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켜야 할 세계 - 제13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문경민 지음 / 다산책방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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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년 예순여덟 번째 책.


★★★☆

 

환갑을 앞두고 때 아닌 죽음을 맞은 국어교사 정윤옥의 삶을 그린다.

 

교사로서 윤옥은 투사에 가깝다. 전교조 가입으로 해임됐다가 복직했으며, 교육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고 원대한 꿈을 함께 품었던 동료가 육욕에 굴복하고 돈과 명예에 변절하는 동안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 동료 교사들과 친밀한 우정을 나누지 못하는 단단하고 꼿꼿한 원칙주의자고, 거의 모험에 가까운 수업으로 학부모들의 원성을 듣지만 무시할 정도로 배짱이 있다.

 

개인으로서 윤옥은 슬픈 가족사를 지닌 비운의 주인공이다. 뇌병변장애를 갖고 있는 동생 지호를 포기하는 엄마를 방관하고 어린 나이에 임신한 제자의 아이를 거두어 키운다. 정체가 모호한 시설에 떠맡겨진 동생을 지키지 못했다는 기억은 윤옥의 일생을 지배한다. 학생들을 진심으로 대하고 교육에 헌신하는 모습은 과거의 속죄일 수 있다.

 

내겐 좋은 선생님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다. 몇 명의 선생님이 생각나긴 하는데, 거의 초등학교 시절에 만난 분들이었다. 너무 어려서 아무것도 몰랐을 때.

그런데 그 시기에 난 정말 아무것도 몰랐을까. 적어도 어느 선생님이 친절하고 누가 아이들에게 진심이었는지, 정확히는 몰라도 대강 눈치채고 있지 않았을까. 어리고 세상 모르고 행동과 반응은 굼떴어도 분위기를 읽는 건 빠르고 정확한 편이었으니까. (눈치가 빠르다고 뭐를 어떻게 반응하는 건 아니었지만)

나는 선생님이란 존재를 절대 좋아할 수 없었다. 모든 걸 떠나서 그들은 내가 절대 이룰 수 없는 것들을 요구했고 내 실패에 대해선 매우 엄격했다.

 

굳이 내 과거를 거울 삼지 않아도 윤옥이라는 캐릭터는 비현실적이다. 너무나 일관된 모습뿐이라 얇은 종이처럼 팔랑거린다. 그 영웅적인 모습은 소위 교육계의 히로인, 어벤저스 대접을 받을 만하다. 이런 사람이 있다고? 아니, 이런 선생님이 있다고?

 

소설이니까.

 

하지만 무엇보다, 주인공이 위인에 가까운 인물임이 분명해도 정의와 올바름에 선다는 건 내게 일종의 각성이 되었다. , 자신이 비겁하고 기회주의적인 인간이지만, 인간이라면 정의와 올바름에 마음이 기우는 건 인지상정 아닐까. 정의롭게 행동하는 건 전혀 별개의 문제지만. 그러기 위해선 용기와 자신에 대한 신뢰가 필요하다. 그것은 나의 미덕이 아님을, 내게 그것이 충분치 않음을 깨달을 때 수치스러워야 할까. 아니면 부러움?

 

이야기는 윤옥이 한 일보다 그녀의 삶 자체에 집중한다. 그래서 굉장히 바쁘다. 초반엔 산만해서 눈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랐다. 여러 일이 일어나는데 깊이는 없다. 큰 위험도 위기도 없다. 뭔가 일이 터질 만하면 운 좋게 잘 넘어간다. 다이나믹(dynamic)하기보다 파노라믹(panoramic)하다. 이런 이야기에서 흔히 보이는 건데 교훈을 너무 노골적으로 외치고 있다. 불필요한 사건들도 많다. 적어도 윤옥은 왜 죽어야 했는지, ‘영숙은 왜 자살한 건지, 등은 설명 내지는 이유가 필요하다. 출판을 위해 분량을 많이 줄였다고 하는데(목차 포함 244), 지금보다 좀 더 길었다면 어땠을까 상상해 본다.

 

서이초 교사 자살 사건이 작가에게 계기가 됐다고 하는데, 그 이슈를 정면에서 파고든 작품이라고는 보기 어렵다. ‘교권침해’, ‘학부모의 갑질같은 이슈가 등장하긴 하는데, 다른 이슈들에 파묻혀 유야무야된다. 할 이야기는 많고 분량은 정해진(짧은) 탓에 진중하게, 사건의 드라마성을 차분히 다룰 공간이 없다. 오히려 서이초사건에 대한 정보는 이 작품에 대한 선입견을 갖게 한다. 아무것도 모른 채 이 책을 손에 드는 게 낫다.

 

그럼에도 (주인공의 한결같이 영웅 같은 면모를 무시하면) 작품은 꽤 읽을 만하다. 작품에서 힘이 느껴지는데 그게 이야기에서 나온다기보다 캐릭터에서 비롯된 것처럼 보인다. 윤옥에게서 우러나오는 에너지는 여전사의 기개에 가까워 마음을 흔드는 힘이 있다. 간결하고 안정적인 문장이 눈에 착 붙는다. 윤옥의 죽음을 서두에 두고 그녀의 삶을 되짚는 세 장(chapter)의 구성도 적절해 보인다. 초반의 산만함은 오륙십 쪽을 넘어서며 질서를 찾아간다. (대사는 살짝 오골오골하다) 교육 현장에 관한 디테일이 상당하다. (그 바닥을 전혀 모르므로 그렇게 보인다고 말하는 게 낫겠다) 작가의 본업이 교사이니 아마도 실제 지식과 경험에서 온 디테일일 것이다. 선생님이 주인공이 아닌, 학교가 무대가 아닌 소설도 작가가 잘 쓸까, 이런 의심 살짝 해본다.

 

결말에 대해서.

윤옥은 자신이 치른 전쟁에서 이겼을까. 그건 어떤 관점에서 보는지에 따라 다르다. 여러모로 이런 싸움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다. 윤옥의 상대는 거대한 시스템과 삶 자체였다. 결과를 떠나 무언가를 시도했다는 것만으로 그 가치는 빛난다. 윤욕은 용감했고 자신을 희생했고 행동하며 버텼다. 삼가 정윤옥 선생님의 명복을 빈다.

 

13(2023) 혼불문학상 수상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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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봄의 불확실성
시그리드 누네즈 지음, 민승남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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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년 예순일곱 번째 책.


★★★☆

 

몇 년 전, 전 세계를 얼어붙게 만든 코로나 팬데믹시기를 무대로 한다. ‘얼어붙게 만든이라는 표현은 (돌이켜 보면) 전혀 과장이 아니다. 말 그대로였다는 걸 모두가 안다.

 

작품은 그 시기를 지나는 한 개인(아마도 작가 자신)의 사적인 기록이다. 친구의 지인 집에 머물며 홀로 남은 앵무새를 돌보게 된 이야기를 기둥으로 남성과 여성, 문학과 예술, 글쓰기, 삶과 죽음, 유머의 힘, 선과 악, 타 생명체에 대한 예의와 책임감, 환경 문제 등에 대한 작가의 사유가 다양하게 흘러나온다.

 

인간이 아닌 다른 생명체에 대한 윤리 의식에 대한 저자의 생각에 깊이 공감했다. 이슈는 곧바로 환경 문제로 이어지고, 환경 운동이 어떻게 좌파의 이데올로기가 되었는지 설파한 데릭 젠슨의 저서 거짓된 진실 (아고라, 2008을 생각나게 해서 흥미로웠다. 또한 작가는 제인 구달을 인용하기도 하는데, 팬데믹 시절에 본, 코로나 바이러스(COVID-19)의 출현에 대해 야생 동물 학대’, ‘지구촌 빈곤을 줄이기 위한 노력의 부재에 원인을 둔 제인 구달의 인터뷰 영상도 생각났다.

환경에 대한 인간의 이기적 행동과 태도를 악()으로 규정지으려는 노력은 의외로 드문 것 같다. 선함과 악함, 둘 모두 인간 본성의 속성이라면, 대개 선함보다 악함이 더 쉽게 드러나는 것 같다.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의 몰인정함보다 예측하기 쉬운 게 있을까? 그게 얼마나 이른 나이에 시작되는지 목격하는 것보다 섬뜩한 일이 있을까? (151~152)

 

나는 세상에 악한 사람들보다 선한 사람들이 더 많다고 믿는다. 하지만 수적으로 우세하다고 해서 반드시 선이 승리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우리가 반드시 고려에 넣어야 할 점은, 특정 상황에서는 악이 선으로 하여금 악을 행하게 만들 수 있으며 더 나아가 특정 목적-이를 테면 전쟁에서의 승리-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것이 꼭 필요한 일이 된다는 것이다. (219~220)

 

이 소설엔 (굳이 첨언한다면) 플롯이 없다. 에세이와 소설의 경계를 허문다는, 혹은 두 장르를 혼용한다는 점에서 박완서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현기영지상의 숟가락 하나, 멀리 아니 에르노의 작품들이 떠오른다.

소위 에세이 소설들 대해 적어도 독자로서의 나의 인식은 부정적이다. 소설은 지어낸 이야기’, 즉 거짓의 이야기(하지만 진실을 말하는)여야 한다는 사고방식을 버리지 못한다. 그런 내게 작가는 이런 말을 하고 있다.

 

전통적인 소설은 우리 시대에 주요 장르로서의 자리를 잃어 가고 있다. 아직 죽지 않았을 수는 있어도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다. (중략) 여전히 인물의 성격과 체험을 그려 내는 강력한 도구로 남아 있지만, 허구의 이야기는 점차 핵심에서 벗어난 인상을 줄 것이다. 점차 작가들은 당신은 왜 지어낸 이야기를 하죠?’라고 묻는 목소리를 잠재우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다. (288)

 

작가의 말대로 이 주장에 대해 공감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질까. 작가의 주장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개인의 역사와 성찰을 담은 문학(289)’일까.

작가는 이란의 영화감독 아바스 키아로스타미의 말을 인용하기도 한다.

 

셰에라자드와 왕의 시대-이야기의 시대-는 끝났다. (289)

 

소설이 어떤 모습이든, 혹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든 분명한 게 있고 이건 내게 위로와 힘이 된다. 작가는 플래너리 오코너의 말을 인용한다.

 

희망이 없는 사람들은 소설을 쓰지 않는다. (220)

 

매력적인 인물이 등장하고 그, 혹은 그녀에게 일어나는 드라마틱한 사건과 클라이맥스, 반전의 결말 등을 이 작품에 기대하는 건 무리이다. 그리고 문학, 특히 소설에 대한 인식이 변화하고 있다는 작가의 주장엔 아직까지 동의하기 힘들다. 하지만 잔잔히 물 흐르듯 작가의 의식을 쫓으며 조곤조곤 읊조리는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건 분명 편안하고 좋은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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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춤을 추세요
이서수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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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년 예순여섯 번째 책.

 

★★★

 

여덟 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 이서수의 작품집.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이다.

 

전체적으로 평타는 치는데 정말 좋다라고 할 만한 작품이 없다. 물론 겨우 한 권 읽고 이런 말 하기엔 섣부른 감이 있지만 (더 읽어봐야 하겠지만), 이 작품집 한 권만으로 감상을 밝힌다면 이서수 만이 쓸 수 있는, 오리지널한 무언가는 찾기 어려웠다.

 

평타를 친다는 말은 평균적인 감상이다. 아마추어 같은, 습작처럼 읽히는 작품(전반부)이 있는가 하면 뒤로 갈수록 작품들이 그럴싸해진다. 이걸 다 한 사람이 썼다고? ‘예소연사랑과 결함을 읽으면서도 거의 똑같은 생각을 했더랬다. 하지만 예소연과는 달리, 이서수는 장편과 단편집을 이미 여러 권 펴낸, 소위 중견이라 할 만한 작가다. 그럼에도 이 책으로 작가의 역량, 문체의 개성, 상상력과 구성력, 필력 등을 가늠하기 어려웠다. 한 권만으로도 팬심이 솟아나게 만드는 작가들이 있는데 이 작가가 그렇다고는 말할 수 없겠다.

 

이야기마다 공통된 특징이 있는데, 바로 모녀 관계(혹은 그 유사 관계)에 집중하고 있다는 것. 반면 남성들은 철저히 소외된다. ‘거세된 남성성이란 표현은 좀 과할지라도 작품들마다 남자들(주로 아버지들)은 나쁜 사람이거나 필요가 없거나 거추장스러워 무대 밖으로 치워진다. 뿐만 아니다. 이야기들의 문제적 인물들은 거의 남성들이라는 점에서 성차별적인 요소가 보인다.

 

너무 불평만 한 것 같은데, 나름 좋았던 점도 언급해야겠다. 이건 차별이야, 이건 혐오야, 그건 꼰대 마인드야, 그건 가스라이팅이야, 그건 가부장이야. 이런 말들은 요즘 너무 쉽다. 그리고 너무 편리하다. 상대방의 입을 한순간에 닫게 만드는 너무나 강력하고 유용한 의 말들이다. 작가는 가끔 이런 말들에 고민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시류에 묻어가지 않고 주변을 관찰하고 살핀 결과로서, 그런 말들조차 다른 형태의 폭력이고 편견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려 한다. 그런 부분은 꽤 신선했다.

 

작품집을 여는 <이어달리기>는 경쾌한 톤, 긍정적인 분위기로 쉽게 읽히지만 책의 첫 작품으로서 독자들을 휘어잡는 데엔 역부족이다. 별론데? 하면서 책을 쉽게 내려놓는 독자들은 분명 존재한다.

일단 화자의 상황이 설득력이 없는 건 물론이고 신뢰가 가지 않는다. 상사의 갑질에 시달리고 격무에 혹사당하고, 이런 불만들이 화자 자신의 시선과 발언에 머물고 있어 과연 그 말들을 믿을 수 있는지, 의심을 하게 만든다. 이는 균형의 문제다. 객관성이 결여된 시선은 이야기 전체에 암시되는 화자의 미성숙한 모습으로 탄력을 받는다. 재취업 의지를 보이지 않는 화자가 엄마를 대하는 태도는 가관이다. 엄마를 씩씩하고 단단한 삶 대신 아름답고 슬픈 삶을 선택한 사람(27)’으로 판단하며 희생을 종용하는가 하면, 막무가내로 회사에서 사라지려 했던 에피소드에서(36), 엄청난 소동을 예상했으나 자신의 부재가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다는 사실에 실망하는 모습은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는 한편 연민과 동정을 구하는 어리광이나 투정에 지나지 않게 보인다. (완전한 성장과 독립을 이루지 못하고 엄마의 그늘 아래로 숨는 자식은 뒤에 실린 <AKA 신숙자>에서도 보인다) 화자의 상황에 설득이 되질 않으니 이야기 전체에 공감이 안 간다. 실직한 엄마와 도서관을 들락거리는 에피소드 역시 허무맹랑한 판타지, 과한 사치로 보인다. 과한 설정은 또 있다. 엄마의 교통사고는 도대체 무슨 의미, 무슨 소용일까.

화자가 고백하듯, ‘어려운 글 말고 그냥 내 이야기’, ‘하루를 낭비하는 이야기’, ‘의미 따위는 없는 글, 내가 이렇게 산다고 적는 글, 우리 외엔 아무도 읽지 않는 글(31)’이 이 작품의 본질이라면 독자로서 무슨 말을 더 얹을 수 있을까.

 

<춤은 영원하다>는 엔딩이 인상적인 작품이다. 무덤가에서 세 명의 여자가 춤을 추는 모습은 그리스 신화의 디오니소스 제례나 맥베스의 세 마녀, 러시아 설화를 소재로 고골이 쓴 작품들 연상하게 한다.

이 장면은 말하자면 이 소설의 가장 강렬한 장면,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게 전부다. 오직 엔딩 장면을 위해 쓰인 작품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이야기가 빈약하다. ‘이라는 소재는 신선하다. 신과의 소통, 주술적 의식 이상으로 속을 비워내고 무아지경(trance)이 이르고 자신을 잊고 고달픈 현실을 벗어나는 행위는 모두에게 위로가 된다. 외할머니, 엄마와 이모, 화자로 이어지지는 세대를 아우르는 운명과 그것을 극복하거나 마주하기 위한, 시공을 초월한 연대를 보여주겠다는 의도도 괜찮다. 하지만 결과물로서의 이 작품은 공허하다. 인물들의 춤은 위로가 아닌 환각처럼 보인다. 모든 시름을 잊고 한바탕 춤이나 추자는 결말은 너무나 진심 없는 위로, 대책 없는 파이팅으로 들린다.

 

직장사실주의를 표방한 듯한 <광합성 런치>는 앞의 두 작품에 비해 늘씬한 모양새가 돋보인다. 여러모로 중간에 끼어 있는 인물 차진혜를 화자로 세대와 계급, 권력의 차이에서 오는 어쩔 수 없는 갈등을 흥미롭게 보여준다.

차진혜의 짝사랑은 자칫 빈틈을 메우기 위한 소비적 에피소드로 전락할 수도 있었으나, 차진혜에게 그들의 시각과 입장을 적극적으로 헤아리는 계기가 된다. 더불어 차진혜에게 타인과의 차이를 인식하는 인물, 그것을 극복할 의지가 있으며 적어도 노력은 하는 사람이라는 인간적인 매력을 부여한다. 전형적인 Z세대인 박이재라는 캐릭터가 평면성을 넘어서 입체적인 인간으로 반전하는 결말도 좋았다.

X세대(대표, 홍차장), M세대(차진혜), Z세대(박이재) , 각 세대의 대표성을 지닌 인물들을 골고루 등장시켜 이야기를 천천히 빌드-업 시키는 구성, 인물 간 대화가 주는 재미가 좋으며 차이와 다름에서 오는 갈등을 어떻게 최소화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독자 스스로 던지게 만드는 방식이 세련됐다. , 차진혜의 계모인 김순화는 쓸모가 없어 보여 지면 낭비처럼 보였다.

광합성런치라는 두 단어를 결합한 제목에 대해선 핑계가 필요하다. 인간의 끼니는 박이재가 원하는 진지만큼이나 자본과 노동의 집약적 산물이다. 광합성도 마찬가지로 식물의 노동(명반응, 암반응)과 자본(빛에너지, , 이산화탄소 등)을 필요로 한다. ‘광합성 런치라는 제목은 저절로, 혹은 손쉽게 얻어지는 무엇이라는 의미보다는 식집사인 박이재의 관심과 애정을 갈구하는 화자의 욕망을 반영한 제목으로 여겨지는데, 작품의 제목으로는 부적절해 보인다.

 

노동자인 엄마, ‘신숙자와 미숙한 딸, ‘박미리가 등장는 <AKA 신숙자>는 모녀 서사를 빌려 어떤 면에서는 아직 아이에 머물러 있는 청년 세대를 꼬집는 것 이상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작가는 줄곧 미숙한 딸의 이기심과 엄마의 희생을 비교하는데 미리 스스로는 엄마를 부양한다고 믿지만 그녀가 실제로 진심어린 성의를 쏟는 대상은 길고양이 퐁이. 딸에게 신숙자는 그저 엄마일 뿐, ‘인간 신숙자가 되기엔 요원하다. 딸은 엄마의 온라인 지원서를 작성하면서 쓸 게 별로 없다는(아는 게 거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반면, 엄마는 계속되는 노동에 내몰린다. 그녀에겐 꿈이 있지만 아직은 일을 내려놓을 수가 없다. 그녀는 딸을 위해 끊임없이 희생한다. 무당은 아니어도 딸에게 도움이 된다면 서툴게 무당 흉내까지 낼 수 있다.

초반에 등장하는 헬레나 루빈스타인의 초상화는 인간이 지닌 여러 겹의 얼굴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잘 안다고 생각하는 누군가를 정말로 잘 알고 있는 것일까. 피상의 일부만으로 전체를 본다고 착각하고 있지나 않을까.

인간의 시간은 과거를 지나 현재에 이르러 미래를 향하는, ()으로 흐르기보다 차곡차곡 쌓이며(<미식 생활>, 252)’ 흐른다. 위에 것을 덜어내고 깊이 파헤치는 노력 없이는 결코 그 아래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다. 작품은 우리가 타인을 보다 잘 보고 이해하기 위해 들이는 노력이 충분한지 묻는다.

다만, 한 문단 안에서 시점이 널을 뛰고 있다는 건 치명적인 흠으로 보인다. 이런 아마추어 같은 실수가 진짜 실수일까. 아니면 어떤 의도로 계획된 예술적 허용일까.

 

<운동장 바라보기>는 이 작품집에서 베스트로 추천할 만한 작품이다. 인물들의 편견과 설레발로 점철된 이야기는 부분으로 전체를 안다고 믿는 오만, 전형적인 패턴을 진실로 착각하는 오류, 소수와 약자를 위하는 척 드러내는 다른 형태의 가부장, 비판 없이 공식처럼 작동되는 PC적 사고, 이런 습관적이고 기계적인 인식과 반응에 역차별적 행동을 보이는 아이들의 결말로 대항한다.

현실을 마주한 당사자가 아닌 외부인의 시선은 한계가 있다. 숫자뿐인 통계, 교묘히 선발되고 왜곡된 이미지 등은 사고를 무력화 시킨다. ‘김희서의 일기를 제 식대로 윤색해서 친구들에게 들려주는 청미의 행동(161)은 황색언론의 전형적인 수법이다. 돕고 싶다는 청미의 말에 희서는 언니는 내가 부족한 사람이라고 생각해?(153)’라며 되묻고, 귀촌한지 얼마 안 되어 곤충들에 익숙하지 않은 설경에게 벌레를 무서워하면 벌레 많은 시골에서 못 산다(166)’고 따끔한 일침을 놓는다.

김희서로 대변되는 결혼이주여성들은 보통의 걱정, 우려와는 달리 타국 생활에 대해 이미 완벽한 준비와 각오가 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들을 그저 타국에서 고생하는, 타국으로 팔려온피해자, 약자라는 프레임을 습관처럼 씌우고 있는 건 아닌지 질문해 볼 일이다.

 

<잘 지내고 있어>는 논쟁적인 이야기가 될 뻔했으나 실패한 작품으로 보인다. 뭔가 아귀가 안 맞는 느낌이랄까, 초점이 어긋난 사진을 보는 느낌이 든다.

가장 눈에 거슬리는 건 연명 치료를 포기한 걸 살인에 비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딜레마를 제대로 보여주길 바랐다면 안락사정도의 이슈가 나왔어야 하지 않을까.

이 작품은 줄곧 모녀 서사에 매달리던 작가가 (이제야 아빠들에게 미안했는지) ‘아빠라는 캐릭터를 전면에 내세운 (작품집의 유일한) 이야기라는 점에서 일단 눈에 띈다. 하지만 시종일관 의식불명으로 누워 있는 게 전부이므로, 아빠에 대한 이야기라고 하기에도 민망하다. 서사의 촉매제로서의 도구 역할에 지나지 않는 아빠 캐릭터는 소외되고 거세당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내면적으로는 조금 다른 형태의 모녀 서사로 읽히는데, 혈연이 배제된 모녀 관계(딸들과 아빠의 내연녀)가 이야기 저변에서 활발하게 작동하기 때문이다.

아빠에 대한 힌트, 정보가 거의 전무하므로, ‘주연-세연자매의 감정이 잘 살지 못하고 독자로서 이야기에 멀찌감치 거리를 두게 된다. 치열한 척 분위기를 내지만 이야기는 빈약하다. 공감할 여지가 많지 않다.

완성도와는 별도로 이 작품의 의미는 죽음, 웰 다잉(well dying)에 대한 사유를 촉발한다는 데 있다. 죽음에 있어 최소한의 품위를 잃지 않는 게 가능할까. 어떻게? 인간이라는 필멸자로서 우리는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 연명 치료를 거부하는 건 물론이고 안락사 역시 사회적으로 합당한 방법으로 용인되어야 하지 않을까. 죽음에 임박해 고통에 시달릴 때 그들의 인권과 복지를 위해 사회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

동시에 사랑하고 함께 오랜 세월 동고동락 했어도 실제적으로는 가족으로서 아무런 권리도 보장도 없는 이야기 속 사실혼 관계를 통해, 결혼이라는 제도 밖에 있는, 가족이지만 가족이 아닌 관계들(대표적으로 동성애자 커플)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지 숙고해 볼 일이다. 이들 관계를 법이라는 틀 안에서 효력을 갖게 하려면 사회는 어떤 시도를 하고 어떤 변화를 겪어야 할까.

 

<미식 생활>에선 먹는 입, 넣는 입, 토하는 입, 탐하는 입, 죽으려는 입 등의 다양한 이 등장한다. 작가는 씹고 삼키는흔하고 평범하며 익숙한 행위를 미시적인 시선으로 관찰하고 풀어헤치다가 경험, , 역사로 시야를 확장(음식은 그저 음식이지 않고 입은 그저 입이지 않다. 그것은 기억을 불러일으키고 생과 사에 개입하며 특정한 리듬 안에 잠기게 된다, 250), 무너지고 있는 타인을 외면하지 않으려는 인간애, 휴머니티의 결말로 이끈다. 서사의 흐름이 무척 유려한데, 마치 각기 흐르던 수많은 지류들이 마침내 깊고 푸른 강으로 합쳐지는 것에 비유할 만하다. 특히 손 끝에 혼이 붙은 듯 써내려간 결말 즈음의 페이지들에선 행간에 휘몰아치는 에너지가 고스란히 느껴진다.

먹는 행위를 나만의 경험, 그것만이 내 역사의 근간으로 보는 작가의 인식이 독서라는 행위에도 마찬가지임을 깨닫는 건 새롭다. 책을 읽는, 나만의 고전, 나만의 명작을 찾는 과정도 비슷해 보인다.

 

노동을 소재로 한 <청춘 미수>는 통통 튀는 문체와 경쾌한 톤, 화자 주변의 발랄한 조연들 덕에 유쾌하게 읽힌다. 이슈 메이커로서 울림이 꽤 묵직하다.

김아혜 선생님의 행동을 시혜적 태도로 볼 것인가. 악인의 서사 (돌고래, 다수의 저자, 2023에서 전승민은 이런 태도를 연민과 동정, 이해를 앞세운 우월한 자의식이 깃든 나르시시즘으로 간주하고 소극적인 악()으로 봤다. 김아혜 선생님의 친절 역시 있는 자의 여유, 가진 자가 보이는 가부장적 온정으로 볼 수 있을까. ‘미수의 노동은 성실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과연 성실한 노동은 무엇일까. 그리고 어떤 형태일까.

작가는 아마도 김아혜의 편을 들어주려는 모양이다. 미수의 꿈 속에 나타난 두 명의 엄마는 미처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엄마 품을 벗어난 미수를 위한 다른 엄마의 존재를 암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이 작품 역시 살짝 비튼, 다른 형태의 모녀 서사로 읽힌다. 김아혜의 친절이 진심이었는지, 그리고 진심이 통했는지, 미수는 자신이 받은 실망을 거두고 김아혜의 안녕을 빌어준다.

 

요즘의 한국 소설을 읽다 보면 이런 생각이 들곤 한다. ‘한국 문학이란 어떤 장르적 특색, 경계가 존재하는 건 아닐까. 한정된 단어들만 가지고 생각하고 글을 쓰라는 무형의 압박이(마치 오웰1984처럼) 작가들에게 가해지는 것은 아닐까. 물론 심각한 비약이고 과장인 줄 안다. 소설 역시 시대적 유행을 타는 것임을 부정해선 안 된다. 하지만 거의 대부분의 주류 문학들이 어떤 틀 안에서 머무는, 그 경계를 벗어나지 않고 있다는 느낌을 버릴 수가 없다는 건 분명하다. 읽을수록 좀 더 새롭고, 좀 더 파격적이거나 독창적이고, 좀 더 용감하고, 좀 더 획기적인 이야기에 대한 갈망이 커진다.

 

영혼을 때리는 울림이라는 건 분명 있다. 과거엔 소설을 통해 종종 그런 경험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요즘의 독서 이력을 살펴보면 그런 경험이 매우 귀하다. 무엇이 문제일까. 내가 변한 걸까. 아마도. 하지만 변화는 내 밖에도 있을 것이다. 단순히 기교나 기술적 측면이 아닌 건 확실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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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트램 호텔에서 애거서 크리스티 미스터리 Agatha Christie Mystery 57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정성희 옮김 / 해문출판사 / 1991년 5월
평점 :
품절


26년 예순다섯 번째 책.

애거서 크리스티 다시 읽기 스물다섯 번째 책.

 

★★★☆

 

사람은 절대로 과거로 돌아갈 수가 없다는 것, 그리고 그렇게 돌아가려고 해서도 안 된다는 것을 말이에요. 인생의 본질이란 앞으로 계속 나아가는 것이니까 말이죠. 인생이란 결국 일방통행로 아니겠어요? (210)

 

영국 런던. 중심가에서 벗어난 한적한 곳에 위치한 버트램 호텔(Bertram’s Hotel)’. 시대의 흐름에 발맞춰 많은 게 진보적인 변화를 거듭하고 있지만, 이 곳만은 과거 에드워드 왕조 시대(1901~1910)의 매력을 한껏 뽐내고 있다. 요즘 같으면 레트로라는 키워드 아래 SNS 페이지마다 인증샷으로 도배될 핫플이 될 수 있겠지만, 우리의 명탐정 미스 마플의 눈에는 부자연스럽다.

 

호텔의 손님인 레이디 셀리나 헤이지에서 데릭 러스컴 대령으로 시점을 옮겨가며 작품의 주무대인 버트램 호텔을 보여주는 도입부가 무척 인상적이다. 독자는 작가가 이끄는 대로 호텔의 구석구석을 목격한다. 이 작품은 전체적으로 한 편의 연극처럼 느껴지는데 고풍스럽고 우아한, 한편으로는 폐쇄적이고 어딘지 모르게 비밀을 품고 있는 장소 덕이다. 무대 자체가 하나의 캐릭터인 셈이다. 환상적인 연극 무대 같다는 미스 마플의 말은 버트램 호텔의 핵심을 찌르고 있다.

 

전체를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은 다소 산만하다. 난삽한 사행활의 사교계 셀럽’, 나이 어린 상속녀, 카리스마 넘치는 카레이서, 구시대의 완벽한 호텔 종업원, 각양각색의 손님 들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지는데, 강도 사건과 살인, 실종, 막대한 재산, 삼각관계의 연애 문제에 내가 네 엄마다류의 가족의 비밀까지, 작가는 다룰 수 있는 거의 모든 재료들을 한 작품 안에 쏟아붓는다. 그렇지만 혼돈은 혼돈이되 보기에 좋다. 갖가지 문제들이 치고 빠지며 질서와 균형을 잘 유지한다. 각각의 사건들은 서로를 배반하지 않으면서 영향을 끼친다. 한 사건은 다른 사건의 원인이 되기도 결과가 되기도 한다. 많은 사건들이 돌고 돌아 다시 돌아오는 장소는 바로 버트램 호텔. 결국 오랜 역사를 지닌 호텔 건물처럼, 인간의 범죄도 한 순간의 오류가 아닌, 오랜 세월에 걸쳐 곪아온 상처가 터진 결과로 보인다. 인간의 악행을 바라보는 작가의 인식이 드러난다.

 

외부의 사건과 복잡한 내면의 미로를 절묘하게 배합하여 이야기의 단순함을 극복하고 인간의 이기심과 사악함에 집중하는 구성은 작가의 트레이드 마크처럼 보이지만, 50년대 이후의 후기작 (비둘기 속의 고양이, 59, 핼로윈 파티, 69)에서 보다 더 두드러진다.

65년에 발표된 이 작품은 작가의 대표작은 아니지만, 쉽게 잊히지 않는 인상을 남긴다. 전체적인 소재는 굵직굵직하지만 강렬한 긴장감보다 아기자기한 잔재미가 돋보인다. 매력적인 인물들과 강한 멜로드라마 성은 작가의 팬들은 분명 반길 요소다. 그렇다고 코지함(coziness)’만을 내세운 작품은 아닌 게, 결말이 꽤나 묵직하다. 악을 고발하는 데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건 정의(justice)’이다.

 

미스 마플이 등장하지만 활약은 크게 두드러지지 않는다. 미스 마플의 런던 나들이는 그 인물에게도 독자들에게도 귀한 경험이지 싶다. 젊은 시절을 추억하며 곳곳을 누비는 미스 마플을 구경하고 그녀의 과거를 상상하며 그 머릿속을 엿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단순히 노처녀 할머니 명탐정이란 소설 캐릭터에서 벗어나 인간 제인 마플로 돌아가는 순간을 작가는 선물하고 싶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사족.

 

극 중 인물인 베스 세지윅이 도넛을 먹으면서 잼이 턱으로 흘러내리는 모습을 묘사하는 장면이 있는데, 얼마나 인상적이었던지 도넛을 먹을 때마다 이 소설이 생각나곤 했다. 동시에 흘러내릴 정도로 잼이 꽉 채워진 도넛은 도대체 어디 가면 먹을 수 있을까, 하는 아쉬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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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 갈증 트리플 13
최미래 지음 / 자음과모음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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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년 예순네 번째 책.

 

★☆

 

단편 세 작품에 프롤로그’, 그리고 작가의 에세이 한 편이 실렸다. 프롤로그의 분량이 꽤 긴데다 뒤에 이어지는 연작 형식의 세 작품과 내용이 이어지니, 독립된 단편 작품으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단편 세 편+에세이 한 편이 기본 포맷인 다른 트리플시리즈와 달리 다른 작가들에게 제공된 공간보다 더 많이 주어진 셈이다. 작가는 이 넓고 빈 터에 어떤 세계를 펼쳐 보일까.

 

꾸역꾸역, 힘들게 읽었다. 인물은 호감이 전혀 생기지 않고 감정을 줄 여지도 없다. 인물의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그 고뇌의 실체가 없어 공감하고 응원하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

재미가 없다. 인물들이 꾸준히 움직이고 계속 뭔가를 하는데, 동기도 모호하고 그 뭔가 함의 의미를 모르겠다. 페이지는 계속 넘어가는데 어떤 이야기인지 감이 안 잡힌다. 이야기가 뜬구름 같으니 흥미가 안 생긴다. 호기심이 안 생기고 뒷일이 궁금해지지도 않는다. 결말이 궁금하긴 했다. 과연 이 혼돈을 작가는 어떻게 마무리할 것인가.

결국 지루해지다가 책을 읽는 게 고역스러워진다. 소설에서 재미와 즐거움을 추구하는 나 같은 독자들에게 어필할 요소는 눈을 씻고 봐도 없다.

그럼 어떤 모종의 의미라도 있을까? 글쎄.

 

형식적인 면에서도 그다지 장점이 보이지 않는다. 평범한 문체에 소위 문장 수집가들을 유혹하는, 시선을 붙드는 문장도 눈에 띄지 않는다. 작가 만의 그 무엇도 찾아보기 힘들다. 작가 자신이 쓰고 싶은 것을 쓸 뿐, 자신의 머릿속에 머무르려는 태도도 개성이라면 개성이겠지.

 

작가가 이런 작품들을 (무려 네 편씩이나) 쓴 데엔 무슨 이유가 있지 않을까 싶어서 에세이를 정독했으나 머리만 더 어지러울 뿐이었다.

그나마 문학비평의 힘을 빌려 이 작품들을 이해하고 싶은 마음에 평소에 읽지도 않는 작품 해설을 읽었지만 별 도움이 안 됐다. 비평이란 게 원래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아니던가.

 

충분히 매력적인 혼돈은 분명 존재한다. 모호하기만 한 혼돈은 그냥 혼돈 그 자체다. 질서가 결여된 환상성은 난삽하고 산만해 보인다. 소설 작품은 이성과 감성이 함께 동원되어야 한다. 잘 쓰인 소설은 정교한 건축물, 맛있는 음식과 같다.

 

최미래 작가를 좋아하고 응원하는 독자들도 있을 것이고 이 작품집을 좋아하는 독자들도 있을 터이니, 이 모든 감상은 그저 나의 취향과 안 맞았던 것으로, 내 독법이 모자란 것으로 돌릴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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