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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 하나는 거짓말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8월
평점 :
나름의 결핍과 그늘을 안고 있어 자신 안에 스스로를 가둔 세 명의 고등학생들이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고 결국 성장한다는 이야기.
이들의 상처와 고통은 외부로부터 기인하여 자신이 어쩌지 못하는 것들이 대부분이지만, 부정과 의심, 상황에 대한 몰이해로 스스로를 모는(고통 속에 자신을 방치하는) 가학적인 측면도 있다.
내면이 튼튼하지도 않고 세상과 타협하는 방법을 배우지도 못한, 아직 십대의 그들은 서로가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도록 돕는데, 그 과정에서 인물들은 서로에게 엮이며 영향을 주고받는다.
작가는 자신의 어둠을 어쩌지 못할 때 타인의 손길(어둠을 문질러 빛이 새어나오게 만드는 손가락, 11쪽)이 필요함을, 그것에 다소 기대도 괜찮음을 이야기한다.
단어와 생각을 오랫동안 갖고 논 사람만이 빚어낼 수 있는 문장들이 여전하다. 작가의 특징이었던 ‘달콤쌉사름한’ 정서에서 ‘달콤함’은 많이 휘발되고 쌉싸름함이 짙게 남아 있는 느낌이다. 그래서 이야기 전체가 꽤 어둡다. 그럼에도 개인이라는 섬을 잇는 정서적 다리, 타인의 도움과 영향력, 서로를 향해 내미는 손길 등 세상을 바라보는 작가의 따뜻한 시선은 변하지 않은 것 같아 반갑다.
좋은 말은 여기까지.
이야기가 단조롭다. 그것 자체는 단점은 아니다. 하지만 비중 있는 인물이 세 명씩이나 등장하고 이들이 각자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으며 작품 내내 세 명의 시점을 오고가고 있다면, 독자는 (분량과는 상관없이) 보다 풍성한, 빨강과 노랑, 파랑의 셀로판지가 서로 적당히 겹쳐 있는 것처럼 다채로운 이야기를 기대할 것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그러질 못한다. 개성이 없는 인물들에 그들끼리 중복되는 설정(엄마의 부재, 암에 걸린 두 명의 엄마, 사고로 죽은 두 명의 엄마, 폭력 가장 두 명, 그런 아버지에 대해 살의를 품는 아들 두 명, 그림에 소질이 있는 두 명의 인물, 두 마리의 애완동물 등)에 서로 비슷한 면이 많아 마치 세 장의 셀로판지가 차곡차곡 포개져 있어 결국 검정색만 보이는 형국이다. 작가가 의도한 바일까? 무엇 때문에? 독자로서 피로감이 심하다.
그리고 전형적이다. 미숙한 십대, 상처와 아픔, 극복과 성장. 이런 서사를 김애란을 통해 굳이 읽어야 하는 이유가 뭘까. 작가가 이런 이야기를 꼭 써야 한다면 써야겠지만, 공산품처럼 널린 그런 이야기라면 김애란 아니면 쓰지 못하는 뭔가가 있어야 한다. 그게 작가의 신작을 기다리고 지갑을 열어 기꺼이 책을 구매하는 독자들에 대한 예의다. 팬덤에 새로 유입될 잠재적 독자들에게는 좋은 미끼인 거고.
쓰다가 만, 이야기가 더 있어야 하지 않나, 하는 아쉬움이 크다. 세 인물들 중, 그럭저럭 이야기가 완결된 것으로 보이는 건 ‘지우’가 유일하다. ‘소리’와 ‘채운’의 경우는 뒤에 이야기가 더 필요해 보인다. 지금으로선 너무 성급해 보인다. 자연스럽지 못하고 인위적이다.
소리의 초능력은 작가로서 일종의 도전이었을 것 같은데, 그런 설정이 굳이 필요했던 이유를 모르겠다. 쓸모도 정확하지 않고 명분도 없어 보인다. 인물들이 서로 관련이 되는데 너무 느슨하다. 특히 지우가 채운에 대해 과연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 하는 부분에선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이 정도면 허풍으로 보인다.
좋아하는 작가의 오랜만의 신작이라 반갑게 읽었지만 ‘역시 김애란!’하고 외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빈약한 이야기에 과도한 마케팅의 콜라보는 거의 출판사와 서점의 횡포라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언제나 작가에게 걸작이나 명작을 기대할 수는 없을 테니 이만큼 써 준 것도, ‘썩어도 준치’라고 이 만큼의 결과물도 김애란이어서 가능했으니, 마냥 작가에게 감사를 해야 할까. 작가로서 사는 것도 피곤한 일일 테지만 독자로서 사는 것도 녹록치 않다. 제대로 된 이야기를 만났을 때에라야 비로소 독자는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