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모든 곳의 전수미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53
안보윤 지음 / 현대문학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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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수미’는 의미없는 폭력과 기상천외한 미친 짓으로 어렸을 때부터 유명했다. 그런 언니를 둔 덕에 화자인 ‘전수영’은 부모의 사각지대에 방치되어 우그러지고 찌그러진 채 살아왔다. 그러므로 생존을 위해,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 나름의 방식을 찾아야 했다. 수영은 ‘세상 모든 곳의 전수미’가 아니라 ‘세상의 모든 전수미’들을 식별하고 피하는 방법을 터득해야 했다. 하지만 동시에 수영은 ‘자신 안의 전수미’를 발견하기에 이른다.

‘악의’에 대한 이야기로 읽힌다.
작품 속엔 여러 형태의 악의가 나온다. 적극적인 악의, 소극적인 악의, 결과로서의 악의, 기타 등등. 결과로서의 악의는 약간 억울한 점도 있으나, 결과가 이런데 넌 전혀 의도하지 않았다고? 이렇게 따지면 할 말은 없다. 그도 그런 게 무의식이란 게 있으니까. 무의식의 밑바닥에 굳이 악의가 아니더라도 증오와 무관심이 흐르면 수면 위로 어떤 물고기가 튀어 오를지 아무도 모르니까. 그게 사실이니까.

‘절대선’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절대악’도 거의 거짓말이다. 우리의 마음속엔 천사와 악마가 공존한다는 건 심리학계에서 꾸준히 주장하고 행동심리학에서 증명해 온 가설이다. 평소에 선한 사람이 악한 행동을 하거나, 반대로 악한 인간으로 알려진 사람이 의외의 선한 행동을 하는 경우를 우리는 왕왕 본다.
작품 속 ‘전수미’는 오로지 동생을 위해 행동한 적이 있다. 빈틈없는 장삿속에 냉혈한처럼 보이는 ‘구원장’ 역시 철저히 악인이라고 매도할 수만은 없다.
그렇다면 우리의 주인공 수영은?

수영이 ‘태풍’의 결말을 몰랐을까? 나쁜 결과를 예측하기가 전혀 불가능하지 않았을 텐데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았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나쁜 조짐을 외면한건 결과를 방치한 것과 다름없을까. 소극적으로나마 그런 결과를 바라고 의도하진 않았을까. 고작 ‘개’일뿐인데, 그렇게까지? 너무 잔인한가.

판단은 독자의 몫이다. 그런데 작가의 생각은 어떨까.

추리소설로 세계적인 명성을 쌓은 (애정하고 존경하는) 작가 ‘애거서 크리스티(Agatha Christie)’는 작품들 속에 ‘공기 중의 악(evil in the air)’이라는 표현을 즐겨 썼다. 그 말인 즉, 보이지 않는 공기처럼 악의는 드러나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한다는 말일 테다. 세심히 살피지 않으면 알아챌 수 없는 악의는 도처에 존재한다.

여러 작품들을 통해 본 작가 ‘안보윤’은 위로보다는 고발, 격려보다는 각성을 촉구한다. 날카롭게 벼린 시선은 인간의 내면을 향한다. 선과 악의 본질을 물으려는 시도는 작가의 관심이 인간 의 본성에 있음을 증명한다.

사족

전수영-전수미 자매의 관계는 작가의 작품집 ≪밤은 내가 가질게≫의 연작 단편, <미도>와 <밤은 내가 가질게>에 나오는 자매를 연상하게 한다. 연관해서 읽으면 의미가 더욱 확장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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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 머더 클럽
로버트 소로굿 지음, 김마림 옮김 / 열린책들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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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연령과 직업의 세 명의 여성이 의기투합하여 우여곡절 끝에 동네에서 일어난 연쇄살인 사건을 해결한다는 이야기다. 흥미롭고 유쾌하며 긴장감 넘친다. 쉽게 잊히지 않는 매력적인 인물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호기심을 유발하는 사건들을 해결한다. 결말이 궁금해 말 그대로 손에서 책을 내려놓을 수 없다. ‘쾌락’으로서의 독서를 경험하는 가장 모범적인 예라고 할 수 있겠다.
여성 독자들을 타겟으로 한 ‘코지 미스터리(Cozy Mystery)’의 전형이다. 범죄 자체는 끔찍하고 어둡지만 전체적으로 통통 튀는 밝은 분위기를 유지한다. 진행되는 템포도 경쾌하다.

인물들이 기가 막힌다. 70대의 대범한 할머니, ‘주디스’, 마을 목사 부인인 새침한 40대 ‘벡스’, 그리고 이웃들의 반려견을 산책시키는 일로 생계를 유지하는 정보통 ‘수지(50~60대로 추정)’. 시리즈를 염두에 두고 만든 인물들답게 모두 개성들이 특출하다. 이 아마추어 탐정 트리오를 내세운 작품이 이후로 두 작품 더 나왔다고 하는데 모두 해외 평점이 좋다. 우리말로 번역이 될지 궁금한데 꼭 그렇게 되길 바란다.

미스터리 소설답게 범죄 구상에 신경을 많이 썼다. 용의자들을 나열하거나 범인을 숨기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범인이 드러나는 결말의 쾌감도 상당한데, 알고 보니 작가가 범죄+스릴러 TV 시리즈 시장에서 베테랑이다. ‘제임스 본드’ 식은 아니어도 80년대 TV 외화 시리즈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액션은 눈여겨 볼 만하다.

살인의 이해관계가 ‘동기’와 ‘기회’로 얽히고설키는 범죄는 굉장히 어렵고 복잡해 보이는데, 차 떼고 포 때고 남는 뼈대는 재활용이다. ‘퍼트리셔 하이스미스’나 ‘프레드릭 브라운’의 가장 유명한 미스터리 소설들이 가장 먼저 생각나는데, 어차피 이들도 최초의 작가는 아니었을 것이다(해 아래 새 것이 어디 있을까). 그런데 작가는 그것을 살짝 한 번 더 비트는데 그게 무척 영리해 보인다. 손 안 대고 코 푼 격이라고나 할까.

사실 이 작품에 대해 쓸 말은 길지 않다. 미스터리 소설로서 눈에 거슬리는 게 없다는 말도 되지만 재미있게 읽기는 했는데 평범하다는 말도 된다. 전자는 장점이고 후자는 단점이다. 하지만 내가 주인공들을 계속 만나고 싶어 한다는 점(그만큼 인상적이고 매력적이다), 그리고 묵은 것을 가져다 자신만의 스타일로 환골탈태시켰다는 걸로 칭찬할 게 조금 더 많은 것 같다. 그리고 그건 작가의 다른 작품을 기다리는 이유로 충분하다. 후속작들이 번역되길 애타게 기다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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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치콘티니가의 정원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조르조 바사니 지음, 이현경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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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게 읽은 책이다.
작가는 이탈리아의 국민 작가이고 이 소설은 작가의 대표작이(라고 한)다.
나는 겨우 읽었다. 재미가 아예 없었던 건 아니었지만 지루했다. 내가 이 책을, 리뷰를 쓸 정도로 어지간히 이해했을까. 아는 만큼, 본 만큼 적어보자.

기본적으로는 로맨스다. 초로의 화자가 과거에 실패한 자신의 연애담을 들려주는 형식이다.
무대는 2차세계대전이 한창인 시기의 이탈리아. 파시즘, 인종법, 반유대주의 같은 단어로 작품의 분위기는 어느 정도 설명되겠다.

엘리트(의사)였으나 지금은 블루칼라 계급이 된 유대인 가정의 아들이 유대인 귀족, 핀치콘티니 가(家)의 딸 ‘미콜’을 짝사랑한다. 화자에게는 사랑보다 귀족 가문의 대저택, 특히 아름다운 정원(≪비밀의 화원≫에 나오는 신비롭고 드라마틱한 장소는 아니었다)을 향한 동경이 먼저였다. 주변을 맴돌다 우연히 그 집 딸을 만나고 친구가 되고 사랑에 빠진다.

이런 이야기뿐이라면 괜찮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 옆으로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하고 이탈리아의 문화, 회화, 역사, 정치 같은 주제로 대화를 나누는데, 자국의 독자들이라면 모를까 문외한인 나로서는 이 부분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는 거다. 그냥 대화구나, 하고 넘길라 치자니, 이런 대화가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하다. 그리고 인물들도 대화에 꽤 진지하게 임한다. 이 부분이 꽤 지루했고 책장도 잘 넘어가지 않았다. 모르는 것투성이니 자괴감마저 들었다면 너무 엄살일까.

결과적으로 남는 건(그나마 내가 즐길 수 있었던 건) 첫사랑 이야기뿐인데, 그것조차 사랑의 애절함이나 절절함, 풋풋함 같은 감정이 별로 전달이 안 됐다. 화자는 망설이고 주춤거리고 용기를 냈다가 다시 뒤로 물러서더니 결국 첫사랑을 뺏긴다(이런 고구마라니). 결국 핀치콘티니 가문의 사람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많은 유대인들의 결말을 맞고 주인공은 용케 생존한다.

기타 등등의 이유로 이 작품을 ‘홀로코스트 문학’의 범주에 넣고 있는데 과연 그럴 수 있는지 (개인적으로) 의아스럽다. 역사적인, 대대적인 인종 학살 사건을 그저 배경으로 삼으면서도 그것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독자들 코앞에 들이대고 있는 ‘신시아 오직’의 무자비한 단편, ≪숄≫과 비교하면 이 작품은 그저 결말에 잠깐 언급되는 정도일 뿐이다.

‘앨런 홀링허스트’의 ≪아름다움의 선≫과 형식적으로 비슷하다. 정서적으로는 허무와 나른한 자의식 범벅인 ‘다자이 오사무’를 연상케 한다. 두 작가 모두 별다른 애정은 없는 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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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스무 번
편혜영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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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삶을 오롯이 즐길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하지만 그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지 않을까. 왜? 일단 우리는 바라는 게 너무 많다. 굳이 생존에 필요한 것도 아닌데도 원한다. 한 유명한 스님은 욕망을 내려놓으면 우리가 행복해질 거라고 말한다. 그게 어떻게 가능할까.
지극히 우리는 모든 면에서 부족하다. 시기하고 증오를 품는다. 그리고 많은 것을 욕망한다. 오욕칠정(五慾七情)의 기저엔 불안이 있다. 불안과 욕망은 한 자궁에서 잉태된 쌍생아처럼 보인다.

우리 인간은 하향비교보다 상향비교에 더 익숙하다. 어떤 대상을 늘 선망(羨望)한다.
뒤처지지 않기 위해 원한다. 저걸 가지만 얼마나 내가 완벽해 보일까. 나의 가치를 높여주므로 저것을 가져야 한다. 그것을 손에 넣지 못하면 나는 초라해진다. 그래서 불안하다.
광고들의 목적은 사람들의 불안을 자극하고 욕망으로 둔갑시켜 결국 그들로 하여금 소비하게 만드는 것이다. 욕망은 만들어진다고들 한다. 하지만 그게 언제나 나쁜, 인간에게 악영향을 미치고 있을까? 반대로 그건 원동력일 때가 많다. 성취 욕구를 자극하여 뭔가를 이루게 만든다. 슬기와 지혜를 겸비한 인간이라면 자신의 불안과 욕망을 통제하고 다스릴 것이다.

여기 실린 여덟 편의 작품을 읽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올린 키워드는 ‘불안’이었다. 미래에 대해 불안하고 타인에 대해 불안하고 과거에 저질렀을지도 모르는, 이미 과거가 되어버린 자신의 행동에 대해 불안해 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불안을 해소하지 못한, 즉 욕망을 해소하지 못한 사람들도 보인다. 그들은 스스로 불행하다고 느낀다. 앞이 보이지 않고 삶의 막다른 골목에 몰린 기분이 들고 그런 불행감에 빠진 사람들은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

<어쩌면 스무번>의 주인공 부부는 미래에 대한 불안에 시달린다. 앞으로 닥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외부의 타인들이 만들어서 주입한 불안에 시달린다. 낯선 지방의 외딴 집이라는 물리적 환경이 주는 소외와 두려움에 치매 노인을 가두고 약물을 임의로 투약한다는 그들의 비밀, 협박에 다름없는 주변 사람들의 폭로와 걱정, 충고와 권유가 가중된 불안에 잠식되는 인물들을 통해 안전과 행복을 담보로 우리가 치러야 하는 대가는 무엇인가를 질문한다. 단지 행복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안의 불안을 없애는 것이 최고의 목적이라면, 불안에 대처하는 양식있는 태도는 과연 무엇일까.

<호텔 창문>의 주인공 ‘운오’가 겪는 불안은 과거에서 비롯된다. 제 탓도 아닌 과거의 죽음에 대한 강요된 애도를 끊으려는 고민에 화재 현장에서 보았을지도 모르는 생존자의 존재, 그를 구하러 들어간 소방관의 생사 여부로 더욱 무거워진 불안은 고향 형이 들려준 원인이 불분명한 화재 사건의 이야기로 증폭된다. 작가는 명백히 자신의 몫이 아닌 책임을 떠안게 됐을 때 우리가 짊어져야 할 책임에 대해 묻는다. 우리는 결코 답을 구하지 못할 의문들이 앞으로의 삶을 계속 간섭하게 그냥 두어야 할까.

아내의 관점으로 일관되어 진행되는 <홀리데이 홈>은 타인에 대한 불안을 이야기한다. ‘정소령’의 남편 ‘이진수’는 불투명하고 모호한 인물이다. 아내가 아는 건 남편의 피상적인 모습뿐, 그에 대해 실제로 아는 건 뜻밖에도 그리 많지 않다. 작가는 타인의 ‘알 수 없슴’을 깨닫고, 보고 싶은 것만 보겠다는 편향적 사고의 함정에 빠져 순식간에 이방인이 된 남편에 대한 아내의 불신(불안)을 드러낸다.
우리는 타인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걸까, 아니면 안 보는 걸까. 끊임없는 힌트와 시그널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타인에 대해 꽤 유용한 정보들을 무의식적으로 무시하고 있는 건 아닐까.

<리코더>의 수오는 큰일 이후에도 평범한 일상을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고 무영은 제 경험을 드러내고 전시하는 사람이다. 위기를 전환점으로 삼아 재기할 수 있는 수오와는 달리 무영은 제풀에 꺾여 불행에 굴복하는 사람이다. 그런 수오가 사라졌다. 뒤에 남은 무영은 의문과 의심을 떠안는다.
기록과 반복 재생이라는 리코더의 기능처럼 (기록된) 삶의 구간마다의 패턴도 (fractal 이론을 인간의 인생에 대입할 때)반복의 성질을 갖는다. 예측할 수 있는 삶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 짐작하여 안다는 것이 오히려 더 큰 불안을 야기하고 있지는 않는가. 삶의 진정한 묘미는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다’는 사실 아닐까.

각자의 상황을 함구하고 있는 모녀 이야기인 <플리즈 콜 미>의 ‘미주’는 말도 통하지 않는 타국에서 술에 의지해 딸과 사위 집에 머물며 스스로를 눈칫밥 신세로 전락시킨다. 모녀는 서로에게 비밀이 있기에 서로를 도울 수 없다. 그래도 적극적으로 찾아보면 살 길이 나올까. 사라진 남편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앞으로의 시간은 무궁해 보이지만 삶이 우리에게 허용한 시간은 유한하다. 그 시간을 기대와 희망으로 채울 것인가 불안과 걱정으로 채울 것인가. 분명한 건 우리가 약속받은 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이게 바로 삶의 본질이며 시간의 본 모습이다.

미지의 미래에 대한 불안은 <좋은 날이 되었네>와 <미래의 끝>에서도 반복된다. 두 작품 모두 막다른 골목에 처한 삶, 희망 대신 절망이 들어찬 각박한 현실을 보여준다.
더 이상의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 우리는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 ‘좋은 것은 다 흘러(196쪽)’가므로 나쁜 것 역시 다 흘러간다고 바라도 될까. 고이거나 머물지 않고 흘러가는 것은 의외로 다행한 일이다. 당장은 어둡고 막막해도 찰나의 빛줄기는 기대할 만하다. 비극적인 상황에 작가가 던져주는 희망은 티끌 같을지라도 우리는 그것에 의지할 수 있을 것이다.

<후견>의 ‘소명’은 과잉된 선의의 희생양으로 보인다. 이 작품은 주인공보다 그 부친인 ‘정호인’이 더 눈길을 끈다. 과잉의 원인은 분명히 사랑이었을 터이고 그 사랑은 딸의 미래에 대한 걱정과 불안이었을 것이다. 아비의 그런 마음은 딸에게서 친구를 빼앗고 학창시절의 추억을 빼앗는다. 무엇보다 나쁜 건 소명이 제대로 된 기회조차 갖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 성장한 지금, 소명은 오리무중에 빠져 있다.

언급했듯이 ‘불안’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다. 배경음악처럼 작품 전체를 아우르는 설정들(방에 갇힌 치매 노인, 큰어머니의 전화, 발신인 불명의 전화벨 소리 등)이 있어 화자의 불안을 자극하는데 그 감정은 독자들에게도 전이된다.

작가는 설명하거나 단정하기보다 방임한다. 그래서 대부분의 작품들이 불친절해 보인다. 독자에 따라 그게 불만일 수 있으나, 내게는 작가가 질문을 던지는 것처럼 보였다. 많아 보이는 빈틈은 여백으로 보였고 스스로 나름의 답을 찾고 의미를 부여하도록 자극하는 것처럼 읽혔다. 작품에 참여한다고 할까. 드러난 피상의 이면을 상상하게 됐다. 생각하고 고민하며, 나라면 어땠을까, 이야기에 이입하게 됐다.

편혜영의 소설은 오래 전에 읽은 ≪아오이 가든≫ 이후로 처음이었다. 작가의 스타일이나 천착하는 이슈 같은 건 모르겠고, 인물들에게 다소 가혹하다는 것, 무턱대고 낙관, 다 잘 될 거야, 이런 것보다는 비관, 운명론자 같은 시선 등은 알겠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삶이 그렇게 호락호락할 줄 알다간 큰코다쳐. 섣부른 희망 따위, 차라리 기대조차 하지 않는 게 나아.
맞는 말 아닌가. 그런 냉정함에도 불구하고 <미래의 끝>에서 느껴지는, 온몸을 감싸는 온기 같은 걸로 짐작컨대, 인간에 대한 강한 호의는 간직한 것 같다. 삶과 인간은 동일한 듯 보여도 전혀 다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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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의 실종에 관한 48 단서들
조이스 캐롤 오츠 지음, 박현주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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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사랑하고 존경하는, 번역서를 모두 찾아 읽고 신간 소식이 들리면 서점에 나오길 목 빠지게 기다렸다가 냉큼 읽는 국외작가 탑 텐을 뽑을 때, 그때그때 달라지긴 하지만 변치 않고 리스트 안에 드는 작가가 있다. ‘이디스 워튼(Edith Wharton)’, ‘애거서 크리스티(Agatha Christie)’, ‘대프니 뒤 모리에(Daphne du Maurier)’, ‘퍼트리샤 하이스미스(Patricia Highsmith)’,‘온다 리쿠(恩田 陸)’, 그리고 ‘조이스 캐롤 오츠(Joyce Carol Oates)’.

이 작가가 1938년 6월 생이니, 올해(2024년) 꽉 채워 여든여섯이다. 그리고 아직 현역이다. 이 작품이 미국에서 출판된 게 재작년(2022년)이다. 이 작품은 최근작도 아니다. 올해, ≪Butcher≫란 제목의 장편을 출간했다. (우리나라 출판사들은 부지런히 일 하길)
내로라하는 어마무시한 다작가다. 필명이 두 개(Rosamond Smith, Lauren Kelly)나 되고 그 이름들로 발표한 작품들도 상당하다. 게다가 ‘올-라운드-플레이어’다. 소설, 시, 희곡, 넌 픽션, 전기 등 형식과 장르에 구애받지 않는다. 하루 일고여덟 시간 이상 글을 쓴다고 하니, 다작하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다.

이 사람은 보통 호러, 서스펜스, 스릴러 작가로 분류되지만 작가 입장에선 약간 억울한 평가다. 동화, 영 어덜트 소설, 로맨스 같은 작품들도 상당한데, 장르 소설 작가로 국한된 독자들의 인식은 작가의 능력이 호러, 서스펜스, 스릴러 안에서 가장 잘 발휘되기 때문인 것 같다. 우리나라 출판사의 책임도 아주 약간 있는 게, 작가의 그런 작품들만 번역해서 내놓는다. 작가의 유명하고 성공한 작품들이 주로 그 쪽인 이유일 테지만.

그렇다고 작가가 마냥 범죄나 폭력에 집중하는 건 아니다. 범죄가 나와도 암시를 줄 뿐, 폭력 장면을 대놓고 묘사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작가가 가장 큰 관심을 두는 건 인간의 악의(malice)와 범죄 심리이다. 범죄 행동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 자체보다 그것에 이르는 과정과 그 저변에 작동하고 있는 심리, 동기를 주로 다룬다. 특정 사건이나 장면, 문장 같은 단편적인 요소들보다 이야기를 진행시키며 서스펜스를 서서히 쌓아간다. 한 순간의 임팩트보다 작품 전체가 주는 효과를 노리는데, 그런 속도감에 익숙해진 독자들이 작가의 팬이 된다.
작가가 주는 스릴은 다른 의미로 ‘쫄깃하다’. 독자들을 겁주지 않고 마음의 어둠 속으로 데리고 들어간다. 저 아래 숨겨진 악의를 스스로 들여다보게 만든다. 결국 독자는 그것을 타자화하지 않고 자신과 동일화한다. (그래. 나도 저게 어떤 건지 알 것 같아)

작가 이야기를 (내가 아는 한에서) 줄줄이 읊는 이유는, 정작 이 작품에 대해서는 할 말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작가의 (비교적) 신작이라 반갑게 읽었고 꽤 만족했으나 께름칙한 부분이 분명 있긴 한데 어떤 점이 좋고 어떤 점은 그렇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 약간 모호하다.

이야기는 중년의 ‘조진 풀머’가 과거에 사라진 언니, 지역의 유망한 예술가였고 집안의 상속녀였던 ‘마거리트’와 그 사건을 회상하는 내용이다. 플롯의 중심엔 언니의 실종이란 사건이 있고 지면의 대부분은 화자의 생각과 의견, 이야기로 채워진다.
언니의 실종 사건 자체는 일종의 도화선이다. 작가는 언니의 실종에 대한 비밀을 풀기보다 화자 자신이 사건을 바라보는 방식, 그것에 받은 영향, 당시 주변사람들과 그들에게 일어난 일 등에 집중한다.
미스터리라고 하기엔 쓰다 만 것 같고 심리 스릴러 정도로 퉁치려니 뭔가 부족하다. 독자의 눈을 사로잡는 건 화자 자신인데 이 사람에 대해서도 투명하게 드러나는 건 거의 없다. 언니에게 열등감이 있고 질투심에 사로잡혀 있었으며 한편으론 언니를 걱정하고 그리워한다는 것. 그러나 그 감정이 사랑은 아니라는 것. 딱 그 정도. 조진은 화자라는 역할에 충실하지 않다. 그녀는 뭔가를 숨기고 부정하고 다른 기억(진술)로 덮으려 한다. 당시 사건 주변으로 많은 사람들이 등장하고 퇴장하는데, 그 중엔 의문스러운 퇴장도 있었다. 자연스러워 보이는가. 아니라면 왜? 어떻게?
베일을 벗기다 만 작품의 모양새는 작가가 의도한 것이다. 독자는 모든 것을 스스로 결말을 지어야 한다.

정확한 그림을 구하는 독자들은 속이 터질 것이다. 하지만 반쯤 열린 문을 기웃거리며 상상하고 유추하길 좋아하는 독자들에겐 매력적인 작품이겠고.
나는 어느 쪽일까. 반반이다. 마거리트의 실종에 대해서는 오리무중의 상태로 남겨져 있는 게 좋다. 사건 자체가 미해결이고 우리가 과거를 바라보는 방식과도 많이 다르지 않으니까. 하지만 조진이라는 캐릭터에 대한 불투명함은 신발 안의 돌 같다. 어차피 일인칭 시점이고 회고와 고백이 주가 되는 작품에서 화자 스스로가 반쯤 숨어 있는 모습은 어딘지 자연스럽지 못하다. 도대체 왜?

그럼에도 잘 읽힌다. 푹 빠져들어 읽었다. 힌트와 암시가 무의식을 자극해 독자는 끝까지 각성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이런 긴장이 좋았다.
모호함이 여운으로 남는데 그것이 화자에 대한 연민으로 이어진다. 조진으로 말하자면 그게 가능한 인물이다. 독자들의 동정과 연민을 자극하는 방식이 약간 독특한데, 언니의 성공과 화려함에 가려진, 가족 내의 그녀의 하찮은 존재감 때문만은 아니다. 완전히 열리지 않은 조진의 마음, 그 문 뒤에 세월이 흐르고 나이를 먹은 후에도 여전히 드리워진 긴 그림자를 상상할 수 있다. 마치 혼자만 보는 일기에조차 솔직하게 제 모습을 드러내지 못 하는 소심함이랄까, 비겁함, 나약함이 느껴진다. 모든 사람이 용감하지는 않다. 읽은 후 이틀 정도는 조진이, 이 책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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