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부 저 때문에 벌어진 일이에요
에밀리 오스틴 지음, 나연수 옮김 / 클레이하우스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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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튀김이 먹고 싶은데 죽을 순 없어


나는 지금 에어백이 분출한 정체불명의 회색 먼지에

보온병이 쏟아낸 뜨거운 액체까지 뒤집어쓰고 있다.

비상등을 켜고서 다시 백미러를 들여다본다. 어떤 여자가

비명을 지르며 밴에서 뛰쳐나온다. 이쪽으로 돌진한다.


언제나 주목받는 게 싫었다. 팔이 부러졌는데도, 그리고

이내 끔찍한 고통이 밀려왔는데도, 나는 아이들이 모두

흩어질때까지 눈 하나 깜짝 않고 괜찮다고 했다.

물론 괜찮지 않았다. 팔꿈치 뼈 두 군데가 골절됐었다.


나도 10대 때는 순전히 호기심 탓에 전자레인지에

전구를 넣고 돌려본 적이 있다. 인간의 사고라는 건

그렇게 폭주할 수도 있다. 이 남자가 죽은 것도 비극이지만,

혼자서 재미 삼아 해본 바보 같은 실험이 그를 규정하게 된

것도 비극이다. 나의 죽음이 나를 규정하는 걸까.


가끔 내가 정말 평생 같은 사람이었는지 궁금해진다.

사진을 뚫어져라 보면서 생각한다. 저게 정말 나일까?

인생의 단계마다 다른 사람이었던 것처럼 기묘한 기분이다.

그때의 나로부터 너무나 달라진 것 같다. 때로는 한 달 전의

나와도 다른 사람 같다. 하루 전, 5분 전, 

그리고 바로 이순간에도.


어떻게 해야 쉽게 돈을 벌 수 있을까? 성 노동을 해야 하나?

레즈비언 성매매 시장은 크지 않을 것 같고, 나는 연기에는

꽝이니까 남자들 상대로 일하는 건 애초에 말이 안 된다.

아니면, 그냥 성당에서 일할 수도 있다. 성 노동을 택하는

경우와 마찬가지로 거기서도 연기를 하긴 해야겠지만,

카톨릭을 속이는 게 추잡한 남자들과 섹스하는 것보단 나을 것

같다.


어떤 문구가 적절한지 모르겠다. 나는 한 번도 누군가에게

친구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본 적이 없다. 내가 이런 일을

떠맡게 되리라곤 생각지 못했다. 내가 ···.


나는 공황 상태에서 벌떡 일어난다.

이 느낌을 어떻게 떨쳐내지?

도저히 떨쳐낼 수 없을 것 같다.

불이 난 집에 갇힌 고양이가 된 느낀이다. 창문 하나 없는

방구석에 몰린 고양이.

쿵쾅. 쿵쾅. 쿵쾅. 

물속 깊이 가라앉은 느낌이다. 수면은 머리 위로 60층이나

떨어져 있다.

쿵쾅. 쿵쾅. 쿵쾅. 


가면 증후군은 자기 자신을 의심하는 한편 다른 사람에게

사기꾼으로 보일지도 모른다는 내면화된 두려움에 시달리는

심리적 반응 양식이다.


"넌 언제 커밍아웃했어?"

그런 질문에는 정말이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내가 커밍아웃했단 생각이 들지 않으니까. 언제나 커밍아웃중인

기분이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 같다. 누군가를 새로 만날

때마다 매번 커밍아웃해야 한다.


나도 몰랐던 내 원초적 본능, 울고 있는 아기에게 반응하는

극도의 신체적 불안과 경계심에 당혹스럽다. 아기 울음소리가

각성제 같다. 아기가 비명을 지를 때마다 내 동공이 커지는 게

느껴진다.


거의 2주 동안 카톨릭 신자로 위장하는 데 성공했다. 아슬아슬한

순간이 몇 번 있었다. 어제 무릎 받침대에 발가락을 찧고서는

카톨릭여성연맹 회원들 바로 앞에서 "이런 망할!"이라고 내뱉고

말았다.


우리 가족이 다툴 때마다 나는 멀리 떠나 다시는 식구들과

말도 섞지 않고 사는 걸 상상했다. 새로운 대륙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걸 생각했다. 그러나 침대에 누워 잠들기를

기다릴 즈음이면 죄책감이 모려오곤 했다.


해변으로 차를 몰고 가 거기서 목숨을 끊을 생각을 했다.

사고를 내서가 아니라, 오랫동안 우울했기 때문이다.

원래는 내가 먹으려고 산 감자튀김이었다. 스스로에게

"지금 당장 먹고 싶은게 있나?"라고 묻고, "감자튀김"이라고

답했다. 그래서 목숨을 끊는 대신 감자튀김을 사러가기로 했다.

그 편이 더 논리적인 것 같았으니까, 아직 먹고 싶은 게 남아

있을 때는 목숨을 끊어선 안 된다.

그 다음엔? 문득 떠 올랐다. 일라이가 감자튀김을 먹고 싶어

할지도 몰라.


나는 방금 행복을 선택했다. 테이블 위에 펼쳐놓은 모든 감정

가운데 그걸 골랐다. 단연코 최고의 선택이다.



@1morepage_books


<원모어페이지>를 통해서 도서를 '협찬'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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