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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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년 일흔세 번째 책.

 

★★☆

 

김연수의 작품집. 여덟 편의 작품이 실렸다.

오롯이 개인적인 감상이다.

 

작가의 전작을 섭렵한 건 아니지만, 내가 읽은 김연수의 작품집 중에서 가장 이질적이다. 뭔가 새로운 걸 시도했다는 생각이 든다.

책을 읽고 처음 든 느낌. ‘백가흠의 소설집, 같았다를 읽고 난 후와 비슷했다. 한국 문학계에서 대가대접은 조금 이를지라도 노련한 중견소리는 충분히 들을 수 있는 사람이 이렇게 무너지나, 하는 생각. 어딘지 아등바등해 보인다고나 할까, 처연해 보인다고나 할까. (내가 읽은) 전작들에 비하면 약간 쥐어짜는 듯, 안간힘을 쓰는 듯해서 안쓰럽다는 생각도 조금은 했던 것 같다. 작가의 개성이나 장점들이 이 작품집에선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작품들이 공허하다. 실체가 없다. 아이디어와 설정, 개념을 소개하고 끝나는 이야기들이 많다.

심하게 표현하면 겉만 번드르르하다. 뭔가 알록달록 그럴 듯한 포장을 벗기고 나면 모래 한 줌 들어 있는 선물 상자 같다.

 

관념적이고 명확하지 않은 문장들도 한몫한다. 좋게 말하면 시적이고 감각적이라 할 수 있겠으나, 당의(糖衣)를 입힌 듯, 현혹하지만 솔직하지 못한 문장들이 많이 거슬린다. 달큰하고 화사한 색깔의 솜사탕을 주먹에 쥐면 설탕 한 줌 남는 것에 비유할 수 있겠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문체 비슷하다는 생각은 오래전부터 해왔으나, 이 작품집에선 하루키 짝퉁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올드한 느낌이 강하다. 작가의 경력이나 연령을 고려하면 이상할 것도, 딱히 거슬릴 것도 아니지만 시대의 흐름이나 인식과 시각의 변화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다. 어떤 작품에서 작가는 여전히 과거 어딘가에 머물러 있는 것 같다.

젊은 척을 하라는 게 아니다. 현재의 물결에 잘 적응한 작가로서의 스탠스랄까. 그런 점이 아쉽다. 다른 작가와 비교하는 건, 이 작가에게나 저 작가에게나 예의가 아닌 건 알지만, 어쩔 수 없이 이청해21년 출간된 소설집, 어디까지 왔나와 비교를 하게 된다. 팔순이 다 된 작가가 쓴 작품들에선 이런 촌스러움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표제작 <이토록 평범한 미래>는 삶의 긍정성을 이야기한 작품으로 읽히는데 전반적으로 설득력은 떨어진다. 독자가 !’하는 지점이 없다. 현재와 미래, 과거라는 시제에 대한 어떤 개념, 아이디어는 흥미롭지만 작품은 이를 설명하느라 바쁘다. 그게 전부다.

미래를 기억한다는 표현은 이 작품의 핵심처럼 보이는데, 대체로 의미가 모호하다. ‘최진영역시 23년 이상문학상 대상을 받은 단편, <홈 스위트 홈>에서 똑같은 문장을 쓴 바 있다. 하지만 최진영의 그 문장은 이야기 안에서 시간은 발산한다는 표현과 어우러져 받아들이는 데 크게 무리가 없다. 이야기와 인물에 잘 녹아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연수의 이야기에선 이야기랄 것도 없고 인물들 역시 극적으로 과장된 캐리커처들(관심종자)뿐이라 독자들이 감응할 여지가 없다. 작가는 이런 빈틈을 메우기 위해 여기저기서 많은 것들을 끌어넣는데 그 통에 산만하고 정신이 없다. 집약적인 간결함이란 단편소설의 미학적 측면에서 봐도, 이 작품에 점수를 후하게 주지 않을 이유는 충분해 보인다.

 

<난주의 바다에서> 역시 산만하게 읽힌다. 여기저기서 데려온 것들로 크게 부풀려진 덩치에 비해 속은 텅 비어 있다. ‘정난주의 이야기가 작품 안에서 지나치게 강조되어 있는 탓에 막상 주요 인물인 통계학과 은정이의 시름이 크게 와닿지 않는다. 주객이 전도됐다고 할까. 추자도 관광 홍보 영상에 어울릴법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소설 작품으로는 무리다.

어중간한 곳에서 멈추지 않고 경험의 극대치를 찍자는, ‘끝까지 가본다는 메시지는 좋았다.

 

<진주의 결말>은 이 책에서 그나마 눈에 띈 작품이었다.

유진주라는 인물의 행위와 의도를 알려는 노력, 과정이 이야기의 핵심인데, 그 끝을 말끔히 보여주지 않는 미완의 결말이 매력적이었다. 범죄 수사 드라마나 사이코스릴러에 어울리는 소재도 난 잘 쓸 수 있어, 라고 작가가 말 하는 듯하다. 썩 잘 한 것 같다.

한 인간을 파악하는 것, 한 마디로 정의하는 것이 가능할까, 라는 질문은 언제나 유효하다. 동시에 누군가를 이해하는 것도 거의 불가능하지 않을까. 인간은 혼돈 그 자체. 인간에게 진심이란 없다는 전제 아래, 오로지 임시방편의 핑계와 구실만 있고 그건 이 아니라는 사유는 흥미로웠다.

 

<바얀자그에서 그가 본 것>은 몽골에 대한 환상이 있는 나로서는 대단히 흥미롭게 읽은 작품이었다. 특히 수려한 자연 풍광의 묘사나, ‘빅토르 위고를 인용하면서 밤의 신비로움을 표현한 부분은 나를 사로잡았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연애 이야기를 이다지도 진부하고 장황하고 재미없게 할 수도 있구나, 하고 놀랐다. 이해할 수 없는, 도무지 무슨 감정인지 헤아리기 어려운 인물을 보면서, 작가가 작품에 과한 치장을 하고 있다는 생각, 약간 허세랄까, 현학적이라고 할 수도 있겠는데, 독자의 공감, 독자와의 교감과는 크게 상관없는 것에 더 힘을 쓰고 있지는 않았는지 우려가 들었다.

 

<엄마 없는 아이들>에서는 이혼과 외부모 가정, 남겨진 아이들에 대한 작가의 고루한 상상력, 때 늦은 현실 감각 등이 보이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이 작품 역시 독자의 감정이 얼마나 움직이느냐가 중요한 작품처럼 읽히는데, 공감이 쉽지 않았다.

가장 단 적인 예로, ‘명준혜진을 같은 수위에 놓고 마치 땡처리 하듯 취급하는 작가의 태도가 거슬렸다. 엄마 없는 가정에서 크긴 했어도 명준과 혜진이 품은 내면의 결은 완전히 다르다. 명준은 엄마에 대한 그리움이 큰 사람인 반면, 혜진이 엄마에게 지닌 감정은 분노가 대부분일 것이다. 명준은 엄마 없이 자란 자신의 숙명에 순응했을 테고, 혜진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고 반항하고 저주처럼 여겼을 것이다. 두 사람이 어찌 같을 수 있을까. 독자는 누구에게 감정을 줘야 하는가. 두 인물의 내면이 합쳐졌을 때 시너지가 생겨 이야기가 의도한 효과가 날 텐데, 서울과 부산을 한데 엮으려니 무리가 생긴다.

 

지나치게 낭만적인 설정의 <다만 한 사람을 기억하네>는 타인의 기억 속의 나, 기억의 주체가 아닌 대상으로서의 나에 대한 이야기로 읽었다. 잊히는 건 정말 두려운 일일까. 영원히 기억되는 것이 좋기만 한 일일까. 잊히는 것과 기억되는 것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위로에 대한 화두도 엿보였는데, 진정한 위로란 의외로 평범하고 사소한 것에서 오는 게 아닐까, 보잘 것 없는 삶이라도 그것에 만족하고 감사하지 않는다면 위로란 게 과연 의미가 있을까, 무엇보다 제 상처를 어루만지고 살필 수 있는 건 바로 자신이라는 생각. 빤하지만 행동이 어려운 그런 생각들을 했다.

반면, 결국 희진의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서 메일이란 수단과 다른 인물을 동원한, 이유 없이 복잡한 얼개는 흠처럼 보인다.

 

<사랑의 단상 2014>는 사랑에 실패한, 이별을 겪고 상처받은 짐승처럼 웅크리고 있는 남자가 아픔을 극복하고 자신을 다시 세우는 회복의 과정을 담은 이야기다. 이국적인 여행지와 낯선 소재들이 제법 나오는데, 이런 멋부림이 감상적이고 낭만적인 이 작품에서는 썩 어울린다. ‘몸은 무죄, (늦된) 마음은 유죄라는 문장 역시 매우 트렌디하게 들려 이 작품의 정서에 잘 스민다. 자칫 바람 맞은 남자가 징징거리는 공허한 이야기로 읽혔을 법도 하지만, 작가는 형식적인 면에서 기교(과거와 현재의 경계가 모호한 대화 구성과 영화의 오버랩(overlap)같은 장면, )를 부려 위험을 극복한다.

마지막에 세월호 참사이야기는 정말 뜬금없다. 본 이야기에 잘 섞이지 않을뿐더러 이런 식으로 그 사건을 소비해도 되는지, 작가가 무슨 생각이었을지 궁금하다.

 

영화 인터스텔라를 연상케 하는 <다시, 2100년의 바르바라에게>의 중요한 화두는 시간이다. 그런 이유로 책 머리에 실린 표제작, <이토록 평범한 미래>의 변주처럼 읽히는데, (작품이 어땠는지와는 별도로) ‘시간이라는 소재를 작가 자신의 말로 좀 더 잘 풀어낸 것 같다.

우리는 광활한 우주, 영원한 시간 속에서 라는 존재를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 과거는 현재의 나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그리고 현재의 나는 미래에 어떤 영향을 주게 될까. 이런 사유가 가능했다.

과거의 영향을 받았으므로 나는 과거에도 존재했고, 현재의 나는 미래에 영향을 줄 것이므로 나는 미래에도 존재할 것이다. 나의 육체는 머지않아 사라질 테지만 실재하지 않음의 상태로 나는 존재할 것이다. 과거에도 나는 존재했다. 시간의 영속성(eternity) 위에서 우리는 어쩌면 영원하다. 과거와 현재, 미래는 분명한 경계로 서로 단절된 것이 아니고 겹치고 영향을 주고받는다. 시간의 연속성(continuity) 위에서도 우리는 영원하다.

(작품을 읽으면서 들었던 생각과는 달리 글로 적으려니 뭔가 횡설수설하게 된다)

존재와 시간, 철학과 과학, 심지어 영성적인 색채까지 어우러져, 작품을 읽으면서 드는 생각이 풍성했는데, 이야기 자체보다 이런 상상들이 더 재미있었다. 반면, 시간이 중첩되고 서로 원인을 제공하고 결과를 야기한다는 개념이 언제나 세계의 확장, 존재의 확장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돌고 도는 뫼비우스의 띠나, 꼬리를 물고 영원히 도는 우로보로스의 뱀이나,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질문은 인간의 내면, 인식을 고립시키는 설정이 되기도 한다. SF-호러 장르나, 다크 판타지 장르의 다수의 영화에서 종종 보이는 서사 장치이기도 하다.

소설=이야기라는 엄격한 기준 아래라면, 이 작품 역시 앞의 몇 작품과 마찬가지로, 극화, 이야기화, 소설화에 실패한, 소재와 개념에서 주저앉은,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펼쳐 보이는 대신 기존의 무언가를 끌어다 지면을 때운 것처럼 보인다. 하나마나 한 말이지만, 이는 독자에 따라 다를 것이다.

 

- - - - - -

 

문학, 특히 소설을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는 독자마다 다르다. 그건 취향이나 선호도의 문제 이상이다. 보다 먼저, 소설이 무엇인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독자 스스로의 고민이 먼저 이뤄져야 할 것이다.

독자는 자신의 결정에 따른다. 자신의 기준으로 소설을 읽을 권리가 있다. 그건 또한 독자로서의 의무이기도 하다. 작가의 손을 떠난 한 권의 책은 멀리 나아가 세상의 파도에 휩쓸린다. 세파에 휩쓸려 만신창이가 되는 것도, 고이 모셔져 성물(聖物)로 숭배받는 것도 모두 작품의 운명이다. 그리고 그건 온전히 독자에게 달려 있다. 응당 그래야 한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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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덫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유명우 옮김 / 해문출판사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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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년 일흔두 번째 책.

애거서 크리스티 다시 읽기 스물여섯 번째 책.

 

★★★★

 

작가의 대표작 중 하나인 중편 쥐덫(the Mousetrap)과 여덟 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작가는 일찌감치 자신의 소설 작품을 희곡으로 각색하여 무대에 올려왔는데, 이 작품이야말로 희곡 작가로서 작가의 인기와 성공의 정점을 찍은 계기가 됐다고 할 수 있다. 원래 이 작품은 영국 왕실, 메어리 공주의 생일 선물을 위한 라디오드라마 극본(원래 제목은 Three Blind Mice, 47)이었다. 이후에 소설로 개작된 것이 이 책에 실린 것이고 나중에(52) 희곡으로 각색, 무대에 올라 지금에 이른다. 연극 쥐덫은 지금도 공연되고 있는데, 세계에서 가장 롱런한 연극 작품으로 기네스 북에 이름을 올린다.

 

소설로서 쥐덫은 클로즈드 서클(closes circle) 미스터리의 고전적인 작품이다. 폭설로 고립된 산장이라는 매력적인 무대와 그곳에 갇혀 오도 가도 못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살인이 벌어지고, 여기에 아동 학대라는 사회적 이슈가 범죄 동기로 드러난다. 전형적인 후던잇(whodunit) 작품으로 구성이 지나치게 도식적이지만 이야기가 주는 긴장감과 수수께끼는 언제 읽어도 생생하다.

작가는 범인은 누구일까, 하는 문제에는 물론이고 과연 다음에 누가 죽을까, 에도 힘을 쏟는다. 이 작품의 피살자들은 모두 과거의 어떤 사건에서는 가해자였다. 이야기가 진행하면서 범죄의 동기가 복수라는 게 서서히 드러나는데,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인 범인을 향한 양가감정이 감상의 핵심이다. 살인이 성공하면 복수가 이뤄졌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동시에 손에 피를 묻힐 수밖에 없는 범인에게 독자는 안타까움을 느낀다.

45년 영국, 위탁 가정에서 실제 발생한 데니스 오닐(Dennis O’neill) 학대 치사 사건이 모티프가 됐다고 한다. 작가가 처음의 라디오드라마 극본을 단 일 주일만에 써냈다는, 혀를 내두를만한 일화도 전해진다.

 

그 외에 실린 단편 작품들은 작가가 과거에 잡지에 발표한 단편들을 추려 모은 것들인데, 출연진(?)이 화려하다. ‘포와로’, ‘미스 마플’, 그리고 귀하디귀한 할리 퀸까지. 작가의 팬이라면 화려한 상차림 앞에서 군침만 흘려도 분명 행복할 터.

 

죽은 삼촌이 남긴 유산을 찾으려는 커플의 이야기인 <이상한 사건>, 질투와 열등감에서 비롯된 살인을 해결하는 <줄자 살인사건>, ‘완벽함뒤에 도사린 사악함을 경고하는 <모범 하녀>, 화려하고 비밀스러운 연막 뒤에 가려진 진실을 파헤치는 <관리인 노파>에선 미스 마플이 활약한다.

그리고 이기심에 의한 치정 살인을 고발하는 <4층 아파트>, 유괴된 아이를 구하는 이야기인 <조니 웨이벌리의 모험>, 습관과 일관성에 어긋난 행동을 단서로 범죄를 추적하는 <24마리의 검은 티티새>에서는 포와로가, 살인 사건을 두고 서로 자신이 범인이라고 주장하는 커플의 자백을 앞에 두고 진위를 밝히는 <연애 탐정>엔 할리 퀸이 등장하여 장기를 유감없이 발휘한다.

 

이 작품집이 특별한 또 다른 이유는 작가의 다른 장편들과 비슷한 단편들이 무려 두 편이나 된다는 사실이다. <관리인 노파(the Case of the Caretaker, 42)>끝없는 밤(Endless Night, 67)과 비슷하고 <연애 탐정(the Love Detective, 26)>은 미스 마플의 데뷔 장편인 목사관 살인사건(the Murder at the Vicarage, 30)을 연상케 한다. 각각의 작품들을 짝을 지어 두고 비교하면 단편을 장편으로 발전시킨(다시 쓴) 경우라고 여겨지는데, 작가가 플롯을 재활용하는 것으로 유명했던 걸 염두에 둔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사족

 

태어나 처음 관람한 연극이 바로 쥐덫. 아직 기억에 남는다.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겨울이었고 정동의 마당 세실극장을 향해 가는동안 입에서 피어오르던 입김, 발 아래 사박사박 눈 밟히는 소리가 지금도 눈과 귀에 선하다. 생전 처음의 연극. 그것도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이야기라니. 그 흥분, 그 설렘. 어찌 행복하지 않을 수가.

내가 애거서 크리스티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았던 누나가 데리고 갔었는데, 정작 누나는 그걸 기억 못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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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의 여름
루시 스티즈 지음, 노진선 옮김 / 다산책방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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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년 일흔한 번째 책.


★★★

 

내셔널갤러리. ‘성찬이란 제목의 그림. 13인분의 음식이 차려진 테이블을 그린 대작이다. 그림의 어두운 한 구석에 에두아르 타르튀프라는 화가의 사인이 보인다. 그 앞에 초로의 여자가 서 있다. 그녀는 그 그림이 36년 전, 불에 전소됐음을 기억한다. 그녀 자신이 그 불을 질렀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 그녀가 마주한 그림은 바로 그 그림이다. 어떻게 된 일일까.

 

짧은 프롤로그엔 이야기 전체의 가장 중요한 비밀이 숨겨진 동시에 가장 핵심적인 스포일러를 흘리기도 한다. 과거에 불에 타 사라진 그림이 지금 눈앞에 있다면, 그건 뭐다?

 

시간을 거슬러 1920. 인물들이 소개되고 그들의 이야기가 시작되면, 어떤 사정인지 대강 짐작이 된다. 하지만 그 사정이란 게 절대 수월하지 않다.

 

빛의 거장으로 불리는 타르튀프(타타)는 은둔한 화가다. 그의 작업과 생활 전반을 관리하며 돕는 사람은 그의 조카인 실베트(에티)’. 두 사람의 조용하고 틀에 짜인 일상은 타르튀프에 대한 기사를 쓰려는 기자 조지프의 출현으로 조금씩 흔들린다.

사실, 이런 표현은 조지프에게는 조금 억울한 일이다. 그의 등장으로 타타와 에티 사이의 갈등이 좀 더 가시화된 건 사실이지만, 그 조짐은 벌써부터 존재해 왔다. 촌구석에 틀어박혀 집안일이나 잔심부름에 얽매인 삶이 젊은 에티에게 만족스러웠을까. 타타의 은둔은 그냥 자연스러운 것이었을까. 행동은 필요와 욕구에 의한 결과라고 볼 때, 타타의 은둔엔 어떤 동기가 작용했을까.

 

하나에서 열까지 전부 독()인 사람도, ()인 사람도 없다. 약을 주려고 했는데 독으로 가는 경우도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타타와 에티는 서로에게 악당이고 은인이다. 두 사람을 삼촌과 조카가 아닌, 엄마와 딸, 아빠와 아들, 그 외에 양가적인 감정이 사이에 진득하니 흐르고 있는 어떤 관계로 상상해도 그림이 된다. 각자의 욕망은 얽히고설키다가 결국 비틀리고 날카로워져 서로를 찌르고 만다. 작가는 이들의 갈등을 사회 전반(특히 예술계)에 존재하는 다양한 형태의 성차별로 발전시키다가 다시 개인의 영역으로 데리고 와 폭발시킨다.

 

개인의 영역으로 데리고 왔다는 표현엔 다소 주저앉은 감상을 포함한다. 에티의 결말 때문이다. 그녀는 사회적으로 비난을 면했다.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는다. 이기적이고 폭력적인 타타가 제 몸에 흐르는 피 같은작품의 소실로 벌을 받았다면, 에티에겐 어떤 처벌이 가해졌나?

에티의 기만적인 (동시에 어리석고 아무 의미도 없는) 행동에 어떤 설명이나 핑계가 있을 수 있을까. 심리학 도구들을 동원한다면 가능할지도. 하지만 액면 그대로 본다면 에티의 행동은 명백한 범죄다.

캐릭터 성의 시너지 효과로 에티의 행위에 동정과 연민과 더불어 면죄부를 줄 수 있다고 쳐도, 결말에서 타타를 취급하는 작가의 방식엔 변명이 어렵다. 타타 역시 희생자고 피해자다. 어린 조카딸과 함께 촌구석에 처박힌 이유도 에티와 전혀 무관하지 않았다. 하물며 화마에 희생된 일생의 작업물들을 생각한다면. 예술가, 창작자의 관점에서 볼 때, 이 작품의 가장 참혹한 피해자는 바로 타타가 아닐까. 그런데 결말에서 타타를 작가가 어떻게 대하는지 보라. 그 사람이 아무리 악인이었어도 이야기 안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면 그에 합당하고 적절한 퇴장을 마련해 줘야 한다. 그게 바로 캐릭터에 대한 애정이고 마땅한 예의다. 하지만 작가는 그냥 타타를 슬그머니 무대 밖으로 밀어낸다.

타타에 대한 작가의 푸대접은, 에티와 조지프의 시점이 교차되어 진행되는 작품의 구성에서도 보인다. 사실 조지프는 개인의 서사도 있고 중요한 인물인 척하곤 있지만, 불쏘시개 역할을 빼고는 거의 하는 일이 없다. 그보다 내면에 얼음과 불이 공존하는 타타가, 이야기에 헌신하고 기여하는 정도만 보더라도 훨씬 중요한 인물이다. 이야기의 균형은 둘째치더라도, 에티와 조지프를 통해서만 전달되는 타타의 모습은 독자로서 어딘지 부족해 보인다. 그 인물에게 뭔가, 드러나지 않은, 독자들만 볼 수 있는 내밀한 뭔가가 분명 더 있을 것이다.

 

에티는 자신의 분노를 엉뚱한 방법으로 푸는 대신 좀 더 용기를 낼 필요가 있었다. 이 말이 피해자를 향한 이차 가해로 들릴까? 에티와 타타는 서로에게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다. 자신의 꼬리를 물고 영원히 맴도는 우로보로스처럼 두 사람의 갈등과 애증은 영원처럼 보인다. 절대 끊어지지 않을 관계를 청산하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강한 결단이 필요하다. 행동에 나선다면 누구에게 수월했을까. 그림이 인생의 전부이고 은둔 생활에 비교적 만족하는 타타보다는 폐쇄적이고 고립된 생활에 환멸을 느끼는 에티에게 좀 더 많은 동기와 기회가 있지 않았을까. 그녀 스스로도 절실히 원하던 바이기도 하고.

 

폴 세잔느’, ‘페기 구겐하임등의 실존 인물들이 심심찮게 나온다. 특히 폴 세잔느는 복잡하고 더러운 사생활로 파렴치한 악당 역할을 부여받는데, 알고 보니 작가의 상상이랜다. 실존 인물에게 작가의 상상으로 이런 터무니없는 오명을 씌워도 괜찮은가?

덕분에 작품은 역사 소설의 냄새를 살짝 풍긴다. 본격적인 시도는 아니고 약간 그런 척만 한다. 출판사는 로맨스+미스터리 장르로 선전하고 있던데, 로맨스로서는 너무 빤하고 미스터리라니. 정말 어처구니가 없다. 내가 읽기엔 처절한 심리 소설, 싸이코드라마에 더 가깝다. 타타와 에티의 소설 속 심리를 다룬 에세이나 소설 비평이 나온다면 기꺼이 읽고 싶다.

 

사족.

 

온라인 서점의 이 책 페이지를 보면, 책 소개보다도 작가 소개가 더 눈에 들어오는데, , 신인 작가라 그럴 수도 있지만, 책에 대해 얼마나 자신이 없으면(혹은 할 말이 많지 않으면) 작가 홍보로 때우나, 그런 생각 잠깐. 그렇다고 이 책이 아주 형편없었다는 말은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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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읽고 말하다
아사쿠라 가스미 지음, 전화윤 옮김 / 현암사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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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년 일흔 번째 책.

 

★★★

 

살아 있잖아, 살아 있잖아요. (336)

 

카페 시트론에서 한 달에 한 번씩 독서 모임이 열린다. 벌써 이십 년 가까이 됐다. 이름 하여, ‘언덕 중간의 책 읽는 모임’. 참가자는 78세에서 92세까지의 노인 여섯 명. 여기에 고모를 대신해 운영을 맡게 된, 카페의 매니저 얏쿤이 최근 합류한다. 얏쿤은 등단한 소설가이지만, 어떤 이유로 쓰기를 멈췄다.

 

아기자기한 분위기와 낭만적인 배경, ‘이라는 소재와 읽기라는 활동을 주재료로 삶과 죽음, 인간에 대한 소소한 이야기를 풀어내며 사랑과 관용, 연대와 위로를 전달한다.

 

독서 모임 참여자 개개인의 스토리를 상세히 드러내기보다 겉보기엔 비슷해 보이는 노인들을 한데 모아놓고, 무리 안에서 한 개인을 차별화시키는 요소들, 개성과 인격, 사람됨, (혹은 그녀)다움을 결정하는 것이 무엇인지 집중한다. 그런 탓에 기대했던 드라마틱한 작품은 아니었지만 대신 삶의 과정에서 발견되는 연속성, 외형은 변할지라도 죽을 때까지 간직되는 개인의 본질과 성격의 핵심, 개별성을 지닌 각자로서의 개인이 타인과 우연히 만나는 순간, 그 교차점에서 불꽃이 튀듯 보이는 유사성 등이 책읽기라는 공통된 행위를 중심으로 보이고 탐구된다.

 

젊은 소설가가 슬럼프에 빠져 쓰기를 중단한 이유도 이야기의 작은 핵을 이룬다. 얏쿤의 그런 사정은 작가는 과연 어떤 사람이고 무엇을 하며 어떤 책임을 지는가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쓰는 사람으로서 작가는 그저 받아 적는 사람, 옮겨 적는 사람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 글감과 소재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 타인의 삶이 작가에게 영향을 미친다면, 그렇게 쓰인 글을 작가만의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예상과는 많이 달랐던 작품이었다. 좀 더 차분하고 건조하며(독자의 태도에 따라 다소 지루할 수 있는), 읽는 내내 경건한 마음까지 들었다. 삶에 대한 자세랄까. “살아 있잖아요.(336)”라는 쇼코의 외침은 이 세상을 사는 모든이들을 위한 응원처럼 들린다. 이건 살아 있음에 대한 찬미로서 삶에 대한 집착만은 아니다. 살아 있는 것들에 대한 연민과 애정, 지나온 시간에 대한 경의와 동경, 그리움이랄까. 살아 있다는 것. 호흡하고 감각하고 유기생명체로 존재하는 것, 우리에게 기대할 수 있는 미래와 추억할 수 있는 과거가 있다는 게 얼마나 기쁘고 다행한 일인지.

 

작품 속, 독서 모임에서 텍스트로 삼는 <아무도 모르는 작은 나라>라는 작품(실제로 존재하는 판타지 동화이고 우리나라에도 번역된 적이 있다)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져서, 그 부분에 대한 대화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공감할 수 없었다는 점은 아쉽다. 이 동화에 대해 잘 알았더라면, 이 작품에 대한 감상도 좀 더 풍성해지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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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그리드 누네즈 지음, 공경희 옮김 / 열린책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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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년 예순아홉 번째 책.

 

★★★☆

 

문학의 악덕에는 치료제가 없는 것 같다. 감염된 이들은 거기서 더 이상 쾌락을 얻지 못한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버릇을 고치지 않는다. - W. G. 제발트 (70)

 

글도 쓰고 문학 강의도 하는 는 최근에 선배이면서 스승이기도, 멘토이면서 연인이기도 했던 남자의 자살을 겪고 충격에 빠졌다. 와중에 그의 세 번째 부인으로부터 그가 키우던 개, ‘아폴로를 맡게 된다. 늙은 개는 화자로 하여금 끊임없이 의 기억을 곱씹게 만든다. 고인이 된 연인의 개를 보살피는 이야기를 중심으로 상실과 애도, 위로, 사랑과 이별, 삶과 죽음, 젊음과 노화, 죽어감, 예술과 문학에 대한 사유가 다양하게 펼쳐진다.

애초에 상상했던, 인간과 개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었는데 난 오히려 이게 더 좋았다. 제목의 친구는 화자와 아폴로의 관계이기도 하지만 화자와 고인의 관계이기도 한데, 화자의 애도 방식은 약간 특이한 구석이 있다.

 

지난주에 읽었던 작가의 다른 작품, 그해 봄의 불확실성과 공통점이 많다. 소설과 에세이의 모호한 경계, 작가인 화자, 1인칭 시점, 동물(앵무새가 나오더니 여기는 그레이트 데인 종의 초대형견)을 중심으로 한 기둥 이야기, 자유로이 흘러가는 의식, 다양한 이슈의 사유, 특히 문학과 글쓰기에 대한 작가의 생각.

 

가장 최근작(2023년 출판)그해 봄의 불확실성을 먼저 읽은 나로서는 이 책에 대한 (처음의 호기심과는 달리) 만족도는 그리 크지 않다. 비슷한 형식에 거의 흡사한 구성은 식상하기까지 하다. 그해 봄의 불확실성에서 들렸던 작가의 목소리가 조곤조곤 읊조리는것에 가까웠다면, 이 책에서의 작가는 거의 주절거리는것으로 들린다. 이 책을 탓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활동 기간 동안 내내 자기 복제를 일삼는 예술가(창작자)가 적지 않으니, 작가에게도 그럴 권리가 있다면, 같은 작가의 책을 거의 연달아 두 권이나 읽은 나에게 문제가 있지 않을까. 아마 이 책을 먼저 읽었더라면 감상은 또 달랐을 터.

 

이 책만 가지고 이야기 하자면, 이 작품은 문제가 없다. 작품 안에서 작가는 더 깊이 있는 사유를 펼친다. 그해 봄의 불확실성에서 작가의 생각이 여기서 저기로 널을 뛴다는 점이 없지 않았다면, 이 작품에서 작가는 소수의 이슈에 집중한다. 바로 삶(죽음)과 글쓰기.

 

작품의 포문을 여는 사건이 자살이므로 작품 전반에 드리워진 죽음의 그림자와 그 대척점에 놓인 삶에 대한 사유는 어쩔 수 없다. 화자는 그 슬픔에 내내 짓눌린다.

 

일정한 나이가 된 사람에게는 그것(자살)이 합리적인 결정일 수 있다고. 완벽한 선택이, 심지어 해결책이 될 수도 있다고, 젊은 사람이 자살하면 실수일 수밖에 없지만 그 경우와는 다르다고. (12)

 

화자는 고인의 선택과 결정을 존중하면서도 슬픔과 충격에서 헤어 나오고 있지 못하는 자신을 이렇게 항변하기도 한다.

 

자살은 이기심과 자기 연민으로 꽉 찬 괴물이죠. 고귀한 선물인 생명을 그렇게 배은망덕하게 내치다니. 또 자살자들은 자신을 증오했겠지만, 자살이 망친 것은 자신만이 아니라 남은 친지들이었죠. (180)

 

자살을 옹호하는 건 아니지만, 자살자들의 상황과 심리는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덮어놓고 무조건 자살은 자신을 향한 범죄라는 프레임을 씌우는 사회에서 자살(죽음)에 대한 자유롭고 솔직한 논의는 불가능해 보인다.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솔직하고 열린 마음이 최우선이 되어야 한다.

 

문학과 글쓰기에 대한 작가의 사유는 작가들은 물론이고 독자라는 존재들에게 더 할 나위가 없는 좋은 충고처럼 들린다. 작가와 독자의 관계(난 작가에게서 작품을 구원하는 것은 독자 리뷰, 140), 오해와 오독(내가 사람들을 저녁 식사에 초대해 근사한 쇠고기 스튜를 대접하자 다들 맛있게 먹고 이렇게 말합니다. , 맛있네요. 먹어 본 중 최고의 양고기 스튜인 걸요! 그게 어때서요? 손님들이 잘 먹은 게 핵심 아닌가요?, 140), 작가의 특권과 저술(글쓰기)라는 소명(저술이 엘리트 위주의 자기중심적 행위라는 점은 부인 못 해요. 관심을 받고 출세하려고 글을 쓰니까요. 세상을 더 정의로운 곳으로 만들려고 글을 쓰는 게 아니고요. 물론 거기에는 약간의 수치심이 수반되겠지만, 223), 등의 질문을 통해 오늘날 한 권의 책, 출판시장, 작가(저술가)의 현실을 되짚고 비판한다.

 

그해 봄의 불확실성에서와 마찬가지로 작가는 다큐멘터리 픽션이란 이름으로, 허구가 아닌 픽션(아이러니하게 들린다)의 필요성을 강조하는데, 거듭 듣고 있으니, 내겐 마치 작가의 변명처럼 들리기도 한다.

 

평범한 개인의 삶에서 추려 낸 이야기들이 필요해요. 지어내지 않은 이야기. 필자의 관점이 개입되지 않은 이야기. (222)

 

같은 맥락은 아니지만, ‘실제로 고초 속에서 사는 이들이 제대로 말하는 게 목적이고, 작가의 역할은 그들이 말할 수 있게 하는 데 국한된다(222)’는 말은 현재의 퀴어 문학이나 페미니즘 문학이 귀 기울여야 할 충고 같다.

 

작가의 작품 중 가장 대중적으로 성공한, 그야말로 대표작이고 출세작(2018년 전미도서상 수상작)이다. 번역도 무려, 영문학 번역계의 대모라고 할 수 있는 공경희’. 작가를 처음 접한다면 (내가 읽은 두 권 중에) 이 책을 가장 먼저 읽기를 권하고 싶다.

 

책꽂이에 작가의 다른 책(‘줄리앤 무어주연으로 영화화된 책)이 보인다. 한동안 잊고 있다가 나중에 읽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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