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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만 보는 바보 ㅣ 진경문고 6
안소영 지음 / 보림 / 2005년 11월
평점 :
정조시대의 이야기는 늘 흥미롭다. 변화의 바람이 불어오는 시기, 변하지 않을 것만 같았던 견고한 체제는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해 혼란을 낳고 그 혼란 속에서 새시대의 기운이 움트고. 단점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역사 속 몇 안 되는 성군 가운데 한 분인 정조는 지독히도 성실하게 나라를 다스렸다. 권력을 잡은 이들의 오만하고 부패한 모습을 참지 못했고, 새로운 인재를 찾아나선다. 그 번뜩이는 눈에 들어온 이들이 있었으니, 양반의 핏줄을 받았으나 그에 끼지는 못하고 그렇다고 평민으로 살 수도 없었던 서얼이었다.
세상에 대한 울분과 이루지 못한 꿈의 좌절로 가슴에 불을 품은 듯했던 박제가, 허물없는 성격 유쾌하고 경쾌하게 시를 풀어낸 <발해고>의 저자 유득공, <무예도보통지>의 지은이 중 하나인 조선의 검객 백동수, 명문가의 자제였지만 신분에 상관없이 마음을 주고받은 이서구, 역시 명문가의 사람이지만 허례허식을 거부하고 진정한 지식인으로 자유인으로 살고자 했던 박지원과 역시 훌륭한 학자이자 박지원의 둘도 없는 벗인 홍대용... 그리고, 이들을 바라보고 애정어린 글로 풀어낸 이 책의 주인공 '간서치' 이덕무. 그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두근거리는 그때 그 사람들.
'간서치전'은 나도 참 좋아하는 글이다. 사방에 난 창문으로 빛이 들어올 때마다 방향을 바꾸어 하루종일 책만 읽었던 이덕무. 그 역시 신분의 굴레 때문에 고뇌하면서도, 열 살 가까이 어린 이들을 벗으로 맞고, 네 살 위의 박지원을 스승으로 섬길 줄 알았다. 나이나 신분에 관계없이 마음으로 사람을 보고 대할 줄 알았다. 사십 줄이 되어 관직에 나가게 되자, 기뻐하며 지은 글은 그 감격을 그대로 드러낸다. 정조라는 훌륭한 왕의 통치 아래, 이제는 자신도 벗들도 자신과 그들의 자식들도 새 시대를 살게 될 것이라며 기뻐했던 이덕무. 정조가 승하하기 전 세상을 떠난 그는 어쩌면, 불행한 현실을 살다가 행복하게 꿈을 꾸며 삶을 마쳤는지도 모른다. 남은 이들이 겪은 일을 생각한다면.
슬픔을 슬픔으로만 말하지 않은 사람, 물처럼 온화했던 사람, 누구에게도 편견을 갖지 않았지만 기준을 거스르는 사람에게는 냉정했던 꼿꼿한 사람, 무엇보다 약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아파했던 사람.. 책만 보는 바보라고 스스로를 낮춰 말했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그게 그리 쉬운 일인가. 벗을 바라보는 이야기하는 그의 모습은 또 어찌 그리 따스한가. 옮긴이의 손을 빌어 어린 독자들을 위해 다시 풀어쓴 글이지만, 그 느낌이 잘 살아 있다. 백탑파의 사람들에 대해 알고 싶은 어른들이 읽어도 좋을 것이다.
세상에 대한, 인간에 대한 온기를 간직했던 이덕무. 그의 글은 언제나 마음에 물기가 돌게 한다. 약한 자에게 더 넉넉했던 마음가짐이,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 어린아이 같은 호기심이, 벗과 스승에 대한 사랑이. 몇 백 년의 시간을 사이에 두고도 이런 가르침을 받을 수 있다니, 우린 얼마나 운이 좋은가. 하지만 그 모든 감정도 그들의 끝을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읽으면서 어디선가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했던, 그래서 더 슬펐던 이 책도 마찬가지였다. 할 말은 많아지지만 말을 잇기 힘들게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