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스무 번
편혜영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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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삶을 오롯이 즐길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하지만 그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지 않을까. 왜? 일단 우리는 바라는 게 너무 많다. 굳이 생존에 필요한 것도 아닌데도 원한다. 한 유명한 스님은 욕망을 내려놓으면 우리가 행복해질 거라고 말한다. 그게 어떻게 가능할까.
지극히 우리는 모든 면에서 부족하다. 시기하고 증오를 품는다. 그리고 많은 것을 욕망한다. 오욕칠정(五慾七情)의 기저엔 불안이 있다. 불안과 욕망은 한 자궁에서 잉태된 쌍생아처럼 보인다.

우리 인간은 하향비교보다 상향비교에 더 익숙하다. 어떤 대상을 늘 선망(羨望)한다.
뒤처지지 않기 위해 원한다. 저걸 가지만 얼마나 내가 완벽해 보일까. 나의 가치를 높여주므로 저것을 가져야 한다. 그것을 손에 넣지 못하면 나는 초라해진다. 그래서 불안하다.
광고들의 목적은 사람들의 불안을 자극하고 욕망으로 둔갑시켜 결국 그들로 하여금 소비하게 만드는 것이다. 욕망은 만들어진다고들 한다. 하지만 그게 언제나 나쁜, 인간에게 악영향을 미치고 있을까? 반대로 그건 원동력일 때가 많다. 성취 욕구를 자극하여 뭔가를 이루게 만든다. 슬기와 지혜를 겸비한 인간이라면 자신의 불안과 욕망을 통제하고 다스릴 것이다.

여기 실린 여덟 편의 작품을 읽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올린 키워드는 ‘불안’이었다. 미래에 대해 불안하고 타인에 대해 불안하고 과거에 저질렀을지도 모르는, 이미 과거가 되어버린 자신의 행동에 대해 불안해 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불안을 해소하지 못한, 즉 욕망을 해소하지 못한 사람들도 보인다. 그들은 스스로 불행하다고 느낀다. 앞이 보이지 않고 삶의 막다른 골목에 몰린 기분이 들고 그런 불행감에 빠진 사람들은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

<어쩌면 스무번>의 주인공 부부는 미래에 대한 불안에 시달린다. 앞으로 닥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외부의 타인들이 만들어서 주입한 불안에 시달린다. 낯선 지방의 외딴 집이라는 물리적 환경이 주는 소외와 두려움에 치매 노인을 가두고 약물을 임의로 투약한다는 그들의 비밀, 협박에 다름없는 주변 사람들의 폭로와 걱정, 충고와 권유가 가중된 불안에 잠식되는 인물들을 통해 안전과 행복을 담보로 우리가 치러야 하는 대가는 무엇인가를 질문한다. 단지 행복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안의 불안을 없애는 것이 최고의 목적이라면, 불안에 대처하는 양식있는 태도는 과연 무엇일까.

<호텔 창문>의 주인공 ‘운오’가 겪는 불안은 과거에서 비롯된다. 제 탓도 아닌 과거의 죽음에 대한 강요된 애도를 끊으려는 고민에 화재 현장에서 보았을지도 모르는 생존자의 존재, 그를 구하러 들어간 소방관의 생사 여부로 더욱 무거워진 불안은 고향 형이 들려준 원인이 불분명한 화재 사건의 이야기로 증폭된다. 작가는 명백히 자신의 몫이 아닌 책임을 떠안게 됐을 때 우리가 짊어져야 할 책임에 대해 묻는다. 우리는 결코 답을 구하지 못할 의문들이 앞으로의 삶을 계속 간섭하게 그냥 두어야 할까.

아내의 관점으로 일관되어 진행되는 <홀리데이 홈>은 타인에 대한 불안을 이야기한다. ‘정소령’의 남편 ‘이진수’는 불투명하고 모호한 인물이다. 아내가 아는 건 남편의 피상적인 모습뿐, 그에 대해 실제로 아는 건 뜻밖에도 그리 많지 않다. 작가는 타인의 ‘알 수 없슴’을 깨닫고, 보고 싶은 것만 보겠다는 편향적 사고의 함정에 빠져 순식간에 이방인이 된 남편에 대한 아내의 불신(불안)을 드러낸다.
우리는 타인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걸까, 아니면 안 보는 걸까. 끊임없는 힌트와 시그널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타인에 대해 꽤 유용한 정보들을 무의식적으로 무시하고 있는 건 아닐까.

<리코더>의 수오는 큰일 이후에도 평범한 일상을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고 무영은 제 경험을 드러내고 전시하는 사람이다. 위기를 전환점으로 삼아 재기할 수 있는 수오와는 달리 무영은 제풀에 꺾여 불행에 굴복하는 사람이다. 그런 수오가 사라졌다. 뒤에 남은 무영은 의문과 의심을 떠안는다.
기록과 반복 재생이라는 리코더의 기능처럼 (기록된) 삶의 구간마다의 패턴도 (fractal 이론을 인간의 인생에 대입할 때)반복의 성질을 갖는다. 예측할 수 있는 삶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 짐작하여 안다는 것이 오히려 더 큰 불안을 야기하고 있지는 않는가. 삶의 진정한 묘미는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다’는 사실 아닐까.

각자의 상황을 함구하고 있는 모녀 이야기인 <플리즈 콜 미>의 ‘미주’는 말도 통하지 않는 타국에서 술에 의지해 딸과 사위 집에 머물며 스스로를 눈칫밥 신세로 전락시킨다. 모녀는 서로에게 비밀이 있기에 서로를 도울 수 없다. 그래도 적극적으로 찾아보면 살 길이 나올까. 사라진 남편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앞으로의 시간은 무궁해 보이지만 삶이 우리에게 허용한 시간은 유한하다. 그 시간을 기대와 희망으로 채울 것인가 불안과 걱정으로 채울 것인가. 분명한 건 우리가 약속받은 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이게 바로 삶의 본질이며 시간의 본 모습이다.

미지의 미래에 대한 불안은 <좋은 날이 되었네>와 <미래의 끝>에서도 반복된다. 두 작품 모두 막다른 골목에 처한 삶, 희망 대신 절망이 들어찬 각박한 현실을 보여준다.
더 이상의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 우리는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 ‘좋은 것은 다 흘러(196쪽)’가므로 나쁜 것 역시 다 흘러간다고 바라도 될까. 고이거나 머물지 않고 흘러가는 것은 의외로 다행한 일이다. 당장은 어둡고 막막해도 찰나의 빛줄기는 기대할 만하다. 비극적인 상황에 작가가 던져주는 희망은 티끌 같을지라도 우리는 그것에 의지할 수 있을 것이다.

<후견>의 ‘소명’은 과잉된 선의의 희생양으로 보인다. 이 작품은 주인공보다 그 부친인 ‘정호인’이 더 눈길을 끈다. 과잉의 원인은 분명히 사랑이었을 터이고 그 사랑은 딸의 미래에 대한 걱정과 불안이었을 것이다. 아비의 그런 마음은 딸에게서 친구를 빼앗고 학창시절의 추억을 빼앗는다. 무엇보다 나쁜 건 소명이 제대로 된 기회조차 갖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 성장한 지금, 소명은 오리무중에 빠져 있다.

언급했듯이 ‘불안’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다. 배경음악처럼 작품 전체를 아우르는 설정들(방에 갇힌 치매 노인, 큰어머니의 전화, 발신인 불명의 전화벨 소리 등)이 있어 화자의 불안을 자극하는데 그 감정은 독자들에게도 전이된다.

작가는 설명하거나 단정하기보다 방임한다. 그래서 대부분의 작품들이 불친절해 보인다. 독자에 따라 그게 불만일 수 있으나, 내게는 작가가 질문을 던지는 것처럼 보였다. 많아 보이는 빈틈은 여백으로 보였고 스스로 나름의 답을 찾고 의미를 부여하도록 자극하는 것처럼 읽혔다. 작품에 참여한다고 할까. 드러난 피상의 이면을 상상하게 됐다. 생각하고 고민하며, 나라면 어땠을까, 이야기에 이입하게 됐다.

편혜영의 소설은 오래 전에 읽은 ≪아오이 가든≫ 이후로 처음이었다. 작가의 스타일이나 천착하는 이슈 같은 건 모르겠고, 인물들에게 다소 가혹하다는 것, 무턱대고 낙관, 다 잘 될 거야, 이런 것보다는 비관, 운명론자 같은 시선 등은 알겠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삶이 그렇게 호락호락할 줄 알다간 큰코다쳐. 섣부른 희망 따위, 차라리 기대조차 하지 않는 게 나아.
맞는 말 아닌가. 그런 냉정함에도 불구하고 <미래의 끝>에서 느껴지는, 온몸을 감싸는 온기 같은 걸로 짐작컨대, 인간에 대한 강한 호의는 간직한 것 같다. 삶과 인간은 동일한 듯 보여도 전혀 다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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