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한다는 것
고이케 마리코 지음, 안소현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2월
품절


나오코는 천박한 몸짓으로 말보르를 물고 일회용 라이터로 불을 붙인 뒤 또롯하지 않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마야한테는 연애하며 살아갈 수 있는 충분한 시간과 자유가 있어. 틀림없이 그건 앞으로도 달라지지 않을 거라 생각해."

"그건 연애가 잘되어 갈 때 이야기죠. 지금은 뭐 시간이 있어봤자 괴롭기만 해요"라고 나는 말했다.

나오코는 훗, 하고 웃으며 "그래?"라고 사람을 깔보듯이 되물었다.

"연애하거나 사랑하기 위한 시간과 자유가 풍족하다는 건 멋진 일 아닐까?

괴롭다거나 안타깝거나 그런 건 다음 이야기고.

시간과 자유가 없는 사람은 변변히 연애도 못 한다고. 안 그래?"

그 순간 마음속으로 나는 나오코에게 거세게 반발하고 있음을 느꼈다. 그건 달라, 다르다고, 그런 문제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녀의 말이 완벽하게 옳았다고.
-70~71쪽

그 무렵 내 마음의 날씨는 지금도 또롯이 떠올릴 수 있다. 그건 날마다 시간마다 눈이 핑핑 돌 정도로 계속 변화하고 잠시도 같은 곳에 머물지 않았다.
오늘은 평온한 마음을 되찾았다고 생각하면 다음 날은 그때보다 극심한 지옥을 겪는 처지에 놓였다. 그런가 하면 홀연히 구름이 걷히고 한줄기 빛이 비치는 듯한 기분이 되기도 했다.
이 정도라면 생각했던 것보다도 빨리 일어설 수 있겠다고 방심하면, 그 몇 시간 뒤에는 다시 음울한 먹구름으로 뒤덮여 꼼짝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알코올을 끊임없이 입에 댄다고 해서 안심할 수는 없었다.
마시면 마실수록 끝없는 절망의 밑바닥으로 가라앉을 때도 있고 반대로 술에 취하지 않았는데 섬뜩할 정도로 기분이 잔잔해질 때도 있었다. 하지만 어떤 상황이든 마음속 깊이 괴어있는 어둠의 크기는 같았다. 그 어둠은 아무리 알코올의 힘을 빌려도 결코 사라지는 일이 없었다.
자살할 용기가 없다면 바쁘게 살아가야 한다. 죽을 수 없다면 어떻게든 살아 나가야 한다. 방법은 그것밖에 없다는 듯 방에 틀여박혀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소리 높여 계속 울고 술을 마시고 굴뚝처럼 담배를 피워봤자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음을 -175-176쪽

잘 알고 있었다.
살아간다는 건 단순히 숨을 쉬고 음식을 먹고 자고 배설하는 게 아니다. 자신의 생활을 자신의 힘으로 헤쳐 나가는 것이다.
습관과 의무......살아가기 위해 내가 마지막으로 의지하고자 한 것은 그 두 가지 였다.
모든 사람에게는 습관이란 게 있다. 사소하지만 의무라는 것도 있다. 습관도 의무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176쪽

"어쨌든 그만둘 결심을 했어"라고 나는 그의 이야기를 부드럽게 가로막았다.
"바로 조금 전 얘기야. 여러 가지 일이 말이지, 쿵 하며 이해가 되는 것 같고 별안간 눈앞이 확 트였어. 왜 그랬을까? 나도 잘 모르겠고 멋들어지게 설명할 수 없지만 아무튼 그런 마음이 들었어."-275-27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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