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어떻게 쓸까요? - 그리스도인의 돈을 다스리는 태도
임은미 지음 / 두란노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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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히 모을 돈도 없지만) 나는 돈을 잘 모으지 못하는 사람이다. 아니, 돈을 잘 쓰는 사람이다. 어릴 적부터 1주일 단위로 용돈을 받으면 용돈의 거의 대부분을 화요일 이전에 써버리곤 했다. 용도는? 친구들과 함께 간식을 먹는데 썼다. 그걸 아는 내 친구들은 항상 월요일과 화요일에 내 주변에 많았다. ㅎㅎ

흥청망청 써버리는 것은 물론 곤란하지만, 나는 ‘얼마를 벌 수 있을까?’ 혹은 ‘얼마를 모을 수 있을까?’에 대해 가치를 두지 않고 살아왔다. 나 혼자를 위해서가 아닌 다른 사람도 함께 유익할 수 있는 데 돈을 얼마나 쓸 수 있는가에 중점을 두었다. 감사하게도 하나님은 나에게 ‘부하지도 않지만 가난하지도 않은’ 삶을 허락해 주셨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나에게 좋은 인사이트를 제공해 주는 책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가장 육적인 것이지만, 성경에도 하나님과 재물은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할 만큼 가장 영적이기도 한 이 돈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자세를 선교사님의 삶을 통해 자연스럽게 간증하고 있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하나님, 어떻게 쓸까요?’가 이 책의 핵심을 꿰뚫고 있다. 첫 번째는 그리스도인에게 돈은 수입과 소유의 목적이 아니라 소비에 있다는 것이다. 복음의 기쁜 소식을 고이 묵혀 둘 수 없고 흘려 보내야 하듯이, 돈도 마땅히 흘려보내야 한다. 내게 허락된 것은 모두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는 고백 아래 이런 태도가 가능하다.

두 번째는 이를 위해 하나님께 끊임없이 물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단순히 ‘이것을 살까요 말까요’의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돈의 사용법을 고민하고 주변을 둘러보아야 한다. 선교사님의 십일조, 십이조, 십삼조의 원칙이 그런 점에서 아주 인상적이었다. 십일조는 하나님께 온전히 바치고, 십이조는 가난한 이웃을 돌아보고 사용하고, 십삼조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기쁘게 하는 데 쓴다는 것이다. 이는 비율의 문제라기보다는 태도의 문제다. 십이조와 십삼조의 원칙을 통해 돈에 휘둘리지 않고 돈을 마땅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도구로 쓸 수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자연스럽게 이번 달에는 누구를 도와 주어야 하나 하고 이웃을 돌아보는 습관이 생겼다.’ (33쪽)
‘오늘도 내가 십삼조를 통해 맘몬을 다스리고, 돈을 다스릴 수 잇는 것은 신실하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기 때문이다.’ (56쪽)

나는 이제껏 나의 삶에서 나를 이끌어오신 하나님의 은혜를 믿는다. 그 은혜에 감사한다. 앞으로도 그렇게 인도하실 하나님을 의지하고 감사하며, 받은 은혜를 나의 것으로만 여기지 않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대로 나의 가진 것을 흘려 보내며 살아가기 원한다.

재정에 관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원칙을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분량이 길지 않고, 선교사님의 삶의 간증이 주를 이루고 있어서 딱딱한 원칙보다 더 마음을 울리는 삶의 지혜가 담겨 있다.

이 책에 인용된 중국 속담이 기억에 남는다.

‘꽃을 건넨 사람의 손에는 꽃향기가 남는다.’
무언가를 갖기 위해 손을 꽉 쥐기보다 손을 펼쳐서 향기를 떨치는 삶을 살고 싶다.

#하나님어떻게쓸까요 #두란노 #임은미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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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다 듣다 걷다 - 교회는 지금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이어령 지음 / 두란노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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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본질을 회복하려면, 명사에서 동사로 – 이어령 지음, <먹다, 듣다, 걷다> 서평

내가 저자를 알게 된 것은 ‘지성에서 영성으로’라는 책을 통해서였다. 기독교를 반대하는 입장에 있었으나 회심하여 하나님을 만나고, 그가 가진 지성이 하나님을 경험하는 영성과 결합하여 시너지 효과를 내는 것을 보면서 정말로 하나님은 다양한 사람들을 사용하신다는 생각을 했다. 과연 모든 지식 위에 뛰어난 것이 하나님의 지혜다. 요즘에는 ‘꼰대’라는 말이 보여주듯 과거의 경험과 연륜으로 얻게 된 지식의 경륜을 다소 등한시하는 경우가 있는데, 김형석 교수님이나 이어령 교수님과 같은 분들의 혜안을 잘 본받을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이제 하나님 곁으로 떠난 저자의 메시지가 다시금 주목을 받고있는 시점에서 이 책을 접하게 되었다.

보통 글을 쓸 때는 본론과 결론을 쓰고 마지막에 서론을 쓴다. 본론과 결론으로 들어가기 위한 도입부의 과정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글의 가장 핵심, 엑기스는 주로 여는 글에 있다. 그리고 나서 ‘어? 이게 무슨 말이지?’라는 의문과 호기심을 가지고 글을 읽게 된다. 이 책에서도 서론의 진가가 잘 드러난다.

‘이제까지 기독교는 존재론적인 관점에서 대부분 명사에 대해서만 이야기해 왔다고 생각합니다. (중략) 예수님은 인간 가운데 우리의 일상 현실 속으로 성육신하시고 그로써 역사의 일부가 되셨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의 생애는 대단히 역동적인 사건이었다는 것이지요.’ (6~7쪽)

이제껏 교회는 ‘영생’, ‘빛’, ‘소금’ 등 예수님의 가르침을 압축적인 명사로 규정하게 되어 단지 도덕적인 덕목 중 하나로 축소되기 쉬웠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여기 한국교회가 해야 할 일을 저자는 ‘먹다’, ‘듣다’, ‘걷다’의 세 가지 동사로 제시하고 있다.

먹는 것, 듣는 것, 걷는 것은 인간 생활에서 빠질래야 빠질 수 없는 요소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이 인간 삶의 본질적인 요소들이 여러 가지 이유로 많이 변질되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본래의 세계에서 많은 것이 문명의 발전이라는 이름 아래 뒤틀리게 되었다. 그로 인해 어느 때보다 풍족하게 먹고 있으나 많은 이들이 풍요 속의 빈곤에 시달리게 되었고, 먹고 주리지 않는 영의 양식은 취하지 못하는 시대가 되었다. 책의 내용 중에서는 ‘최후의 만찬과 혼밥’이라는 주제가 상당히 신선했다. 그래! 주님도 혼밥을 한적은 없지 않은가? 먹는 것은 단순히 육신의 굶주림을 해결하는 것 이상의 문화적인 의미가 있고, 예수님은 이 먹는 것에 영적인 의미를 부여하셨다.

또한 듣기보다 보기를 즐겨하여 스피커(speaker)는 많지만 리스너(listener)는 부족한 시대가 되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외로움에, 우울증에 시달린다. 많은 현대인이 내면에 임재해야 하는 성령의 부재를 인식하지 못한다. ‘마르다와 마리아’ 이야기에서처럼, 생명의 말씀을 듣는 것은 다른 어떤 사역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에 충분히 공감하게 되었다.

그리고 ‘걷다’는 사라지고 ‘타다’가 대체하고 있는 사회를 살고 있다는 지적에도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예수님은 평생 지구 한 바퀴를 돌만큼을 걸어다니셨다는데,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야 할 제자로서 나는 얼마나 실제로 걷고 있는지, 누구와 함께 걷고 있는지를 돌이켜본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의 땅을 딛고 실제로 걸어간다는 것은 생각보다 큰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언젠가 ‘현대인은 온전히 대지의 기운을 느끼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다’며 맨발로 걷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설명하는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참 현대인이 많은 것을 누리고 있으나 실제로는 얼마나 많은 것을 놓치고 살아가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교회가 해야 할 일이 ‘먹고, 듣고, 걷는 것’이라니. 어쩌면 너무 실없는 이야기로 들리지 않을까? 그러나 코로나19를 거치면서 많은 사람들이 가장 원하는 것이 바로 ‘교제’라고 하니, 이 기본적인 삶의 패턴이 본질을 회복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큰 힘이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리고 이 회복의 중심에 교회가 있다면 얼마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될까?

교회의 사역이 생명력을 잃었다고들 평가한다. 예수님께서 실제로 하신 사역이 대부분 함께 먹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듣고, 함께 걸어갔음을 기억한다면 교회가 충분히 이를 따라해봄이 어떨까. 나도 내 삶의 영역에서 함께 먹고, 함께 듣고, 함께 걷기를 애써야겠다는 다짐을 해 본다.

이런 사람들에게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 위드 코로나,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교회가 해야 할 일을 고민하는 분
- 이어령 교수님의 저작에 관심이 있는 분
- 기독교를 믿지 않지만 기독교의 본질에 관심이 있는 분
- 지성과 영성의 접점을 찾고 싶은 분

이 책을 읽는 많은 독자들이 예수님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먹고, 듣고, 걷는 즐거움을 충분히 누릴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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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석 교수의 예수를 믿는다는 것 - 백년 믿음으로 바라본
김형석 지음 / 두란노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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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김형석 교수님의 ‘기독교, (아직) 희망이 있는가?’라는 책을 읽었었다. 당시 코로나19로 인한 팬데믹의 충격이 채 가시지 않은 때여서(물론 아직도 현재진행형이지만) 절망 중에 희망을 찾게 되는 계기였다. 그 책이 한국 기독교에 대한 거시적인 시각이라고 한다면, 이 책은 교수님 본인의 삶을 토대로 기독교 신앙의 참 의미를 찾아보는 미시적인 책이라고 하겠다. 책의 서문에서 저자 본인이 밝혔듯이, 이 책은 ‘예수를 믿는 것에 대한 내부적인 시각’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자기 자신의 신앙에 대한 서술이 누구에게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과 같은 위대한 저서가 아니어도 상관없다. 모두가 그런 삶을 살 수는 없지 않은가? 내가 이 서평의 제목으로 인용한, 저자의 서문 제목과 같이 ‘당신은 무엇을 믿는가?’라는 질문에 각자가 대답할 말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종교개혁의 핵심은 바로 자기 자신의 주체적인 믿음을 가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대 기독교 사회의 많은 문제는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하는 기독교인들이 많아지는 것과 궤를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책에서도 이렇게 밝히고 있다.

‘우리가 염려하는 것은 깊은 문제의식의 빈곤이며 그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하는 교회 지도자들의 무능력이다. 교회 건물의 크기나 교인 수가 전부는 아니기 때문이다.’(26쪽)

나는 교회 지도자들의 무능을 탓하기 이전에 개별 신자들이 자신의 믿음을 세우지 못하고 교회 지도자들을 맹신한 것에서도 문제의식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각자가 말씀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지 못하고 남에게 자신의 신앙을 위탁했기에 이런 문제가 발생한 것이 아닐까?

이 책의 흐름은 결국 이것에 대한 교수님의 성찰의 기록이라 할 수 있다.
내가 어떻게 신자가 되었는지(1부), 그 믿음은 어디에서 오는지(2부), 믿음의 삶의 본이신 예수님(3부)과 그 주변의 사람들의 실제 삶은 어떠했는지(4부)를 다루고 있다. 그리고 5부와 6부에서는 참된 신앙을 가진 자로서 살아야 할 삶의 실제에 대해 말한다. 마치 로마서 1~11장과 12~16장이 나누어지듯.

저자는 자신의 믿음에 대한 정의를 이렇게 내린다. 참 공감이 된다.
‘나는 서서히 신앙이란 일생에 걸친 사명이라는 생각을 굳히게 되었다. (중략) 신앙이란 내 생명보다 더 귀한 무엇을 위하여 내 모든 것을 바치는 것이다.’ (32쪽)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실제로 그런 삶을 사셨기 때문이다. 예수님만큼 죽기 위해 이 땅을 사신 분이 없다. 그리고 그 죽음을 통해 누구보다 많은 생명(모든 생명이면 참 좋겠다.)을 살리셨다. 이것이 내가 닮아가야 할 길이 아닐까.

참된 스승은 문제의 답을 찾아주는 사람이 아니라, 그 답을 스스로 찾을 수 있게끔 도와주는 사람이라고 했다. 물고기를 잡아주는 것보다 물고기를 잡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이 책도 믿음이 무엇인지 답을 제공하고 그것을 주입시키기보다는 읽는 이로 하여금 질문하고 기도하는 자리로 나아가게 한다. 100년 인생이라는 것은 하나의 옵션이다. 100년을 산다고 꼭 교수님처럼 되겠는가. 예수님은 30년 남짓한 삶 가운데서도 모든 것을 이루셨다.

2021년이 하루 남았다. 매일이 당연히 나에게 주어지는 삶이라고 생각하고 살때가 참 많다. 그러나 그것이 당연하지 않음을 인정할 때마다, 내게 주어지는 하루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는다. 새롭게 시작하는 한 해는 더욱 나의 믿음을 주님 안에서 확증하고 그 믿음대로 살아가며 다른 사람을 살리고 세우는 일에 힘쓸 것을 다짐해본다.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맞이하며 자신의 신앙을 점검하고자 하는 그리스도인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그리고 혹 신앙을 가지지 않은 사람이라도, 진정한 신앙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면 이 책을 추천하는 것도 아주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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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안에 거하다 - 광야 인생에게 건네는 가나안 일상 광야 시리즈
이진희 지음 / 두란노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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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이 책을 접했을 때는 단순히 광야의 삶을 지나서 가나안이라는 약속의 땅에 거하는 방법에 대한 책이라고 생각했다. 저자의 이전 두 책을 읽어보지 않아서 그렇게 생각하게 된 것 같다. 어쩌면 일반적인 ‘광야’와 ‘가나안’에 대한 성도의 일반적인 인식과 같을지도 모른다. 저자도 그것을 충분히 염두에 두고 이 책을 쓴 것 같다. 그래서 첫 장부터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우리가 꿈꾸는 ‘그런 가나안’은 없다! 라니...
말씀에 대해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이미지들이 실제의 모습과는 다를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를테면 이런 문장들은 아주 생소하면서도 놀라웠다.

‘현재 이스라엘에서 경작지로 사용되는 땅은 전체 면적의 약 3퍼센트가 채 안된다고 한다.’ (28쪽)
‘예수님은 목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스라엘에는 나무가 없기 때문에 나무로 만들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 (중략) 예수님은 목수보다는 석수에 훨씬 가까운 분이셨다. (중략) 이렇게 산은 많지만 대부분이 돌산이어서 나무도 제대로 자라지 못하는 곳이 바로 가나안이다.’ (34~35쪽)
‘성경에 나오는 가나안은 land of promise가 아니라 promised land다. 하나님이 주기로 ‘약속하신 땅’이지, 장밋빛 미래가 펼쳐질 ‘약속의 땅’이 아니다.‘ (53쪽)

아... 내가 이제껏 알고 있던 가나안의 이미지는 과연 무엇이었던가!
그러나 이러한 인식의 깨어짐은 새로운 인식의 시작점이기에 의미가 있었다. 그리고 진짜 가나안의 이미지를 정립하고자 하는 열망이 생겼다.

책을 읽으며 가장 중요한 깨달음 중 하나라면 바로 ’광야‘와 ’가나안‘을 구분짓는 것 자체가 그렇게 의미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가나안이 우리가 생각하고 상상하던 그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아니며, 오히려 광야의 속성을 많이 가지고 있고, 실제로 가나안 땅에는 광야가 많다는 사실은 결국 광야와 가나안은 서로 물고 물리는 관계라는 것이다. 저자도 이것을 실제로 이렇게 우리의 삶에 적용하여 표현하고 있다.

’우리의 삶은 광야와 가나안이 뒤섞여 있다‘ (123쪽)
’진짜 가나안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 사는 것이다.‘ (138쪽)

그렇다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삶의 방식은 무엇인가?
바로 ’성공‘이 아닌 ’승리‘하는 삶이다. 성경에 나온 사람들은 성공한 사람들이 아니라 승리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 승리한 사람을 영어성경에서는 ’overcome’이라고 번역하는데, 이 뜻은 Victory가 아니다. 잘 견뎌낸 사람들이다. 매일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를 갈구하며 그것을 힘입어 삶의 여정을 잘 버텨낸 사람들, 믿음을 잃지 않고 떠내려가지 않은 사람들이다. 세상의 성공은 늘 그것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에게 상대적인 박탈감을 준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은혜는 그렇지 않다. 이 세상의 삶이 결코 겉으로 보기에 만족함을 주지 않는 경우가 여전히 많지만, 그것이 우리의 진짜 삶이 아니라는 사실. 그리고 그 와중에도 필요를 채우시는 은혜가 있기에 감사할 수 있다.

결국, 우리의 삶은 나그네 인생이다. 정처 없이 떠도는 방랑자가 아니라, 천국이라는 진짜 가나안을 목적지로 두고 이 세상에서 산다. 누군가는 애굽과 같은 눈에 보이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소망하며 살겠지만, 성도는 그곳이 광야인지 가나안인지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이 찬송가의 고백이 얼마나 위대한지! 광야 같은 인생길 속에서도 주님이 약속하신 그 땅을 소망하며 사는 그리스도인에게 이 길은 위대한 여정이 될 것이다.

아래와 같은 분들에게 이 책을 읽기를 추천한다.
- 앞길이 보이지 않는 광야 같은 인생길을 걸어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리스도인
- 나는 지금 주님이 주신 약속을 충분히 누리는 가나안에 있다고 생각하는 그리스도인
-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하고 방황하는 것 같은 그리스도인

이 책에는 각자의 상황이 어디인지를 따라 읽어야 할 성경이 다르다고 소개하고 있다.
궁금하신 분들은 이 책을 읽으면서 자신이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여정 속에서 어디쯤 있는지를 점검해 보는 것도 의미있을 것 같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보다 중요한 것은 누구와 함께 있느냐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 인생의 승리와 패배를 규정지을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기는 인생이 되기를 축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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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아말렉과 싸운다 - 나의 옛사람과 반드시 치러야 할 전쟁
이승희 지음 / 두란노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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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린도후서 5:17)

이 구절을 읽으면 어떤 생각이 드는가? 가슴이 뛰는가? 그렇다. 실로 이 선언은 가슴뛰는 선언이다. 마치 8.15 해방의 그 날과 같은 느낌일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런 생각도 든다. ‘정말 나는 새로운 피조물인가? 나의 삶은 별로 변한 것이 없는 것 같은데.’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내 삶은 달라졌다. 그러나 또한 분명한 것은 나의 옛 모습 또한 남아 있다. 그저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너무도 잘 살아 있어 당황스러울 때도 있다. 오죽하면 사도 바울도 자신을 ‘곤고한 사람’이라고 표현했을까. 그야말로 인류 최대의 난제다.

이 책은 새롭게 되었으나 여전히 살아 숨 쉬는 이것을 ‘아말렉’이라 이름지었다. 성경에 등장한 아말렉 족속의 정체성과 특징에 대해 논하면서 오늘 내 삶에 살아 숨쉬는 아말렉이 무엇인지, 이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섬세하게 밝히고 있다.

불신

이 책에서 지적하는 아말렉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불신’이다. 그리고 이 불신은 두려움과 연결된다. 두려워할 이를 두려워하지 않음이 불신의 중심에 있다.

‘아말렉은 우리 속에 있는 불신의 성향입니다. 불신의 성향이 있으면, 하나님이 가나안 땅에 이끌어 주셔도 그곳에서 풍요로움을 누릴 수 없습니다.’ (43쪽)

그리스도 안에 거하면 그리스도를 불신하지 않는다. 자녀가 부모의 품 안에서 만족함과 안정감을 느낀다. 자녀가 느끼는 가장 큰 불안이 무엇일까? 바로 부모로부터 분리되는 것이다. 가장 신뢰하는 부모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상황에 놓일 때 자녀는 불안을 느낀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 안에 온전히 거하면 두려울 것이 없다. 가장 두려운 것은 하나님 안에 거하지 않는 상태일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한다면, 다른 어떤 것을 하나님 대신 의지할텐데 그것이 절대 그를 만족시키거나 안정감을 줄 수 없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역설적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불신앙이 그를 두렵게 만들고, 그 두려움이 자신을 공격하게 되는 것이다.

현재에 집중하기

아말렉과의 지난한 싸움에서 승리하는 비결로 저자는 ‘기억하기’와 ‘기억에서 지워 버리기’를 성경 본문을 근거로 말한다. 아말렉이 어떤 존재인지를 기억하라는 메시지는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적을 알아야 적과 싸울 것 아닌가. 그런데 ‘지워 버리라’는 말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책을 읽으면서 이것이 ‘무엇에 초점을 맞추고 살아갈 것인가’라는 의미임을 깨닫게 되었다. 아말렉을 기억하는 것은 문제의 예방 혹은 진단이 될 수는 있으나 이것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묵상할 것은 하나님이 되어야지, 아말렉이 되어서는 안 된다.

‘어제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일하신 하나님의 날이고(Yesterday is his-story), 내일은 그의 약속을 이뤄가는 것을 누릴 날이며(tomorrow is my-story), 오늘은 그의 약속을 믿고 따르는 백성에게 선물로 주신 날이다(today is a God-gift). 그러므로 현재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다(So the present is present).’ (118쪽)

쿵푸팬더의 유명한 대사를 멋지게 바꾼 이 말이 가슴에 와닿는다. 그리스도인은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변치 않으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근거로 기뻐하며 하루하루를 감사함으로 누릴 수 있다. 내가 하나님을 신뢰하는 만큼 나의 하루는 더욱 풍성해질 것이다!

하나님의 지팡이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도구가 필요하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도구는 무엇일까? 여러 가지 비유들이 있겠으나, 이 책에서는 ‘하나님의 지팡이’를 말한다. 누구의 지팡이냐가 중요하다. 모세가 가진 지팡이는 흔하디 흔한 지팡이였으나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하나님의 지팡이’가 되었다. 그리고 모세는 그 지팡이를 가지고 홍해를 가르고, 반석에서 물을 내고, 기도함으로 아말렉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였다. 하나님은 이미 모세가 가지고 있던 일상의 도구를 새롭게 탄생시키셨다.

나에게 모세의 ‘하나님의 지팡이’와 같은 것은 무엇일까? 중요한 것은 모세가 자신의 지팡이를 ‘하나님’의 지팡이라고 인식했다는 것이다. 내가 무엇을 통해 하나님의 일하심을 드러내고 또한 경험할 것인지는 지금 여기에서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잘 살펴보는 것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그 주체가 바로 하나님 자신이심을 인정할 때 내 삶에서 하나님께서 더욱 역사하실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내 안에 여전히 살아 숨쉬며 틈을 타서 공격하는 나의 옛 자아를 살펴보게 되었다. 때로 그것이 상처가 남긴 흉터마냥 내 삶에서 지워지지 않는 모습인 듯 여겨질 때가 있다. 물론 쉽지 않은 과정이지만, 성경은 분명히 이 지긋지긋한 아말렉을 지워 없앨 수 있음을 말씀하고 있다. 주님은 우리가 이 선한 싸움을 잘 싸워내기를 원하시고, 그러시기에 이 싸움을 이길 힘 또한 주신다. ‘최후 승리를 얻기까지 험한 십자가 붙들겠네’의 고백이 이 글을 읽는 모두에게 주어지기를 축복한다. 아말렉을 기억하자. 그리고 아말렉을 지워 버리자.

구원의 감격을 얻고도 옛 자아, 쓴 뿌리로 인해 온전히 기쁨을 누리지 못한다고 생각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책을 읽기를 추천한다. 이것이 소모전이 아니라 이미 끝난 전쟁에서 도망가며 끝까지 발악하는 패잔병을 물리치는, 승리를 확정짓는 마지막 전투임을 기억하자. 주님은 참으로 우리의 승리의 깃발, 여호와 닛시가 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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