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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의 피
나연만 지음 / 북다 / 2024년 10월
평점 :
엄마를 죽인 범인의 시체가, 내 눈 앞에 있다.
그리고 남겨진 메시지.
안치호는 목이 와이어에 졸린 채로 질식되어 꿈틀거린다.
무기력한 반항이다. 안치호의 움직임 탓에 주머니에
들어 있던 갤럭시노트와 녹색 지포라이터가 슬금슬금
빠져나온다. 마치 살겠다고 기어 나오는 것 같다.
나는 나이프를 안치호의 발목에 찔러 넣은 다음, 컴퍼스로
원을 그리듯 빙글 돌려 살과 근육을 잘라내고는 철근 절단용
커터로 뼈를 끊는다. 안치호의 발목에 채워져 있던 전자발찌가
툭 하고 떨어진다.
"며칠 남지 않은 것 같다."
사광욱은 자신의 남은 생을 의사보다도 정확히 알았다.
준우는 아버지의 정신이 온전하지 않길 바랐다.
맑은 정신으로 죽음의 고통을 감내하는 아버지를 지켜보기가
괴로웠던 까닭이었다. 폐암은 그런 병이었다.
아버지는 그 말을 한 후 이레 만에 숨을 거뒀다.
엄마 공예지가 죽은 지 10년 만이었다.
"용의자는 검거됐습니다."
자신을 떠나갔던 엄나는 주검이 되어 돌아왓다. 용의자에게
찔린 칼자국과 그보다 수십 배는 더 긴 메스 자국이 더해진
채였다.
"아니요."
안치호는 말했다. 피해자에게 성폭행을 시도했는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었다. 투숙하고 있던 펜션의 주인인 피해자가
자신을 무시했다고 말했다. 단답만을 하던 범인은 예외적으로
길게 자신에 대한 변호를 이어 나갔다.
무거운 쇳덩이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적막을 깼다.
철로 된 정문이 열리더니, 사람이 걸어 나왔다. 안치호.
구치소를 나오는 그는 완전한 백발이 되어 있었다.
"죽은 듯 조용히 살아."
준서였다. 역시 지프는 엄마의 차가 맞았다.
준서가 안치호의 앞으로 다가갔다. 안치호는 준서를 보더니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대꾸했다.
"넌 뭐야."
어깨가 부러진 안치호는 신음하며 고꾸라졌다. 이윽고
나이프가 콘크리트 바닥에 떨어지면서 쨍한 소리가 울렸다.
"너 누구야?"
얼굴을 바닥에 대고 엎어진 안치호가 거친 숨을 내뿜으며
물었다. 준호의 왼팔에서는 빗물과 피가 한줄기가 되어 땅으로
흘러내렸다. 준우는 나이프를 주우려고 고개를 숙였다.
나이프에 손이 닿았을 때, 관자놀이에 강한 충격이 느껴졌다.
준우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는 누워서 움직이지 않았다.
준우는 눈으로 가만히 그를 훑었다. 숨을 쉬면서 움직여야 할
가슴은 멈춰 있었다. 안치호는 시체가 되어 있었다.
어떻게 죽었을까, 준우의 시선은 그의 왼 다리에 멈췄다.
왼쪽발에 빨간 고무장갑이 덧씌워져 있었다. 손을 그리로
갖다 댔다. 고무장갑을 누르자 그대로 푹꺼졌다. 발이 만져지지
않았다.
설정한 적 없는 알람과 메시지가 떴다.
"오후 08:30
잡혀 들어가지 싫으면 시체 치우기"
피스리버의 중정 위로 번개가 걸쳐지자 안치호의 얼굴이
푸르게 빛났다. 눈은 감겨 있었다. 준우는 안치호가 누워
있는 대차를 화로 속으로 밀어 넣었다. 건들대는 그의 표정을
이제는 볼 필요가 없었다.
준우는 치밀하지 못한 자신의 행동에 다시 한번 어금니를
깨물었다. 그가 그 자리에 없었다면 준우는 지금 이 세상
사람이 아닐터였다. 누구일까.
안치호에 대한 복수심이 물러난 자리는 이제 불안감으로
채워지고 있었다. 그런 불안은 언제 꺼질지 알 수 없었다.
좌절감과 불안감이 곤죽처럼 뒤섞인 기분이었다.
발목을 굳이 계곡에 갖다 버릴 필요가 있을까요?
여기 화로가 이렇게 있는데. 그렇다면 살인자 입장에서는
정말 쓸데없는 짓을 수고스럽게 한 거지요.
전기톱을 썼으니까, 시신을 토막 내면서도 서두른 흔적이
없어. 시체를 앞에 두고 연구할 여유가 있는 사람이야.
패륜.
그 단어는 백상에게 어떤 버튼처럼 작동했다.
가사도우미의 목은 어느새 백상의 손아귀에 잡혀 있었다.
평생 고양이 목도 잡아본 적이 없었지만, 연습이라도 한 듯
능숙했다.
"와, 죽은 척이라도 하지."
백상은 양팔을 들어 정글모의 손을 뿌리쳤다. 잡을 것을
잃은 그의 몸이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급류는 먹이를
문 상어처럼 정글모를 낚아채 하류를 향해 맹렬하게
흘러갔다.
증거를 굳이 세상 밖으로 내놓은 이유가 궁금할 테니까.
윤대수는 가장 아름다웠다. 그러나 윤대수는 자신을
무서워했다. 결국, 윤대수가 그들 중 하나가 된 것은 슬픈
일이었다.
모른 척하는 거다.
아버지가 말했었다. 다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거라고.
숨기려 하지말고 덮어라.
준서의 허벅지 옆이 허옇게 벌어지는가 싶더니 그 틈이
순식간에 붉은 피로 채워졌다. 엎어진 준서는 허리에
찬 홀스터에서 리볼버를 빼내고는 운전석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직감은 분명 자신을 잡기 위한 덫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녀석의 덫은 그럴싸했다. 마치 먹음직한 미끼처럼.
<채성모의 손에 잡히는 독서>를 통해서 도서를
'협찬' 받았습니다.
@vook_da
@chae_seongm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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