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타르인의 사막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3
디노 부차티 지음, 한리나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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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타르인의 사막(문학동네/한리나 옮김/1940)』은 환상 문학의 거장으로 불리며 보르헤스, 쿳시 등 대가들의 찬사를 받은 디노 부차티의 국내 초역 장편이다. 글쓰기 이외에도 그림, 무대 디자인 등 여러 방면에서 다재다능함을 증명했던 그는 스스로를 기자와 작가를 취미로 하는 화가라고 일컫는데 시선을 뗄 수 없는 표지의 삽화 역시 부차티의 작품이다. 중국어판과 영어, 프랑스 판의 표지 역시 요새를 내세우지만 부차티의 그림은 무척이나 매혹적이다.

 

 

장교로 임명된 조반니 드로고가 도시를 떠나 그의 첫 부임지인 바스티아니 요새로 향한 것은, 9월 어느 아침이었다.(7p)”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타타르인의 사막은 도시를 떠나며 드로고가 떠나야했던 것들, ‘요새로 향하며의심과 열망을 비롯한 감정의 격동과 동시에 그가 겪어낸 것들과 매번 같은 얼굴이지만 현격히 멀어져 가는 ‘9월 어느 아침들에 대한 이야기다. 물론 9월의 어느 아침들은 하루의 어느 때, 사계절의 어느 시기로건 대체될 수 있다. 그리고 요새로 가는 길에 들은 말들, 요새라니요?”, “무슨 요새 말입니까?(11p)”에서는 이제 시작이군!’하는 혼잣말을 내뱉게 한다. 부차티가 도스토옙스키와 카프카의 문학에서 영감을 받아왔다는 해설의 소개처럼 도입부에서 또렷이 연상되는 장면들이 있다. 바로 요새를 찾아가는 드로고의 여정이 카프카의 에서 성을 찾아가는 토지측량사 K나 알바로 무티스의 작품에서 제제소를 찾아가는 마크롤 가비에로와 겹쳐 보인다.

 

 

요새에 들어섰으나 드로고의 마음은 불편하다. 지금 돌아가고 싶다, 당장 돌아가겠다고 말하나 절차때문에 적어도 이 주 정도는 걸린다는 답을 듣는다. ‘이 주의 유예중위가 여기서 넉 달을 머무른다면 최선의 해결책이 될 겁니다.(34P)”라는 말로써 넉 달로 연기되고 보이지 않는 올가미는 마련된다. 그리고 바로 이날 밤-, 그가 그 사실을 알았다면 잠 같은 건 달아나버렸을 것이다-바로 이날 밤, 그에게서 시간의 돌이킬 수 없는 도주가 시작되었다. (60P)” 시간의 돌이킬 수 없는 도주라니! 한참을 이 문장에 빠져있다.

 

 

시간을 말하는 작품들은 주저없이 선택하고 아끼게 되는데 타타르인의 사막시간의 해부도라 볼 만큼 시간이 간직하고 있는 거의 모든 ’, 드러나 있거나 숨겨진 비밀들을 끌어내 펼쳐보인다. 문장까지 아름답고 처연하게, 반박할 수 없는 논리로 시간을 그려내기에 읽는 내내 허망함과 긴장, 슬픔과 후회, 무엇도 담보할 수 없는 미미하고 소모적인 인간 조건인 노력 또는 노오력에 부대낄 수 밖에 없었다. 드로고가 겪는 감정들과 때로 전면에 드러나는 두려움은 곧 나의 것이고, 매마른 땅을 바라보는 눈은 그가 아닌 독자의 것이라는 사실에 더 늦기 전에 도망쳐, 드로고! 지금 속고 있는 거야!” 그를 흔들고 싶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무엇으로부터?’ 라 묻게 된다. 요새로부터, 사막과 타타르인의 전설로부터, 환영이나 망상으로부터, 벌거벗은 임금님처럼 허울뿐인 자부심으로부터, 머리를 쓰고 너를 속이며 가장무도회를 끝내지 않는 악한 동료들로부터! 그러나 결국 시간으로부터, ‘으로부터에 이르자 도망치는 것은 그 무엇도 고칠 수 없음을, 우린 결코 도망칠 수 없음을 깨닫고 만다. 좋은 것은 뒤에, 아주 뒤에 있는데, 그가 모른 채 그 앞을 지나쳐버렸다고. , 되돌아가기에는 이제 너무 늦었고, 뒤에서는 그를 쫓아오는 무리의 웅성거림이 점점 크게 들려온다. 하지만 텅 빈 하얀 길 위에서, 그들의 모습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63P)” 모른채 지나가 버렸던 그 많은 것들, 왜 알아보지 못했을까, 그저 스쳐버렸던 그 많은 것들을 그려본다.

 

 

그들의 행운과 모험, 그리고 적어도 각자가 한 번쯤은 경험할 기적같은 시간이, 저 북쪽 사막으로부터 올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불분명해지는 이 막막한 우연을 위해, 군인들은 인생의 전성기를 요새에서 소모하고 있었던 것이다.(71P)” 다른 선택은 불가능했을까 물었을 때 이미 너무 늦었다, 또는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하는 변명이 따른다. 시간은 드로고를 비롯한 사람들을 길들이고 익숙한 습관은 무감각한 일상으로 안락함을 선사한다. 실존과는 거리가 먼, 그 순간에도 시간은 무서운 속도로 도피하고 있음을 감추는 안락함이다. 한편, 책상 맞은편의 시계추는 계속해서 삶을 바스러뜨리고 있었다. (141P)”

 

 

초현실적으로 열악한 상황에서도 비열하고 이기적인 본성에 충실한 모략과 갈등은 너무도 현실적이다. 인간의 여러 유형이 단순하기에 더 웅장한 서사 아래 경고하듯 흔적을 남긴다. 마치 내일이라는 시간이 있을 것처럼 내일 해야 할 일······(167P)”을 마지막 말로 남기는 앙구스티나는 어리석은 것인가, 애처로운 것인가, 누구나 그럴 것인가. 그때로부터 사 년이 지났다. 인생의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는 시간이었다. 수많은 희망이 옳았음을 보여줄 만한 일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루하루의 나날들은 쏜살같이 지나갔다.(173P)” 작품 속 시간의 흐름은 귓전에 초침이 울리듯 점점 압박감을 더해가고 꽤 실제적으로 감각된다.

 

 

미처 자각할 틈도 없이 우리가 맞을 마지막 시간. 드로고는 삶의 중요한 일이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는 환상을 놓지 않는다. 그는 결코 오지 않은 자기의 때를 인내심 있게 기다린다. 미래가 끔찍할 정도로 짧다는 생각, 다가올 시간이 무한하며 아무 거리낌 없이 낭비해도 되는 무궁무진한 부유함처럼 여겨졌던 옛 시절이 더는 아니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241P)” 새로 부임해 오는 중위를 우연히 만나는 드로고는 오래전 기억속에 생생한 그날을 떠올린다. 계속해서 또 다른 조반니 드로고들은 요새에 도착할 것이고 떠날 것인지, 어떤 교훈도 약속도 없이, 마치 시지프스처럼! 드로고가 마지막 적, 북쪽의 이민족 타타르인이 아닌 인류 공동의 적을 만나는 마지막 장면들은 가슴아픈 여운을 남긴다.

 

 

군에서는 이 년이라는 시간은 사회 경력상 사 년에 해당한다고(18P) 유혹적인 조건을 내놓기도 하면서 속도를 가늠할 수 없는 물리적인 시간 크로노스에 견주어 퇴색되지 않을 의미로 남을 수 있는 시간인 카이로스가 떠오르기도 했다. 익숙한 습관이 주는 편안함을 경계하기 위해 깨어있는 의식을 경주할 것, 그와 같은 나의 익숙함의 고리는 무엇일까도 되새겨본다. 때론 장편의 연작시같고 꿈속 장면에서는 동화 같기도 해서 하나의 소설 안에서 다채로운 감동을 경험했다. 쿳시의 야만인을 기다리며가 이 작품에서 영감을 받아 나온 만큼 다음 독서로 이어질 수도 있겠고, 무엇보다 부차티의 단편집 “60개 이야기가 출간을 앞두고 있다니 설레인다. 기다리는 동안 발레리오 주를리니 감독의 영화로, 그 안에서 엔니오 모리꼬네의 주제 음악으로 맥박에 맞춰 심장이 뚝뚝 떨어지는 것같은 작품 타타르인의 사막을 감상하며 기억하려 한다. 가장 좋은 방법은 물론 재독겠지만. 어쩌면 발췌와 필사도 필요한 새겨야 할명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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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엔지니어가 될 거야 BBC 과학 프로그램 진행자인 시니 소마라 박사가 들려주는 직업 이야기
시니 소마라 지음, 나자 사렐 그림, 박정화 옮김 / 바나나북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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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니 소마라 박사의 나는 엔지니어가 될 거야(바나나BOOK/나자 사렐 그림)는 아이들과 눈을 맞추며 엔지니어에 대해 알려주는 진로 그림책입니다. 공학박사이며 엔지니어인 시니 소마라는 과학 프로그램 진행자이자 어린이책 작가이기에 아이들에게는 최고의 안내자가 분명합니다. 엔지니어는 자주 들을 수 있는 익숙한 직업이지만 곧바로 설명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어디부터 시작해야 할까, 내가 생각하는 것은 전체의 일부분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도 스칩니다. 답을 찾아가는 길, 엔지니어를 꿈꾸는 친구들과 그 세계를 함께 탐색해 볼 생각에 설레이네요.

 

화사한 하늘색 표지, 이 소녀도 엔지니어가 되고 싶은가 봅니다. 면지를 여니 종이비행기 접는 순서가 그려져 있어요. 나도 아는데, 하지만 뭔가 다른 부분이 눈에 띕니다. 종이를 가져오게 되네요. 이야기가 시작되고 첫 장면인 세아의 방에는 여러 모양의 종이 비행기가 보입니다. 다른 종이로, 다른 크기로 접은 비행기들과 구긴 종이뭉치도 보이는데 이번 비행기 역시 나는 듯 하다 바로 추락하네요. 이때 할머니가 접은 종이비행기는 멋지게 날아갑니다.

 

할머니와 집을 나선 세아는 가는 길에 만나는 궁금한 것들을 실컷 질문합니다. 엘리베이터는 물론 크레인과 불도저, 늘 멋진 롤러코스터와 에스컬레이터의 구조와 작동 원리를 배워갑니다. ‘주파수 도약기술을 만든 헤디 라머와 알리시아에스볼러 데이비스나 레오나르도 다빈치, 파즐루 칸 등 훌륭한 엔지니어들도 새롭습니다. 이 날의 외출은 세아에게 새로운 세계로의 초대장 같습니다. 할머니는 비행기를 설계한단다. 조금 전에 이야기했던 사람들처럼 할머니도 엔지니어란다. 최고의 직업이지. 늘 새로운 것을 연구하고 문제점을 해결한단다. 엔지니어가 된다는 건 어떤 일을 끝까지 해낸다는 거야. 실패할 수도 있지만 성공할 때까지 계속 시도하는 거지!(책 속에서)” 할머니는 세아 뿐 아니라 모든 친구들에게 엔지니어의 세계를 설명합니다.

 

마지막 장은 관찰하고 질문하고 도전하는 일련의 과정을 즐기도록 질문을 던집니다. “왜 뜨거운 음식은 결국 차갑게 식을까요?”같은 질문이에요. 또한 엔지니어의 문제 해결법으로 아이디어와 실험 예시가 재미있게 담겨 있어요. 복잡해서 모르겠다 할 수 있는 엘리베이터나 크레인의 구조도 핵심을 부각한 그림으로 보니 신기하고 궁금증을 채워줍니다. 전체적으로 밝은 색채와 인물의 표정이 딱딱할 것 같은 지식 그림책을 푹 빠져서 즐기게 해주네요. 이제 이 책 한 권이면 엔지니어는요~”하고 자신있게 말하고 또 꿈을 키워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음 직업 이야기도 기다려집니다.

   

 

[출판사에서 도서를 무상으로 제공받아 솔직하게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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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와 쥐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4
귄터 그라스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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귄터 그라스의 『고양이와 쥐(1961/문학동네/박경희 옮김)』 는 작가의 잃어버린 고향을 기억하는 단치히 3부작 중 한 권으로 첫 소설 양철북 다음에 출간되었다. 올해가 귄터 그라스가 세상을 떠난 지 육 년, “고양이와 쥐”가 발표된 지 육십 년이 되는 해(194p)라는 말에 조금 더 일찍 귄터 그라스를 접하지 않았고, 못했던 스스로가 아쉽다. 출간 후 환영보다는 비판과 논란에 시달렸다는 “고양이와 쥐”는 1999년 노벨상을 수상한 귄터 그라스가 내내 집중했던 주제를 담아낸다. 살만 류슈디의 “홀로코스트를 두고, 독일인이 스스로 선택했던 맹목성에 대해 반 유대주의자라면 결코 쓸 수 없었을 역대 최고의 반나치 걸작들을 쓴 작가”라는 설명(193p)을 앞으로 읽어갈 귄터 그라스를 위해 기억하려 한다.

 

 

“그러나 나, 너의 쥐를 한 마리의 그리고 모든 고양이의 눈에 띄게 했던 나는 이제 써야만 한다. 설사 우리 둘마저 허구라 해도 나는 그래야 할 것이다.(8p)” 자책 같기도 고백 같기도 한 문장이 스스로에게 선고를 내린다. 문제의 발단은 쥐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까? 숨고 싶은 쥐는 내내 등장하고 발톱을 드러낸 고양이 앞에 때로 속수무책으로 움츠리고 때로는 비현실적으로 압도하기도 하고, 혹은 무심한 척 기다린다. 말케의 울대뼈, 후두는 눈에 띄는 공격 대상이었고, 단지 그 이유로 무리는 태연히 자신들의 행동을 은연중에 정당화한다. 의도치 않은 시선집중을 피하고자 말케는 특별한 의미로 포장한 물건들을 치렁거리며 걸어보고 가려본다.

 

 

“수영을 할 줄 알기 전에, 너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따금 호명되면 대체로 정답을 말하며, 요아힘 말케라 불렸을 뿐. (중략) 그 무렵 큰 사건들이 세계를 뒤흔들었으나 말케의 시간은 자유롭게 수영하기 이전과 자유롭게 수영하게 된 이후로 나뉘었다.(36p)” ‘아무것도 아니었던 소년’이 ‘매우 특별한 말케(32p)’가 되어 모순된 의미를 지닌 갈채를 받기도 하다가 ‘위대한 말케’가 되기까지의 팽팽한 시간을 기록자인 필렌츠의 목소리로 듣게 된다. “실제 마주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보는, 두려움이 깃들고 물기어린 눈(53p)”을 가진 말케의 적극적인 대응과 소리 없는 견딤은 마지막 장을 덮고 회상하는 이 시간 더 아프게 다가온다.

 

 

경외의 대상이었던 말케는 “부풀어오르는 소음의 한가운데서 경탄은 뒤집혔다. 우리는 그가 혐오스러웠고 그를 외면했다.(81p)” 더 이상 같은 대우를 받지 못한다. 학교 졸업생이자 해군 대위의 훈장 분실 사건과 말케의 대응, ‘전대 미문의 사건’이라며 내린 학교의 퇴학 조치, 어느날 다시 나타난 그는 조금 달라져 있다. 보지 못하는 동안에도 결코 잊히지 않았던 그에 대해 “무엇보다 흔적이 남아 있었다. 잿빛이든, 검정이든, 얼룩무늬든 고양이만 보면 내 눈앞에는 쥐가 스쳐지나갔다. 그러나 나는 계속 머뭇거리며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작은 쥐를 보호해야 할지, 고양이들을 부추겨 사냥하도록 해야 할지.(134p)”라고 회상하며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말케를 쫒던 필렌츠는 선망과 질시 사이에서 감정의 극단을 오가다 말케의 소망이었던 자신이 다녔던 학교에서의 멋진 강연이 좌절되는 것을 지켜본다. 대신 한 사람의 관객 앞에서 들려주는 강연은 먹먹한 울림을 준다. “그러나 가장 큰 고요를 만들어낸 것은 너 요하임 말케였다. 내가 내는 소음에도 답할 줄 모르던.(180p)” 이어지는 ‘그러니까’, 하지만 ‘그러니까’가 백 번 이상 반복되어도 회복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시간적 배경이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1939년부터 패전한 1945년 무렵까지라는 특수성을 배제한다면 소년들의 성장소설로도 읽힐 것이다. 내내 연상되는 작품이 존 놀스의 “분리된 평화”나 프레드 울만의 “동급생”이었듯이 소년들, 특히 주인공 말케와 서술자 필렌츠의 역학관계에 이끌렸다. 동시에 중반 부터는 본격적으로 예상하는 결말이 다가오겠지 하는 불안감이 엄습했고, 다만 그 결말이 너무 참담하지 않기를 바랬다. 건조하고 사실적인 문장, 때론 시같고, 노래같은 반복이 인상깊었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자 애도의 서로써 말케 뿐만 아니라 광기어린 시대와 후에는 웃어넘길 지언정 아슬아슬한 통과의례로써의 찬란함과 잔혹함이 공존하는 유년의 시기를 엿볼 수 있었다. 필렌츠는 말케의 심중을 예상해 “너는 생각했을 것이다. (중략) 어서 이 겨울이 지나갔으면. 나는 다시 잠수해서 물속에 머물고 싶다.(70p)”고 말한다. 물 속으로, 물 속으로 인간의 조건을 벗어난 공간만을 자신의 기지로 삼아야 했던 소년의 이야기를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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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걱정러의 5만 생각과 픽토그램
미셀 리알 지음, 김지혜 옮김 / 아트앤아트피플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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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리알의 『5만 생각과 픽토그램(아트n아트피플/김지혜 옮김)』 은 제목부터 신선하다. ‘오만가지’를 찾아보니 오픈사전에서는 -여러가지, "오만개의 가짓수만큼" 비유적 표현- 이라 하고, 국어사전은 -매우 종류가 많은 여러 가지. 또는 그런 것-으로 명명한다. 원제목이 궁금할 수 밖에 없는데 “AM I OVERTHINKING THIS?”로 표지에서는 OVERTHINKING만을 표기하고 있다. 이래저래 압사 직전까지 과하게 눌릴 걱정과 생각의 무게를 쉽게 연상할 수 있고 너무도 친근한 현상이라 그 처방이 무척 궁금하고 기대된다. 책을 처음 받았을 때의 느낌은 “이건 너무 예쁘잖아!”였다. 판형과 앞 뒤 표지의 흰 바탕과 겹치며 그려낸 색색의 벤다이어그램 속 낱말들이 ‘준비되었나요?’ 하며 시동을 거는 듯하다.

 

 

서문에서는 책의 사용법 및 정체성을 밝힌다. 앞서 속표지 이후 한 장을 할애한 분수 형식의 헌사나 “이 책은 도표 책이 아니다.”로 시작해서 “아, 그리고 이 책은 도표 책이다.”로 마치는 서문의 구조 또한 신선지수를 계속 상승시킨다. “5만 생각과 픽토그램”은 “일상 속 걱정, 오늘 뭐 먹지?, 이메일 제목 뭘로 하지?, 어른이 된다는 것, 인간관계, 이런저런 온갖 생각, 진지한 고민들”까지 일곱 가지 대주제를 중심으로 질문 형식의 항목들을 각각 한 페이지씩 할애한다. 픽토그램이 그림을 뜻하는 픽토(picto)와 전보를 뜻하는 텔레그램(telegram)의 합성어로 누가 봐도 의미를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그림문자라고 사전은 정리하고 있는데 “5만 생각과 픽토그램”이 바로 이 정의에 완벽히 부합한다.

 

 

“고데기 안 끄고 나왔나?”, “소파 뭘로 사지?”, “살까 말까?”, “버릴까 말까?”등의 기본 장착된 혼잣말을 지나가면 “어떻게 평정심을 유지할까?”, “아직도 모르겠는가?”와 같은 오래 멈춰있게 붙잡는 장면들을 만나게 된다. “할 수 있는 건 다 하고 있나?”는 내게 너무 일상적인 질문이라 위로가 되었다. 나의 경우 이 질문의 확장으로 “혹시 지금 해야 되는데 안하고 있는 게 있을까?”, “다른걸 해야 되는데 이걸 하고 있는거면 어떻하지?”, “내가 뭔가 잘못하고 있는게 아닐까?”등이 수시로 등장하며, 뒤따르는 것은 심호흡과 두근두근이다. 하지만 앞으로는 이 책을 펴고 종이와 펜을 찾지 않을까 싶다. 단순성은 기본이고 자유롭고 창의적인 표현이 놀랍다. 컬러테라피를 받듯이 아름다운 색을 즐길 수 있고 사물의 재치있는 활용은 그 자체로 일상을 재발견하는 기쁨을 준다. 충분한 여백 또한 의미있는 배려다. 이 책과는 더 많이 친해질게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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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과 편견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54
제인 오스틴 지음, 류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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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문학동네/류경희 옮김/1813)』 은 화사한 분위기의 영화이미지가 먼저 오버랩 되는 작품이었다. 달달한 로맨스에 무슨 유익이 있으리 하는 ‘편견’으로 아직 영화를 보지 못한 채 펼친 “오만과 편견”은 장면 곳곳에서 무언가를 떠올리느라, 감정을 따라가느라, 예측하거나 기대하느라 읽다 멈추기를 반복하게 했다. “소설을 쓰는 셰익스피어”라는 찬사를 읽을수록 이해할 수 있었다. 시간이 흘러 여섯 편의 소설로 문학사의 중요한 위치를 점하게 된 제인 오스틴. 결혼 권장 또는 결혼 필수 시대를 평생 독신으로 살며 정착하지 못하고 불안정했을 그녀의 삶이 명민한 의식으로 갈등과 문제를 포착해 내어 자전적 경험을 승화시킨 일면이 “오만과 편견”의 사실성에 기반한 내적인 힘을 확고히 했을 것이다.

 

 

“큰 재산을 가진 미혼 남자라면 마땅히 아내가 필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진리다.(9p)” 소설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그리고 굳건한 ‘진리’가 바로 등장하는데 큰 재산을 가진 미혼 남자인 ‘그’는 “그들 딸들 중 누군가가 으레 취할 재산으로 여겨진다.(9p)”는 점이다. 꽤 자극적인 도입부가 가능한 것은 지금부터 200여년 전 18세기의 영국으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기 때문이다. 다분히 목적지향적,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관계의 의도들, 결혼 집착은 시대적 배경을 이해할 때 설명된다. 사회적 계급을 뚜렷이 체감할 수 있었고 상류사회에서도 조건이 곧 명함이던 때 ‘한사상속’이라는 제도는 베넷 가를 더 긴장하게 만든다. 방어수단이라고는 없는 여성의 지위는 때론 감정 마저도 목적을 위한 도구로 왜곡시킨다. 선택의 문제가 아닌 생존의 문제가 되면 수용의 폭은 넓어지고 뭉뚱그려 묵과하게 된다. 예를 들어 엘리자베스의 친구 샬럿 루커스처럼 ‘속셈’을 따로 두고 ‘너무하는 거 아닌가’에서 결국 ‘안쓰럽다’는 동정여론으로 선회하게 되는 것처럼.

 

 

강력한 방어기제 한 두 개 만으로 심플하게 평생을 밀어붙이는 엄마 베넷 부인, 돋보이는 유머와 여유를 이기적 무관심이라는 치명적 약점을 포장하는 도구로도 삼아 은근히 가족에게 상처주기도 하는 아버지 베넷 씨, 사람인가 천사인가 싶은 순백의 영혼 맏딸 제인, 찬탄의 순간을 규칙적으로 선사하는 우리의 주인공 엘리자베스, 그 밖에도 개성 강한 동생들까지, 베넷 가 사람들을 중심으로 1년여간의 사랑과 오해, 갈등과 관계의 회복, 성장을 보여준다. 속내를 꺼내 지나치다 싶을 만큼 눈앞에 흔들어 댐으로, 계산의 수가 보이는데 늘 틀린 계산이기도 해 바보임이 확실하다 싶은 사촌 콜린스 씨를 비롯한 다양한 성격의 인물들은 서사에 활력과 재미, 풍성한 색조를 덧입힌다.

 

 

다아시를 처음 만났을 때 엘리자베스는 자존심에 상처를 받고 그는 오만하다고 확정하는데 ‘편견’의 시작이다. “종종 오만이 허영심과 동의어로 사용되지만 사실은 아주 달라. 허영심 없이도 오만할 수 있어. 오만은 우리 자신에 대한 우리 스스로의 평가와 더 관련이 있고, 허영심은 타인이 우리에 대해 생각해주기를 바라는 바와 더 관련이 있거든.(31p)” 엘리자베스는 이후 다아시와 대화의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신의 첫인상에 근거해 주장을 펴나 다아시는 재기발랄하고 특별한 그녀를 스며들 듯 아끼고 사랑하게 된다. 그러나 엘리자베스는 후에 “자신이 눈이 멀었고, 편파적이었고, 편견을 품었고, 어리석었다고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268p)”고 스스로를 통찰하고 허영심, 편견과 무지에 자신 또한 사로잡혔음을 인정한다(268p).

 

 

결혼의 다양한 형태는 자연스레 등장한다. 엘리자베스에게는 상상할 수 없지만알다시피 나는 낭만적인 사람이 아니잖아(166p)’라며 세속적인 이점을 갈등없이 선택함으로 이루어지는 샬럿-콜린스 부부, 배우자에 대한 빠른 파악과 포기, 온당치 못한 태도를 견지했던 베넷씨와 아내, 특히 엘리자베스는 “이토록 안 맞는 결혼이 자식들에게 끼치는 불이익을 지금처럼 강하게 느낀 적이 없었고, 재능이 잘못된 방향으로 쓰이는 데 따른 해악을 이토록 온전히 느낀 적도 없었다.(302p)”라고 가슴 아파한다. 베넷 가의 막내 부부는 안타까움을 남기고 제인과 빙리, 엘리자베스와 다아시까지는 앞으로의 상상의 몫까지 추가한다.

 

 

생기 넘치고 때론 실랄한 대화의 열기는 “오만과 편견”을 읽는 가장 큰 즐거움 중 하나다. “겸손한 척하는 것보다 더 기만적인 태도도 없습니다. (중략) 겸손이란 종종 그저 의견이 없다는 소리죠. 때로는 간접적인 자기 자랑에 불과하고요.(67p)” 개념을 자신의 말로 정리하는 문장들은 인물의 성격을 드러낸다. 유머 넘치는 문장들 또한 갈등의 긴장을 해소시킨다. 리드미컬하게 이어지는 대화에서 때론 나쁜 의도가 담긴 인간 행동들과 심리를 비춰볼 수 있는데 어리석지만 억제하기도 쉽지 않은 지점을 확인케 한다. “저는 고집이 있어서 마음대로 겁주려는 사람들 앞에서 절대 겁먹지 않죠. 누가 겁을 주려 할 때마다 오히려 용기가 더 솟아요.(227p)”라는 엘리자베스의 말은 후에 캐서린 드 버그 귀부인과의 숲속 논쟁에서 충분히 증명된다. 엘리자베스와 다아시의 후반 장면들, 특히 3부 16장에서는 셰익스피어의 대사들을 연상시킨다. “엘리자베스 양을 향한 제 사랑과 소망은 변함이 없습니다. 하지만 한마디 말씀으로 이 일에 대해 저를 영원히 침묵하도록 하실 수 있습니다.(464p)” 마치 세레나데 같은 말들이 봄날의 아지랭이 같다.

 

 

엘리자베스가 특별한 이유는 제인 에어가 틀을 깬 새로운 전형인 이유와 같다. 시대에 반하는 드물고 경이로운 표본을 제시하기 때문이고 첫 시도의 성공은 확장된 가능성과 카타르시스를 선물한다. “하지만 이 작품이 특히나 여성 독자에게 사랑을 받는 데에는, 신데렐라 이야기를 뛰어넘어 세계문학사에서 가장 유명한 여성 캐릭터 중 하나로 손꼽을 수 있는 엘리자베스 베넷이라는 여성상이 제시되기 때문일 것이다.(496p)” 다크 초콜릿으로 버무려 슈가 파우더로 장식한 듯 절정에서 마무리 된 이야기를 덮으며 그들의 결혼 생활을, 나아가 함께 맞을 중년과 노년까지도 보고 싶어 자꾸 머릿속에 그려본다. 영화 “비포 선라이즈”가 “비포 선셋”에서 “비포 미드나잇”까지 내심 ‘뭐 이렇게 까지나······이정도로 궁금치는 않은데요’ 할 때까지 놀래키며 나왔듯이, 또 내 시간도 동일하게 흐른 줄 모르고 빨리감기 한게 아닐까, 주인공들의 세월 흔적에 의아했음에도, 엘리자베스와 다아시, 제인과 빙리의 이후 시간에 대한 불가능할 그림을 꿈꿔 본다. 어쩌면 가능할 수도 있을까, ‘오마주’라는 마법의 펜, 비장의 무기를 사용한다면? 화사한 분위기의 영화 “오만과 편견”은? 물론 볼 생각이다. 더 이상 편견 따위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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