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비가 오고, 오늘은 많이 쌀쌀해졌다. 햇빛은 따뜻해보였는데, 바람은 아니었나보다. 학교 가는 길의 은행나무 은행들이 비바람에 떨어지고 나서 거리에서는 어딘지 적막한 구린내가 났다. 그러고보니 어제는 학교에 가는 길에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비가 쏟아지더니 강의실에 도착할 무렵에는 흠뻑 젖었었다. 2개 과목 시험을 치르고나니 그도 다 말라있었지만. 누군가는 아이스크림이 녹는 동안 가능한 건 사랑에 빠지는 일 정도밖에 없다고 말했는데, 그건 그 짧은 시간에 가능한 일의 범위를 알려주기보다는 아이스크림을 먹다가도 인생이 바뀔 수도 있다는 이야기에 다름 없었다. 샐린저의 소설 <에스메를 위하여>에서 에스메와의 만남은 1955년 4월 30일의 오후 3시 45분에서 4시 15분 사이의 30분에 지나지 않는 만남이었다. 에스메 또한 흠뻑 젖어 있었고, 30분이 지나도 그녀의 웨이브 머리는 되살아나지 않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만남은 나중에 두 개의 마주보는 벽이 만나게 되는 세계를 보여준다. 시험이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흠뻑 젖은 내 몸이 다 마르고, 비도 그친 거리를 걸으면서 그 시간에 가능했을 수많은 변화들에 대해서 잠깐 생각해보았다. 그러나 언제나 내가 상상하는 그 모든 것들이 나를 두고 사라져도 나는 남아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나는 살아있다.
사실 시험은 어제 끝났는데, 집에서 뒹굴거리다가 조모임 때문에 학교로 갔다. 시간이 남아서 도서관에 들렀다. 쑤퉁의 단편집 <홍분>의 "부녀생활"을 읽었다. 이 소설은 어떤 상황에서도 강공밖에 할 줄 모르는 3대의 여성 야구선수들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내게 있어서는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야구'보다야 더 그녀들의 중국 여성의 야구 미학에 끌리고 말았다. "나, 제왕의 생애"에서 내가 가장 마음을 빼앗기고만 존재는 다름 아닌 혜선과 옥쇄 소녀였듯이, 언제나 맹목적이었던 그녀들은 오직 하나 밖에 볼줄 몰랐고 그렇게 살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서글프고 아름다운 존재들이었다. 언제나 남성들은 그녀들의 앞에서는 고개를 숙이는 것이 옳다. 언제나 그렇듯이 이번에도 나의 시험 공략은 강공인척 하다가 어쩌다보니 눈감고 번트한 꼴이 되고 말았는데, 결과 또한 오리무중이다. 교수님들은 어쩜 그렇게 내가 약한 구질에 코스만을 던지는 것일까? 나 같은 남자가 그녀들의 강공 스타일을 동경하는 것도 당연한 일임을 이젠 알겠다.
너는 나를 이해하지 못했고,
나도 너를 이해하지 못했다.
다만 우리가 진창에 빠졌을 때.
우리는 곧 서로를 이해하게 되었다.
- <노래의 책>, "귀향" 78. 하인리히 하이네
시간이 부족해서 더 읽기를 그만두고, 컴퓨터로 학교 도서관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도서관에 없는 소설 몇 개를 희망자료신청 하고 도서관에서 나와 조모임으로 향했다. 언제나 그렇듯이 이번 조모임의 성과 또한 우리 학교 정말 빡시게 굴리는구나 하는 환의에 찬 합의를 이끌어내는 전형적이라면 전형적인 결말이었다. 언제나 그렇듯 결말보다는 과정이 중요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강공인척 하면서 본의 아니게 번트만 치고 있다. 본의 아니게. 본의 아니게. 집에 돌아와서, 스타리그 송병구와 도재욱의 경기에서, 송병구의 깜짝 놀랄만한 강수를 보고 조금 그가 부러워졌다가, 이내 책이나 읽어야지 생각했다.
외로운 사람들은 언제나 밤중에 찾아오므로, 나는 그들을 위해 읽던 책을 펼쳐놓고 잠드는 미덕을 안다. 배트 휘두르는 법 좀 알려달라고 적어놔야 겠다.
ㅡ
지금 읽고 있는 책의 198페이지의 시작은,
없답니다.
이 책은 176페이지로 끝나거든요. 그러니, 이 책의 198쪽의 시작을 어떻게든 알고 싶다면, 이젠 밤을 새며 상상하는 수밖에 없네요. 다들 한 주간 고생하셨고, 주말 잘 보내시길. 여불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