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나무의 여신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소미미디어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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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행복했던 날의 추억


실은 부탁드릴 게 있어서요. 이 절에 시집을

비치해 주실 수 있을까요? 시집?


시가 좋은지 어떤지, 나는 그런 건 모르지요.

하지만 젊은 사람이 생각나는 대로 써 내려간

글을 읽는 건 아주 재미있군요. 내일, 나한테도

한권 가져다주세요.


치후네는 경도 인지장애를 앓고 있다. 일상생활에

딱히 지장은 없지만, 이따금 기억이 뭉텅

빠져나가곤 한다. 자신의 장애를 잘 아는 그녀는

소소한 일상도 최대한 꼼꼼히 기록해 두려고 했다.

그래서 행동 기록장인 노란 수첩은 몸에서 한시도

떼어 놓지 않고 지니고 다녔다.


"물론 돈도 필요하지만, 그보다는 읽고 싶은 분에게

드리는 게 더 중요해요." 유키나가 방긋이 웃으며

말했다. 천사의 웃음이라는 게 이런 거구나, 라고

레이토는 생각했다.


"기념···이라고 해도 너는 모르겠네. 녹나무 안에서

기원을 올릴 때 쓰는 거야."

"아, 그거! 누나가 애기해 줬어요. 월향신사이

녹나무에 기원을 올리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근데 그거, 미신이죠?"


녹나무의 기념에는 두 종류가 있다. 예념과

수념이다.  예념은 초승달이 뜨는 초하후 무렵에

행한다. 녹나무 안에 들어가 밀초에 불을 켜고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것을 염원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 염원이 녹나무에 새겨진다.

염원을 받는 것을 수념이라고 하는데, 보름달이

뜨는 날에 행한다. 예념한 이와 혈연관계인

사람이 녹나무 안에서 밀초에 불을 켜고 예념자에

대해 깊이 생각하면 그 염원이 전해져 온다.


놀라는 것도 당연하다. 가지는 사방으로 넓게 

뻗어 나갔고 나무 기둥 둘레는 5미터가 넘는다.

게다가 큰 뱀처럼 굵고 구불구불한 뿌리가

땅바닥을 기어가고 있다. 처음 마주 했을 때.

레이토는 그 장엄함과 박력에 압도되어 몸이

부르르 떨렸다.


"어휴, 강도 사건으로 체포된 사람이 그 아저씨

였다니." 역시 정상적인 인간이 아니었구나,

라고 레이토는 생각했다. 지난번 그 200엔도

결국 가져오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은 명백히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넋을 잃은 사람처럼도 보였다. 녹나무의 힘에

압도된 것인지 아니면 염원에 충격을 받은

것인지, 그건 알 수 없었다. 어쩌면 그 둘

다인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처음으로 기념한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보이는 반응이다.


"나도 잠깐 읽어 봤어, 그 시집의 독후감이더라고."

시집, 아주 좋았습니다. 시 한 편 한 편에 감동

했습니다. 정확히는 표현할 수는 없지만, 

어쩐지 기운이 나는 시였습니다. 포기하지 말고

씩씩하게 살아겠다, 노력해서 제대로 된 인간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띠지도 풀지 않은 신권 100만 엔과 1만 엔짜리

지폐 두 장, 도합 102만 엔이었다. 그리고 동봉한

한 장의 편지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모리베 도시히코의 머리를 내리치고 현금을

빼앗은 사람은 나다. 구메다 고사쿠 씨는 관계가

없다.


혹시 내가 범인으로 몰려 교도소에 가게 되더

라도 그 아이만 무사하다면 괜찮다. 여태까지

살아오는 동안 한 번도 남에게 도움이 되지

못했던 내가 누군가를 구해 줄 수 있는 기회

라고는 앞으로 평생 없을지도 모른다.


잊기 쉬운 정도가 아니라 저 아이의 경우에는

아예 기억 자체가 사라져요. 오늘 여기서 이렇게

우리를 만난 것도 아마 내일은 전부 잊어버릴걸요.


과거의 나는 재미없다고 결론을 내렸지만, 정말

그럴까. 하지만 오늘은 더 이상 시간이 없다.

오늘의 나는 여기까지. 내일 일은 내일의 나에게

맡긴다. 잘 자.


광장해요. 녹나무를 이런 이미지로 떠올려 본

적은 없지만, 이 그림을 보니까 완전히 딱 맞는

거 같아요. 맞아, 그 녹나무는 여신이야, 하고

깊이 공감하게 돼요.


나도 하루하루 버티면서 가까스로 살고 있어.

앞날을 생각해 볼 여유 따위는 없어. 내 앞에

어떤 미래가 기다릴지, 생각하면 불안하기만

해. 아마 많은 사람이 그렇지 않을까?


좀 더 일찍 알았어야 했어요. 모토야가 마음속에

품고 있는 게 무엇인지. 녹나무가 알려 주기 전에

우리 둘이 미리 알았어야 했어요.


후지오카는 사에코의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 보며

힘주여 대답했다. "그래, 같이 해보자."

그 순간에 한때 부부였던 두 사람의 인연의 끈이

다시 맺어졌다고 레이토는 생각했다.


행복하다, 라고 생각했다. 이제 다른 건 아무것도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그때 나는 갑작스럽게

깨달았다. 미래 같은 건 필요 없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그런 건 상관없다. 그런 건 몰라도

괜찮다. 중요한 건 지금이다.


꿈이 아니야. 실제 있었던 일이야. 네가 직접

체험한 거야. 그리고 그걸 보여 주는 건 내가

아니라 너 자신이야. 모두 다 모토야, 너의 

추억이야.


<채성모의 손에 잡히는 독서>를 통해서 도서를 

'협찬' 받았습니다.


@somymedia_books

@chae_seongm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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