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만과 편견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54
제인 오스틴 지음, 류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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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문학동네/류경희 옮김/1813)』 은 화사한 분위기의 영화이미지가 먼저 오버랩 되는 작품이었다. 달달한 로맨스에 무슨 유익이 있으리 하는 ‘편견’으로 아직 영화를 보지 못한 채 펼친 “오만과 편견”은 장면 곳곳에서 무언가를 떠올리느라, 감정을 따라가느라, 예측하거나 기대하느라 읽다 멈추기를 반복하게 했다. “소설을 쓰는 셰익스피어”라는 찬사를 읽을수록 이해할 수 있었다. 시간이 흘러 여섯 편의 소설로 문학사의 중요한 위치를 점하게 된 제인 오스틴. 결혼 권장 또는 결혼 필수 시대를 평생 독신으로 살며 정착하지 못하고 불안정했을 그녀의 삶이 명민한 의식으로 갈등과 문제를 포착해 내어 자전적 경험을 승화시킨 일면이 “오만과 편견”의 사실성에 기반한 내적인 힘을 확고히 했을 것이다.

 

 

“큰 재산을 가진 미혼 남자라면 마땅히 아내가 필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진리다.(9p)” 소설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그리고 굳건한 ‘진리’가 바로 등장하는데 큰 재산을 가진 미혼 남자인 ‘그’는 “그들 딸들 중 누군가가 으레 취할 재산으로 여겨진다.(9p)”는 점이다. 꽤 자극적인 도입부가 가능한 것은 지금부터 200여년 전 18세기의 영국으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기 때문이다. 다분히 목적지향적,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관계의 의도들, 결혼 집착은 시대적 배경을 이해할 때 설명된다. 사회적 계급을 뚜렷이 체감할 수 있었고 상류사회에서도 조건이 곧 명함이던 때 ‘한사상속’이라는 제도는 베넷 가를 더 긴장하게 만든다. 방어수단이라고는 없는 여성의 지위는 때론 감정 마저도 목적을 위한 도구로 왜곡시킨다. 선택의 문제가 아닌 생존의 문제가 되면 수용의 폭은 넓어지고 뭉뚱그려 묵과하게 된다. 예를 들어 엘리자베스의 친구 샬럿 루커스처럼 ‘속셈’을 따로 두고 ‘너무하는 거 아닌가’에서 결국 ‘안쓰럽다’는 동정여론으로 선회하게 되는 것처럼.

 

 

강력한 방어기제 한 두 개 만으로 심플하게 평생을 밀어붙이는 엄마 베넷 부인, 돋보이는 유머와 여유를 이기적 무관심이라는 치명적 약점을 포장하는 도구로도 삼아 은근히 가족에게 상처주기도 하는 아버지 베넷 씨, 사람인가 천사인가 싶은 순백의 영혼 맏딸 제인, 찬탄의 순간을 규칙적으로 선사하는 우리의 주인공 엘리자베스, 그 밖에도 개성 강한 동생들까지, 베넷 가 사람들을 중심으로 1년여간의 사랑과 오해, 갈등과 관계의 회복, 성장을 보여준다. 속내를 꺼내 지나치다 싶을 만큼 눈앞에 흔들어 댐으로, 계산의 수가 보이는데 늘 틀린 계산이기도 해 바보임이 확실하다 싶은 사촌 콜린스 씨를 비롯한 다양한 성격의 인물들은 서사에 활력과 재미, 풍성한 색조를 덧입힌다.

 

 

다아시를 처음 만났을 때 엘리자베스는 자존심에 상처를 받고 그는 오만하다고 확정하는데 ‘편견’의 시작이다. “종종 오만이 허영심과 동의어로 사용되지만 사실은 아주 달라. 허영심 없이도 오만할 수 있어. 오만은 우리 자신에 대한 우리 스스로의 평가와 더 관련이 있고, 허영심은 타인이 우리에 대해 생각해주기를 바라는 바와 더 관련이 있거든.(31p)” 엘리자베스는 이후 다아시와 대화의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신의 첫인상에 근거해 주장을 펴나 다아시는 재기발랄하고 특별한 그녀를 스며들 듯 아끼고 사랑하게 된다. 그러나 엘리자베스는 후에 “자신이 눈이 멀었고, 편파적이었고, 편견을 품었고, 어리석었다고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268p)”고 스스로를 통찰하고 허영심, 편견과 무지에 자신 또한 사로잡혔음을 인정한다(268p).

 

 

결혼의 다양한 형태는 자연스레 등장한다. 엘리자베스에게는 상상할 수 없지만알다시피 나는 낭만적인 사람이 아니잖아(166p)’라며 세속적인 이점을 갈등없이 선택함으로 이루어지는 샬럿-콜린스 부부, 배우자에 대한 빠른 파악과 포기, 온당치 못한 태도를 견지했던 베넷씨와 아내, 특히 엘리자베스는 “이토록 안 맞는 결혼이 자식들에게 끼치는 불이익을 지금처럼 강하게 느낀 적이 없었고, 재능이 잘못된 방향으로 쓰이는 데 따른 해악을 이토록 온전히 느낀 적도 없었다.(302p)”라고 가슴 아파한다. 베넷 가의 막내 부부는 안타까움을 남기고 제인과 빙리, 엘리자베스와 다아시까지는 앞으로의 상상의 몫까지 추가한다.

 

 

생기 넘치고 때론 실랄한 대화의 열기는 “오만과 편견”을 읽는 가장 큰 즐거움 중 하나다. “겸손한 척하는 것보다 더 기만적인 태도도 없습니다. (중략) 겸손이란 종종 그저 의견이 없다는 소리죠. 때로는 간접적인 자기 자랑에 불과하고요.(67p)” 개념을 자신의 말로 정리하는 문장들은 인물의 성격을 드러낸다. 유머 넘치는 문장들 또한 갈등의 긴장을 해소시킨다. 리드미컬하게 이어지는 대화에서 때론 나쁜 의도가 담긴 인간 행동들과 심리를 비춰볼 수 있는데 어리석지만 억제하기도 쉽지 않은 지점을 확인케 한다. “저는 고집이 있어서 마음대로 겁주려는 사람들 앞에서 절대 겁먹지 않죠. 누가 겁을 주려 할 때마다 오히려 용기가 더 솟아요.(227p)”라는 엘리자베스의 말은 후에 캐서린 드 버그 귀부인과의 숲속 논쟁에서 충분히 증명된다. 엘리자베스와 다아시의 후반 장면들, 특히 3부 16장에서는 셰익스피어의 대사들을 연상시킨다. “엘리자베스 양을 향한 제 사랑과 소망은 변함이 없습니다. 하지만 한마디 말씀으로 이 일에 대해 저를 영원히 침묵하도록 하실 수 있습니다.(464p)” 마치 세레나데 같은 말들이 봄날의 아지랭이 같다.

 

 

엘리자베스가 특별한 이유는 제인 에어가 틀을 깬 새로운 전형인 이유와 같다. 시대에 반하는 드물고 경이로운 표본을 제시하기 때문이고 첫 시도의 성공은 확장된 가능성과 카타르시스를 선물한다. “하지만 이 작품이 특히나 여성 독자에게 사랑을 받는 데에는, 신데렐라 이야기를 뛰어넘어 세계문학사에서 가장 유명한 여성 캐릭터 중 하나로 손꼽을 수 있는 엘리자베스 베넷이라는 여성상이 제시되기 때문일 것이다.(496p)” 다크 초콜릿으로 버무려 슈가 파우더로 장식한 듯 절정에서 마무리 된 이야기를 덮으며 그들의 결혼 생활을, 나아가 함께 맞을 중년과 노년까지도 보고 싶어 자꾸 머릿속에 그려본다. 영화 “비포 선라이즈”가 “비포 선셋”에서 “비포 미드나잇”까지 내심 ‘뭐 이렇게 까지나······이정도로 궁금치는 않은데요’ 할 때까지 놀래키며 나왔듯이, 또 내 시간도 동일하게 흐른 줄 모르고 빨리감기 한게 아닐까, 주인공들의 세월 흔적에 의아했음에도, 엘리자베스와 다아시, 제인과 빙리의 이후 시간에 대한 불가능할 그림을 꿈꿔 본다. 어쩌면 가능할 수도 있을까, ‘오마주’라는 마법의 펜, 비장의 무기를 사용한다면? 화사한 분위기의 영화 “오만과 편견”은? 물론 볼 생각이다. 더 이상 편견 따위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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