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 읽기의 혁명 - 비루한 삶도 고귀한 삶도 부활한다 철수와영희 생각의 근육 4
손석춘 지음 / 철수와영희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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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루한 삶도 고귀한 삶도 부활한다.

삶이 연원히 되풀이되더라도 지금처럼 살 것인가?


사랑하는 자는 창조하려 한다. 경멸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사랑했던 것을 경멸할 까닭이 없었던 자가

사랑에 대해 무엇을 알겠는가!


근본적으로 철학은 개인이 건강해지는 법에 대한

본능이 아닐까? 나의 대기, 나의 높이, 나의 기후,

나름대로의 건강을 두뇌라는 우회로를 통해 

추구하려는 본능이 아닐까?


철학이 근본적으로 '건강하려는 본능'이라는 정의는

철학사를 톺아보아도 파격일 만큼 새롭다.


책장에서 우연히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가 들어왔다. 삶을 바라보는 눈에서 '낙관주의의

안대'가 벗겨지는 느낌에 사로잡혔다. 더 예리해진

니체의 눈에 삶은 "더 추악해지긴 했어도 흥미롭게

변했다."


나는 사물에 있어 필연적인 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보는 법을 더 배우고자 한다. 그렇게 하여 사물을

아름답게 만드는 사람 중 하나가 될 것이다.

네 운명을 사랑하라. 이것이 지금부터 나의 사랑이

될 것이다!


세상은 곤궁과 비탄의 무대이며 적어도 우리에게

알려진 사실들로 판단컨대 가장 행복한 경우라 해도

무료함을 던져줄 뿐이다. 그 세상을 비추는 일밖에 하지

않는 별들, 방대한 우주, 무한한 공간에서 무수히

반짝이는 별들을 바라보면 우리는 미치고 싶은 기분이

든다. <쇼펜하우어>


니체에게 쇼펜하우어는 독창적 우주론에 근거해

유럽인들이 공감해온 '휴머니즘'을 정면으로 비판한

철학자다. 


쇼펜하우어가 지적한 계몽주의와 기독교의 핵심적인

오류는 무엇일까. 인간중심주의다. 기독교에서 인간은

신이 창조했고 자유의지를 지닌 존재다. 신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그 신을 통해 인간중심주의 세계관을 

공고화했다.


세상이란 실은 지옥이다. 인간은 한편으론 들볶이는

영혼이고, 다른 한편으론 그 영혼 속의 악마이기도 하다.


표상의 세계는 인식하는 주관인 나에 의해 파악된다.

이성에 근거해 인식하는 주관에게 세계는 언제나 표상으로

나타난다.


쇼펜하우어에게 생의 맹목적 의지는 자기 보존과 종족

보존의 욕망으로 나타난다.


욕망이 무한할 때 그만큼 결핍감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욕망이 충족되지 못하면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동물은 '현실적인 감적이나 눈앞의 쾌락이나 고통에

따라서 행동' 하지만 시람은 현실만이 아니라 과거와

미래까지 생각하고 고통을 느낀다.


맹목적 의지에 따른 욕망으로는 고통→권태→고통

→권태가 되풀이 된다. 그래서 행복감을 느끼기 어렵다.

삶은 고통이 아니면 권태다.


사회 구성원에게 일률적으로 노동의 양이 분배되지 않는

사회는 노예제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니체는 자기 자신 외의 다른 신을 거부하는 유일신을

'신의 자기모순'으로 이해한다. 유일신이라면 아예 다른

신이 있을 수 없기에 굳이 '유일'을 내세울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것은 신성이 아니라 한낱 시기와

질투에 지나지 않는다.


기실 국가만 '신을' 대체한 것은 아니다. 니체 사후인

20세기와 21세기에 걸쳐 사람들이 신을 대체해 

의존하는 대상은 국가 못지 않게 '돈'으로 나타났다.

학계에서도 '물신주의'라는 말이 퍼져갔듯이 돈(자본)을

신처럼 섬기며 부의 축적에서 삶의 의미를 느끼는

사람들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니체에게 "인식의 가장 일반적인 효과는 착각"이다.

니체는 지성이 "개체 보존을 위한 수단"으로서 자신의

"주된 힘을 표상을 통해 전개한다"고 생각했다.


이 순간도 마찬가지다. 이미 한 번 있었고, 여러 번

있었으며, 그렇게 다시 돌아올 것이다. 모든 힘들은

지금과 똑같이 분배돼 있다. 인간 존재 전체의 모든

고리 속에는 항상 어떤 순간이 있는데, 이것은 처음에는

단 한 사람에게, 그 다음에는 많은 사람에게 그리고

결국 모든 사람에게 가장 강력한 생각, 즉 모든 것의

영원회귀라는 사상이 떠오르는 순간이다.


"누구나 죽음을 대단하게 받아들인다.

그런데도 죽음은 아직도 축제가 되지 못하고 있다.

사람들이 어떻게 이 더 없이 아름다운 축제를 벌여야

할지를 아직 배우지 못한 것이다."

그렇다면 니체에게 죽음은 어떻게 축제, 그것도 아름다운

축제가 될까. 그 근거가 영원회귀다.


니체에게 '낙타'는 무거운 짐을 지면서도 '무엇이 무겁단

말인가?' 되묻는 삶이다. 낙타는 '아니오!'라고 할 줄

모른다. 과도한 짐을 지우는 명령에 '낙타의 정신'은

항의나 저항은커녕 자발적으로 더 많은 짐을 지겠다고

나선다.


용은 세계를 지배하는 법과 도덕, 가치다.

권위주의적이고 위압적이다. 사자는 '의무'에 대해서

조차도 경건하게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지녔다.


니체가 아이 단계에서 강조하는 것은 창조다.

그는 당대의 사람들이 "창조적인 번개의 웃음"을

잃어버린 채 살고 있다고 진단한다.

창조적인 삶을 살아가려면 사자의 용기만으로 부족하다.

기본의 틀을 벗어나야 '창조의 놀이'를 할 수 있다.


니체와 마르크스, 두 철학자 모두 '자본주의적 민주주의'

사회를 비판하며 사람이 더 사람다운 삶으 살 수 있는

철학을 제안했다. 다만 니체는 '인간의 왜소화'에,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에 방점을 두고 비판했다.


<채성모의 손에 잡히는 독서>를 통해서 도서를 

'협찬' 받았습니다.


@chulsu815

@chae_seongm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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