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의 실종에 관한 48 단서들
조이스 캐롤 오츠 지음, 박현주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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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사랑하고 존경하는, 번역서를 모두 찾아 읽고 신간 소식이 들리면 서점에 나오길 목 빠지게 기다렸다가 냉큼 읽는 국외작가 탑 텐을 뽑을 때, 그때그때 달라지긴 하지만 변치 않고 리스트 안에 드는 작가가 있다. ‘이디스 워튼(Edith Wharton)’, ‘애거서 크리스티(Agatha Christie)’, ‘대프니 뒤 모리에(Daphne du Maurier)’, ‘퍼트리샤 하이스미스(Patricia Highsmith)’,‘온다 리쿠(恩田 陸)’, 그리고 ‘조이스 캐롤 오츠(Joyce Carol Oates)’.

이 작가가 1938년 6월 생이니, 올해(2024년) 꽉 채워 여든여섯이다. 그리고 아직 현역이다. 이 작품이 미국에서 출판된 게 재작년(2022년)이다. 이 작품은 최근작도 아니다. 올해, ≪Butcher≫란 제목의 장편을 출간했다. (우리나라 출판사들은 부지런히 일 하길)
내로라하는 어마무시한 다작가다. 필명이 두 개(Rosamond Smith, Lauren Kelly)나 되고 그 이름들로 발표한 작품들도 상당하다. 게다가 ‘올-라운드-플레이어’다. 소설, 시, 희곡, 넌 픽션, 전기 등 형식과 장르에 구애받지 않는다. 하루 일고여덟 시간 이상 글을 쓴다고 하니, 다작하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다.

이 사람은 보통 호러, 서스펜스, 스릴러 작가로 분류되지만 작가 입장에선 약간 억울한 평가다. 동화, 영 어덜트 소설, 로맨스 같은 작품들도 상당한데, 장르 소설 작가로 국한된 독자들의 인식은 작가의 능력이 호러, 서스펜스, 스릴러 안에서 가장 잘 발휘되기 때문인 것 같다. 우리나라 출판사의 책임도 아주 약간 있는 게, 작가의 그런 작품들만 번역해서 내놓는다. 작가의 유명하고 성공한 작품들이 주로 그 쪽인 이유일 테지만.

그렇다고 작가가 마냥 범죄나 폭력에 집중하는 건 아니다. 범죄가 나와도 암시를 줄 뿐, 폭력 장면을 대놓고 묘사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작가가 가장 큰 관심을 두는 건 인간의 악의(malice)와 범죄 심리이다. 범죄 행동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 자체보다 그것에 이르는 과정과 그 저변에 작동하고 있는 심리, 동기를 주로 다룬다. 특정 사건이나 장면, 문장 같은 단편적인 요소들보다 이야기를 진행시키며 서스펜스를 서서히 쌓아간다. 한 순간의 임팩트보다 작품 전체가 주는 효과를 노리는데, 그런 속도감에 익숙해진 독자들이 작가의 팬이 된다.
작가가 주는 스릴은 다른 의미로 ‘쫄깃하다’. 독자들을 겁주지 않고 마음의 어둠 속으로 데리고 들어간다. 저 아래 숨겨진 악의를 스스로 들여다보게 만든다. 결국 독자는 그것을 타자화하지 않고 자신과 동일화한다. (그래. 나도 저게 어떤 건지 알 것 같아)

작가 이야기를 (내가 아는 한에서) 줄줄이 읊는 이유는, 정작 이 작품에 대해서는 할 말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작가의 (비교적) 신작이라 반갑게 읽었고 꽤 만족했으나 께름칙한 부분이 분명 있긴 한데 어떤 점이 좋고 어떤 점은 그렇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 약간 모호하다.

이야기는 중년의 ‘조진 풀머’가 과거에 사라진 언니, 지역의 유망한 예술가였고 집안의 상속녀였던 ‘마거리트’와 그 사건을 회상하는 내용이다. 플롯의 중심엔 언니의 실종이란 사건이 있고 지면의 대부분은 화자의 생각과 의견, 이야기로 채워진다.
언니의 실종 사건 자체는 일종의 도화선이다. 작가는 언니의 실종에 대한 비밀을 풀기보다 화자 자신이 사건을 바라보는 방식, 그것에 받은 영향, 당시 주변사람들과 그들에게 일어난 일 등에 집중한다.
미스터리라고 하기엔 쓰다 만 것 같고 심리 스릴러 정도로 퉁치려니 뭔가 부족하다. 독자의 눈을 사로잡는 건 화자 자신인데 이 사람에 대해서도 투명하게 드러나는 건 거의 없다. 언니에게 열등감이 있고 질투심에 사로잡혀 있었으며 한편으론 언니를 걱정하고 그리워한다는 것. 그러나 그 감정이 사랑은 아니라는 것. 딱 그 정도. 조진은 화자라는 역할에 충실하지 않다. 그녀는 뭔가를 숨기고 부정하고 다른 기억(진술)로 덮으려 한다. 당시 사건 주변으로 많은 사람들이 등장하고 퇴장하는데, 그 중엔 의문스러운 퇴장도 있었다. 자연스러워 보이는가. 아니라면 왜? 어떻게?
베일을 벗기다 만 작품의 모양새는 작가가 의도한 것이다. 독자는 모든 것을 스스로 결말을 지어야 한다.

정확한 그림을 구하는 독자들은 속이 터질 것이다. 하지만 반쯤 열린 문을 기웃거리며 상상하고 유추하길 좋아하는 독자들에겐 매력적인 작품이겠고.
나는 어느 쪽일까. 반반이다. 마거리트의 실종에 대해서는 오리무중의 상태로 남겨져 있는 게 좋다. 사건 자체가 미해결이고 우리가 과거를 바라보는 방식과도 많이 다르지 않으니까. 하지만 조진이라는 캐릭터에 대한 불투명함은 신발 안의 돌 같다. 어차피 일인칭 시점이고 회고와 고백이 주가 되는 작품에서 화자 스스로가 반쯤 숨어 있는 모습은 어딘지 자연스럽지 못하다. 도대체 왜?

그럼에도 잘 읽힌다. 푹 빠져들어 읽었다. 힌트와 암시가 무의식을 자극해 독자는 끝까지 각성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이런 긴장이 좋았다.
모호함이 여운으로 남는데 그것이 화자에 대한 연민으로 이어진다. 조진으로 말하자면 그게 가능한 인물이다. 독자들의 동정과 연민을 자극하는 방식이 약간 독특한데, 언니의 성공과 화려함에 가려진, 가족 내의 그녀의 하찮은 존재감 때문만은 아니다. 완전히 열리지 않은 조진의 마음, 그 문 뒤에 세월이 흐르고 나이를 먹은 후에도 여전히 드리워진 긴 그림자를 상상할 수 있다. 마치 혼자만 보는 일기에조차 솔직하게 제 모습을 드러내지 못 하는 소심함이랄까, 비겁함, 나약함이 느껴진다. 모든 사람이 용감하지는 않다. 읽은 후 이틀 정도는 조진이, 이 책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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