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 평전
김삼웅 지음 / 두레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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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정조 시대에는 정조라는 개혁 군주와 훌륭한 신하들이 많았는데, 왜 정조의 죽음으로 개혁정치가 무너지고, 하루아침에 다시 수구세력에 권력이 넘어가는가?
둘째, 조선 사회가 두 차례 호란을 겪은 뒤 극심했던 ‘북벌론’에서 ‘북학론’으로 어젠다가 바뀌고, 이런 과정에서 ‘성호 이익의 중농학파→연암 박지원의 이용후생파→다산 정약용의 경세치용파’로 이어지면서도 이들 실학파가 정치세력의 중심이 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
셋째, 다산은 “조선인으로서 조선 시”를 지어야 한다고 누누이 역설하면서도 정작 본인은 500여 권의 저술 중 시 한 편도 한글로 짓지 않았는데, 그 배경은 무엇인가? 또 정조의 ‘문체반정(文體反正)’에 적극 호응하고 더욱 강경하게 대응하도록 촉구한 것은 왜인가?
넷째, 긴 유배 생활 동안 다산이 집필한 책이 동학군 지도자들이 읽고 동학혁명의 이론적 지침이 되었다고 하고, 또한 동학혁명기 동학군은 ‘다산비결’이라는 문건을 품속에 지니고 다녔다는 설도 전해지는데, 이 이야기들에 대한 실상은 무엇인가?
다섯째, 정약용의 집안은 우리나라 천주교의 발상지라 할 만큼 천주교와 인연이 깊다. 그런데 천주교 박해가 시작되자 천주교를 버리고 가족들을 고발한 것으로 알려진 다산은 과연 배교자인가 아닌가? 그 진실은 무엇인가?
여섯째, 그의 수많은 저술 중에 후대에 유독 『목민심서』와 『흠흠신서』 등만 널리 알려지고 읽히게 된 배경은 무엇 때문인가?
일곱째, 강진 유배지에서 18년 동안 책 500여 권을 저술했으나 귀양이 풀려 고향에 돌아와 18년을 더 살면서는 「자찬묘지명」을 짓고, 『흠흠신서』와 『매씨서평』 등을 수정하고, 이가환·정약전·권철신 등의 묘지명을 짓는 것 외에는 별다른 저작을 남기지 않았는데, 왜일까?
여덟째, 그의 호는 사암(俟菴), 탁옹(籜翁), 태수(苔叟), 자하도인(紫霞道人), 철마산인(鐵馬山人), 열수(洌水), 다산 등 여러 가지였고, 생전에 그는 다산이라는 호를 저술에 명기하지 않았고, 사암과 열수라는 호를 주로 사용했다. 「자찬묘지명」에도 ‘사암’이라는 호를 썼는데, 왜 후대에 이르러 열수나 사암 대신 다산이 호로 쓰이게 되었을까?
아홉째, 정약용이 강진 유배 시절에 정을 나눈 여인과 그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 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 여인의 심정을 담은 시 <남당사>는 누가 지었으며, 인륜대사를 다산은 왜 모른 체했을까?

그러게 왜 그랬지? 왜 그랬을까?를 연발하며 책 소개글을 읽었다. 다산 정약용에 대해 극히 일부만 아는 나도 이렇게 궁금한 부분을 이렇게 시원하게 정리해주시다니 저절로 구매버튼이 눌리네. 김삼웅 선생님 책을 손에서 떼지 못하고 밤새 읽었던 기억이 여전히 남아 있어 더욱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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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이랑 2024-06-26 0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란마음님 댓글보고 저도 구먀했어여. 밤새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