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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가와 란포 기담집
에도가와 란포 지음, 김은희 옮김 / 부커 / 2024년 7월
평점 :
그로테스크와 공포, 슬픔과 아름다움이 공존하는
‘란포 세계’, 각 장을 마칠 때마다 기괴한 전율이
당신과 함께한다.
독한 악인도 죽을 날이 가까워져 오면 착한
사람이 되나 봅니다. 제가 만일 그 죄를 자백하지
않고 죽는다면 제 아내가 너무도 가엾습니다.
그 것보다 더 전에 또 한 사람을 죽인 일이 있습니다.
그를 생각할 때마다 저는 참으로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건 바로 제 형입니다.
저는 마침내 제 육체를 들여다보는 것도 두려워
졌습니다. 죽은 형과는 주름 하나, 근육 하나까지도
똑같은 이 육체가 너무도 무서워졌습니다.
저와 똑깥이 생긴 쌍둥이의 목을 휘감아 죽을힘을
다해 미친 듯이 졸랐습니다. 마침내 새빨갛게
불어오른 목이 반쯤 제 쪽으로 돌아오자, 허옇게
뒤집힌 눈가로 제 얼굴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지만(그 얼굴은 죽어도 못 잊을 겁니다)
인간에게는 자신의 혈육을 증오하는 감정이 있습니다.
이 감정에 대해서는 소설책 같은 데서도 자주 나오는
걸 보면 오직 저 혼자만 느끼는 감정은 아닌 것 같은데,
타인에 대한 그 어떤 증오보다도 한층 더 견딜 수 없는
종류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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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희라는 것은, 갑작스런 말씀이라 놀라실지
모르겠습니다만 ··· 살인입니다. 전 그 유희를 발견
하고는 지금까지 오로지 권태로움을 털어버리고자
무려 100여 명의 목숨을 빼앗았습니다. 남자와
여자, 어린애들 모두 말입니다.
절대로 법률에 저촉되지 않는 살인, 셜록 홈즈라도
알아낼 수 없는 살인이라니, 정말 눈이 번쩍 뜨이도록
더없이 근사한 일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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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일 만큼 사랑했습니다!
하지만 슬프게도, 아내는 바람둥이였습니다.
너무도 사랑스러운 그 모습을 영원히 내 것으로
만들려면 지금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준비해 둔
송곳을 아내의 향기로운 목덜미에 있는 힘껏
찔러 넣었습니다.
내 눈앞에 놓인 유리관 속에는 여자의 얼굴이
들어있었다. 앞니를 다 드러내고 방긋 웃고 있는
그녀. 밀랍으로 세공된 소름 끼치는 종기 속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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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로 의자가 한 사람의 방이 된 셈이지요.
전 셔츠만 걸치고 밑바닥에 장치한 출입구를 열고
의자 속으로 기어 들어 갔습니다.
참으로 기묘하더군요.
캄캄한 절벽에 옴짝달싹할 수 없는 가죽 속 세상.
아 얼마나 야릇하고 매력적인 곳입니까! 그곳에서는
사람이란 것이 평소 눈으로 보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이상한 생물처럼 느껴집니다. 목소리, 콧소리, 발소리,
옷 스치는 소리, 그리고 몇개의 둥글둥글한 탄력 있는
살덩이로 이루어진, 단지 그것뿐인 생물 말입니다.
의자 속 사랑! 그게 얼마나 짜릿하고 매력적인지
들어가보지 않은 사람은 모릅니다. 오직 감각과 청각,
그리고 얼마 안 되는 후각만의 사랑이고, 어둠 속
세계의 사랑입니다. 결코 이 세상의 것이 아닙니다.
그야말로 악마가 사는 세상의 애욕이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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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클어진 머리칼 사이로 병석에서 일어난 듯 핏기
없이 초췌한 그녀의 추악한 얼굴이 드러났다.
보지 않으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내 눈은 저절로
그녀의 허리께로 갔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아니다 다를까, 뼈만 남은 굶주린 개처럼 금방이라도
접힌 듯이 폭삭 꺼져버린 그녀의 납작한 배가 내
가슴을 철렁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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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숨바꼭질을 하고 계셨군요. 정말 유치한
장난을 다 하시고 ···, 그런데 어째서 이 자물쇠가
잠겨버렸답니까?"
그녀는 쇠고리를 풀어 뚜경을 쌀짝 들어 올리는가
싶더니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다시 원래대로
꾹 누르면서 재차 자물쇠를 걸어버렸다.
훗날 무참한 남편의 죽음을 떠올릴 때마다 오세이를
가장 괴롭했던 것이 바로 이 뚜겅을 들어 올리려고
안간힘을 쓰던 나약하기 이를 데없던 남편의 손힘
이었다.
<채성모의 손에 잡히는 독서>를 통해서 도서를
'협찬' 받았습니다.
@thebooks.garden
@chae_seongm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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