관람차에서, 그 때...
우리들이 작아져가는
지상을 내려다보는 가운데
하늘을 올려다보던 칸나가 강하게 인상에 남았어
칸나, 난 아무 말 할 수 없지만
다만,
우리들은 살아서 앞으로 나아가는 거구나... 하는 생각을 해.


그녀에게도, 누군가 그 달을 함께 바라봐 주기를. 그렇게,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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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노래한다
김연수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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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어디에 있나요? 제 말은 들리나요? 어쩌면 이건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 편지겠어요.”

책을 몇 번이나 덮었다가 다시 폈다. 한 문장만 더, 한 문장만 더, 그러다 숨이 막히면 다시 책장을 덮었고 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리고 참을 수 없어서, 현실의 속도는 마음의 속도보다 빠르다던데, 지금 나의 마음의 속도가 현실의 속도를 추월해 나갔기 때문에, 나는 다시금 책장을 펼쳐 다시 끊어진 문장의 꼬리를 찾아냈다.

칼 세이건은 우주에 대해 생각할 때, 등골이 오싹하며 숨이 막힌다고 했지만, 내게 있어서는 이처럼 아름다운 문장을 대할 때, 우주에 대해 생각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체험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이 때의 아름다운 문장이란 아름다운 이야기이다. 그 둘은 다르지 않다. 내가 알기로 이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소설이란, 이를테면 단 한명의 여성, 내가 모르는 타자의 세계를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에 탄생하는 것인데, 그렇다면 내가 아름다운 그녀의 세계를 상상하는 그 문장이 아름답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아름다운 소설은 아름다운 문장에서 나오므로.

나를 데려가우. 이번에는 진짜 바다를 내게 보여줍소. 사람은 무엇 때문에 살며 어떠한 사람으로 되며 사람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는 잘 압지. 그러니 내게 진짜 바다를 보여줍소. 그럼 나는 숨이 다하는 그날까지 당신의 바다로 들어가는 작은 오솔길이 되겠슴둥.

내가 아는한 세상에 이보다 아름다운 사랑의 밀어는 없다. 그것은 말 그대로 너를 통해서만 나는 나의 바다를 볼 수 있게 된다는 말이었으니. 우리 모두가 도무지 하나의 온전한 이야기가 되지 못하는 현실을 살아가면서 소설을 읽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이기도 했다. 길송이형의 물음마냥 니 누기야? 라고 물어왔을 때,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 우리가 속한 세계뿐만 아니라 우리가 모르는 그 세계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으므로. 때때로 너무나도 가혹한 현실, 농밀한 어둠이 우리를 덮쳐누를 때에도, 내 눈동자, 두 개의 검은 눈동자, 어둠을 보지 못하고, 또 믿지 못하는 두 개의 검은 눈동자는 어둠으로 보지 못한 다른 세계를 꿈꾸므로. 아름다운 암코양이 눈동자에서 시간을 읽는 남경의 중국인 소년처럼.

그 아우성들을 들을 때마다 나는 간도 땅에서 살아가는 조선인들은 죽지 않는 한, 자신이 누구인지 말할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들은 경계에 서있었다. 어디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민생단도 되고 혁명가도 될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그들은 항상 살아 있었다. 살아 있다는 건 다만 끊임없이 변화하는 존재라는 것이므로, 시시때때로 운명이 바뀐다는 뜻이므로.

어쩌면 그들 모두는, 그리고 우리들, 그렇다 우리들은 삼나무 높은 우듬지까지 올라가본 까마귀처럼, 다시는 뜰로 내려 앉지 않을 수는 없으므로. 그 고귀한 진실, 그 모든 세계를 얻을 수는 없으므로, 우리는 차라리 한 권의 소설을 읽는 현명함을 안다. 언젠가 우리는 모두 우리를 잃을 운명이지만, 우리는 동시에 우리의 이야기였으므로. 이 역사에는 편입될 수 없는 잊혀지고 가려진 내밀한 삶의 이야기에 끌릴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이 왜 저 이야기가 아니라 이 이야기인지를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설명할 수가 없다. 그것은 사랑에 빠지는 일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리니까, 세상의 전부가 아니라, 바로 그 세계.

한때는 이 세상 전부를 원했지만, 이젠. 겨우 그 정도. 이제 내가 아는 세계의, 그러니까 거의 전부.

스바시바, 스바시바. 책장을 다 덮고 나서 아무리 외롭고 쓸쓸해지더라도, 우리는 꺄르르꺄르르 헤어져도 좋을 것이다. 그가 모르는 세계에 대하여 도저히 적을 수 없다고 느낄 때, 그는 결국 다시 소설을 쓰게 될 것이므로. 우리가 모르는 세계란 끝이 없으니, 그의 소설의 세계도 끝이 없으리라는 것. 김연수의 바다로 가는 오솔길이 있는 한, 우리는 다시 그의 바다를 보는 일이 가능하므로. 아, 그것은 참으로 넓고 아름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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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05 10: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BarSur 2008-10-05 16:46   좋아요 0 | URL
흐흐. 알스님의 말을 듣고 생각해보니, 그도 그렇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현실에 대해, 혹은 리얼리티에 대해 잠깐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인데, 우찬제 교수님의 비평집 가운데 "리얼하지 않은 것이 어디 있겠느냐만은."이라는 말도 떠올랐답니다.

김연수 님이야 뭐, "음악은 내게 다른 리얼리티를 보여준다. 다른 리얼리티라는 게 소설에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는 작가라면 누구나 알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시인이 되지 못하면 소설가가 된다고 말하던데, 당치도 않은 소리다. 나는 연주자가 되지 못해 소설가가 됐다."(...) "삶은 잠이고 사랑은 꿈이다. 자는 동안에는 계속 꿈을 꾸고 싶다." 이런 말씀을 하시는 분이니까요.

한편 수잔 손택은 이렇게도 적었네요.

어떤 것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에 너무 압도되었다는 말은, 그것이 대단히 비현실적인 것으로 비친다는 의미다. 리얼하다는 것은 놀랍지 않다는 것이며, 그로 인해 겸연쩍음을 느끼지 않는 것이다. 리얼하다는 것은 의식이라는 작은 진창을 둘러싸고 있는, 그야말로 마른 땅이다.

그러니까 그건 우리가 저 말의 현실감을 느끼려먼, 먼저 압도될만한 사랑부터 해야된다는 이야기가 되나요?

저처럼 그래도 안생긴다면, 그 세계를 이해하는 건 영영 무리일지도 모르겠네요.
Orz

건 그렇고 제가 전역하고 알스님 흔적을 찾다가, 알라딘까지 흘러온 사연은 알고 계시나요? 이런 이야기도 제법 비현실적이지 않나요? 제가 스토커란 이야긴 아니구요. 여전히 책을 많이도 읽으시네요. ㅎㅎ

2008-10-05 23:06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