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손 마르코폴로의 도서관
안드레스 바르바 지음, 성초림 옮김 / 마르코폴로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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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 말고는 달리 사랑하는 법을 몰랐다. (36쪽)❞

❝누군가는 인형이 소리치지 못하도록 그 입을 막아야 했다. 나였던가? 너였나? 누군가는 인형을 밀어야 했다. 우리가 모두 바닥에 넘어졌고 그 인형 위에 있었으니까. 누군가는 그 인형을 단단히 붙잡아야 했다. 발길질하지 못하도록, 그래서 차분해지도록, 다른 어떤 인형도 그런 적 없을 만큼 차분해지도록, 너무 차분해서 우리가 숨을 돌리기까지 한참이 걸리도록.

인형아, 나는 여러 날을 울었어. 그리고 너를 그리워했어.

우리는 밤새도록 꼼짝않는 그 인형과 놀았다. (124쪽)❞


일곱 살의 ‘마리나’는 교통사고로 부모를 잃고 보육원에 들어간다. 그곳엔 다른 아이들이 있다. 그 아이들에게 마리나는 이방인이다. 마리나와 아이들은 서로를 탐색하며 친구가 될 수 있는지, 그렇다면 그건 언제인지 기회를 엿본다.

총 세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마리나와 아이들의 시점을 오간다. 마리나의 편에서는 3인칭 시점이, 아이들의 편에서는 1인칭이다. 1인칭의 아이들은 ‘나’가 아니라 ‘우리’다. 그들은 이미 그곳에 속해 있음으로 하나의 집단을 이룬다. 반면 마리나는 이방인이자 개인이다. 그곳에 속할지, 그들에게 받아들여질 지는 아직 미지수다. 속하고 싶은가 하면 속하고 싶지 않다. 아이들 역시 마리나를 받아들이는가 싶다가도 밀어낸다.

‘외집단(outer group)’과 ‘내집단(inner group)’ 사이의 권력, 한편으로는 인간 심리의 양가성에 관한 이야기로 읽힌다.
‘사랑’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그 의미가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다소 다르다. 다소 아이러니하게 들린다. 이들의 감정은 양가적이다. 서로에게 호감을 보이다가도 밀어낸다. 사랑이라고 말을 하면서 폭력을 휘두른다. 호기심과 긍정적인 관심이 배타적인 폭력과 동시에 양립할 수 있는가. 작가는 그렇다고 말한다. 다소 모호하게 처리된 결말은 인간 심리의 양가성과 계급의 폭력을 섬뜩하게 드러낸다.

호기심은 가끔 폭력의 양상을 띤다. 아이들에게서 ‘순수한 악’의 요소들을 종종 발견한다. 인간의 잔인성, 폭력성은 종종 순수함과 동반되어 나타나는 것 같다. 그 둘은 어쩌면 전혀 다르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시적인 문장은 암시로 가득 차있다. 상징과 복선이 난무한다. 모호한 분위기, 무시되는 논리와 개연성, 생략과 비약이 심한 서사는 이야기의 환상성을 극대화 한다. 고개를 돌릴 정도의 끔찍함엔 일정량의 아름다움이 있는데 이를 드러낸 작가의 솜씨가 탁월하다. 스페인에서 일어난 실제 사건을 소재로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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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소리를 듣다
우사미 마코토 지음, 이연승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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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든 팝니다. 삽니다.
각종 고민 상담 및 의뢰 환영.❞


허름한 외관에 이름이 ‘달나라’인 가게는 중고 물품을 사거나 팔면서 자질구레한 심부름도 맡는 그런 곳이다. 그 장소를 배경으로 세 인물이 등장한다. 은둔형 외톨이로 살아온 18세의 ‘류타’, 달나라의 숙식 종업원인 ‘다이고’, 그리고 그곳의 사장인 인색하고 괴팍하지만 어딘가 인간미 있는 노파 ‘다카에’. 류타와 다이고가 만나 친구가 된 하로노부 야간 고등학교는 또 하나의 중요한 배경이다.

연작 형식의 장편이다. 세 개의 개별적인 에피소드가 존재하고, 그것들이 곧 하나의 커다란 사건을 이룬다. 이야기의 뼈대이자 대미를 장식하는 사건은 바로 십여 년 전, 동네에서 발생했던 일가족 살인 사건. 당시 유일한 생존자였던, 가족의 어린 아들의 행방은 묘연하고 용의자는 자살했다. 사건은 미궁에 빠졌지만 완전히 잊힌 건 아니다.

일가족 살인사건이라니. 무시무시하게 들리지만 작품 전체의 분위기는 따뜻하고 경쾌하다. ‘코지 미스터리’의 색깔이 두드러진다. 류타와 다이고, 그리고 집안에 틀어박힌 류타를 야간 고등학교로 이끈 ‘유리코’의 이야기만 보면 십대들의 성장 드라마의 색채도 갖는다. 아웃사이더, 소위 ‘문제아’들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이 따뜻하다. 그런 문제들을 생산하는 사회를 향해서는 날을 세우기도 한다. 사회적인 주제의식도 담겨 있어 독자들의 경험은 더욱 다양해진다.

전체를 아우르는 사건보다 그것들을 구성하는 작은 에피소드들이 더 빛난다. 아이디어들은 새롭고 추리는 과학에 많이 의지하고 있다.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자연 구석구석에 숨겨진 크고 작은 비밀들이 수수께끼를 해결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작품을 위한 자료 조사에 작가가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는지 보인다. 작가는 자신이 잘 아는 것을 써야 하지만 그것만 쓴다면 금세 도태된다. 이야기를 쓰고 짓는 일에 엄청난 공부가 따른다는 사실은 놀랄 일도 아니다.

소소하지만 기발하고, 과학적이지만 인간적인 에피소드들을 거치며 차곡차곡 쌓아놓은 호감과 재미, 서스펜스는 뒤로 갈수록 약해진다. 가장 무게가 실린 사건의 해결은 다소 허무하다. 가장 공을 들어야 할 부분에서 작위성이 드러나고 우연이 개입되어 긴장감이 떨어진다. 마시던 콜라가 시간이 지날수록 김이 빠지고 밍밍해지며 단맛만 강해지는 그런 느낌이랄까.

서글프고 아련한 정서, 곳곳의 유머와 쾌활함, 드라마틱함과 기괴함이 적절히 섞인 독특한 분위기는 작가 ‘온다 리쿠’를 연상하게 하는 장점이지만 뒷심이 빠지는 건 몹시 아쉽다. 작가의 다른 작품, ≪어리석은 자의 독≫을 읽었을 때도 비슷한 감상이었던 걸 보면 작가의 고질병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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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락독서 - 개인주의자 문유석의 유쾌한 책 읽기
문유석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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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철로 이동할 때 거의 책을 읽는데, 스마트폰이 아닌 책을 펼치고 있는 사람을 보면 무지 반갑다. (앗! 동지다) 다가가서 말을 걸고 싶지만 그건 미친자 취급받기 쉬울 테니, 무슨 책을 읽고 있는지 책 표지나 책등이라도 볼 수 있다면.
이 책을 만났을 때 그런 기분이었다. 책에 관한 책, 독서에 관한 책이라니. 게다가 쾌락으로서의 독서라니. 내가 딱 그런데, 하는 생각에 이 책을 갖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뻤다.

책 ‘덕후’로서의 저자의 자기 고백이다. 책에 관한 수다로 일관된 글. 더 정확하자면 저자가 읽은 책들에 관한 ‘썰’과 그것들에 상관된 저자 개인의 추억 등이 주를 이룬다.
정말로 에세이답다. 가벼운 톤에 읽기 쉬운 문장, 수다를 떠는가 싶으면 순간 정색을 하고 진중한 주제를 꺼낸다. 굉장히 사적인 부분을 빼면 공감하기도 쉽다. 저자와 비슷한 연배라면 과거를 회상하며 잠깐 추억에 잠기며 행복할 수도 있겠다.

저자의 독서 범위가 굉장히 넓다. 젊은 시절 공통적으로 강요받던 동서양의 고전, 다양한 장르의 현대소설, 무협지, 만화까지.
이 책을 읽기 전에 가장 먼저 든 생각은 판사가 되기 위해 공부를 얼마나 했을까, 였다. 법대 준비하느라 고생이 상당했을 텐데 책 읽을 시간을 어떻게 만들었을까 싶지만 그의 말을 들어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았나 보다, 하다가 워낙 머리가 좋았나 보다, 부럽다가 그래도 할 땐 열심히 했을 거야. 이런 생각이 두서없이 든다. 그러다가 읽다 보니, 의외로 미래의 판사에 어울리는 필독서, 고전, 섣불리 손 대기 어려운 책, 이런 것에 치중한 독서는 아니었구나, 참 다행스럽다는 위안도 들고. (그런데 내가 왜?)

작가는 유희로서의 독서를 강조한다. 책을 읽는 행위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즐거움을 얻는 것이라 주장하며 책을 읽는 중에 습득되는 정보나 지식 같은 것들은 그저 부산물일 뿐이라고 말한다.
총 3부로 구성된 이 책의 마지막 장에 이르면 분위기가 살짝 달라지며, 앞에 살짝 언급한 독서의 ‘부산물’이 과연 어떤 것인지 저자는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독서 행위의 사회적인 측면, 즉 책을 통해 무언가를 깨닫고 아는 것이 사회에 어떤 변화를 야기할 수 있는지를 살피는데, 독서 행위에 따르는 윤리, 판단력의 중요성, 개인적인 독서를 벗어난 사회적인 독서 등을 설파한다.

하지만 저자가 주장했듯이, 그런 것들이 없어도 괜찮지 않을까. 기대하는 것 없이 ‘그냥’ 하는 행동은 하나같이 무의미한 걸까. 영어 단어 하나 더 외우고, 수학 문제 하나 더 풀어야 하는 학창시절, ‘야자’ 시간에 선생님들 눈을 피해 참고서 안쪽에 소설책 펴고 읽는 건, 그야말로 ‘개꿀잼’. 책이 주는 재미 외에도 흥미로운 모험, 규율을 배반하는 행동이 주는 흥분은 중독적이었다. 하지만 여지없는 죄책감엔 속수무책이었다. 성인이 된 지금, 책 읽을 시간 만드는 건 여전히 어렵지만 책을 읽기 위해 죄의식을 감수할 필요가 더 이상 없으니 그거 하나는 아주 좋다.

책을 놀이로서 대하자는 저자의 말에 지극히 동감한다. 독서 인구가 나날이 줄고 독서율이 현저히 떨어지는 요즘, 어린 세대들에게 놀이감으로 손에 책을 쥐어준다면, 책 읽기를 공부나 숙제가 아닌 놀이와 취미로 접근하도록 어른들이 이끌어준다면, 미래엔 책에 관한 많은 것이 다르지 않을까.

사족.

1. 저자의 직업이 다양하다. 판사, 에세이저자, 드라마작가, 소설작가, 콘텐츠기획자, 기타 등등.

2. 저자를 처음 만난 건 바로 이 책(https://soulflower71.tistory.com/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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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씨는 진짜 사랑입니다
엘리자베스 버그 지음, 박미경 옮김 / 나무의철학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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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무덤에서 뭔가를 느껴요. 구체적인 이미지가 떠오르는 건 아니지만 뭔가가 느껴져요.”
“뭘 느끼는데?”
“평온함이랄까… 안도감이랄까. 자 됐습니다. 다 풀지 못했더라도 이젠 펜을 내려놓으세요. (78쪽)❞

❝내 눈에는 시든 잎도 여전히 예뻐요. 시들어 떨어지는 것도 생의 일부잖아요. 꽃망울이 맺힌 상태로 우리 집에 와서 꽃잎을 활짝 벌려 고운 자태를 뽐내다가 이젠 이별을 준비하는 거잖아요. 서서히 이별을 준비하게 놔둬요. 떠날 때가 되면 알아서 떨어질 거예요. 어느 한순간도 소중하지 않은 때가 없어요. (253쪽)❞


도시락을 들고 죽은 아내의 무덤을 매일같이 찾는 80대 노인 ‘아서’, 편부슬하의 가정에서 외롭고 쓸쓸한 나날을 겨우 살아내는 십대 소녀 ‘매디’, 그리고 아서의 이웃이자 전직 선생님이고 참견장이인 80대 노파 ‘루실’. 세 사람이 이뤄내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진짜 가족의 이야기다.

주요 등장인물들만 봐도 어떤 이야기인지 짐작이 간다. 그리고 그 짐작은 아마 반 이상 맞을 것이다.
익숙한 이야기지만 편안하다. 비교적 안전하고 뻔하다 싶지만 심히 위로가 된다. 유려한 이야기는 마음을 어루만지고 인물들은 가까이 두고 싶을 정도로 사랑스럽다. 어른들을 위한 동화, 삶은 어때야 하고 가족은 저때야 하고. 이런 소설 흔하잖아? 맞는 말이다. 이 작품만의 두드러지는 특징도 거의 없다. 하지만 흔하다고 필요가 없는 건 아니다. 에두르고 뭉뚱그려 퉁치는 위안이지만 우리에겐 그것조차 절실할 때가 있다.

이야기 속에서 묘지라는 공간은 무척 매력적으로 묘사된다. 망자를 향한 애도, 삶에 대한 낙관과 희망, 신비, 심지어 로맨틱하기까지 하다. 묘지가 중요한 공간적 배경이니만큼 죽음과 삶에 대한 이야기가 작품 전체를 아우른다. 살 날보다 살아온 날들이 더 많은 두 노인이 죽음을 대변한다면 그 대척점에 있는 십대의 매디는 삶을 대변한다. 매디와 아서에게 공통점이 많고 서로를 쉽게 이해하고 공감하듯이, 삶과 죽음은 서로 충돌하지 않는다. 삶은 친숙하고 죽음은 낯설지만 그 둘은 같은 연장선 위에 공존한다.

궁극적으로 작가는 ‘함께하는 삶’을 권하는 것 같다. 세 사람은 가족이 아니지만 가족을 이룬다. 세 사람의 연대는 무척 끈끈하다. 서로를 염려하고 서로에게 도움을 준다. 우리를 진심으로 걱정해주고 아무런 대가없이 도우려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 이런 이야기를 그저 환상이라고, 꿈 깨라고 치부해야 할까. 먼 옛날엔 비행기나 자동차도 한낱 헛소리에 불과하지 않았나.
이 작품을 어떻게 보든 그건 각자의 마음이다.

다소 삐딱한 시선으로 보면, 단지 나이가 많을 뿐인 두 노인이 우연히 마주친 착한 십대 소녀를 돕는 이야기다. 두 노인은 나이만 들었을 뿐, 육체적으로 큰 문제가 없어 보인다. 게다가 부자다. 노인들에게 흔히 따라오는 경제적인 문제는 거의 없는 셈이다. 건강하고 돈까지 많은 노후란 얼마나 든든한가. 매디의 고민은 심각하긴 해도 어른들의 눈으로 보면 충분히 해결 가능하다. 실제로 아서가 죽은 후 매디는 부자가 된다. 지나치게 안전한 이야기다. 심각한 위기도 없다. 돈이 없어 매 끼니를 걱정하고 오늘내일 하며 겨우 숨만 쉬는 골골한 노인들이 인성 개차반에 싸이코패스 저질 십대 아이를 만난다면 과연 어떤 이야기가 나왔을까.

사족

‘아저씨’가 아니라 ‘아서씨(Arthur氏)’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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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밀한 이방인 - 드라마 <안나> 원작 소설
정한아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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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질서를 연기하는 한, 진짜 삶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다. 그렇다면 진짜 삶은 어디 있는가? 그것은 인생의 마지막에서야 밝혀질 대목이다. 모든 걸 다 잃어버린 후, 폐허가 된 길목에서.❞ (133쪽)

'나’는 오랜 기간 슬럼프에 빠져 허덕거리고 있는 작가. 어느 날 신문에서 어떤 소설을 발췌한 광고를 보게 된다. 의뢰자는 그 소설을 쓴 당사자를 찾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소설을 쓴 사람은 바로 ‘나’다. 그렇게 ‘나’는 광고 의뢰자인 ‘진’을 만나고 등단하기 전, 아주 오래 전에 바로 자신이 쓴 소설을 ‘이유미’란 사람이 도용했음을 알게 된다.

이유미라는 이름의 인물에 대한 이야기다. 그녀의 삶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거짓’이다. 그녀를 둘러싼, 그녀에 관한 거의 모든 게 허구다. 심지어 진에겐 성별까지 속였댄다. 이걸 속는 사람이 있다고? 싶지만 최근에 똑같은 일이 있었다는 게 생각난다. 세상 참 어처구니없구나 싶다.

이런 인물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이 재미있을까. 이 바닥에 세계적인 인물이 이미 있다. ‘퍼트리샤 하이스미스(Patricia Highsmith)’의 악당 ‘톰 리플리(Tom Ripley)’는 괘씸한 놈이지만 매력적인 사람이다. 비난을 하면서도 동정과 연민을 독자로서 아끼지 않을 수 있었다. 이 작품의 관건은 리플리에게 없는 무언가가 이유미에게는 있는가, 로 보인다.

그렇지만 이유미에겐 딱히 내세울 무언가가 없다. 가장 큰 건 동기가 없다는 거. 그저 ‘허영’이라는 한 단어로 모든 게 설명된다. 물론 가난과 폭력 같은 부수적인 동기가 있긴 하지만 그닥 쓸모가 없다. 그런 장애에 대응하려는 노력을 적극적으로 하지 않는 것을 보면 타고난 천성처럼 보인다. 위기에 몰린 사람의 절박함도 없고 포기했다가 다시 일어서려는 용기도 없다. 심지어 악당들을 상대로 한 대결 구도가 주는 쾌감도 없다. 뼛속 깊이 허영심으로 가득 차 있는데다 나약하고 게으르기까지 한 인물에 독자들이 마음을 열기가 쉬울까.

이야기가 재미가 없다. 진행은 (다소 막힘이 있어도) 비교적 물 흐르듯 하지만, 오로지 설명으로만 일관된 작품은, 전체적으로 소설을 읽는다기보다 요약된 시놉시스를 읽는 기분이다.

주인공이 잘 보이지 않는다. ‘나’라는 화자와 여러 증인들(인터뷰이)들의 필터를 거친 이유미는 그저 피상에 머무른다. 어느 누구 그 사람의 본질에 닿질 못한다. 저들이 겪고 들은 게 진짜 이유미일까. 이야기가 그저 ‘그랬다더라’ 수준이니 이건 작가 탓이다. 시점과 구조의 측면에서, ‘나’를 비롯한 여러 인물들이 이유미의 이야기를 전하는 것과 당사자가 직접 자신의 삶을 독자들에게 보여주는 데엔 차이가 있다. ‘나’라는 인물이 왜 필요했을까.

이유미의 이야기와 병행하는 화자의 이야기는 재미도 없고 의미도 없고 구조 안에서 두드러지는 기능도 없다. 한마디로 불필요해 보인다. 오히려 불쑥 끼어드는 모습이 방해만 되니 성가셔 보이기까지 한다.
피상과 이면, 허상과 본질, 진짜 삶과 연출된 삶, 이런 게 작가의 의도였다면 이유미에게 집중했어야 옳다. 작가는 왜 이유미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았을까. ‘나’와 이유미가 마지막엔 한 번쯤 대면하는 게 맞지 않나?

이유미의 목소리는 작품 내내 철저히 거세되어 있다. 무대 뒤에서 유령처럼 존재한다. 이야기에 드러난 이유미도 진짜 이유미가 아닌 것 같다. 말하지 못 한, 보이지 않는 다른 모습이 더 있을 것 같다. 작가가 이런 걸 노렸나?

전체적으로 설득이 안 된다. 설정이 그렇다는 게 아니라 이야기가 그렇다. 거칠고 투박하고 성급하다. 인물에 감정을 주기도 어렵고 공감도 어려우니 남는 건 활자뿐인데, 이조차 ‘와!’하는 구석이 없다. 예를 들어 인터뷰 녹취의 기록이라면 구어체여야 한다. 그래야 진짜 같다. 엔딩에서 밝혀지는 반전 아닌 반전은 바보 같다. ‘반전 아닌 반전’이란 표현을 쓴 까닭은 작가는 최후의 일격처럼 다뤘지만 그냥 제 살 깎는 것 이상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끝까지 읽고 처음으로 돌아가 30쪽까지만 읽어 보라. 얼마나 넌센스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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