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기적
정현우 지음 / 도서출판 아시아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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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눈을 감을 때마다 다시 태어나는 그녀를 본다.



○ 가지

너는 가지, 사랑했던 가짓빛 살결을 만지며

가슴 한국석이 무너진 채로 가지,

사랑과 과육의 밀도가 차오르는 저녁에,

길을 걷다가 만난 가지처럼, 원래 그런 것 없다고

중얼거리면서도



○ 십이월

창문 너머로 남겨둔 용서가 풀빛으로 번지듯 당신에게

닿고자 쓴 편지에요. 한 인간이 빛에 감싸인 모습을

보았습니다. 겨울의 설원은 조금씩 갈라지고, 눈 밑에서

검은 흙이 드러날 때마다 누군가 들어오기를 기다리는

예감 같았습니다. 기쁨은 언제나 무너짐의 예고였으니

빛은 너무 짧게 머둘다 가버립니다.



○ 석류와 기적

당신의 심장에 기대어 잠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검붉은

잎 아래 몸을 웅크리고 있었습니다. 두 눈 위에 얹힌

잎사귀 하나를 들어 올릴 때

...


신은 빛이 새어나오지 않도록 불타는 과육 위에 피부를

덮어둡니다. 그리하여 자비로운 핏빛을 모두 감추는 일을

어쩌면 모두 다 이해한다고 하였습니다.



○ 상속

죽은 엄마의 핸드폰을 끊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당신의 이름을

이렇게 많이 적어 본 적은 처음이에요.



○ 빛의 해부

얼굴은 우리 안에 잠든

도달할 수 없는 빛의 뒷면,

신은 오래전부터 그렇게 빚어온 듯했습니다.


유리병 속에 갇힌 불빛에 의지한 채

눈이 흩어져 사라지는 한 사람처럼

내 마음의 한 부분도 사라졌습니다.

틀에 흘려보내진 영혼,

해변 곳곳에 서걱이는 유리조각들,

끝없이 이어지는 발자국,

더 이상 돌아갈 수 없다는 것만은 알았습니다.



○ 해부학

개구리 배를 연다.

작은 심장이 말한다.


젖은 서랍은 열기만 해도 울 수 있다.

사랑은 살아 있는 채로는

해부되지 않는다.



○ 루비

신이 인간을 읽어내려가는 방식으로 그림자 위에

사람들을 올려놓는다. 다시는 오지 않을, 어제는 되풀이

되지 않는다.



○ 유리 가재

신은

심장에 얇은 유리막을 심어 놓았다.

기억은 

그 위로 내려앉은 메세한 선,

선은 빛을 따라 유리벽을 통과하지 못했다.

물 위에서만 일렁였다.



○ 포도

사랑한다는 말은, 모든 걸 잔인하게 무화시켜요.

유리잔을 엎듯 아무것도 남지 않지요.

일기장엔 기적이 아닌 단어들을,

작은 연필로 동그라미,

토독, 토독



애도란 급작스럽게 맞닥뜨린 이별이어서 감정적인

재난으로 다가온다.

소설이 공적 애도가 어떻게 소비되고, 기억에서 

지워지는가를 본다면

시에서는 사적으로 체험된 상실에 대한 감정 소비 문제와

맞닥뜨린다.

따라서 소설이 사회적 정치적이라면 시는 너무나 사적이다.


<@mmk_katarina>를 통해서 도서를 '협찬' 받았습니다.


@mmk_katar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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