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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산문 산책 - 조선의 문장을 만나다
안대회 지음 / 휴머니스트 / 2008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고려시대 문장가 이규보가 그랬단다. 천 년 뒤 누가 자신을 기억하겠느냐고. 그러니 자신의 작품이 2010년에도 전하는 것을 안다면 아마 엄청 기뻐할 것이다. 술로 여러번 곤욕을 치렀을 만큼 주당이니 술판을 벌이지는 않을까ㅎㅎ
이렇듯 한 시대를 풍미했던 사람조차 자신과 자신의 작품이 영원하지 않을 것을 예감하고 안타까워했다. 그러니 그 당시에 혹은 세월이 흘러 천천히 지워진 작품들은 또 얼마나 많을까. 지금 우리가 고전을 감상한다는 것은 아마도 넓은 숲에 난 작은 길을 따라 걷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고 알려진 것보다 아직 묻혀 있는 것이 더 많은. 이것은 과거를 연구하는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일 터다.
그래서 책의 제목이 멋도 없고 재미도 없지만 내용을 잘 설명해준다 생각했다. 또한 허균, 박지원, 박제가, 정약용, 이덕무, 조희룡 등 이미 잘 알려지고 나 역시 참 좋아하는 분들의 작품만이 아니라 심로숭, 장혼, 남종현 등 낯선 분들의 작품까지 감상할 수 있어 더욱 의미있었다. 시대나 처한 상황, 생각들은 달라도 흰 종이 위에 자신의 뜻을 펼쳐낸 점에서 모두 멋진 사람들. 하지만 대부분이 평탄하지 않은 삶을 살았기에 안타까운 마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때때로 늦은 밤에 편안히 자리에 앉아 책을 읽는 것이 미안해질만큼. 그래도 기세등등한 허균에서 시작해 매화덕후 조희룡으로 끝을 맺는 차례 덕분에 기분좋게 책을 덮을 수 있었다. '창가에 뜬 봄볕을 오이처럼 따다가 답장 속에 넣어 바로 보내고 싶'다는 조희룡의 말에 웃음이 나왔다. 유배지의 궁핍한 생활을 전하는 척독이었음에도 저런 말을 할 수 있는 여유. 사람을 성장시키는 것은 행복보다 시련이라고 하지만, 그 힘든 삶은 견디게 하는 것은 일희일비하지 않는 평온함과 여유라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된다.
원문을 제외하고 650쪽인 이 책은 꽤 두꺼운 편이다. 하지만 여러 사람의 작품이 서로 다른 맛을 내어 지루하지 않다. 또한 저자의 짧은 설명이 곁들어 있어 작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저자의 책을 많이 읽은 것은 아니지만 과장되지 않고 담담한 서술이 마음에 들었다. 곧 도착할 다른 책들은 또 어떤 맛일지 기대하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